
"네가 하고 싶었던 게, 정말 이거 맞아?"
"...당연하죠! 좋지 않아요?"
작게 한숨을 쉬는 백지한을 뒤로 한 채 채유하는 제 앞에 꾸며진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들 앞에는 백지한이 평소 몰고 다니는 차와 다른 기종이 놓여 있었다. 이는 채유하가 나름 깜짝 이벤트로 준비한 차량이었다. 트렁크에 누울 수 있는 공간과 그 주변에 두른 작은 전구들이 빛나고, 기댄 채 앉을 수 있는 의자 2개 사이로 작은 모닥불이 놓여져 있고. 딱 유명한 캠핑러들이 SNS에 올린 사진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두 사람은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단지, 이 풍경을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는 점만 빼면.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지나가듯이 캠핑을 가보고 싶다는 채유하의 말을 백지한이 기억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오로지 캠핑 한 번을 위해 캠핑카를 사고, 물품을 사고, 시간까지 비워두는 일도 백지한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정작 캠핑하러 가자는 말을 하기까지 시간이 한참 걸렸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왜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데이트 신청 하나 못할 정도로 떨리는지, 이에 대한 것도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결론적으로 백지한은 채유하와 함께 가기만 하면 됐으니까. 드디어 마음을 먹고 그에게 캠핑을 권하자 들려오는 건 웃음소리였다.
'가볍게 한 말인데,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요?'
그 짧은 말이 백지한에게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그 웃음소리만으로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고, 몰아치는 행복감에 잠시 어지러울 정도였다. 웃음소리에 이어지듯이 백지한도 짧게 웃었다. 날짜는 언제가 좋아, 라거나 준비는 내가 할게, 라는 말로 몇 마디를 주고 받다보면 백지한은 세상에 단 둘뿐이라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기분을 깬 건 채유하의 말이었다.
'준비는 제가 할게요! 하고 싶었던 게 있어요.'
충격적이거나 실망스런 말은 아니었다. 그가 하고 싶었던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해 말릴 생각도 없었다. 오히려 저와 보내는 시간에 자신이 하고 싶었던 걸 하다니, 백지한에게 있어서 기쁜 일이었다. 백지한은 그 말에 알겠다고 답했고, 다시 몇 시간 전을 마주하자면...
"짜잔, 어때요?"
"이게 뭔데?"
"바로 캠핑카죠."
채유하가 과장스런 효과음을 직접 입으로 내뱉으며 가르킨 건, 적어도 백지한이 준비한 캠핑카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경차 크기에 둘이 누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라 백지한은 한참 차 주변을 빙빙 돌았다. 요즘 차를 개조해서 캠핑카를 만드는 게 유행이라고 했지만,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반려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서 반려가 준비한 일이라면 어떤 일에도 불만을 갖고 싶지 않지만, 이럴 거면 제가 준비한 캠핑카를 끌고 오는 게 더 낫지 않았나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백지한은 채유하를 흘긋 바라보았다. 제 반응을 기대하는 얼굴에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다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쉽게 생각이 들지 않았다.
"...너 닮아서 귀엽네."
"그게 감상이에요?"
정말 이뿐인데. 백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과 다른 평에 채유하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도 어쩌면 백지한다운 평이라는 생각도 들어 결국 웃어버렸다. 그게 뭐예요, 하면서. 이때까지만 해도 백지한과 마찬가지로 채유하는 캠핑을 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바라던 여행이 있었고, 이를 이룰 수 있다면 사사로운 건 전부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들뜬 상태였다. 가지고 온 짐을 전부 풀고, 예쁜 캠핑장을 만들기 위해 꾸미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뭐든지 시작은 좋다. 혹은, 상상하는 순간만이 좋거나.
"다 끝낸 건 맞지?"
"잠깐만 기다려 봐요. 아직 부엌 준비도 안 했고..."
"이 작은 곳에서 부엌까지 만들어?"
"원래 그런 법이에요. 안 먹어도 사진은 남겨야죠."
"그럼 넌 가만히 있어."
"백지한 씨가 이런 걸 할 줄 알아요?"
채유하는 눈을 둥글게 뜬 채 백지한을 바라보았다. 편의점을 가봤다거나 컵라면을 사먹은 적이 있다고 했지만, 여전히 비싼 차를 몰고 다니거나 번지르르한 옷을 챙겨 입는 그가 캠핑을 준비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전혀 상상가지 않았다. 실제로 백지한은 오늘의 캠핑을 위해 새로운 차를 구매했으니 채유하의 예상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백지한은 늘 채유하의 예상 외였다. 백지한에게 채유하가 예상 외의 인물인 일처럼. 백지한은 채유하가 준비한, 그러니까, 사전 정보가 없을 법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무리없이 탁자를 펴고, 가스렌지를 꺼내 냄비를 올리고, 주방도구나 조미료 등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부엌에 장식하기 위해 들고 온 -몇몇 사람들은 실용성이 없다고 말할 법한- 작고 귀여운 램프마저 채유하가 상상한 위치 그대로 내려 놓았다. 채유하는 제 앞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한참 눈을 깜박거리며 바라보았다. 백지한이 어떠한 마법을 부린 것도 아니었고, 설명서 따위 있지도 않았다. 채유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보다 잘하잖아! 괜히 허세 부린 거 아냐? 라고. 해 뜰 때 와서 해가 지고 나서야 전등 설치와 의자 조립 후 자리에 놓기만 끝낸 제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물론, 백지한이 일부러 내버려둔 건 아니었겠지만.
