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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하현달_Esoruen.png

서곤륜의 구별동에는 언제나 홍매화가 피어있었다.
계곡의 시작부근부터 서왕모의 궁으로 이어지는 골짜기 길 앞까지. 누군가 인공적으로 심어놓은 것도 아닌데도 정확하게 구별동에만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매화의 아름다움이란 실제로 보지 않는 이상 실감하기가 힘들었지.
여기가 꿈속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절경, 짙은 매화 향과 산들바람. 그 모든 것에 취해있을 때쯤이면 구별동의 주인이 손님을 반기러 오는 것이 서곤륜의 평범한 일상이었는데. 오늘 만큼은 조금 달랐다.

“아…. 옥정진인 님, 안녕하세요.”
“음?”

간만에 구별동에 방문한 옥정진인을 반기는 것은 혼자서 책을 읽고 있는 양랑이었다.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비렴진인은 부재중이고 저 혼자서 공부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이도 어린데 참으로 열심이다. 언제나 노력하는 양랑을 갸륵하게 여기고 있는 그는 다정한 얼굴로 눈인사 하고 주변을 살폈다.

“비렴은….”
“잠깐 인간계로 내려가셨어요. 확인해 보고 올 게 있다고….”
“그러니? 언제쯤?”
“가신지 좀 되셨는데, 언제 오실지는 모르겠어요. 어디 가신지도 모르고….”

 

별다른 말없이 갔다면 그리 좋은 일 때문에 내려간 것은 아닌 모양이다. 특히 양랑에게는 알리기 곤란한, 그런 일이었겠지. 비렴진인은 언제나 제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게 비밀은 만들지 않았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잘 아는 옥정진인은 제가 유추해 낸 사실을 양랑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웃어보였다.

“알려줘서 고맙구나. 나는 다음에 또 올게.”
“네….”
“열심히 하렴.”

커다란 손으로 자그마한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준 그는 그대로 제 거처로 돌아가는가 싶더니, 돌연 경로를 바꾸어 인간계로 향했다.
양랑은 제 스승의 행선지를 모른다고 말했지만, 옥정진인은 이미 비렴진인이 어디로 갔을지 눈치 챈 상태였다. 반드시 그렇다고 확신할 수는 없어도, 8할은 맞을 거라 생각하는 장소가 있긴 했지. 하지만 그걸 양랑에게 말하지 않은 것에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비렴이 애써 숨기려 든 것을 제가 밝힐 순 없다. 양랑을 위해서라도 비렴진인을 위해서라도. 제가 해야 할 행동에 이 이상의 정답은 없다.’
말하자면, 그건 모두를 위해 선택한 지극히 옳은 결정이었다. 그러니 딱히 후회는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알리지 않는 것이 더 이득인 말이 있었으니까. 자신의 결심을 몇 번이고 곱씹던 옥정진인은 어둠이 내려앉은 인간세상을 둘러보다가, 야생 매화가 늘어져 피어있는 산길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 멈춰 섰다.

 

“아.”

찾았다. 아무래도 제 예상이 맞아떨어진 모양이다.
인간들의 눈에 띄지 않을 곳에 황건 역사를 세운 그는 조심스럽게 땅에 발을 디디고, 상대가 눈치 챌 수 있도록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상대와의 거리를 좁혀갔다.

 

바스락, 바스락.

걸음과 함께하는 풀 밟히는 소리에 꽃들만 보고 있던 비렴진인이 슬쩍 고개를 돌린다. ‘오.’ 매화 꽃 하나를 꺾어든 채 미소 짓는 그 얼굴에는 반가움이 가득했다.

“옥정.”

굳이 인사는 필요하지 않다는 듯, 비렴진인은 그저 상대의 이름을 부를 뿐이다. 물론 옥정진인도 구태여 형식적인 말은 건네고 싶지 않았기에, 눈짓으로 그 부름에 답하고 매화나무의 그늘 아래로 발을 들였다.

 

“무슨 일이지? 날 찾으러 온 건가?”
“응.”
“그래? 뭔가 급한 일이라도 있어?”
“그건 아니지만.”
“아니라고?” 

‘싱겁기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덧붙인 비렴진인은 제 옆에 있는 매화나무에 손을 얹었다.
그리 나이를 오래 먹은 개체는 아닌 걸까. 키가 작고 줄기가 굵지 않지만 꽃만큼은 풍성한 매화나무는 밤바람이 불 때 마다 붉은 가지들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인간계는 자주 오지 않아서 몰랐는데, 이곳의 매화도 참 아름다워.”

아니, 그건 ‘자주 오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연이 없다고 해도 될’ 정도라고 말하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른다. 비렴진인은 아주 어릴 때부터 곤륜에서 지냈으니, 인간계와는 인연이 거의 없었으니까. 곱씹을만한 추억도 없고, 혈연이라 할 만한 존재들은 이미 오래전 자연으로 돌아갔는데, 구태여 인간계에 올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만약 온다고 해도, 그건 본인의 일이 아닌 타인의 일 때문이겠지.
그래, 오늘 이렇게 인간계에 내려오게 된 것도 단순히 꽃구경이나 하기 위함은 아닐 터였다. 여긴 양랑의 고향 근처이니, 아마 제자와 관련된 일로 온 거겠지. 자세한 걸 물어볼 생각은 없는 옥정진인은 비렴진인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혼자서 구경하기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하고 있는 차에 오다니, 내가 모르는 사이에 독심술이라도 배워 둔 건 아니겠지?”
“농담도 참. 그냥 구별동에 네가 없어서, 찾으러 나와 본 것뿐이야.”
“그런 거였군. 양랑은 혼자 잘 있던가?”
“응. 공부를 하고 있는 모양이던데.”
“그렇구나. 하하. 누굴 닮아 그런지 몰라도, 참 성실하단 말이지.”

누구를 닮았기는, 다 제 스승을 닮아 그런 것 아닌가. 비렴진인만 모를 뿐 다들 그리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옛날부터 자신을 갈고 닦는 것에 열과 성을 쏟았고, 지금은 스승노릇까지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잘 방문하지도 않는 인간계에서 이러고 있는 것이니까.
이 얼마나 성실하고, 굳세고, 올곧은 사람이란 말인가.
정말로 매화 같은 사람이다. 매화나무 옆에 있으니 더더욱 그렇게 보인다. 붉고, 지조 있고, 절개 있어서.

 

“달도 아름답네. 그렇지?”

붉은 꽃들 사이에서 빛나는 하현달을 가리키며, 비렴진인이 묻는다.
상대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던 옥정진인은 잠깐 달을 바라보다가, 도로 고개를 숙였다.

 

“응. 아름다워.”

하늘만 올려보는 비렴진인은 몰랐을 것이다. 그의 대답이, 자신을 바라보며 나온 것이라는 것을.
아무것도 모른 채 한참동안 달을 응시하던 비렴진인은 돌연 옥정진인을 향해 돌아서더니, 들고 있던 매화꽃을 상대의 귓가에 꽂아주었다.

 

“네가 있으니 더 그림이 사는걸. 꽃과 달과 미인. 절경이네.”
“놀리지 마, 비렴.”
“놀리다니, 난 진담인데.”

아아, 진담이라서 곤란한 것인데. 네가 그걸 알 리가 없지.
하려던 말을 꾹 삼킨 옥정진인은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새하얀 손을 조심스럽게 붙잡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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