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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맞아요. 인어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죠.

 

뭐, 굉장히 먼 옛날의 일이에요. 지금은 그 이야기를 책으로 내 준 출판사의 기둥뿌리까지 내려앉아버렸죠. 내가 좀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던가 그 이야기가 더 멀리 팔려나갔던가 무엇 하나라도 되었더라면 그렇게 폭삭 망해버리지는 않았을텐데. 재능은 애매하고 할 줄 아는 것은 딱히 없어서 지금은 이렇게 손님 같은 관광객들에게 내가 언젠가 책을 냈던 적이 있었다고 흘러간 자랑이나 하는 처지가 되어버렸어요. 내가 쓴 이야기도 이 근처의 작은 서점에서나 잠깐 팔리고 말았죠. 그래서 솔직히 조금 신기해요. 손님처럼 도시에서 온 젊은 아가씨가 내가 쓴 책의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게.

 

어쩌다 책을 읽게 된 건지 물어봐도 되나요? 아까도 말했듯이 내 책은 이 근처에서나 조금 팔리고 말았거든요. 출판사 사장 말로는 내가 직접 쓴 책 소개문이 너무 황당하고 말이 되질 않아서 도시 독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이지를 못했다던데. 뭐라더라, 그런 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집었다가도 내려놓을 거라고 했나? 언젠가 책 소개문에 썼던 글을 좀 보여주니까 다른 객지 손님이 그렇게 말하더라구요. 대체 소개문에 뭐라고 썼었냐구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사실대로 썼어요. “작가의 할머니가 어린 시절에 목격한, 난파선이 밀려오던 어느 해변가의 인어와 그 인어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 라고.

 

여기쯤 얘기가 나오면 다들 웃어버리거나 헛소리 취급을 하던데. 확실히 손님은 좀 특이한 사람이네요. 원래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나요? 인어나 유니콘이나 뭐 그런 하늘 위 둥둥 떠다니는 환상 이야기 같은? 뭐어, 나야 이제 아무나 붙잡고 흘러간 이야기들 늘어놓는 게 제일 재미있을 나이가 되어서 들어준다면야 고맙지만요. 아가씨도 언젠가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게 될 날이 올 거에요. 나이를 먹는다는 게 다 그런 거랍니다. 일단은 조금 길어질 지도 모르니 마실만한 걸 좀 가지고 올게요. 커피 마실 수 있나요? 아니면 홍차? 찻잎은 변변찮지만요. 그래도 그럭저럭 마실만은 할 거에요.

 

……어때요. 내 말대로 그렇게 나쁘진 않죠? 그럼 마시면서 천천히 시작해볼까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 게 좋을까...... 그래요, 우선은 우리 할머니께서 인어를 봤다는 그 해안가가 어디고 그 분이 어쩌다 그 곳까지 가게 되었는지부터 이야기해볼까요.

 

이 지역에 좀 알려진 해안이 있는 건 알고 있죠? 바윗더미만 잔뜩 늘어서 있어서 백사장이나 탁 트인 경관이 있는 건 아닌데다 손을 담그면 손등이 보일 정도로 물이 맑은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이 지방으로 관광을 한다고 오는 사람들은 전부 한 번 씩은 들렀다 가는 곳이니까요. 지금이야 그 곳에 관광객이 많이 드나들고 돈냄새를 따라 자잘한 먹을거리를 파는 노점상이나 더 멀리는 해안가가 내다보이는 곳에 세운 카페들이 즐비하지만 우리 할머니가 양갈래로 머리를 땋고 천방지축으로 동네를 누비던 때에는 어른들이 그 해안가에 애들 발이 닿는 걸 허락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해요.

