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작을 쪼갤 때는 도끼였던 바스타드 소드가 요리할 땐 식칼이 된다. 농장 가축을 괴롭힌다는 마물을 잡아준 보수로 받아온 고깃덩이를 버섯이며 채소와 함께 큼직하게 썰었다. 고기를 먼저 볶다가 기름이 배어 나오면 약간의 향신료와 나머지 재료를 전부 때려 넣고, 타기 전에 물을 넉넉히 부은 다음 한참 끓인다.
"너 요리도 할 줄 알았구나."
"아뇨, 생존을 위해 날것을 익힌 수준이어서요… 별맛은 없습니다."
한꺼번에 삶았을 뿐 레시피도 없는 음식이다. 카즈키 레이지는 확인해 보란 듯 작은 접시에 완성을 앞둔 스튜를 한 국자 덜어 내밀었다. 기노자 노부치카가 받아 몇 번 불어 식힌 다음 단숨에 마신다.
"그렇군."
"죄송합니다진짜로"
기노자는 조금 웃었다.
"농담이다. 맛있어. 일평생 맛본 왕실 주방장의 솜씨보다 나아."
"솔직히 그건 아닙니다만…."
"…그래, 너무 뻔한 거짓말이었나."
동원하는 식재료의 수준부터 천지 차이다. 질 좋은 고기로 식사다운 식사를 하는 게 오랜만이라고는 해도 기노자는 오직 맛과 모양만을 위해 값비싼 재료와 정교한 기술을 총동원한 장인의 예술 같은 결과물을 매 끼니 누리면서 지낸 사람이다. 똑같이 훌륭한 음식을 먹어도 맛있다가 전부인 카즈키와 달리 맛을 느끼고 표현할 줄 아는 폭이 달랐다. 그러니 역으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혹평이 얼마나 세세해질 수 있을지도 대강 알았다.
"그래도 맛있다는 건 정말이다. 이런 것도 괜찮군."
그렇지만 이어진 말은 진심 같아서 카즈키는 뜻밖에 눈을 깜빡인다.
"진짜로요?"
"그래. 마른 빵에 곁들여도 좋겠고."
기노자는 평온하게 국자를 뺏어 들고 휘휘 젓다가―카즈키의 눈에는 괜히 한번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각자의 몫을 덜어낸다. 그리고 빈말이 아니었는지 정말로 제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왕자님은… 이런 노숙 생활도 잘 견디시는군요."
"왜, 곱게 자라 세상 물정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입맛은 비싼 엄살쟁이처럼 굴 줄 알았나."
"조금은."
굳이 부정하지 않는다.
"왕성 밖에서 왕자님을 모셔본 적이 없으니까요. 늘 호화로운 생활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마땅히 그런 대접 속에서 지내셔야 할 분이고."
"나는 그때의 생활양식을 빨리 잊어야 한다고 생각 중이다."
두어 번 고개 젓는 기노자의 눈은 진지했고,
"다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
목소리는 담담했다.
카즈키는 대답하지 않고 오래 생각했다. 원래 말보다 생각이 많은 편이기도 하지만 기노자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복잡해졌다. 온실 속에서 화초가 아닌 심지 단단한 나무로 자라버린 사람은 홀로 어떤 고통을 감내해 온 것일까? 한때 국서였던 왕자의 아버지는 역적으로 몰려 투옥돼 있다고 했다.
왕국을 어지럽게 하는 드래곤을 처치하라.
어머니인 국왕에게서 내려진 명령은 사실상 세력 잃은 왕자를 성에서 추방하는 지시였다. 드래곤과 대적해 이긴 인간은 없으니까. 저항 없이 명을 받들어 칼 한 자루와 말 한 필 그리고 호위 기사인 저를 데리고 나온 왕자는 그럼에도 성실하게 드래곤의 영지를 향했다. 평범한 로브를 덮어쓴 채 마을을 전전할 때마다 형편이 어려운 이들을 돕다 보니 여비는 금세 바닥이 났다. 싸구려 여관은 빈 헛간이 되고 그마저 여의찮을 땐 지금처럼 캠핑했지만 낯설고 불편할 환경 속에서도 불평 한마디 읊지 않았다.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길을 움직여 왔던 거구나.
"……폐하의 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나면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바보 같은 소리인 걸 알잖아. 설령 그렇게 된다 해도 반기지 않으실 거다. 그날로 왕성에 내 자리는 사라진 거야."
