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니엘라가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정신이 드십니까!”
“여기 아까 쓰러졌던 일반인이 정신을 차렸습니다!”
다니엘라는 혼미한 정신을 부여잡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눈뜨자마자 본 희어멀건한 천장은 제대로 된 건물이 아니라 천막이었다. 그마저도 사방이 뻥 뚫려있었는데, 아마도 어떠한 목적에 의해 임시로 만들어진 공간 같았다. 천막 안팎으론 엉망이었다. 자기처럼 누워있는 사람들이 한가득이었고 그 사람들 사이로 주황색의 괴상한 옷을 입은 사람들이 뛰어다녔다. 들고 다니는 물건들을 보아하니 의료를 담당하는 사람들로 추정되었다.
“환자분, 불편한 곳이 있으십니까?”
지금 이 상황.
다니엘라는 자연스럽게 열리려는 입을 다물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손끝에 거칠거칠한 직물이 닿았다. 주황색 괴상한 옷을 입은 의료원은 머리에 거즈가 붙어있다며 조심하라고 했다. 뒤에서 부르는 누군가의 말에 급하게 가버렸다.
다니엘라는 얼굴을 한껏 구기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큰 사고가 일어난 것 같은데 마법을 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가 머글들의 사고에 휘말리기라도 한 건가? 자신이 정신을 잃기 직전에 뭘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으니 그랬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환자들이 계속 밀려드는 중인데 머리만 조금 지끈거리고 자신이 누워있을 수는 없었다. 나가서 순간이동을 할 수 있을법한 장소를 찾겠다고 생각한 다니엘라는 바깥으로 나가자마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외벽이 유리로 된 아주 높은 건물들,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의 자동차들. 머글들 사이에서 생활해본 경험으로 생각했을 때, 저런 생소한 생김새는 어색했다. 머글들의 유행과 발전이 빠른걸 감안해도 저런 모양들은 ‘과학적’으로도 아직 불가능해 보였다.
아니, 사실 주변 환경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별로 중요치 않았다. 저 멀리에서 날뛰는 마법생물들과 그걸 저지하려고 달려드는, 마법사들?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1(그림).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0a080d099a334482b54390f96bd0cf26~mv2.png/v1/fill/w_800,h_80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1(%EA%B7%B8%EB%A6%BC).png)
“……저런 마법이 있던가?”
맨몸으로 마법생물-사실 마법생물이 맞는지도 알 수 없었다. 다니엘라의 지식 속에 없는 생물이었으므로.-의 꼬리를 낚아채 바닥에 메다꽂는 사람을 바라보며 다니엘라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마법, 아니 저런 식으로 발현되는 마법을 본 적이 없었다. 신체를 강화하는 마법물약이라도 마신 걸까? 알고 있는 마법 물약 종류를 떠올리는 다니엘라 앞에 반투명한 사각형이 떠올랐다.
[당연히 아니죠!]
[당신은 현대판타지 세계선의 본인에게 빙의된 거랍니다!]
[저는 위자딩월드 세계선에서 온 당신에게 도움을 줄 시스템, 레리라고 해요! :D]
다니엘라는 당황스러워하며 드물게 ‘시스템?’하고 중얼거렸다. 그 말에 지나가던 의료원이 걸음을 멈췄다.
“시스템 상태창이 보이십니까? 각성하셨나 보군요.”
각성은 또 뭐야.
[레리가 다 설명,]
[아니다! 설정 다운로드해드릴게요!]
[충격에 주의해주세요! :D]
“충격이라니 대체.”
다니엘라는 그 말과 함께 정신을 잃었다.
또다시 낯선 천장이었다. 물결무늬가 그려져 있는 천장 타일을 보며 눈을 굴리던 다니엘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레리인지 뭔지 하는 ‘상태창’이 머리에 쑤셔 박은 기억 때문에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환자분, 정신 차리셨어요?”
그리고 병원이란 공간은 생각 정리에 별로 좋지 못했다. 온갖 질문과 검사를 끝낸 후에야 담당 의사는 당장 퇴원해도 되는 상태지만 혹시 모르니 하루 정도 더 입원해보자고 했고, 다니엘라는 동의했다.
병실에 홀로 남은 다니엘라는 몸을 침대에 뉘었다. 타이밍을 잡고 있었는지 ‘레리’가 띠링하고 귀여운 소리를 내며 나타났다.
[현대판타지 세계선의 ‘다니엘라 할로웨이’의 기억은 제대로 내려받으셨나요?]