 

그게, 군함이나 큰 상선이라면 모를까, 그때까지도 이 근방의 어부들이 쓰던 고기잡이 배들은 돛과 노의 신세를 져야 움직이고 몸체는 오로지 나무로만 이루어져 있던 것들이었거든요. 폭풍이 한 번 일고 돌풍이 한 번 불어닥치면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나는. 그럴 때마다 그 부서진 잔해들이 이 곳의 해안으로 그렇게 흘러들어왔다고 해요. 차라리 부서진 배의 판자 조각 뿐이라면 뛰어다니지 말고 발 아래를 조심하라는 말로 끝낼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이 아닌 존재들이 해안가에 흔하게 널부러져 있으니 아무리 담력이 좋은 어른이라도 아이들이 그런 곳에 가는 걸 쉬이 허락해 줄 리가요. 그래서 배를 타지 않고 쉬고 있는 어르신들이 그런 상황을 격일로 보고 그나마 생전에 누구였을지 가늠이 갈만한 이들을 수습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가며 그 곳에 발길도 대지 않으려는 어린 애들이 대체 몇이나 있겠어요? 바다에 나섰다가 그 값으로 남은 생을 죄 내놓아야 했던 이들만 제외하면 그 해안가는 고즈넉하고 노을이 지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애고 어른이고 넋을 잃게 되어버리는 곳이었는데요. 게다가 그 시절 애들은 요즘처럼 놀거리도 만만찮았으니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아 조개 껍질이며 파도에 깎여나간 조약돌들이 천지에 널린 모래사장을 돌아다니며 줍는 것도 제법 즐거운 놀이었을 테지요.

 

어린 시절의 우리 할머니도 그런 아이들 중 하나였다고 해요. 아니, 그 분은 한 술 더 뜨시는 분이었죠. 할머니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지금은 이름도 모를 누군가한테 팔려서 여행객을 받는 펜션인가 뭔가로 사용되고 있는데, 어쨌든 간에 그 해안가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어요. 공상이 많아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도 금새 다른 방향의 상상의 나래로 흘러가버리고 마는 어린 여자애가 잠이 오지 않는 밤에 부모님 몰래 빠져나와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도 딱히 들키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으니까요.

 

그래요, 그게 그 분이 그 인어와 인어를 사랑한 남자를 보게 된 이유에요. 할머니께서는 보통 때와 똑같은 밤이었다고 하셨지요. 수평선 근처의 먼 바다에서는 차가운 바닷물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괴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오래도록 울리고 두꺼운 구름 더미와 불길한 회색 공기가 가득하게 차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곳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해가 뜬 것처럼 달빛이 유달리 밝았던 것만이 유일하게 이상한 점이었다고 하셨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또 그렇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지만요. 왜, 인어는 바다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존재들이라고 하잖아요? 사랑하는 이가 어두운 바닷가에서 비바람을 맞고 있는 것을 좋아할 존재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어요? 어쩌면 그 맑은 하늘과 지나치게 밝은 달빛이 인어가 그 곳에 있을 거라는 일종의 암시였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암석 해안이라는 것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곳의 해변도 딱히 다르게 생기진 않아요. 부채꼴처럼 주변을 둘러친 해안 절벽과 그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올 수 있는 가파르게 층이 진 좁은 길. 그곳을 지나고 나면 파도에 쓸려서 맨질해진 돌들과 그 사이로 밀려오거나 일찌감치 부서져버린 모래들이 펼쳐지고, 해안가 근처로는 아이들이 몸을 숨기기 좋을 법하게 비죽 솟은 바위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죠.

 

개중에 절벽 위 쪽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좁은 길의 어느 부근에서 약간만 몸을 숙여 내려다보면 바로 보이는 바위가 하나 있었다고 해요. 몇 년 전 어마어마한 태풍이 몰려올 때 그만 산산조각 나고 말았지만 지금도 그 뿌리 부근만큼은 남아있지요. 그 날, 달빛과 밤에 의지해서 조심스레 길을 내려오고 있던 할머니는 그 바위가 보이는 곳을 지나던 순간 처음 듣는 목소리를 들으셨다고 해요. 목소리에는 색이라는 것이 존재할 리가 없지만 분명하게도 은색으로 빛나는 목소리였다고 하시더군요. 부모님의 증조부모님 대부터 이 마을에 살았던 할머니조차 처음 듣는 서늘하고 아름다운 목소리였다고.

