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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국의 제2 왕자 노릇도 아주 쉬운 것이 아니었다. 제1 왕자가 공석이라 제2 왕자에게 기대나 부담이 더 실리는 것은 아니었다. 국왕에 눈에 든 왕자는 그다음으로 나이가 많은 제2 왕자가 아니라 아직 막내이자, 현재 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정실의 아들인 제5 왕자였다. 어쩌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이 눈엣가시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2 왕자라고 해서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뒤에서 아렌을 두고 없는 얘기를 지어낸다고 할지라도. 아렌에게는 그것을 상대할 힘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아렌은 품 안에서 전등을 꺼내곤 펄럭이는 로브를 다시 단단히 묶었다. 가을로 접어든 밤 날씨는 꽤 쌀쌀하다. 적어도 궁 내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얌전한 생활을 해왔기에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메리트였다. 예를 들면, 그래, 궁 밖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다는 점이 있다. 아렌이 스트레스를 발산하기 위해 택한 방법은 궁 밖으로 나가 자연을 거니는 것이었다. 공무가 아닌 일로 아무런 제지 없이 궁을 벗어날 수 있는 왕족은 몇 되지 않는다. (그만큼 뇌물을 쥐여준 것도 있지만.)

 

아렌은 며칠 전 발견한 호수로 향했다. 익숙하지 않아 멀게 느껴지는 길이었지만 기꺼이 걸음을 옮긴다. 육체적인 피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더 피곤하다.

작은 나라에 그런 건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호수는 수도 외곽에 위치해 인근 주민도 적었고 일부러 찾아오는 이들도 적었다. 아렌도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찾게 된 곳이었다.

 

 

잔잔한 바람 소리만 간간히 들리리라 생각했던 호숫가 큰 바위에 누군가의 인영이 보였다. 밝은 머리의 작은 소녀의 뒷모습이었다. 아렌은 전등을 품에 숨기고 조심스럽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 시간에 사람을 마주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거리를 적당히 좁히고 전등을 반만 꺼내 그 뒷모습을 살폈다. 나라에 흉흉한 소문이 도는 호수가 몇 군데 있다는 얘기를 들은 것이 고작 며칠 전이다. 그게 어느 호수인지는 듣지 못했다. 어쩌면 그 호수가 이곳일 수도 있는 일이고, 의외로 저 소녀가 원흉일 수도 있는 일이다.

아렌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다가 나뭇가지를 밟아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몸을 처신하기 전에 앞의 소녀는 소리에 바로 뒤를 돌아봤고, 아렌과 눈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아렌은 믿지 못할 광경에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소녀가 물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첨벙 소리와 튀어 오르는 물방울까지 봤으니 분명 제가 본 것은 현실이었다. 아렌은 금세 정신을 차리고 소녀가 있던 곳까지 다가갔다. 물이 차오르지 않는 높은 바위 앞. 직후에는 너무 놀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했지만, 정말 물속으로 미끄러지기라도 한 것이라면 위험한 상황이다. 물이 신발 밑창을 적실 듯 넘실거리는 위치에서 호수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물에 빠진 것이라면 허우적거리면서 어떻게든 물 위로 올라오려고 해야 맞는 일인데. 그럼에도, 현실감이 부족한 일이긴 했지만, 어쩐지 소녀가 환상이었다는 생각만큼은 들지 않았다.

무심코 올려다본 바위 위에서 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전등 빛에도 보석처럼 찬란한 빛을 내는 끝이 둥근 삼각형 모양의 조각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채에 아까의 그 소녀처럼 바위 위에 앉아 전등에 가까이 대고 조각을 살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하지만 궁에서만 지내느냐고 식견이 짧은 아렌이 생각해낼 물건은 아닌 듯했다. 평소보다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순식간에 일어난 많은 일에 복잡한 생각하기는 그만 포기하고 궁으로 돌아가려고 할 때쯤 수면이 일렁였다. 아렌은 수면의 변화를 포착하곤 움직임을 멈추고 지켜봤다. 그러자 몇 초 후 무언가 물 위로 튀어나왔다. 사람의 형태였다. 아렌은 그게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아까 전까지 이곳에 앉아있던 소녀였다.

 

 

“아, 너, 잠깐!”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는 모르겠지만, 머리보다 빠르게 말이 나왔다. 소녀는 불안에 찬 눈빛으로 아렌을 살피면서도 다시 물속으로 도망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둘의 대치 상태가 계속되었다. 아렌도 쉽게 소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물 위로는 어깨까지만 드러나 있기는 했지만, 웃옷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했다. 그래도 피어나는 호기심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렌은 심호흡과 함께 큰 결심을 하곤 허리를 숙여 소녀와 가까워졌다. 소녀는 여전히 겁을 먹은 듯 보였지만, 아렌을 피하지 않았다. 아렌이 몸을 완전히 숙여 한 뼘 거리도 되지 않을 정도가 되자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언어보다는 짐승의 울음과 같은 소리였다.