다니엘라는 속으로 욕이 섞인 긍정을 내뱉었다.
다니엘라가 받은 기억은 말 그대로 원래 몸 주인의 기억이었다. 마법이 없었던 세상-마치 머글들만 있는 세상처럼-, 발전하는 과학, 그리고 갑작스러운 재해처럼 일어난 던전 사태, 그와 동시에 힘을 각성한 헌터들……. 결과적으로 아까 다니엘라가 보고 마법이 맞나 의심하던 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맞아요! 그건 마법이 아니라 각성 능력이랍니다!]
레리가 경쾌한 문체로 설명을 이어갔다. 이 세계선의 다니엘라님은 원래 그 사고로 각성을 하게 될 예정이었는데 무언가 문제가 생겨서 다른 세계선의 당신이 빙의 되고 말아버린 거죠! 이곳에는 당신이 사용하는 마법이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다니엘라는 새로운 기억을 더듬으며 레리의 문장-문장마다 느낌표가 찍혀있는 것을 보니 글자일 뿐인데도 너무 소란스럽게 느껴졌다.-을 읽었다. 기억을 더듬는 도중에 가족에 대한 기억이 떠오르자 그녀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무래도 이 세계선의 자신도 가족관계는 별로인 것 같다.
[걱정 마세요. 이곳의 다니엘라님은 법적으로 혈연들과 완전히 남남이 되었거든요.]
[지금 상황은 다니엘라님이 이곳에 적응하기에 딱 좋은 상황이랍니다! :D]
레리는 그 문장 이후에 새로운 창을 띄웠다.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2(상태창).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b5251397afd74442b336135392b6f8f5~mv2.png/v1/fill/w_800,h_64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2(%EC%83%81%ED%83%9C%EC%B0%BD).png)
이건 또 뭐야.
[퀘스트에요! 다니엘라님의 적응을 위해 레리가 열심히 노력할게요!]
아니야, 필요 없어. 다니엘라는 손등으로 눈을 가렸다.
다니엘라는 퇴원을 하자마자 각성자 등록센터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다운로드’ 받은 기억 덕에 서류 절차는 그리 어렵진 않았다. 시야를 계속 방해하는 레리도 제법 도움이 되었다. 다만 위자딩월드 기반 드림주가 현대판타지에 빙의 된 게 신기하다는 둥, 자기가 요즘 조X라나 포X타입을 잘 안 봐서 이런 소재가 유행 중인지 모르겠다는 둥, 영문 모를 이야기를 할 때는 좀 짜증스러웠지만.
각성 등급은 A.
제법 높은 등급인지 각성 등록센터가 시끄러워졌다. 각성 등록을 도와주던 센터 직원은 담당자를 불러오겠다며 다니엘라를 상담실처럼 생긴 곳에 남겨두고 급하게 나가버렸다. 다니엘라는 A급 각성자가 어느 정도의 위치인지 기억을 되새기다가 D등급 이상의 각성자는 무조건 헌터 등록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퀘스트에선 헌터가 되는 것까지가 목표였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들리며 방 안으로 사람이 들어왔다.
“많이 기다리셨나요?”
익숙한 목소리에 다니엘라는 숨을 삼켰다. 잘 세팅된 까만 머리, 한번 보면 쉬이 잊을 수 없을 만큼 잘생긴 외모, 친절을 가장하고 있으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눈.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다니엘라의 맞은편에 앉아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다니엘라 할로웨이씨 맞으시죠? 톰 리들이라고 합니다.”
“……반갑군요.”
다니엘라는 건네어진 손을 살짝 잡았다가 금방 놨다. 짧은 악수에 리들은 슬쩍 다니엘라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어봤다가 시선을 거뒀다. 다니엘라는 리들이 자신을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왜 얘가 여기 있지?
다니엘라는 자신의 연인와 똑같이 생긴-세계선만 제외하자면 동일 인물이라고 봐야겠지만-존재를 찬찬히 살폈다.
[인물정보를 띄워드릴까요?]
지금 당장.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3(상태창).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ec9a979807084b7f9ff4f5a2d96a0446~mv2.png/v1/fill/w_800,h_64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3(%EC%83%81%ED%83%9C%EC%B0%BD).png)
하나같이 정상적인 내용이 없는 정보에 다니엘라는 시선을 올려 리들을 바라봤다. 인물정보와는 전혀 다르게 짐짓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다니엘라는 리들이 다소 지루해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톰님은 다니엘라님에게 중요한 존재라 보여드릴 수 있답니다. 원래는 다른 사람의 정보를 볼 수 없다는 걸 알아주세요!]
