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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유하는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백지한을 흘긋 바라보았다. 저야 늘상 지내는 집이니 특별할 것도 없는 곳이지만, 그에게는 신기한지 장소마다 시선을 떼지 못하였다. 유예가 매일 청소를 열심히 해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직접 청소를 하지 않은 게 벌써 몇 달은 지난 기분인데, 제가 손을 대기보다 더 깨끗해서 아예 맡겨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더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안심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살펴보는 건 부끄러운 기분이기도 했다. 넓지 않은 집이라 눈으로 둘러보면 전부인 게 한참 맴도는 그의 시선을 보자니 무언가 파헤치는 기분마저 들기도 했다. 식탁 의자에 그를 앉혀두고 부엌에서 백지한을 살펴보기를 몇 분, 어색한 분위기가 느껴져 채유하는 얼른 입을 열었다.

 

 

 

"코코아, 먹을래요?"

"코코아?"

"아, 단 건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던가요?"

"아니, 줘. 먹을래."

 

 

 

선뜻 먹겠다는 대답에 채유하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덧붙였다. 집에 두고 마시는 게 코코아 뿐이라서요. 제가 권하는 걸 백지한이 거절할리가 없음에도 저는 습관적으로 그의 동향을 살펴보았다. 그가 제게 좋은 것만 주고 싶듯이 저도 그에게 좋은 것만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연인이란 건, 본래 그런 거니까. 말은 그렇지만 당장 내놓을 게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가끔 마시는 코코아나 녹차, 유예 씨 먹으라고 놔둔 양갱을 그에게 내놓을 수도 없고. 애초에 백지한이 왜 제 집에 있는지… 원래 계획이라면 두 사람은 아쿠아리움에 있어야만 했다. 제가 먼저 표가 생겼다며 권유했고, 제 권유를 거절하지 않는 백지한이 당연하다는 듯이 시간까지 비워줬는데. 솔직한 마음으로 아쿠아리움에 대한 기대도 있었는데, 제가 먼저 정한 데이트 장소라는 점에서 성공적인 데이트를 끝내고 싶기도 했다. 정작 아쿠아리움에 도착하자 들려오는 소식은 차마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

 

 

 

"갑자기 운영을 중단해요?"

"죄송합니다. 수족관 내에서 갑작스런 문제가 일어나 입장이 어렵습니다."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입니까?"

 

 

 

백지한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직원을 향해 대뜸 입을 열었다. 주변에는 왜 들어갈 수 없냐며 불만을 내세우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하는 직원이 불쌍하게 느껴지자 채유하는 백지한을 붙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괜찮으니 따지지 말자는 무언의 의미였다. 이를 눈치챈 백지한의 눈썹 하나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눈썹을 휘었지만, 이내 직원을 두고 뒤로 물러났다. 불만스런 손님에 백지한까지 상대할 직원을 상상하자니 안 그래도 불쌍한 이가 더 불쌍할 게 당연했다. 이렇게 말하는 저라도 모처럼 기대한 아쿠아리움인데. 어렸을 때나 가봤던가. 푸른색으로 이루어진 공간에 작고 귀여운 물고기들이 많아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러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다른 데이트보다 이번 데이트가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이번에는 제 쪽에서 먼저 백지한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는 점. 아쿠아리움 티켓이 무료로 생긴 김에 그하고 데이트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 물론, 그하고 데이트를 하는데 돈이 아까운 건 아니지만, 어디든 가자고 하면 냅다 대관을 해버리는 백지한 때문에 이번에는 그런 짓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마침 무료로 생겼고, 어차피 써야 하는데, 갈 사람을 정하자면 저한테는 당연히 당신이니까. 설득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 저를 보며 정작 제 말은 듣지 않는지 놀란 표정으로 한참 티켓을 바라보는 백지한이 있었다. 아쿠아리움은 별로인가? 가재가 싫은 것처럼? 쓸데없는 걱정과 함께 눈치를 보고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년처럼 웃어보이며 좋아, 라고 답을 내려주는 백지한을 볼 수 있었다. 거절하지 않을 걸 알면서도 왜 그의 앞에 서면 긴장되는지. 상대가 긍정의 답을 내렸으니 이후로는 쉬웠다. 약속 시간을 정하고, 자연스레 집 앞으로 가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 이어서 식사 장소나 카페를 정하기도 했다. 제가 정하기보다는 좋은 곳을 알고 있다고 백지한이 말한 쪽에 가깝지만, 아무렴 어떤가, 모든 게 순조로웠는데. 그리고 약속 당일이 되었을 때는 너무 순조로웠던 나날이 밉기까지 했다. 코앞까지 와서 들어갈 수 없다니… 실망한 기색에 무슨 일인지 알아내면 바로 고칠 것 같은 백지한을 두고, 채유하는 다른 데이트 장소를 잡거나 그의 시선을 돌릴 게 필요했다. 아쿠아리움은 빠졌으니 식사? 아니면 저와 가고 싶어서 봐뒀다는 카페? 어느 쪽인지 고민할 것도 없이 나온 말은 본인이 뱉고도 놀랄 말이었다.