아렌이 다시 심호흡을 하고 소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소녀 역시 손을 뻗어 아렌을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아렌은 속수무책으로 호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렌이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물속이었다. 어두워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이는 물결에 알 수 있었다. 정황상으로도 그것을 예상할 수 있었고. 아렌은 다시 눈을 감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어떤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다 손에 따뜻하고 묵직한 것이 들려있음을 눈치챘다. 아렌은 조심스럽게 눈을 떠 앞을 확인했다.

그 소녀였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이곳에서, 그 소녀에게서는 은은하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아렌은 문득 자신이 수영은 물론 잠수에도 소질이 없는 사람임을 생각해냈다. 아렌은 숨을 참고 뭍으로 나가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소녀는 아렌을 잡고 놓지 않았다. 작은 몸에서 어떻게 이런 강한 힘이 나오는지 의문이다. 아렌도 힘으로는 누구에게 지지 않는 사람인데 벗어날 수가 없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숨을 참고 있으니 입을 벌릴 수도 없는 일이다.

 

“숨, 그냥 쉬어도 괜찮아.”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 순간 들린 부드러운 목소리에 몸에 힘이 풀렸다. 자연스럽게 숨을 들이마시게 되었는데 그 말대로 육지에서처럼 그냥 호흡이 됐다. 하지만 감각은 미묘하게 달랐다. 아렌은 놀라움과 신기함으로 입만 뻐끔거렸다. 소녀가 웃는 얼굴로 아렌을 보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같다.

나랑 손잡고 있으면 물에서도 호흡할 수 있을 거야, 하고 소녀는 덧붙였다.

 

아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서야 소녀의 하체가 눈에 들어왔다. 비늘로 뒤덮인 긴 지느러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도 들었다. 먼 바다로 나가면 인간의 상체에 물고기의 하체를 가진 생물이 있다고. 하지만 수도의 호수에도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소녀가 움직일 때마다 지느러미의 비늘이 빛이 났다. 아렌이 바위 위에서 주운 조각과 같은 모양과 빛깔이었다. 그것은 빛이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찬란하게 제빛을 내었다.

 

머리 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녀는 흠칫 놀라며 아렌의 손을 잡고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아렌도 순순히 소녀를 따랐다.

소녀는 한참을 헤엄쳐 내려가고서야 멈춰 숨을 돌렸다. 아렌은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뜨길 반복했지만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지느러미 위로는 저와 다를 것이 없는데. 아렌은 무심코 소녀를 보았다가 놀라 바로 고개를 돌렸다. 소녀의 머리카락이 길어 다행이었다.

 

 

“너 뭐야?”

 

소녀는 다시 주위를 경계하며 아렌에게 들릴 정도로 크게 숨을 흡 들이마셨다.

 

“비밀이야.”

“뭐?”

“약속해주면 얘기해줄게.”

 

아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렌은 소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이 호수는 우리들-그들-이 아주 오래전부터 살던 호수였다고 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곳이었지만, 간간히 여행자들이나 들르곤 해 인어가 산다는 소문이 전설처럼 전해지는 곳이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곳을 주거로 하는 이들이 생기면서 인어가 산다는 소문이 점차 사실처럼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전설이 사실인지 확인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이 호수를 찾았지만, 언젠가부터 인어를 잡기 위해 사람들이 호수에 모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인어의 비늘이 젊어지는 약, 불멸의 약, 혹은 만병통치약의 재료라는 소문도 함께 돌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어들은 먼바다로 나아가거나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숨기고 절대 물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녀는 우연히 보게 된 바깥세상의 아름다움에 반해 사람이 없을 때를 노려 종종 바깥 구경을 나오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이 호수에 인어가 산다는 소문이 불거져 사냥꾼들이 찾아오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바깥세상을 구경하는 것은 포기하지 못해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고 한다. 조금 전에도 사냥꾼들이 가까이 오고 있어 도망쳐온 거라고. 듣고 보니 멀리서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이런 시각이니 당연히 야생동물이라 생각해 집중해서 듣질 않았다.

 

“그러니까 그 인간들이 갈 때까지만 같이 있어주라!”

- 그 부탁은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아렌이 인간이래도 그들이 근처에 있을 때 밖으로 나간다면 호수에 대한 의심은 더 심해질 것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나는 왜 데려왔어?”

