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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노는 약속된 시간에 맞춰 웨스트코스트로 향하고 있었다. 타니아와의 약속이었다.

 

“오늘 해가 지고 나서 인적이 드물어지면, 웨스트코스트의 바닷가로 와줘. 할 말이 있어.”

 

거리에 사람이 다니지 않을 시간, 레노는 항구 부근에 도착했다. 바닷가치곤 바람이 세지 않았고 적당한 바람이 불었다. 레노는 배가 여러 척 정박해있는 곳을 지나 바다를 따라 걸으며 타니아를 찾기 시작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으니 항구보단 다른 쪽일 것이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늦은 시간에 부를 정도면 한적한 곳에서 만나길 원할 터였다. 하지만 바다는 넓고, 눈에 불을 켜고 찾아도 꽤 시간이 걸리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거야.”

 

묘하게 신뢰가 가는 타니아의 말을 떠올린 레노는 그저 걸으며 그녀를 찾았다. 그리고 그 말대로, 타니아를 찾을 실마리는 금방 바람에 실려져왔다.

 

 

Puedes oír mi canción…?

(나의 노래가 들리니…?)

 

 

희미하게 실려져 온 노랫소리지만 귓속에 깊게 감겨 들어갔다. 타니아의 목소리인 것은 분명했기에 레노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치 주문에 이끌리듯 어떤 방향으로 걸었다.

 

 

Puedes oír mi voz…?

(나의 목소리가 들리니…?)

 

 

어느새 그 속삭임 같은 노랫소리에 중독되어 이끌리듯 걸었다. 노랫소리의 마법이 풀린 것은 바위 위에 앉아있는 타니아의 모습이 바로 앞에 보였을 때였다.

 

“안녕, 레노.”

“타니아…….”

 

이질적인 이끌림 끝에 만난 타니아는 항상 만나던 얼굴이었지만, 그 밑으로 보이는 모습은 달랐다. 상체는 언제나 입던 갑주가 장착된 옷이 아닌 검은 드레스의 모습이었고, 시선을 조금 더 밑으로 내리면 치맛자락 사이에 있어야 할 다리는 없고, 검은 비늘이 덮여진 물고기의 꼬리가 있었다.

 

“어때, 세이렌의 노래 같았어?”

“할 말이 있다고 했던 게… 이것이었군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지?”

 

인어인 타니아의 모습은 평소와 다르게 가련해 보이기도 했지만, 본래부터 있던 뿔, 그리고 은색과 검은색의 오드아이가 불러일으키는 이질적이고도 신비한 분위기에 그렇지 않아 보이기도 했다.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는 레노를 보며 타니아는 그저 평소와 같이 은은하게 웃었다.

 

“타니아는 익숙해질만하면 또 놀랄만한 일을 보여주네요. 저라도 어안이 막힐 정도예요. 당신은 그럼 악마뿐만 아니라 인어의 피도 흐르고 있는 건가요?”

“아니, 이런 모습이 된 데에는 나름 깊은 사연이 있어.”

 

고개를 가볍게 가로젓고 말을 마친 타니아는 마치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라드로 올 때, 차원을 넘어서 왔었다고 말했었잖아?”

“네, 그랬었죠.”

 

차원문에 무작정 뛰어든 타니아는 데몬에서 바로 아라드로 넘어올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차원이란 그렇게 간단히 넘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차원의 틈에 빨려 들어간 어떤 존재는 오랜 시간 빠져나오지 못하기도 했으며 영원히 차원의 틈을 헤매기도 했다. 타니아는 그렇게까지 되진 않았지만 차원을 건너가는 과정에서 이계의 틈이라 불리는 오드 디멘션을 거쳐야만 했다. 공간 조약자 가우니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그 세계는 다른 세계의 존재는 철저히 배척하기에, 그곳을 지나가야만 했던 타니아 또한 가우니스에겐 불청객에 불과했다.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그때의 나는 조무래기에 불과했어. 전쟁터에서 막 벗어났을 뿐인 나는, 눈에 보이는 것 없이 싸웠거든. 보기 좋게 밀려서 그대로 죽는가 했는데 다행히도 내 배짱이 마음에 들었던 건지, 지나가게만 해달라고 하니까 날 죽이지 않고 보내줬어. 대신 조건이 있었지. 그게 바로 이거, 인어가 되는 저주.”

“아…….”

 

기본적으로 인간의 모습과 인어의 모습을 양립할 수 있지만, 인간의 모습으로만 있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정 시간 동안은 인어의 모습으로 있어야 했고, 인어의 모습일 땐 평소와 같은 전투는 불가능하며 마력을 이용한 몇 가지 술법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럼 아까 타니아에게 이끌려왔던 것도…….”