계산이 느린 사람이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가 직접 뱉는 체념을 듣는 기분은 또 미묘했다. 어조가 너무 아무렇지 않은 듯하게 들려서 더 그랬다.
"그럼,"
장작 타는 소리가 맴돈다. 밤이 깊어져 가면서 풀벌레 소리가 점점 커졌다.
"평원으로 가면 어떻겠습니까."
"동남부의 대평원?"
"어차피 이 여정에 승산이 없다면… 그리고, 심지어 임무를 완수해도 왕자님의 입지가 달라지지 않는다면. 왕자님께서 그렇게 판단하셨다면 더는 드래곤의 영지를 향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꼭 평원이 아니어도 좋으니… 어디든 살기 좋은 곳으로 떠나시죠. 제가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기노자의 눈빛은 기특한 애견을 보는 듯한 빛을 띤다.
"이리 와, 카즈키."
명운이 끝난 왕자를 떠나지 않는 충견이란 조롱을 자랑으로 듣는 너와, 수없는 암투와 배신자 사이에서 변치 않을 내 편인 너를 길러낸 것이 자랑인 나다. 고분고분 가까워진 녀석의 머리를 끌어당겨 제 어깨에 기대게 한 기노자는 칭찬하듯 머리칼을 헤집어 준다.
"언젠가 그렇게 할게. 당장은 안 돼."
"……."
"드래곤과의 접경지에서 문제가 심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니 확인해 봐야지. 국왕 폐하의 명 때문만이 아니라, 고통받는 평민들을 아는데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서 그래. 싸워서 승리할 순 없겠지만 최소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하니까."
"……."
"같이 위험을 무릅쓰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아뇨, 사과하실 일이 아닙니다. 제 목숨은 왕자님 몫입니다."
전쟁포로로 잡혀 와 죽음을 앞둔 저를 빼돌려 검술부터 궁술, 마법, 그리고 기사로서의 법도까지 모든 것을 직접 가르친 왕자였다. 은인 이상으로 제 삶의 주인은 이 남자뿐이고 저에 대한 모든 권리가 그에게 있다고 카즈키는 믿었다. 그렇지만 이토록 고결한 정신을 지닌 주인이 안락한 둥지를 잃었음에도 의연하다는 사실은 어쩔 수 없이 가엾고 애틋했다. 기댄 어깨에 뺨을 비비면 오히려 그쪽에서 위로하듯 부드러운 목소리를 낸다.
"모든 일이 끝나면 네 말대로 여러 곳을 돌아볼까. 평원이나, 북방의 설원도 예전부터 궁금하더군. 아니면 다른 나라도 좋아."
"……."
"어딘가엔 요정이 사는 숲이 있다고 하는데, 궁금하지. 내내 대륙에서 살았으니 바다로 나서는 것도 좋을까."
"여기가 요정 숲 아닙니까? 당신이라는 요정이 있는데……."
"내가 간신을 키웠나……."
기노자가 쓸어주던 머리칼 위로 가벼운 딱밤을 놓았다. 그래도 조금 웃었다. 하녀가 내려 온 따뜻한 차도 깃털을 채운 베개도 없는 생활. 그러나 바람 앞 등불처럼 목숨이 위태로운 왕실에서 날을 세우고 늘 예민해져 있던 때에 비하면 조금씩 장난을 걸어오는 카즈키도, 기노자 자신도 마음은 더 여유로워졌다.
"오히려 이제야 맞는 옷을 입었다는 생각도 들어. 그러니 앞으로도,"
그런 표정으로 슬퍼하지 마. 나는 추락을 통해 네게 더 가까워졌지.
"잘 따라오면서 헛소리나 계속하도록."
턱을 쥐고 들어 눈을 마주친다. 물끄러미 그 표정을 살피고 있으면 생각 많은 녀석은 다시 진지한 얼굴이 됐다. 서임하던 날처럼 쏟아지는 달빛. 타오르는 불꽃과 나직한 맹세. 잘 길든 개는 주인이 제게 바라는 것을 정확히 안다.
"말씀하신 모든 곳에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왕자님의 안위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겁니다. 설령 왕자님이 더는 왕자가 아니게 되셔도, 제가 당신의 기사가 아니게 될 일은 없습니다."
그리고 내 세상 전부를 당신께 드리겠어요. 변하지 않을 충정 앞에서 그만의 주군은 옅은 미소를 띤다. 이어지는 말은 이번에도 진심이었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