 

 

"저희 집에 갈래요?"

 

 

 

*

 

 

 

왜 그랬냐고 묻는다면, 사실 잘 모르겠다. 식당과 카페 중에 고를 수 있었고, 저의 선택이 어떻든 백지한이 저에게 큰 불만을 내세우지 않을 걸 알고 있는데. 순간적으로 나온 집 얘기에 놀란 건 백지한도 마찬가지였다. 왜냐고 이유를 물으면 답할 말을 고민하는 사이 보인 건 머뭇거리는 대답이었다. 새삼 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제가 하자는 일에 전부 긍정하고, 제가 좋으면 저도 좋다고 하던 그가 집으로 초대하는 일에 망설이다니. 그가 무슨 생각으로 망설였는지 알 길은 없었다. 물어봐도 제대로 답하지 않을 게 뻔해서 묻지 않았다.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몇 초간의 정적에서 이어진 알겠다는 대답은 제게 있어서도 그가 저를 거부할 마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기에 좋았다. 그를 믿으려고 하면서도 언제나 불안해하는 제가 있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제 마음이 변할까 두려운 게 아니라 그의 마음이 변할까 두렵다는 것을 백지한도 알고 있을까. 홧김에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가 마음을 바꿀까 싶어 조금 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갈까요.

 

 

본래 혼자 살던 집은 제가 살기 딱 좋은 환경으로 두 명이서 살아본 적은 없는 집이다. 유예 씨가 자주 와서 머물고 가지만, 그도 그의 일정이란 게 있는 법이라 간혹 집을 비울 때가 있었다. 혹은 새벽에 겨우 들어오거나. 오늘이 바로 유예 씨가 없는 날이었다. 하루종일 백지한과 있을 걸 알기에 그는 집을 비워도 괜찮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과 같은 집에서 지내는 일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저에게도 유예 씨에게도 하나의 믿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주인과 종의 관계라는 믿음. 백지한의 집에 살림을 옮기는 일도 생각은 해봤으나 저에게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서도 괜찮을 시간, 혼자서도 이겨내야 하는 시간. 백지한은 당연하게도 제 뜻을 존중했다. 저는 그저 단순히 그가 저를 믿어주고 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연인이면서도 연인 사이만으로 정의할 수 없는 우리이기에, 그가 이해해주길 바랐다. 우리 사이가 분명 괜찮을 거라고. 이러나 저러나 해도 지금은 단 둘이서 제 집에 있으니 그가 아닌 사람에 대한 생각은 그만해야겠지. 막상 집에 데려오고 나니 내줄 게 없다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했다. 잠이 안 올 때면 종종 먹었던 코코아였는데. 부엌에 서서 우유를 따뜻하게 데우면서도 신경은 온통 백지한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고보니 연인 사이에 집을 데려온다는 건…

 

 

 

“내가… 와도 되는 건가.”

“네?”

“내가 여기 있어도 괜찮아?”

 

 

나즈막히 들려오는 목소리에 채유하는 고개를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집에서 데이트 하는 건 안 맞는다는 얘기인가? 전자레인지에서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꺼낸 코코아 잔을 백지한 앞에 놓던 채유하는 다시금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의 표정이 말문을 막히게 했다. 제가 판단하기 웃기게도 차마 좋아하는 사람의 방에 놀러온 얼굴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예 씨 때문에 신경 쓰여요?”

“그런 건 아냐.”

“그럼… 오기 싫었어요?”

“그보다는 네가 괜찮은 건지 묻는 거야.”

 

 

내가? 괜찮냐고? 괜찮지 않으면 그를 집 안까지 불러올 일도 없었다. 그의 말뜻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왜 점점 불안한 기분만 드는 걸까. 우리는 이미 연인이고, 서로 좋아하는데도. 여전히 이유는 물을 수 없었다. 이 불안감이 어디서 오는지 모르잖아. 채유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뜬금없는 말이었다.