 

아이들이란 겁이 얼마나 있건 없건 간에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잖아요? 제게는 언제나 신중하고 또 신중하신 할머니셨지만 어린 시절에는 또 달랐던 모양이에요. 해서 할머니는, 누군가 길을 내려오다 머리가 깨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 가장자리에 잡아맨 밧줄 난간을 붙잡고 몸을 내미셨다고 해요. 턱을 내밀고 시선을 내리깔자 그 바위가 곧장 보였다더라고도 하셨구요. 네, 맞아요. 어린 시절의 할머니는 그 때 보게 되신 거에요. 긴 머리타래를 늘어뜨린 어느 인어와 드물게도 살아있는 채로 해안가까지 오게 된 어떤 인간 남자를.

 

처음에는 늦은 밤 둘만 있을 시간을 찾은 근처의 젊은 연인인가 싶으셨대요. 사랑은 사람을 미치게 하고 그렇게 미친 이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아서 그저 둘만 있을 수 있는 고즈넉한 곳이라면 밤마다 죽은 이들이 밀려오든가 난파선의 부서진 판자가 밀려오든가 상관하질 않으니까요.

 

하지만 자세히 바라보니 살갗이 희게 빛나는 여자의 등 아래, 허리 아래에서 발 끝으로 이어져야 마땅한 하체가 달빛 아래 은회색으로 번쩍이는 바다뱀의 몸통이었더래요. 그걸 보고 얼마나 놀라셨는지, 비명을 지를 뻔 한 입을 간신히 틀어막았다가 되려 미끄러져 머리가 깨지실 뻔 했다나요. 게다가 그 앞에서 바위에 몸을 기대고 앉은 남자의 셔츠 옆자락과 그 곳을 눌러감은 것 같은 천 아래에서 쉴새도 없이 붉은 물이 번지는데 어린 마음에도 이건 뭔가 다른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셨다더라구요.

 

인어라고 하면 다들 한 번 돌아봐서 성벽을 무너뜨리고 한 번 웃으면 나라를 무너뜨리는 절세의 미인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죠. 하지만 어린 할머니가 본 인어는 그런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다고 하던걸요. 오히려 너무 앳되어서 잘못 보면 근처 혼기가 다 찬 이웃집 아가씨 같은 얼굴이었다던가. 앞섶까지 길게 늘어뜨린 머리타래의 색도 바다의 푸른 빛이나 별의 은색이 아니라 어디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짙고 어두운 갈색이었고요. 눈구멍이 깊게 패이지 않았는데도 눈 아래 길게 그림자가 늘어진 것만 빼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법 한 얼굴이라고 하셨죠. 하지만 그런 앳되고 순한 얼굴 위로는 표정이 하나도 없어서 도리어 무서웠다고도 하셨어요.

 

인어와 마주보고 있던 남자는 바위에 비스듬하게 기대어 있어서 얼굴의 반절 정도만 볼 수 있었는데, 그의 앞에 있는 인어에 비하면 연륜이 있는 얼굴이었다고 했어요. 바다 위에서 오래 일해 노련함과 탈력감을 동시에 얻은 중견 선원과 같은 인상이었다고. 움푹 들어간 눈가며 단정하게 다듬어둔 수염이 제법 사람들의 이목을 끌 법 했는데, 무엇에 갈리고 뭉개진 것인지 드러난 뺨이 온통 흉한 붉은 색으로 일그러져 있었대요. 그리고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눈 앞의 인어를 보고 자꾸 비죽비죽 웃어가며 중얼거렸다고 했죠. 아직 다리를 얻지 못한 거야? 라고.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곧장, 그를 죽이지 않았어? 라고요. 마치 두 사람이 이미 서로를 알고 있고, 둘이서 함께 알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이.