“넌 착한 인간으로 보였으니까!”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답했다. 소녀가 사랑하는 바깥세상에는 인간의 존재도, 여전히 포함된 듯했다. 나는 같은 인간들에게도 환멸이 나는데, 아렌은 소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기운차게 웃을 수 있는 소녀의 정신적 강인함이 부럽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최근 만족감에 웃었던 적이 없었다.

 

“조금 더 가면 내가 사는 곳인데 갈래?”

“어두워서 뭐 보이지도 않는데.”

“인간은 눈이 나쁜가 봐?”

 

그 말에 조금 욱한 건 사실이었다. 환경이 달라서 그런 것이지 아렌은 감과 촉이라면 왕실 제일이래도 뒤지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소녀는 아렌이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전혀 개의치 않는지 웃는 얼굴로 아렌의 볼에 손을 올렸다. 아렌은 갑작스러운 손길에 굳은 채 소녀의 다음 동작을 기다렸다.

소녀는 아렌의 양 볼을 붙잡고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아렌은 소녀의 강한 힘에 놀라며 반항 한 번 하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남자애였다면 그냥 뿌리치고 달아날 텐데, 작은 여자애라는 사실이 그러지 못하게 했다. 아렌이 수많은 고민을 하는 사이 소녀가 바로 눈앞까지 다가온 것이 느껴졌다. 눈을 떠 상황을 보기를 결심한 순간 입술에 무언가 와닿았다. 그것이 소녀의 입술이라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명확했다. 소녀의 입술은 강하게 아렌을 밀어붙이더니 혀까지 섞어내려 했다. 아렌은 그제야 소녀를 밀쳐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행위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것의 의미는 아렌에게 크게 다가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에 아렌은 당황스러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소녀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아렌을 보며 말했다.

 

“어때? 이제 잘 보여?”

 

 

어이는 없었지만 정말 개안한 듯 앞이 육지에서처럼 훤히 잘 보였다. 아렌은 갑작스레 변한 시야에 소녀의 황당한 행동에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복기할 뿐이었다.

 

“너 뭐냐? 뭐 한 거야.”

“그런 얘기가 있거든. 인간과 입을 맞추면 그 인간은 우리와 같아진다……였나? 응, 봐봐, 이제 손 안 잡아도 숨 쉴 수 있잖아! 눈도 잘 보이고.”

 

그러고 보니 아까 소녀를 밀쳐내면서 몸이 떨어졌음에도 전처럼 자연스러운 호흡이 가능했다. 이것도 그러니까, 그. 입을 맞춘 덕분이라는 건가? 찝찝한 기분을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그 효과를 직접 체험하고 있으니 쓴소리가 입안에서만 맴돌고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소녀의 마냥 해맑은 얼굴도 화를 누그러뜨리는 것에 한몫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소녀의 입맞춤은 아렌에게 다른 감정도 불러일으켰다. 아렌은 이제 소녀에게 강한 이끌림을 느꼈다.

 

 

소녀가 머무른다는 곳은 주거 공간 같지 않았다. 여태껏 접하던 수면 아래의 모습과 같았다. 인어의 생활은 인간보다는 물고기와 더 닮아 있었다. 그럼에도 외모를 가꾼다거나, 지식을 탐구한다거나 하는 점들은 인간과 비슷하기도 해서 신기했다.

 

“근데 넌 이름이 뭐냐.”

“왜? 왜 갑자기 궁금해졌어?”

“아, 알고 있으면 좋잖아. 왜, 다음에 만났을 때나.”

“다음에도 오려고?”

 

대충 던진 변명이 되려 화가 되어 돌아왔다. 다른 의도가 없는 순수한 질문임에도 아렌은 차마 소녀의 눈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고개를 돌린 채 질문의 답이 아닌 다른 답을 흘렸다.

 

“아렌……이라고. 나는.”

 

소녀는 아렌의 중얼거림을 듣지 못한 것인지 반응이 없었다. 아렌도 차라리 잘 됐다 싶어 입을 다물었다.

 

 

소녀와의 시간은 활동적이지는 않았지만 지루하지도 않았다. 소녀는 이 호수에는 무엇이 있는지, 자기는 어떻게 사는지, 인어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쉬지도 않고 이야기했다. 사냥꾼을 피해 도망온 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렌은 소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살면서 호수 바닥을 구경할 일이 지금 말고 또 언제 있겠냐 싶었으니 따지자면 아주 귀한 기회였다.

