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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거품 소네트

 

 

 

 

 바다는 예로부터 미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로 쓰이곤 했다. 인간의 가냘픈 몸으로는 바다를 깊숙이 유영하기 어려운 탓이었으며, 그럼에도 그들의 타고난 지식욕이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심해의 숨 방울에 자극받은 까닭이었다. 그 숨 방울은 빛조차 들지 않는 바닷속 깊은 어느 어둠으로부터 비롯하기도 하였으나, 인간의 눈에 실체를 쥐여 줄 생각은 없다고 단언한 당사자들의 의지로 하여금 여전히 허튼 이야기로만 남았을 뿐이다. 그 당사자 중 하나인 바다 마녀 단테는 최근 항구에 유행하는 고담의 주인공인 제 반려 인어를 바라보았다. 붉은 입술 사이에서 보글보글 맑은 방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숨에 육지의 호사가들이 어떤 이야기를 덧붙이는 줄도 모르고.

 

 

 “최근 인간들이 네 이야기를 하더군.”

 

 

 멀뚱한 표정으로 단테의 말을 곱씹던 인어가 이내 응? 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붉은 지느러미가 가벼이 흔들린다. 지상의 풀벌레 우는 소리가 바람에 춤추는 듯한 모양새로, 하늘하늘.

 

 

 “정정하지. 인어의 이야기가 성행하는 모양이라.”

 

 “뭐야, 그거구나. 난 또.”

 

 

 제자리에서 작은 원을 그리며 빙글 헤엄친 인어, 히마와리가 불만스레 종알거렸다. 헷갈리게 하지 마. 바깥 구경 나간 지 한참이나 됐는데 무슨 일인가 했잖아. 괜히 꼬리 지느러미를 큰 궤도로 휘저으며 물결을 어지럽히던 것도 잠시, 금세 잦아든 움직임으로 자그마한 소용돌이를 그린다. 히마와리가 말을 고를 때마다 행하는 버릇이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궁금하기는 한 모양이다. 손바닥만 한 소용돌이를 두어 개 더 그린 끝에 터져 나온 숨 방울은 아담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인데?”

 

 

 짧게, 또 작게 솟아오른 인어의 음성을 한 방울도 빠짐없이 좇던 단테가 그 속의 순수한 궁금증에 허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필시 궁금해할 것을 예상하고 꺼낸 말이기는 했으나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 꼭 눈먼 물고기를 낚아 올리는 꼴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이야기해주마. 단테는 끌어올린 입매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인어의 입맞춤은 기억을 지운다더라. 그 말이 단테의 귀에 들어온 첫 순간은 항구의 상인을 통해서였다. 지상의 약재를 조달하기 위한 주기적인 행보로써, 단테는 인간의 탈을 뒤집어쓴 채 바닷가 근처의 마을을 오가곤 했으므로.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긴 처음 왔느냐며 바다 마녀를 넉살 좋게 맞은 상인은 제가 아는 마을의 유명한 고담을 떠들어댔고, 대부분은 단테의 흥미를 끌지 못했으나 마지막으로 비밀스럽게 덧붙인 인어의 이야기만이 그의 기억에 남은 것이다.

 기원조차 짚을 수 없는 머나먼 전승, 어쩌면 한낱 음유시인의 노래에 불과할지 모를 그 이야기를 단테가 흘려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명백히 심해에서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제 붉은 인어 때문이리라. 다만 바다 마녀는 그 이야기가 거짓이라는 걸 알았다. 적어도 제게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임을 알고 있었다. 처음 그녀를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입맞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단테는 머릿속으로 히마와리에 대해 아는 것들을 나열해보았다. 여름꽃과 꼭 같은 이름, 황혼 녘을 한 아름 떼어다 흩뜨린 듯한 머리카락, 난파선과 함께 가라앉은 그 어떤 보석에도 견줄 수 없는 눈동자, 그를 닮은 색의 꽃잎 같은 지느러미, 가벼운 음률로 흘러나오는 목소리, 사소하다 못해 하찮기까지 한 버릇, 그 외에 사사로운 취향 등……. 새로이 갱신될지언정 단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기억을 되새기고 있자니 역시나 괜한 짓이다 싶었다. 동시에 의미 없는 풍문이겠거니 싶었으나,

 

 그것이 제게 유효한 이야기든 아니든 간에, 무언가를 빠르게 떠올리지 못하는 상대방에게 ‘인어한테 키스라도 받았냐’고 낄낄대는 풍조는 단테의 입장에서 그다지 유쾌하지 못한 것이었다. 인어 본인이 그 풍문을 부정하는 것을 똑똑히 목도하고 나서야 비로소 불쾌감이 해질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히마와리에게 이 주제의 운을 뗀 것은 꼭 그러한 연유였을 터인데.