 

인어는 포말과 해안가의 젖은 모래가 만나는 경계선에 똬리를 틀 듯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로 말없이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더군요. 사실 인어가 되었든 인간이 되었든, 상대방에게 누군가를 죽이지 않은 거냐느니 하는 질문을 하는 건 상당히 무례한 일이잖아요? 그런데도 그 얼굴 위에는 아무런 표정도 스치지 않고, 마치 남자의 영혼까지 뽑아내어 바라보듯이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해요. 차라리 온 얼굴로 표독스레 노려보거나 분한 얼굴로 울고 있었더라면 보는 이가 안타깝더라도 더 마음이 편했을 텐데 그저 그렇게 바라만 보고 있었다고.

 

어린 할머니는 두 사람이 언제 갑작스레 고개를 돌려 저를 쳐다볼까 두려워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 손바닥으로 입까지 막아가며 숨을 삼켰는데 남자는 그 해안가로 누군가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은 건지, 아니면 인어에게 모든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인지 계속해서 목청을 돋워 떠들어댔다고 했어요. 너는 그 때도 그 자를 제법 좋아했지. 똑같은 모양의 외로움을 들고 있는 이를 만난 것은 얼굴을 했잖아. 그래서 그를 죽이지 못했어? 그의 피로 꼬리를 적실 수가 없었나? 그의 피로 발을 얻느니 차라리 영영 가라앉은 채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거야? 꼭 열병 환자가 헛소리를 하듯이 말이에요. 마음에도 없고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는 것을 나오는 대로 지껄이듯이.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의 얼굴이 간청하듯 일그러지는 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고,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 하셨지요.

 

해서 한참동안이나 남자가 떠들어대는 것을 듣고있던 인어가 처음으로 몸을 구부려 남자의 입술 위로 제 손가락을 세워 눌렀을 때 어린 할머니는 그야말로 숨을 쉬거나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었다고 해요. 표정 하나 없던 얼굴 위로 남자가 짓고있던 그것과 비슷한 표정이 번졌으니까요.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씨근거리며 차오르는 울분을 어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 말이에요. 그렇게나 실컷 떠들어대던 남자도 목이 졸리듯 입을 다물고 그의 몸 위를 휩쓸 듯 다가와 입술을 누르며 올려다보는 인어를 바라보았다고 했죠. 그 입술 위에 닿은 손가락을 그대로 씹어삼키고 싶은 얼굴을 했다고도 했어요. 지나치게 사랑하는 것이 자기 곁을 떠나기 전에 망가뜨려 삼키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던 인어가 무언가를 애써 억누르는 듯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럼로우, 하고 입을 열었을 때 할머니는 그게 남자의 이름이라는 것을 직감했대요. 럼로우라는 이름은 조금 특이하니까 어쩌면 성일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눈이 덜 꺼진 숯처럼 지글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한 번 럼로우, 하고 부른 인어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묻고자 했던 것에 답해준다면 나 역시도 당신이 물은 모든 것들에 대해서 기꺼이 말해줄게.’

 

손님이라면 어땠을 것 같아요? 눈 앞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열병에 걸린 것처럼 지껄이게 만드는 존재, 수없이 많고 정도없이 무례한 질문을 수없이 던지게 했던 존재가 내가 그에게 주는 답과 그가 나에게 줄 수 있는 답을 맞바꾸자고 한다면? 보통의 존재들이었다면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했을 테죠. 그다지 대단한 값을 치르는 것이 아니잖아요. 아무리 높게 쳐주어 봐야 답변 하나에 답변 하나를 바꾸는 등가교환 정도인데.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 정도의 가벼운 값이 아니었던 모양이죠. 제 입술 위에 닿은 손가락 하나를 온통 씹고 뭉개 삼켜버리고 싶다는 욕망어린 눈으로 인어를 바라보던 남자는 인어의 그 말을 들은 순간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몸을 움찔거렸다고 해요. 사람의 움직임보다는 창에 맞은 거대한 맹수같은 움직임이었다더군요. 순식간에 제정신을 차린듯한 눈을 한 남자가 인어를 내려다보며 한 대답은 ‘아니’ 였어요. ‘절대로 안될 일이야.’ 꼭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일그러진 입술 끝으로 빈정거리듯이.

