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옥은 혼자 밤 산책을 나섰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는 어김없이 숙소를 나와 밤길을 걸었다. 위험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누구보다 맞서 싸우는 데 거리낌이 없는 존재였다. 홍해아나 옥면공주 조무래기들이 오면 잡아 족쳐야지, 라는 생각으로 걷고 있던 그는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그마한 손톱달이 떠 있었다. 보름이 되려면 한참 남았다는 걸 느낀 그는 계속 걷고 있었다.
이상스레 산옥은 그믐달이나 초승달같은 삭월을 좋아했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으나 그것들은 숨겨져 있기에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대로 삭월은 자기를 숨기는 달이었다.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고 일부만 보여줌으로써 그럼에도 나 역시 달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달이었다. 산옥은 늘 그 모습을 동경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부만 보여줘도 존재를 증명한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실체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지금 산옥이 숨기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는 제 불면과 열띈 마음이라 답할지도 모른다.
산옥은 계속 걸었다. 제가 길치인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어떻게 보면 용감하기도 하고 무모해 보이기도 했다. 대체 어떻게 숙소로 돌아갈 요량인지 아는 이는 없겠지만 그는 항상 개의치 않았다. 애초에 오랜 시간 헤매는 삶을 살다보니 자연스레 방랑은 제 일부로 받아들였다. 게다가 이런 건 거의 유희나 마찬가지였기에 길 좀 잃으면 어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참 걷다 풀인지 꽃인지 모를 것을 발견했다.
“네프로, 레피스.”
방황하기 전까지만 해도 글을 읽지 못해 새로운 언어를 배울 생각도 못했을 텐데 그래도 한 번 읽기 시작했다고 다른 언어를 배울 용기가 생겼더랬다. 그래서 읽어낸 꽃 이름은 네프로레피스였다.
“처음 보는 건데 서역이 원산지인가?”
그는 푯말을 자세히 들여다 보다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양치식물 중 하나로 잎 뒷면에 홀씨주머니가 있다. 꽃말은 매혹이고.”
“양치식물이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생겼던 거네요.”
“헉?”
산옥은 너무 놀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휙 돌리니 익숙하고도 다정한 얼굴이 제 앞에 있었다.
“뭐예요, 놀랐잖아요!”
“어딜 갔나 했더니 또 밖에 나왔군요?”
“나 진짜 다리에 힘 풀렸어요.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불러주지.”
팔계는 산옥에게 손을 내밀었다. 산옥을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둔부에 묻은 먼지를 툭툭 쳐낸 산옥이 말했다.
“팔계 씨는 뭐 하러 왔어요?”
“왜 왔겠어요. 당신이 없으니 찾으러 왔지.”
“나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자지.”
“당신 옆에 잠드는 게 익숙해지도록 만들어 놨으면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하하.”
“어떻게 하면 산옥이 금방 잠들 수 있을까.”
“그러게 말이에요.”
“계속 걸었겠지만 나와 조금 더 걸어줄래요?”
“응!”
팔계는 산옥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따라 미소 짓고는 손깍지를 꼈다. 그들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찬바람이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여전히 삭월은 하늘에 떠 있었고 구름은 거둬지지 않았다. 산옥이 말했다.
“팔계 씨.”
“네.”
“아까 양치식물은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생겼다고 했잖아요.”
“응. 그랬죠.”
“그러면 우리가 지금 있는 곳도 원래 다 양치식물이 있던 곳이었을까요?”
“그렇지 않겠어요? 아마 원래는 내 키보다 더 큰 양치식물이 있었을지도 몰라요.”
“팔계 씨 키보다 더?”
“옛날이니까 가능한 일이겠죠. 아무런 가공도 되지 않은 날것 그대로니까.”
“그런가. 그런 건 보고 싶다. 팔계 씨보다 키 큰 양치식물.”
“발견하면 그 위로 올려줄까요?”
“제가 그 높이를 감당하는 건 둘째 치고 그게 무게를 감당할 것 같지 않은데요.”
고소공포증이 있는 산옥이 그렇게 답하자 팔계는 키득키득 웃으며 산옥을 보았다. 불면이 꽤 심한 이라 편하게 잠을 재워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그는 쉽사리 바로 잠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오죽하면 머리를 바닥에 대기만 해도 잠드는 오공을 부러워할까. 어쩌면 그 이유는 불안감 때문일지 모른다고 팔계는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홀로 살아왔던 산옥이라 잠들 때마다 습격당할 걱정을 안았겠지. 팔계는 거기에 미치자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을 실었다. 그에 산옥이 팔계를 한 번 올려다 보다 손가락으로 살살 손등을 쓸었다.
“괜찮아요.”
“무슨 생각 하는 줄 알고.”
“내 걱정 하고 있잖아요. 그걸 모를까.”
팔계는 산옥이 한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더니 어딘가를 향해 턱짓했다. 어디로 가고 싶은 것인지 묻는 말은 없었다. 산옥은 팔계가 자신을 데리고 가는 곳이 어디든 끝까지 따라갈 작정이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어느새 구름은 자취를 감추고 달만이 남은 밤하늘 아래에 둘 밖에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도착해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서 있었다. 팔계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고, 그래서 종종 산옥이 벼랑 끝에 있다는 걸 경험할 때마다 잔존하는 불안감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불안감은 전부 숨긴 채 산옥을 품에 안았다. 그것만으로도 안온해지는 산옥을 알았던 탓이었다.
“나 진짜 괜찮아요.”
한참 뒤에 산옥이 내뱉은 말은 그것이었다. 팔계는 그 말을 들을 때면 한없이 제가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공고히 자신을 지키는 연인 앞에서 그는 이따금 하염없이 울고 싶어졌다. 산옥은 자신이 느끼는 파동들을 팔계에게 말하는 대신 괜찮다는 말로 덮었다. 물론 정말 괜찮아서, 아무렇지 않아서 한 말이기도 할 테지만 마냥 아무렇지 않게 듣기에는 무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토록 저와 닮은 연인이라니. 둘은 정말 삭월이 가진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가진 불안과 두려움을 숨기며 오로지 밝은 모습만 드러내려 애쓰는 게 딱 그러했다. 그럼에도 이렇게 놓지 못하는 이유는 아까 봤던 네프로레피스 꽃말처럼 팔계와 산옥이 서로에게 지독히도 매혹되어 버린 탓인지도 모른다고 산옥은 생각했다.
한참 서로를 품에 안고 있던 둘이 조심스레 떨어졌다. 산옥은 팔계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요. 이제 정말 자러 갈 시간이니까.”
“오늘은 산옥이 잠드는 걸 보고 자야겠어요.”
“내가 언제 잘 줄 알고?”
“안 자면 잘 때까지 당신 얼굴을 보는 거죠.”
“운전도 해야 하면서! 안 돼요. 팔계 씨는 푹 자야 해.”
엄격한 말투로 말하는 산옥이었지만 팔계는 그다지 무서워하는 기색 없이 산옥 손에 깍지를 꼈다. 그가 잠들 때까지 정말 오늘만큼은 곁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는 느릿하게 휘파람을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