 

 

“무슨! 인어가 아무하고나 키스하는 줄 알아?!”

 

 

 단테는 생각했다. 사랑스럽도록 어리석은 제 인어의 화를 내는 포인트가 잘못되었다고. 또한 생각했다. 히마와리는 제 말의 의도를 짚어내지 못할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으니, 인어의 입맞춤과 기억의 연관성은 어쩌면……. 안타깝게도, 단테의 바람과는 정반대의 가정이었다.

 

 

 “바로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닌 모양이군그래.”

 

 “단테도 몰랐어? 당신은 뭐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히마와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하진 않았다. 당장 단테의 서고만 들여다보더라도, 결코 좁지 않은 방의 사방이 책꽂이인 데다 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누운 서적의 탑 역시 소원을 빌기 위해 쌓은 돌탑처럼 여기저기 솟아 있었으니까. 그 모든 것은 모두가 꺼리고 혹자는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심해에서 홀로 살아온 세월의 잔해였고, 그 세월을 단테의 삶에 있어 뼈대라고 한다면 그간 쌓은 지식은 뼈대에 붙은 살점에 비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그에게도 덜 자란 구석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라, 히마와리는 심해의 그림자를 그대로 덧댄 색의 비늘을 제 붉은 꽃잎으로 간질였다.

 

 

 “인어에 대해 깊이 알 기회는 없었으니까.”

 

 “아하, 모르면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입을 맞췄단 말이지.”

 

 

 뭐가 어떻게 잘못될지도 모르고 조심성 없게! 장난스레 바락거리는 히마와리의 말에 단테 역시 인어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다.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나왔다기에는 지나치게 해사한 붉은 꽃. 그것이 제 영역에 들어온 이상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갈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의 손아귀 속이나 다름없는 구역에 고르게 퍼진 바다 마녀의 숨은 그 자체로 독이요, 해독제는 그의 타액뿐이므로. 입을 맞췄다고는 해도 해독제를 건넨다는 타당한 구실이 존재했다. 결국 자신을 위한 입맞춤이었다는 걸 모를 리 없는 히마와리는 빙글빙글 웃으며 단테의 표정을 살폈다. 한숨처럼 웃는 입매는 그의 애정을 실감케 하는 류의 것이었다. 그 애정에 응하듯 바다 마녀만의 인어가 속삭인다.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을 테니까, 잘 들어봐.”

 

 

 아무 말도 않는다면서 잘 들으라는 건 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도 단테는 굳이 의문을 입 밖에 내지 않고 그녀의 말대로 하겠노라 고개를 끄덕였다. 슬쩍 웃은 히마와리는 단테의 귓가에 얼굴을 가져다 댄다. 꼭 비밀을 나누는 듯한 자세였으나 인어는 예고한 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듯하다가, 이내 다른 소리가 잔잔히 배어나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것은 소라고둥 속의 파도 소리 같기도 했고, 발목까지 오는 물이 걸음에 채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바람이 지평선을 깎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조개껍데기에 끝없는 바다를 담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이면서 동시에 가슴 속의 흔한 추억을 간질일 만큼 초라한 소리. 이토록 하잘것없는 불가해로 우리의 세상은 이루어진 것이라고, 마땅한 진리를 속살거리는 듯한 소리가 단테의 귀를 사로잡는다. 미약한 소음에도 지워지고 말 어렴풋한 음파, 하지만 결코 착각일 리 없는, 히마와리로부터 스며 나온 그녀의 또 다른 파형. 단테가 그것을 가늠하고도 남을 유예를 허락한 히마와리는 그토록 가까운 거리에서 키득이는 소리를 냈다. 이 정도면 됐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녀는 보글거리는 숨소리를 요란하게도 빚어내며 낯선 파형을 곧장 감추었다. 그것을 귀에 담은 것은 찰나에 불과할진대, 단테는 그 소리를 몇 번이고 귀에 담고 싶다고 바라고 만다. 마치 그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방금 들은 그걸로 기억을 지우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데.”

 

 “그렇겠지. 그거, 인간한테만 통하거든.”

 

 

 예의 소용돌이가 다시금 히마와리의 지느러미 끝에서 휘몰아치다 사그라든다. 나도 무리에서 떨어져 나오기 전에 주워들은 이야기긴 하지만, 다소 확신 없는 말투로 운을 떼는 목소리가 가벼웠다.