 

‘절대로 그것만큼은 네게 말하지 않을 거야, 내 사랑.’

 

어렸을 적에는 이 순간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남자가 너무나도 어리석게 느껴져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렇잖아요? 고작해야 원하는 답을 주면 되는 것 뿐인데. 둘러감은 천 아래로도 습하게 핏물이 번져나가는 몸을 하고서도 원하던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을 텐데. 정작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순간에 고집을 부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건 정말로 잔인할 정도로 현명하고 이기적인 선택이었던 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에요.

 

황소와 왕비 사이에서 태어난 괴물인 미노타우르스를 가둬두었었다던 미궁을 기억해요? 아리아드네 공주의 실타래를 들고 나선 테세우스가 미로의 끝에 도달해 괴물을 죽이고 난 후의 미로가 어떻게 되었고 얼마나 형편없이 빛이 바래게 되었는지? 마지막으로 그 미로에 갇혔던 어느 아버지와 아들이 인간으로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할 발상으로 그 벽을 너머 떠났을 때 끔찍한 위용을 자랑했던 미궁은 시간 속에서 폐허와 모래로 부서질 때만을 기다리는 흉물이 되었죠. 모든 이들은 그 미궁을 만들고, 그 안에 버려졌고 갇혔고 빠져나온 이들의 이름만을 오래도록 기억할 뿐이었으니까요.

 

어쩌면 남자는 자기 자신이 그 미궁과 같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자기 안에 감춰둔 것을 꺼내어 보이고 나면 인어가 자신에게 느끼는 가치는 완전히 사라져버릴 것이라고 생각한 거죠. 테세우스에게 중요했던 것은 미궁이 아니라 그 안의 미노타우르스였듯이 인어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어가 그토록이나 알고 싶어하던 그 비밀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인어를 완전히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것을 내놓을 수가 없었던 거에요. 설령 그 순간에는 실망해 떠나갈망정 남자가 그 비밀을 여전히 쥐고 있는 이상 인어는 남자를 온전히 버려두지 못할 테니까요.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혼자 생각해낸 가능성이니, 그 때의 남자가 정말로 이렇게 생각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말이에요.

 

내 생각이 어찌되었든 간에...... 마치 어린아이가 뻗대듯이 고집스럽게 구는 남자를 응시하던 인어는 언제 그 얼굴에 표정이라는 것이 있었냐는 듯 하얗게 굳어 가라앉은 얼굴로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더군요. 시간이 지나 달의 위치가 많이 기울어졌는지 그 뺨 위가 밀랍처럼 바랠 정도로 하얗게 비추던 달빛이 벗은 등 위를 하얗게 식힐 뿐 남자와 마주한 얼굴은 온통 그림자가 져서 보이지 않았다고요. 흠뻑 젖어 뺨에 달라붙어있던 긴 머리카락이 바닷바람 속에 소금기만 남기고 말라붙어서, 그 끝자락이 숨을 따라 연약하게 떠는 것을 보는 것만이 할머니가 확인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 그 후에 인어가 뱉은 말은 그 정도라고 했죠. ‘그래, 그게 대답이란 말이지.’ 한숨처럼 떨어지는 그 말들에 든 것들이 실망이었는지, 분노였는지, 아니면 체념이었는지...... 그 시절에 비하면 수없이 많은 것을 겪어온 나이의 자신마저도 도저히 딱 잘라 말할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고 할머니는 늘 말씀하셨었죠. 얼굴이 보였더라면 그것을 기억해 읽었을 테고 손 끝이라도 말아쥐었더라면 그 꽉 쥔 손 끝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겠지만 남자의 앞에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있던 인어는 얼굴도 손의 움직임도 무엇도 볼 수가 없어서 무엇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고요.