[그리고 이 사람은 아주 위험한 사람이에요…….]
[다니엘라님의 세계선에선 무척이나 평화롭게 지나가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아주 위험한 사람이라구요!]
사악하고 무정하며 위대한 존재들은 대체 뭐야?
다니엘라는 강한 힘을 주장하던 연인의 학창 시절의 모습을 떠올렸다. 밤마다 함께 기숙사를 빠져나와 위험한 마법에 관해 연구했던 기억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사춘기를 좀 격하게 겪었지.
[다니엘라님도 만만찮게 위험하신 분이군요 :(]
다니엘라는 레리의 문장을 무시하고 리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무적인 이야기들이 흘러갔다. 서류 몇 장에 서명하고, 다시 설명을 듣고. 다니엘라가 슬슬 지겨움을 느낄 즈음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왔다.
“이제 막 각성한 헌터들에게는 빠른 적응을 위해 멘토가 배정됩니다. 할로웨이씨의 경우에는 제가 멘토로 배정되었습니다.”
“멘토요?”
“네.”
이것저것 설명이 따라왔지만, 멘토와 멘티는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간 거의 붙어서 생활해야 한다는 내용이 주였다. 다니엘라는 레리가 계속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이쪽 세계선의 리들과 제법 오랜 기간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이 득인지 실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헌터가 되신걸 축하드립니다, 할로웨이 헌터.”
리들이 손을 내밀었다. 그 거미처럼 길쭉한 손을 바라보던 다니엘라는 익숙하게 그 손을 마주잡았다. 하긴 다니엘라는 리들이 내미는 게 득이든, 실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자신의 가치관에 어긋나지 않다면 받아들일 수 있었다.
[퀘스트 완료!]
레리는 진지한 감상에 빠질 시간을 주지 않았다. [보상은 인벤토리에 넣어놨어요!]라는 문장과 함께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니엘라는 자리를 정리하고 방을 나서는 리들을 따라가며 인벤토리를 열어보다 발걸음을 멈췄다. 리들은 뒤에서 다니엘라가 무언가 말하는 걸 들은 것 같아 뒤를 돌아봤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니요.”
다니엘라는 살짝 돌아간 의자의 위치를 바로잡은 후, 리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각성 능력 훈련은 천천히 한다고 했지만, 다니엘라로서는 마냥 훈련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리들을 믿을 수 없었고,-다니엘라가 리들을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는 그의 가치관이나 인성을 그다지 믿지 않았다.- 새로운 퀘스트가 나타나기도 했다.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4(상태창).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e27551c1396546c7b6bdf072f0bba5f3~mv2.png/v1/fill/w_800,h_64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4(%EC%83%81%ED%83%9C%EC%B0%BD).png)
퀘스트 창에 대해서 할 말이 많았다.
우선, 좋은 점은 다니엘라의 각성 능력이 마법이며 이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다니엘라는 계속 마법을 시도했다. 퀘스트의 보상으로 지팡이를 적어놨다는 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병원에서 각성자 등록센터로 가는 길에 사용했던 간단한 주문들은 사용되지 않았고, 레리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라는 문장만 반복될 뿐이었다. 머글들 사이에 섞여서 살 때도 마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지만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 것과 아예 할 수 없는 건 큰 차이라는 걸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퀘스트 완료 후, 사용한 간단한 주문에는 의자가 충분히 움직였다. 지팡이 없이 사용한 마법이라 위력은 떨어졌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이상한 점은 보상과 페널티였다. ‘사악하고 무정하며 위대한 존재들’은 리들의 인물정보에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도저히 뭔지 알 수 없었다.
[초자연적이고 압도적인 존재들이죠. 일반적으로는 그 존재들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망가지고 말아요! :( ]
다니엘라는 잘못 다루면 미치거나, 심하면 사망에 이르는 몇몇 마법들이나 마법 생물들을 떠올렸다. 근데 그걸 이용하는 것도 아니고 ‘힘을 빌려’ 쓴다고? 다니엘라는 리들의 성정상 그게 가능할지 의문이었다. 빌린다는 건 개념이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지. 다니엘라가 사고가 흘러갈수록 레리는 네모난 창을 깜박거리며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아무튼! 너무 관심을 가지지 마세요!!! 위험하다구요!!!!!]
[100m 앞에 미확인 던전 확인!]