 어느 날 어떤 인어가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우연히 인간과 마주쳤고, 둘은 필연처럼 사랑에 빠졌다. 그리고 사랑의 증표처럼 입을 맞춘 직후, 인간은 인어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잊고 말았다. 인어는 절망하여 그 입맞춤의 무엇이 그에게서 자신을 앗아갔는지를 연구했다. 그 결과,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어의 입에서 숨과 함께 근원을 알 수 없는 음파가 함께 흘러나온다는 사실을 알았고, 바다의 어떤 생명도 그것에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으나 오직 인간만이 그로 하여금 기억에 혼선을 겪는다는 사실을 알았으며, 마지막으로 음파의 사정권은 입맞춤을 연상케 할 만큼 가까운 거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동화 「인어공주」 속 왕자 역시 그녀로부터 숨을 나누어 받은 까닭으로 인어공주를 기억해낼 수 없었음을.

 

 

 “제일 유력한 가설로는 인간의 뇌…… 그중에서도 기억과 관련된 부분이랑 파장이 맞아서 공명하는 탓에 그렇게 된다는 얘기가 있더라고.”

 

 “꽤 그럴듯한 이야기군.”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히마와리의 말을 곱씹은 단테가 간단하게 대꾸했다. 인어에 대한 이야기는 바다 마녀로서도 미지의 영역이다. 말했다시피 인어에 대해 깊이 알 기회가 없었을뿐더러, 히마와리라는 인어가 제 곁을 머물고 있음에도 단테의 흥미를 사로잡은 것은 ‘인어’라는 개체가 아닌 ‘히마와리’ 그 자체에 대한 것들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방금의 이야기는 바다 마녀의 세월을 보다 탄탄히 쌓아 올리기에 충분한 살점이었다. 조건이 된다면야 바로 연구에 착수하고 싶은 것도 사실이나……. 단테는 연구 환경을 고려하기 이전에 히마와리의 두 눈을 살피었다. 해사하게 붉은 보석 속에 검은 비늘이 번뜩인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형 존재에게도 통하는지 알아볼 가치가 있겠어.”

 

 “으음~ 아마 안 통하지 않을까? 인어들끼리도 실험해봤을 테고.”

 

 

 그리고 만에 하나 통한다 해도 나랑 단테하고는 아무 상관 없지. 여상한 음성으로 종알거린 히마와리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당신은 뱀이니까. 그것도 아주 커다란, 맘만 먹으면 호화 여객선 서너 개는 가볍게 삼켜버리고 말 「괴물 뱀 레비아탄」 이야기의 기원. 그 말에 단테가 하반신을 움직였다. 영락없는 인간의 형상을 한 상반신과는 대조적으로, 모든 빛을 삼켜버릴 듯 새까만 비늘로 뒤덮인 뱀의 하반신이 인어의 붉은 하반신을 휘감는다. 꼭 저를 중심으로 똬리를 튼 것만 같은 모양새에 인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살결이 연접하는 거리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눈앞의 형상과 감히 연관 지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그가 절대로 자신을 해칠 리 없다는 확신의 웃음소리가 담담하다.

 

 

 “당신한테는 아무 영향도 없다는 게 다행이지. 지금처럼 마구 키스하지도 못 할 뻔했잖아.”

 

 

 정말로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일까. 단테는 차라리 물거품이 흩어지는 소리와 가까웠던 신비에 동한 마음을 되짚었다. 질릴 때까지 몇 번이고 귀에 담고 가슴에 새겨 영영 지지 않을 흉터처럼 새기고 싶다는 감상을 남긴 그 소리. 제 기억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지언정 마음을 현혹하는 따위의 영향은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해무처럼 떠오른 가설을 더듬던 단테는 이내 그것이 부질없는 가설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홀린 이유는 그 소리가 히마와리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아스라한 소리에 긴 감상이 따라붙었던 이유는 그저, 그것이 히마와리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이유라면 얼마든지 사로잡혀주겠노라고, 단테는 기꺼이 웃음 지었다.

 

 

 “그래, 다행이고말고.”

 

 

 히마와리의 가벼운 목소리에 담긴 욕구를 가늠하지 못했을 리 없는 단테가 흔쾌히 고개를 숙였다. 마녀의 독과 인어의 음파가 뒤섞이기 충분한 거리에서, 생소하되 낯익은 염독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참이었다. 인어의 작디작은 파형은 더운 살덩이의 은밀한 마찰음과 감히 해독할 수 없는 열기에 가로막혀 감이 좋은 단테조차 인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어코 헤아리고 마는 것이다. 물거품 이는 소리를 닮은 그것은 어쩌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물거품이 되길 택한 인어의 마지막 음성과 같은 파형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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