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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까지 소년은, 인어 같은 건 어른들이 만들어 낸 헛소문 중 하나일 뿐이라 생각했다.

 

‘어린아이들은 먼바다로 가면 안 된다. 바다에는 인어들이 사는데, 어린아이들을 보면 심해로 낚아채 간단다.’

 

어른들의 허풍은 우스꽝스러웠다, 그런 이야기를 애들이 정말 믿을 것 같아서 지껄이는 거냐고 비웃고 싶을 정도였다.

 

“엿이나 먹으라고 해!”

 

소년과 소년의 친구들은 어른들의 말을 무시했다. 무시한 걸 넘어, 조롱하고 낄낄거렸다.

시답잖은 허풍으로 자신들을 바다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하다니. 어차피 이 항구에 태어난 사내자식들은 어부가 되거나 해적이 된다.

철없는 아이들은 어부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고 큰 도시로 가 제대로 된 일을 구할 생각도 없었다.

 

‘어른들이 못 나가게 막는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어촌의 악동들은 작은 배를 구해 어른들 몰래 바다를 오갔다.

낡은 나무배는 근사하진 않았지만, 성장기 소년 넷이 타기도 힘들 정도로 작은 크기는 아니었다.

누구도 해안가를 오가지 않는 밤. 몰래 배를 띄우고 육지 근처 얕은 바다를 오가는 그들은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지만, 당사자들은 언제나 즐거울 뿐이었다.

 

“좋아, 오늘은 이 섬을 둘러보고 가자.”

 

항구 근처의 작은 무인도에 도착하기 무섭게, 친구들은 각자 할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누가 보면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줄 알겠군.’

 

소년은 신이 나서 뛰어가는 친구들을 보며 코웃음 쳤다.

자신은 이런 작은 탐험으론 만족하지 못한다는 걸까. 친구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음에도, 그는 냉소적인 눈으로 해변 바위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마이스터라면 마냥 놀고 오는 게 아니라 뭐라도 조사해오겠지. 제너럴도 같이 있고…….’

 

생각에 잠겨있던 그는 제 옷에 튀는 물방울에 고개를 돌렸다.

밀물이 차오르는 건가. 소년은 그리 생각했지만, 그의 눈동자에 비친 건 낯선 그림자였다.

 

‘뭐야?’

 

바위틈새로 보이는 건 제 또래의 여자아이였다. 다만, 그 소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안녕.”

 

히죽 웃으며 인사한 소녀가 반쯤 바다에 잠긴 몸을 뭍 위로 내밀었다.

허리 아래로 드러난 하반신에는 다리가 없었다. 있는 건 물고기를 떠올리게 하는 비늘투성이 꼬리뿐.

 

“진짜 인간이네? 내가 잘 못 본 건가 했는데. 여기까진 어쩌다 오게 됐어?”

 

신이 나서 떠드는 목소리는 아름다웠다. 언젠가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은 아버지에게 들었던 동화 속 인어처럼, 소녀의 목소리는 귀에 감겨드는 부드러움이 있었다.

 

“너 뭐야.”

“나는 에소루엔. 다들 루엔이라고 불러. 너는?”

“이름을 묻는 게 아니잖아.”

 

인어 같은 건 다 어른이 만든 허풍의 일부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앞에 본체가 나타나다니. 혹 제가 피곤함에 환상을 보는 건 아닐까 생각했지만, 제 쪽으로 튀는 물방울의 차가움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인어 처음 봐?”

“너는 인간 여러 번 봤나 봐?”

“멀리서라면.”

 

한 마디도 안 지는 여자다.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친 소년은 인어를 향해 몸을 돌렸다.

 

“너는 이름이 뭐야?”

 

소년은 어렸지만 어리석진 않았다. 특히 다른 건 몰라도 상대가 가진 적의는 누구보다도 잘 감지할 수 있었다.

구전되는 전설과 달리 이 인어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다. 그리 확신한 소년이 이름을 밝혔다.

 

“데스페라도.”

“그렇구나. 혼자 왔어?”

“그건 네가 알 필요…….”

 

기껏 이야기해보려고 자세를 고쳐 앉았는데, 인어는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떠나버렸다.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사라지는 작은 그림자. 잘 보이지도 않는 실루엣을 눈으로 따라가던 그는 한참 뒤에야 가까이 다가오는 친구를 눈치챘다.

 

“데스페라도, 혼자 뭐 하고 있어?”

 

혹시 이 녀석 때문에 도망간 건가. 아니,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이왕 올 거라면 조금 늦게 오면 좋았을 텐데. 입밖으로 내뱉지 못한 불만을 삼킨 데스페라도는 물기를 털고 일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눈을 뜬 채 꿈을 꿨다고 생각하자. 어쩌면 제가 정말 헛것을 봤을지도 모르니까.

환상의 존재를 두 번이나 만날 수 없으리라 생각한 소년은 이 만남을 잊어버리려 했으나, 그는 생각보다 운이 좋았다.

 

“안녕. 또 왔네?”

 

며칠 뒤. 다시 섬으로 탐험하러 가자 인어가 아는 척하며 다가왔다.

아니, 며칠 뒤뿐만이 아니었다. 인어는 제가 섬에 찾아올 때마다 어떻게 눈치챈 건지 매번 얼굴을 비추고, 짧은 대화를 나누고 갔다.

 

“나는 언젠가 먼바다로 나갈 거야.”

 

친구들처럼 자주 만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겐 짧은 만남이 여러 번 반복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느새 인어와 자연스럽게 친해진 데스페라도는 이제는 편하게 제 미래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나 먼 바다?”

“구체적으론 생각해 본 적 없다만. 그래도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먼바다로 갈 생각이야.”

“그럼 고향에 있을 부모는 어쩌고? 친구들은?”

“난 친구 없는데.”

“같이 오는 애들 있잖아. 세 명 정도.”

 

매일 다른 발소리가 나타나면 도망가는 탓에 잘 모를 줄 알았는데, 몇 명이랑 같이 오는지도 알고 있었을 줄이야.

의외로 꼼꼼한 루엔의 눈썰미에 그가 작게 웃었다.

 

“저 녀석들은 내 항해 동료야. 아마 멀리 떠날 때 저 녀석들도 같이 떠날걸.”

“그럼 부모는?”

“그건 내가 고려할 일이 아니지.”

 

부모는 제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애초에 자신은 제대로 된 돌봄도 받지 못하고 자랐는데, 어찌 부모를 위해야 한단 말인가.

그리 생각한 데스페라도의 냉정한 대답에, 루엔이 말했다.

 

“그럼 언젠가 네가 멀리 떠날 때, 나도 같이 갈까.”

“너는 신경 쓸 가족이나 친구가 없나 봐?”

“인어는 모두 자유롭게 이 바다를 누벼. 헤엄쳐 나가다 보면 언젠간 만나게 되는 법이지.”

“거참 부러운 인생이네.”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인어의 삶이 부러웠다.

자신도 인어로 태어났다면 이렇게 먼 바다로 나가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자유롭게 어디든 가고, 뭐든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어, 멀쩡한 다리가 괜히 원망스러워지기도 했다.

 

“너도 바다로 떠날 거잖아. 그럼 부러워할 거 없어.”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제가 되든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탄 배를 열심히 따라갈 수 있게 나도 체력을 길러야겠는걸.”

“……하, 그래. 마음대로 해.”

 

인어와 항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지만, 이 인어와 함께라면 제 항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데스페라도는 물속에서 쑥 내민 손의 새끼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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