다니엘라는 생각을 멈췄다. 멀지 않은 곳에 허공에 떠 있는 시꺼먼 구멍이 보였다. 퀘스트 완료를 위해 레리가 찾아준 미확인 던전이었다. 이제 막 각성한 헌터들은 원래 함부로 던전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지? 다니엘라는 던전 쪽으로 천천히 다가가며 인벤토리 안에서 지팡이를 꺼냈다. 익숙한 촉감이 손에 감기자 기분이 고양되었다. 최근에는 제법 얌전히 살고 있었으나 그녀는 미지에 대한 탐구를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다. 안에 뭐가 있으려나.
[안에 들어가기 전까진 레리도 알 수 없어요. :( ]
뭐, 어쩔 수 없지. 다니엘라는 어깨를 으쓱하며 던전 입구로 들어갔다. 마치 플루가루 네트워크를 사용할 때와 비슷한 느낌이 느껴지고 막혔던 시야가 금방 트였다.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5(상태창).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999b42051954461c8cba00b7e4403dfc~mv2.png/v1/fill/w_800,h_64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5(%EC%83%81%ED%83%9C%EC%B0%BD).png)
다니엘라는 읽을 수 없는 사각형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현대판타지의 다니엘라’의 기억을 살펴봤을 때, 저런 문자는 적용되는 글자가 없는 경우에 ‘깨져서’ 나오는 결과물이다.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레리를 책망하자 레리가 다급하게 창을 띄웠다.
[저, 저건 어쩔 수 없어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텍스트여서 깨지는 거라서!]
[그리고 저 언어를 제대로 보게 되면 인간은 정신이 망가진다구요, 흑흑!]
다니엘라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레리가 주절주절 창 띄우는걸. 무시하곤 주변을 둘러봤다.
부서지고 무너져있었지만 아마 성의 로비와 같은 곳으로 보였다. 위로 올라가는 계단 중 오른쪽은 무너져서 그 구실을 하지 못했고, 가구나 조각상이 있을 만한 자리들은 비어있었다. 그리고 바닥과 벽엔 핏자국이 드문드문 보였다. 몬스터-던전에서 출몰하는 마법 생물 같은 존재들을 이곳에선 그렇게 불렀다.-가 보이진 않았지만 몬스터가 없는 던전은 없다고 했으니 분명 어딘가에 있으리라. 다니엘라는 성의 출입문을 열려고 시도해봤지만 움직이지 않았다. 레리가 실내형 던전은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며 짤막하게 알려줬다.
그대로 성의 깊숙이 들어갈 수도 있었으나 다니엘라는 좀 더 신중해져 보기로 했다.
“리벨리오.”
짤막한 주문과 함께 지팡이를 휘두르자 숨겨진 것들이 다니엘라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계단 잔해 뒤에 있는 작은 쥐들, 위층에서 움직이는 몬스터들, 왼쪽 통로 너머 사각지대에 숨어있는 인간의 형체…….
인간?
미확인 던전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직전이 아닌 이상 함부로 들어가지 않고 꼭 헌터 센터에 신고부터 해야 한다고 했다. 제대로 신고하지 않고 들어가면 작게는 벌금, 크게는 징역형까지 살 수 있으며, 미확인 던전에 들어가는 인물들을 주로 범죄자거나 구린 짓을 하기 위함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물론 자신도 미확인 던전 안에 들어와 있긴 하지만.
사실 저기에 있는 사람이 범죄자가 아니라 해도 제압할 필요는 있었다. 다니엘라도 미확인 던전에 불법으로 들어와 있는 처지였으니까. 퀘스트 때문이라곤 하지만 그걸 이해해줄 것 같진 않았다.
다니엘라는 생각을 끝내고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빠르게 제압하는 게 중요했다. 아직 남아있는 리벨리오의 잔상을 떠올리며 다니엘라는 통로의 사각지대가 보일만 한 곳으로 단숨에 뛰었다. 그리고 경계하고 있는 상대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외쳤다.
“스튜페파이!”
[으악! 그 사람 톰님이에요!]
레리의 창이 다니엘라의 시야를 메우기 전에 이미 마법은 날아간 후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리들은 기절하지 않았다. 방어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던 덕이었다. 리들은 미확인 던전에서 사람을 공격해놓고도 태연해 보이는 신입 헌터를 어찌할까 고민이 되었다.