“맞아. 유혹술이야.”

 

이를테면 레노에게 들려왔던 타니아의 노래도 술법 중 하나였다.

 

“대전이가 일어났던 아라드의 베히모스에서 만났던 세이렌을 기억해? 지금 내 모습이 딱 그 꼴이지. 유혹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서 조종하는 나쁜 인어. 사실 그보다도 더 하지. 악마의 모습도 하고 있으니까 어디선가 전해져내려오는 인어 이야기의 마녀 같은 존재일지도 몰라.”

“왜 그렇게 생각하나요. 타니아는 나쁜 일을 하지 않았잖아요. 오히려 그 반대죠.”

 

평소의 당돌한 모습과는 다르게 타니아의 입에서 푸념과도 같은 비관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곤란하지 않을까? 세상을 구하겠다고 큰소리치는 모험가가 이런 저주받은 인어라면. 내가 많은 사람을 돕고 다녀도, 이런 모습을 보면 우습게 여기지 않을까?”

“당신이 지나온 행적은 그렇게 사람들이 간단하게 얕잡아 보고 돌아설 정도로 가볍지 않아요. 그리고 설령 사람들이 그런다고 해도…… 제가 그런 꼴을 보고 가만히 있을 것 같나요?”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금방이라도 나서서 화내줄 것 같은 모습에 타니아는 원하는 답을 받았다는 듯 다시 웃었다.

 

“그래, 난 너의 그 말이 듣고 싶었어, 레노. 사실 그런 상황에 놓이더라도 난 신경 쓰지 않아. 난 내가 가야 할 길을 갈 뿐이지. 하지만 네가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져. 다른 사람은 다 등을 돌리더라도, 난 너만은 붙잡고 싶어지거든.”

 

타니아가 레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바로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처럼 레노의 손이 그 위에 얹어졌다.

 

“바닷속에서 내 모습을 보여줄게.”

 

타니아가 레노의 손을 가볍게 끌어당겼고, 그대로 두 사람은 바다에 함께 빠져들었다. 거기서부터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타니아가 레노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아 안았다. 입을 맞추고 가볍게 숨을 불어넣자 레노도 타니아와 같이 숨을 쉬고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어렵지 않았고, 어둠이 깔린 바다였지만 타니아의 모습만은 분명하게 보였다. 물속에서의 타니아의 모습은 또 달랐다. 검은 비늘이 덮인 하반신과는 다르게 상반신에는 가슴까지 은빛 비늘이 덮여있었다. 완전한 인어의 모습이었다.

 

‘지금 이 모습이 너의 눈엔 어떻게 비칠까…….’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흘러나온 생각이 레노에게도 흘러들어갔다. 유혹술의 영향으로 레노와 타니아의 사고가 이어져있기 때문이었다. 답을 바란다는 눈빛으로 그를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타니아에게, 레노 또한 자신의 생각을 그녀에게 흘려보냈다.

 

‘당신이 어떤 눈빛으로 나를 봐도,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나도 나는 당신에게 반하겠죠.’

 

옅은 기쁨이 묻어나는 표정이 타니아의 얼굴에 잠깐 떠올랐다. 이윽고 타니아는 레노에게 입맞췄다. 숨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했던 가벼운 입맞춤과는 다르게 더 많은 숨결과 감각을 공유하고자 하는 그런 입맞춤을.

 

‘인어의 모습은 잊어줘. 아니, 다시 만날 때까지 나를 만났던 기억은 잊어줘.’

 

그리고 슬프게도 그 입맞춤에는 타니아의 마력 또한 함께 담겼다.

 

‘이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인간으로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어. 그럴수록 너를 만날 수 있는 시간도 짧아질 테고 인간일 때는 이 저주를 풀기 위해서 뛰어다닐 시간밖에 남지 않겠지.’

 

 

마력이 담긴 입맞춤에 정신을 잃은 레노를 단단히 붙잡고 육지로 올라갔다.

 

 

‘그러니 나를 잊고 조금만 기다려줘. 반드시 이 저주를 풀어서 다시 돌아갈게. 늘 돌아왔던 것처럼.’

 

그를 본래 있어야 할 아라드의 땅에 내려준 타니아는 마계의 바다로 향했다.

 

 

“누군가에 처음 눈이 닿았을 때 친애의 노래를 부르고

그에 눈이 멀은 자는 순애의 노래를 부르네

 

하얗게 칠해진 천사는 박애의 노래를 부르고

검게 칠해진 악마는 성애의 노래를 부를 때

보랏빛 저주를 받은 자는 어떤 목소리를 내는가

 

저주에 물든 악마는 사무치는 사랑을 노래로 태워……

비애의 노래를 부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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