소녀는 아렌에게도 인간 세계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청했다. 아렌은 왕자인 자신이 인간 세계의 삶을 제대로 전달해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왕자인 것을 말할까 했지만 결국 하지 않았다. 왕자로서의 삶을 이야기하면 소녀의 환상을 깨버리게 될 것 같았다. 대신 근처에 사는 상인으로 위장해 어쩌다 보고 들었던 그들의 이야기를 대충 전했다. 아렌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하나에 표정이 바뀌고 맞장구를 치는 소녀의 반응에 민망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처음에는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소녀의 환상을 지켜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느냐고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면, 하면 할수록 말이 편하게 나왔다. 어느새 상인의 이야기에 아렌의 삶이 녹아 있었다. 부담스러웠던 소녀의 반응이 여태까지 숨죽여 살아온 아렌의 삶을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심지어 어머니와 아버지에게도 부리지 못했던 어리광을 소녀에게 부리는 꼴이었다.

아렌은 이것 이상으로 소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에 멋쩍은 웃음으로 이야기를 마무리 했다. 소녀는 아렌의 이야기가 대충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듯 경이에 가득 찬 눈으로 아렌을 봤다. 그게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었다.

 

 

“새벽이 지나가고 있어.”

“그래서?”

“그 인간들도 이제 포기하고 갔을 시간이라구. 너도 돌아가야지.”

 

변함이 거의 없이 잔잔한 호수 깊은 곳에 있어서 그런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제 겨우 몇십 분이나 지났을 것으로 생각했다. 아직 하늘이 어두울 때 돌아가야 했다.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가는 부지런한 궁의 이들에게 밤에 몰래 궁을 나서는 것을 들킬 것이었다. 궁에 아렌의 편인 이와 아닌 이, 어느 쪽이 더 많을지는 불 보듯 뻔했다.

 

“나는 돌아가는 길도 모르는데.”

 

소녀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아렌에게 눈을 감으라고 했다. 아렌은 불현듯 밀려오는 불안감에 쉽사리 눈을 감지 못했다. 소녀는 아렌은 기다렸다. 여기서 시간을 끌어 불리한 건 자신이니 아렌은 어쩔 수 없이 머뭇거리며 눈을 감았다.

 

“내가 시작이라고 하면 천천히 10까지 세고 눈을 뜨는 거야. 알겠지?”

 

아렌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아렌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곤 작은 손으로 아렌의 볼을 감쌌다. 아렌의 입술에 무언가 와닿았다. 낯선 듯 낯익은 감촉. 소녀는 다시 아렌에게 입을 맞췄다. 두 번째 입맞춤은 짧고 가볍게 이어졌다. 소녀는 몇 초 지나지 않아 입술을 떼곤 시작을 외쳤다. 아렌은 몸이 붕 떠오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눈을 뜨고 소녀의 얼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지만, 그래도 약속대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10을 셌다.

하나, 두울, 세엣 …….

 

 

눈을 떴을 땐 호수 앞 큰 바위 위였다. 아렌은 호수를 들여다보며 몸을 더듬었다. 호수는 밑을 들여다볼 수 없었고, 옷은 하나도 젖지 않은 채였다. 다만 로브 아래로 떨어진 전등이 꺼져 있을 뿐이었다. 깜빡 졸기라도 했던 건가. 아렌은 합리적인 의심을 던졌다. 하지만 성급히 결론을 내리고 싶지가 않았다.

하늘을 보니 정말 얼마 가지 않아 해가 떠오를 듯했다. 아렌은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옮기기 시작했다. 궁으로 돌아가면서도 자꾸만 호수를 뒤돌아봤다. 호수는 아주 잔잔했고,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다행히 늦지 않게 성에 도착한 아렌은 바로 옷부터 갈아입었다. 막 잠에서 깬 사람이 외출복을 입고 있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일이니. 혹시 모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게 웃옷을 뒤집어 털자 무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렌은 바로 옆 의자에 옷을 걸쳐두고 몸을 굽혀 조각을 주워들었다. 어디서 많이 본.

호수에서, 소녀가 앉았던 바위에 올라가 주웠던 조각이다. 물에 들어가면서 이것을 주웠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렌은 침대에 걸터앉아 그 조각을 살폈다. 그것은 여전히 자신의 아름다운 광채를 뽐냈다. 이리저리 각도를 달리할 때마다 빛과 색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이 시선을 빼앗았다. 소녀의 지느러미에 달린 비늘이 딱 그랬다. 그렇다는 건 역시 그 일은 꿈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런데 다시 살펴보니 모양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소녀와 헤어지기 전 소녀의 마지막 말이 순간 아렌의 뇌리를 스쳤다.

 

“오늘 있었던 일은 비밀이야. 그래도 다음 만날 때까지 날 잊으면 안 되니까 이걸 보면서 가끔은 내 생각을 해줘야 해.”

 

조각 뒤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무어라 글이 적혀 있었다. 삐뚤빼뚤 악필이기는 했지만 못 알아볼 글씨는 아니었다. 이 나라의 글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치즈’.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렌은 바로 알아챘다. 아렌은 그 조각을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린 액자 뒤에 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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