말없이 다니엘라가 손을 건넸다. 리들은 잠시 고민했지만 금방 잡고 일어났다. 옷에 먼지를 털어내던 리들은 다니엘라를 슬쩍 쳐다봤다.
“미확인 던전에 대하여 제가 설명이 부족했나요?”
“신고하려다가 발을 헛디뎌서 잘못 들어왔어요.”
리들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삼켰다. 성의 없는 핑계다. 이제 막 각성한 사람치고 각성 능력 사용하는데 지나치게 능숙하다. 아니, 각성 능력뿐만 아니었다. 움직임 자체가 전투해본 사람이었다. 조사해봤을 때, 다니엘라 할로웨이는 제법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으나 전투와는 관련이 없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고? 차라리 각성한 지 오래되었지만 내내 미등록 각성자로 활동했다는 편이 믿기 쉬웠다.
리들은 다니엘라 손에 들려있는 막대기-아마도 마법 지팡이로 추정되는-를 경계하며 미소 지었다.
“각성 능력 사용이 능숙하시네요.”
“멘토님께선 미확인 던전에 어쩐 일이세요?”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다. 일부러 그러는 기색이 역력했다. 곤란한 이야기는 피차 하지 말자는 걸까. 리들은 잠시 침묵했다. 다니엘라를 지금 제압할 수도 있겠지만 피해가 어느정도 일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저 신입헌터의 각성 능력은 ‘마법’. 불, 물, 바람 등과 같은 다른 능력들에 비해 포괄적으로 활용할 수 있으나 위력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으며 등급이 아무리 높아도 B를 넘기지 못한다. 베테랑 헌터들 조차도 자신의 각성 능력이 마법이면 완벽하게 이해하고 활용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리들도 헌터 임무를 다니며 마법을 사용하는 헌터는 단 한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 헌터는 아주 긴 마법 주문을 사용해 던전을 탐색하고는 금방 나가떨어졌었지. 그럴 바엔 탐색 능력을 가진 헌터를 고용하는 편이 경제적일 터였다.
하지만 조금 전의 다니엘라 읊은 주문은 짧았고, 단시간 안에 마법을 2가지를 사용했다. 아마 무언가가 훑고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첫 번째 마법은 탐색 마법이었을 것이고, 자신에게 사용한 두 번째 마법은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마법이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마법이 아니라.
이젠 만성이 된 왼팔의 통증이 느껴졌다. 리들은 익숙한 고통을 무시하며 멀끔한 미소를 가장했다. 이 여성은 미인계가 통할만 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았지만 호의적인 분위기를 형성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던전에서 나가는 법은 알려드렸었죠?”
“탈출석을 사용하거나,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고 하셨죠.”
다니엘라는 낮에 리들에게 들은 던전에 대한 교육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복도 너머로 갉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탈출석이 하나 있습니다만, 먼저 탈출하시겠습니까?”
다니엘라는 뚱한 표정을 지으며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피차 목적을 가지고 몰래 미확인 던전에 들어와 놓고 저게 무슨 소리인지.
이윽고 몬스터 몇 마리가 나타났다. 정확히는 시체가 움직이고 있었다. 갉작거리는 소리는 저들이 손과 발로 복도의 카펫을 긁으며 난 소리였다.
“던전에서 나가실 생각은 없어 보이시는군요.”
“예, 뭐.”
리들이 손을 들어 허공을 가르듯 휘두르자 하얀 빛무리가 몬스터들을 갈랐다. 다니엘라는 생경한 광경에 오,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확실히 자신이 사용하는 마법과는 달랐다. 그것과는 별개로 다니엘라는 반으로 갈린 살아있는 시체들을 보며 의아해했다. 인페리우스들이 저 정도로 파괴되진 않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시체들이 계속 기어 왔다.
“일반적인 좀비는 이 정도면 행동 불능일 텐데…….”
리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다니엘라는 좀비가 아니라 인페리우스라고 이야기할까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이곳엔 인페리우스가 일반적이지 않을지도 모르지. 시체들은 이제 리들과 다니엘라의 코앞에 있었다. 다니엘라는 지팡이를 휘둘러 시체들을 불태웠다. 시체들은 더는 움직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정말 이제 막 각성한 게 맞습니까?”
“네.”
다니엘라는 뻔뻔하게 대답했다. 리들은 눈을 가늘게 떴지만 더 이상 추궁은 하지 않았다. 따지고 든다면 끝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라.