 

여전히 입술 위를 손바닥으로 내리 누르고 있던 할머니가 간신히 삼킨 숨을 뱉어낼 만큼의 시간이 흐른 후에, 인어는 어떠한 예고도 없이 그대로 몸을 돌렸다고 해요. 포말의 바깥으로 비어져 나온 길고 매끈한 몸체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소금 부스러기가 떨어지도록 마른 머리타래가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가 헐떡이며 손을 뻗었지만 아주 당연하게도 닿지 않았고요.

 

천으로 둘러싸인 옆구리를 한 손으로 누른 채 남은 손으로 허공을 젓던 남자가 기어코 온 상체를 모래밭 위로 넘어뜨리는데도 인어는 돌아보지 않았대요. 구부러지고 휘어진 바다뱀의 꼬리가 모래 위를 적시고 돌아서는 파도처럼 천천히 바다를 향하여 물러서는 내내 남자는 쓰러진 몸을 뒤틀고 남은 손을 갈퀴처럼 휘며 어떻게든 인어를 따라 나아가려고 애를 썼다고 하더군요. 그 모습이 피를 토해내는 것처럼 너무나도 처절해서 제대로 된 것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둘 사이의 한 순간을 본 것 뿐인데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고, 할머니는 늘 몸을 떨며 그렇게 말하셨어요.

 

하지만 얼마나 간절하고 처절했든 인간이, 그것도 상처입은 인간이 어떻게 인어를 따라잡을 수 있겠어요? 모래밭에 던져진 바다뱀처럼 기던 남자는 결국 포말이 간신히 손 끝을 적시는 곳까지 나아갔을 뿐이고, 저를 쫓는 남자에게 단 한 번도 돌아봐주지 않은 인어는 밀려온 물결이 함께 엉겨들어 되레 잔잔하게 들썩이는 곳으로 녹아들기 직전이었죠. 젖은 모래 위에 이마를 뭉개고 웅크린 남자가 그 등을 향해 ‘윤’, 하고 입을 열었을 때 할머니는 남자의 이름을 눈치챘듯이 남자가 뱉어낸 그것이 인어의 이름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다고 해요. 더 정확히는 그 소리를 들은 인어가 물살 아래로 파고들려던 몸을 움칫 굳히며 멈춰섰기 때문이었지만요.

 

머나먼 수평선에 깔려있던 두꺼운 구름도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하늘은 온통 투명하게 가라앉은 검푸른 빛이었고 인어가 제 반신을 파묻은 바다는 요람처럼 고요하게 찰랑이기만 해서, 할머니의 숨소리까지 시끄럽게 들릴 정도의 고요한 순간이었다고 했어요. 모래 알갱이가 눈물자국처럼 뺨 위로 말라붙은 얼굴을 무겁게 무겁게 들어올리며 남자가 다시 한 번 ‘윤’, 하고 불렀다고 했죠. 여전히 등을 돌리고 바라봐주지 않는 인어를 향해 남자가 말을 떨어뜨렸대요. ‘거짓말이라도 좋아.’ 잇새 사이로 뼈라도 부러뜨릴 것처럼 중얼거린 남자는 간신히 들어올린 머리를 떨군 채 그 끝을 이었죠.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해줘.’

 

남자가 과연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생각했어요. 그렇게 말해달라고 했지만, 정말로 그걸 들었다고 해서 남자가 만족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걸요. 거짓이라도 좋으니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다는 말의 무게 추는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그 행위 자체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목이 말라 바닷물을 들이키다 갈증으로 죽어버렸다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그 말을 듣는다고 해도 남자가 원하던 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았을 테요.

 

여전히 등을 돌린 채였던 인어는 그것을 알고 있었는지, 그게 아니면 그저 자신과의 거래를 내던진 이와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는지. 남자의 애원에도 아무런 대꾸조차 없었다고 했어요. 남자에게 대답하듯 밀려왔던 것은 그토록 간청했던 인어가 아니라 인어를 맞이하려는 듯 입을 벌리고 다가온 파도 뿐이었다고.