"할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말해주지..."
"할 줄 몰라. 나도 처음 해봐."
"그런 사람치고는 너무 잘했잖아요. 저 램프, 놓고 싶은 건 어떻게 알았어요?"
"오기 전에 좀 찾아보긴 했는데..."
"거 봐요."
"그보다 상상했어."
"뭘요?"
"너라면 뭘 좋아할까, 하고. 전날까지 계속 구상했었어."
"그러니까..."
"내 상상이 네 마음에도 들었단 얘기겠지."
채유하는 머리를 짚었다. 언제쯤 저런 말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대충 하는 말이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는 부분마저도. 익숙해져야겠지. 그가 먼저 관둘 일은 없으니까. 밀려오는 쑥스러움에 채유하는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저 혼자만 쑥스러움을 느끼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백지한 씨가 해주는 건데, 제 마음에 안 들리가 없잖아요."
"...그래?"
문제는 그의 반응이었다. 제 말에 한순간 눈이 커지더니 이어서 쑥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나름 같이 쑥스러움을 느끼자고 뱉은 말인데 그의 마음에 들었는지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그와 지내면서 몇 번 보지 못 한 얼굴. 처음에는 제가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심기불편한 표정을 지었던 건지 오해할 정도로 그는 매순간 딱딱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백지한이 간혹 가다 저의 말과 행동에 지금처럼 순수한 웃음을 짓는다. 분명 그도 저처럼 쑥스러움을 느끼고 있는 중이겠으나 왠지 모르게 얼굴이 더 붉어진 건 제 쪽이었다. 그, 그렇게 좋나. 내가 한 말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 말마저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백지한이 대꾸했다.
"좋아. 네가 하는 건 전부, 너를 이루고 있는 거 전부."
"그, 그런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돼요."
"이제 뭘 하면 돼?"
"식사할까요? 시간 늦었잖아요."
"그럼 앉아 있어, 내가..."
"같이! 이번에는 같이 해요."
저도 준비한 게 있어서요. 채유하가 웅얼거리듯이 말하자 백지한은 한참 서 있더니 곧 그를 제 품으로 끌어 당겼다.
"나, 지금 너무 과한 선물을 받고 있는 것 같아."
"이 정도로요?"
"응, 너무 행복한데. 그만큼 또 불안해."
"하여튼 겁쟁이라니까요."
"그런가 봐. 너랑 있으면 나는 매번 겁쟁이가 돼."
"겨우 밥으로 청승 떨지 말아요, 우리~"
그가 말하는 불안감이 뭔지 알고 있다. 행복한 만큼 불행한 일이 일어날까 두려운 마음. 이 행복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예상할 수 없는 미래. 그래도 지금 우리는 같이 있으니까. 너무 먼 미래나 두려움은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같이 있다면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적어도 저는 그를 믿고 있으니까. 두려움이 없다면 거짓이겠으나 이 순간에 느낄 감정은 아니다. 장난스럽게 대꾸하자 백지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한 거 맞죠?"
"응, 왜?"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거예요?"
"계속 이러고 있고 싶어."
"...저 배고파요."
"식사 쯤이야 내가 금방 해줄게."
"정말이지..."
한번 끌어안자 떨어지지 않는 모습에 채유하는 웃었다. 이렇게 어리광 많으면서 그동안 어떻게 혼자 지냈는지. 결국 백지한이 그에게서 떨어진 건 몇 분동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그 다음은 그동안 서로에게 있었던 일이 꿈처럼 평범한 시간을 보내었다. 백지한은 익숙하게 스파게티를 만들고, 이를 맛본 채유하는 그를 칭찬하고. 몇 번이고 이뤄진 백지한과의 데이트에서 이번 데이트처럼 다툼없는 하루는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식사 자리를 정리하고, 한참동안 피워둔 불을 바라보던 채유하의 시선이 백지한에게로 넘어갔다. 제 시선을 알아차린 건지, 처음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확한 타이밍에 그하고 눈이 마주쳤다. 이런 시간이 언제까지고 영원했으면 하는 건 분명 백지한만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는 운명이기에 저도 그를 사랑한 거라 생각하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저 눈빛을 피하지 않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저를 원하는 눈빛, 저의 모든 걸 놓치지 않겠다는 감정. 채유하는 입을 열었다.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우리의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저도 백지한 씨도 노력해야겠죠. 이제 각자의 문제만이 아니게 되었잖아요. 우리의 미래를, 당신의 미래를 너무 두려워하지 않으려고요. 우리의 운명이 끝나도 어쩌면 저는 당신을...
"좋아해요."
"뭐?"
"...많이 좋아해요."
"...그래."
"그뿐이에요?"
"난 좋아하는 정도로 안 끝나. 사랑해."
온갖 말이 지나갔어도 그에게 내뱉을 말은 결국 하나였다. 좋아해요, 제가 많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정도로. 그리고 돌아온 말은 예상했는데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그러고보니 백지한 씨는 언제나 좋아한다기보다는 사랑한다는 말을 했었다. 그가 저를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저도 그만큼 백지한 씨를 사랑한다고 자신하지만... 사랑한다는 건 여전히 쉽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전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그를 사랑하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괜히 쑥스럽다는 말로 대꾸하자 예상했다는 반응으로 그는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여전히 피할 수 없어서, 타닥타닥 장작을 앞에 두고 그들은 서로를 보며 웃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