 

 

“영화, 볼래요?”

 

 

*

 

 

그래, 집 데이트라고 하면 이런 거겠지. 같이 자리에 앉아 서로한테 기대며 영화를 보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것. 비록 편한 옷도 아니고, 서로 주고 받는 대화조차 없는 채로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하고 보기 위해 고른 영화는 잔잔한 분위기에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는데도 헤어진 탓에 슬픈 엔딩으로 유명한 로맨스영화였다. 유명했지만, 슬픈 영화를 혼자 볼 자신이 없어서 골랐는데. 같이 로맨스 영화를 본 적도 있으니 괜찮을 거란 생각은 이번에도 빗나간 예상이었다. 중간중간 슬픈 장면이 나와도 전혀 집중이 되지 않았고, 그의 안색을 살피느라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몇 번이고 눈이 마주치는 탓에 아닌 척하기에도 바빴고. 오늘따라 왜 이러지. 평소라면 본인을 쳐다보는 일에도 장난스럽게 대꾸하던 백지한이 별 말도 없고… 혹시 영화가 재밌나? 그에게도 나말고 재밌는 게 존재하게 된 걸까…? 시선을 영화에 두면서도 쓸데없는 생각이 이어지는 와중에 제 손에 강한 힘이 느껴져 채유하는 백지한을 바라보았다. 영화를 보러가면 화면보다 저를 보는 그인데. 오늘은 무슨 일인지 제 쪽에서 먼저 보지 않는 이상 제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화면에는 서로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장면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그게 자의인지 타의인지 알 수 없는 채로.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렀더라… 눈물을 흘리는 남자 주인공을 보며 채유하는 뭔가 깨달은 듯이 작게 아, 하고 소리를 내었다.

 

아, 그렇구나. 이제야 알겠다.

 

곁눈질로 보던 화면에서 시선을 뗀 채유하는 백지한의 볼을 덥석 잡은 뒤 그하고 시선을 마주쳤다.

 

 

“혹시 지금 불안해요?”

 

 

제 질문이 무언가 찔리기라도 한 듯이 눈이 커진 채 시선을 마주하던 그는 곧 시선을 내리고 대답했다.

 

 

 

“응.”

“제 마음이 변할까봐?”

“…오늘 데이트가 엉망이었잖아.”

“백지한 씨가 의도한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내가 준비했는걸.”

“알아. 그래서 식당도, 카페도 꽤 고민했어. 아쿠아리움은 못 갔지만, 그럼 카페라도 가자고 하려고 했어.”

“근데 제가 먼저 집에 가자고 했네요.”

“그래, 혹시 준비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라면…”

“그럴리가 없잖아요!”

 

 

왜 그런 걱정을, 아니, 왜 매번 쓸데없는 걱정을 하냐고요. 불만스런 표정을 짓자 그는 눈치보듯이 시선을 돌렸다. 질투한다거나 바보같은 생각을 하는 걸 알지만, 이번에도 그럴 줄이야.

 

 

“그보다 나를 두고 딴 생각할 거예요?”

“뭐?”

“지금의 나한테 집중해야죠.”

“내가 널 두고 다른 생각을 할 리가 없잖아.”

“지나간 일에만 신경 쓰는 게 다른 생각이죠.”

 

 

일부러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리자 백지한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두고 연인이 헤어지는 영화 같은 걸 봤다니. 눈치가 한참 없었구나, 채유하… 그럼 이제 이걸 어쩐담?

 

 

 

“제가 왜 집에 초대했겠어요?”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바보. 이제 더 나아간 사이가 되길 바라니까 데려온 거라고요.”

“더 나아간 사이?”

“불안해도 돼요. 몇 번이고 안심시켜줄게요. 난 이제 백지한 씨한테 숨기는 거 없어요. 내 전부를 보였으니까, 겨우 데이트 망친 걸로 걱정하지 마요.”

“…난 처음부터 전부 보였어, 적어도 너한테는.”

 

 

 

그거야 알고 있지만. 자각 없는 플러팅 멘트에 진지한 표정까지 보려니 제 얼굴이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불안한 모습이 귀엽다고 하면 그의 얼굴도 저처럼 붉어질까?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데이트 해요.”

“어디서? 난 지금 준비한 게…”

“바로 여기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당신이 나에 대해 뭐든 괜찮다고 하는 일처럼. 불안해하는 모습과 어설픈 모습마저 다 보고 싶은걸. 그러니 이제부터 숨김 없는 데이트,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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