 

마을 하나를 통째로 욱여넣으려는 듯 거대하게 밀려왔으면서 인어 하나만을 삼키고 녹아내린 파도의 끝자락이 뻣뻣하게 곱아든 손가락을 적시고 물러났을 때, 할머니는 바짝 몸을 웅크린 남자가 울부짖듯이 웃어대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어요. 산 채로 타들어가는 듯한, 아무리 수면 아래의 깊은 곳으로 파묻혀도 결코 꺼지지 않는 불덩어리가 된 것 같은. 그런 소리로 웃어대는 것을요. 상처에 닿는 소금물이란 그 자체로 불타는 창처럼 살갗을 헤집는 고통일 텐데도 그저 바닷물이 한없이 밀려오는 그 자리에서, 울부짖듯이 웅크린 그 자세 그대로 뿌리를 내린 것처럼. 아주 오래도록......

 

…그 후의 이야기는 별 것 없어요. 노인들이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옛이야기들이 다들 그렇듯이요. 그 모든 것을 지켜본 할머니는 내장을 토하듯 웃어대는 남자를 그 자리에 그대로 내버려 둔 채 쉼없이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죠. 홑이불로 몸을 둘러 감싸고 날이 밝을 때까지 당신이 봤던 그 광경을 몇 번이고 떠올리면서 머리 한 구석에 새겨놨다나요. 그리고 억 만 겁 같던 밤이 지나 희붐하게 하늘이 밝아오고 아침 그물을 걷으러 가는 배들이 항구를 떠나기 시작할 때 다시 그 해안가로 가봤다고 해요. 당연하게도 그 곳엔 등 돌린 인어도 웅크린 남자도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죠. 절벽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좁은 돌길의 밧줄 난간에 흐릿하게 남은 핏자국을 제외하면 말이에요.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당신이 낳은 첫 아들의 첫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누구에게도 하지 않으셨어요. 정말로 현명하신 분이죠. 그보다 더 빨리 이야기했다면 젊은 처녀의 황당한 꿈 취급을 받았을 테고 그보다 늦게 이야기를 했더라면 인생의 황혼에서 난데없이 흘러나온 헛소리로 치부되었을 테니까요.

 

나는 할머니가 직접 당신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셨을만큼 그 분과 닮은 구석이 많은 손녀였고 그래서인지 이 이야기를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요. 그래서 그 책을 쓰게 된 거에요. 그 이야기에 대해서 할머니 다음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그 이야기에 대해서 가장 잘 쓸 수 있는 사람도 할머니를 제외하면 나 뿐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리고 이건 조금 엉뚱한 이유이긴 한데, 이 이야기가 멀리 퍼져나가게 된다면 그 이야기의 주인인 남자가 이 곳을 다시 찾아올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어요. 정확히는 그 남자의 손주나 증손주가요. 그 일이 정말로 있었던 일이라면 당사자나 당사자의 후손도 존재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또 거꾸로 생각해보면 정말 인어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지금 생각해보면 낭만적이기보단 황당한 생각이네요. 아휴, 부끄러워라.

 

응? 왜 이야기를 해피 엔딩으로 끝내지 않았느냐고요? 그러게요, 지금 생각해보니 왜 그런 생각을 못했을까 싶어요. 이상하게도 원고를 쓰는 동안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어요. 그냥, 그 남자는 영원히 자신을 두고 돌아선 인어를 찾아 떠돌아다닐 것 같은 느낌이었죠. 인어가 다시 그를 만나러 나타나지도 않을 것 같았고요. 손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남자는 결국 영원히 인어를 만나게 될지 아니면 만나지 못하게 될지 알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셈인데, 생각해보니 조금 불쌍하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이야기 속에서라도 만나게 해 줄 걸 그랬어요.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벌써 시간이..... 곧 저녁 식사 시간이라서 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이거든요. 아무래도 부부가 같이 배를 타고 나서는 일이 많으니까요. 아무리 작은 식당이라도 곧잘 붐비기 마련이죠. 손님도 조금만 더 있다가 저녁 먹고 갈래요? 메뉴는 그다지 많지 않지만..... 아하, 오래 전화 할 곳이 있군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숙소에서도 먹을 수 있을만한 간단한 걸 좀 포장해줄게요. 사양할 필요 없어요. 처음에 말했죠? 나는 남들에게 이것저것 풀어놓는 게 제일 재미있을 나이라구요. 실컷 미주알고주알 풀어놓는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맙다는 성의 표시라고 생각해줘요.

 

좋아, 그러면 혹시라도 다른 포장 손님의 것과 바뀔 수 있으니까 용기 위에다 이름을 좀 써놔야겠네요. 처음에 말해줬는데 잊어버려서 정말로 미안해요. 그래서, 손님 성함이 어떻게 된다고 했었죠?

 

 

수평선 너머로 화려하게 이글거리던 노을이 지고 검푸르게 식은 공기가 깔린 밤바다는 적막했다. 넉살좋고 푸근한 인심을 자랑하던 여주인이 플라스틱 케이스 안에 정성스레 담아준 피쉬 커틀릿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가득 물고 우물대며 앳된 얼굴을 한 여자는 눈 앞의 해안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젠가 장정 한 명이 등을 기대고 앉을 수 있을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었던 바위는 지난 세월 수없이 밀어닥친 폭풍우에 부서져내린 단면만을 남긴 채였다. 파도에 쓸리고 닦여 매끈하게 갈린 그 위를 손 끝으로 쓸며 그는 여주인이 들려준 이야기들을 떠올렸다. 비밀이 사라진 미궁은 가치를 잃고 인어의 회유에도 제 비밀을 꺼내지 않은 남자는 제가 인어에게 가지는 그 어떤 방향의 가치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들이 머릿속을 오래도록 어지럽혔다. 사라지지 않고 떠오르는, 머나먼 기억 속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거짓말이라도 좋아. 언젠가 돌아보지 않으려 애를 쓰던 그 순간 드러난 살갗을 오래도록 긁어내리던 그 목소리. 거짓말이라도 좋아. 단 한 번이라도 사랑한다고 말해줘. 닻줄에 목이 매달린 것처럼 그렁거리던 목소리를 뿌리치고 인어는 깊은 바다로 사라졌고 지상의 모래 위에 버려진 남자 역시도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 둘을 목격한 유일한 이는 일찍이 천수를 누리고 떠났고 그 이에게 기억을 물려받은 자가 쓴 이야기 속에서도 인어의 행방은 알 수 없고 남자는 그저 영원히 떠돌 뿐이다. 병자를 위로하는 입맞춤을 하듯 뿌리만 남은 바위 위로 목덜미를 구부리며 여자는 오래도록 눈을 깜박였다.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줘. 그러나 그 말에 대한 대답만큼은 영영 침묵으로 남겨둔 채로.

 

웅크리듯 구부러진 연약한 그림자 위로 어디에서부터 달려왔는지 알 수 없는 거대한 파도가 입천장을 높이 치켜올렸다. 해안 절벽의 끝자락까지 모조리 삼킬 것처럼 거대한 파도는, 그러나 옅은 그림자 하나만을 삼킨 채로 부드럽게 몸을 흔들며 물러났다. 여자가 몸을 구부리고 있던 바위의 저 먼 맞은 편에서 손을 잡고 걷던 한 쌍의 연인이 갑작스레 발이 젖도록 밀려온 물결에 짧게 비명을 지른 것이 유일하게 벌어진 소동이었다. 그들이 볼 수 없는 얇은 수면 아래를 길쭉하니 거대한 바다뱀의 꼬리가 느긋하게 스쳤다. 나른하게 일렁인 꼬리 끝이 심해를 향하여 오래도록 파고들었다. 한 차례 바람이 불고 난 후에 바닷가는 다시금 조용해졌다.

 

그리고 원하는 것을 영영 얻을 수 없게 된 남자와 어떠한 대답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인어의 이야기만이 그곳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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