둘은 서로 사담 없이 던전을 공략했다. 얼마나 말이 없었냐면, 레리가 [정말 이렇게까지 말이 없어야 하는 거예요……?]하고 물어볼 정도였다. 간간이 던전 공략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지만,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였다. 던전의 몬스터들은 전부 언데드 계열이었다. 다니엘라는 다소 지긋지긋하다는 태도로 인센디오를 날렸다.
“잠시.”
리들이 팔을 뻗어 다니엘라는 막았다. 리들은 아까보다 상태가 나빠 보였다.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그렇고, 왼쪽 팔의 움직임이 어색한 것도 이상했다.
“왼팔에 뭔가 있는 거죠.”
단정적인 다니엘라의 말에도 리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다니엘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리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리들은 왼팔을 주물렀다.
“이 던전에 온 이유라고만 해두죠.”
다니엘라는 자신들이 있는 장소를 둘러봤다.
서재, 아니 규모는 도서관에 가까웠다. 높이 올라간 책장들과 빼곡하게 채워진 책들. 으슥한 먼지의 향이 느껴지는 장소. 다니엘라는 다시금 리들을 쳐다봤다. 소리 없는 의문에 리들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책 중 하나 일 겁니다.”
“특정할 수 있어요?”
“…….”
다니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많은 책 사이에서 제목도 모르는 책을 어떻게 찾는담. 이러다 바깥에서 이 미확인 던전을 다른 사람이 발견하고 신고하는 게 더 빠르겠네. 다니엘라는 속으로 툴툴거렸다.
[제가 찾아드릴 수 있어요!]
네가? 다니엘라는 레리의 문장을 보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수로?
[자세하게 말씀을 드리진 못하지만 톰님이 뭘 찾으려고 하는지는 알 수 있으니까요!]
[저니까 알려드릴 수 있는 거예요! 다른 상태창들은 절대 못 하는 일이랍니다! :D]
묘하게 으스대는 말투였다. 다니엘라는 책의 제목을 알려달라고 했다. 제목만 안다면 금방 가져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레리는 [제목조차 위험해서 알려드릴 수 없어요!]라며 거부했다. 책의 제목조차 알면 안 된다면서 책은 어떻게 찾게 해준다는 건지. 다니엘라는 다소 의문을 가진 채로 레리가 알려주는 대로 책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금방 레리가 어떻게 ‘안전하게’ 다니엘라가 책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책이 모자이크되어서 보였다.
모자이크가 맞나? 다니엘라는 의문을 가지며 기억을 뒤지다 확신했다. 모자이크라는 표현이 맞군. 대체 어떻게 현실에서 모자이크된 시야를 구현한 거지? 다니엘라는 레리의 능력(?)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 아무튼 레리가 표시해 준 바에 따르면 이 책이 맞는 듯했다.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6(상태창).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c9d6ca00a42d40ae8350e365d53b2196~mv2.png/v1/fill/w_800,h_64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6(%EC%83%81%ED%83%9C%EC%B0%BD).png)
대부분 책에 대한 정보창도 읽을 수 없었지만, 책을 펼쳐도 비슷했다. 아니, 정보창보다도 훨씬 심했다. 모자이크로 인해서 그 어떤 것도 구분할 수 없었으니까. 다니엘라는 레리에게 짜증을 느껴야 하는 건지 자신의 정신건강을 염려하는 레리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지 다소 헷갈렸다. 다니엘라는 다른 책들을 쳐다보고 있는 리들에게 다가갔다. 리들의 컨디션은 아까보다도 훨씬 나빠 보였다. 책들을 확인 할 때마다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듯했다.
“……괜찮아요?”
리들은 자신의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도 창백해 보이는 피부가 하얗게 질린 상태였다. 다니엘라는 마법이라도 써줘야 하나를 고민하며 책을 건넸다.
“이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확인 좀 해봐요.”
“감사합니다.”
리들은 그닥 기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로 책을 집어 들고 훑기 시작했다. 그리곤 이내 책의 내용에 급격하게 집중했다. 한참을 책을 살피던 리들은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는 다소 희열에 찬 상태였다.
이 책은 그냥 찾아낼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고대의, 어쩌면 그것보다도 오래된 외계의 존재들에 대항할 수 있는 지식이다. 일반적인 인간들이 찾아낼 수 없는 암시가 걸려있어 인식조차 제대로 하기 힘들다. 사실, 찾아낸 후에도 문제였다.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뜻이 인간들에게 우호적이라는 뜻은 아니므로.
그래, 그만큼 상태가 나빴다. 차라리 절단하는 것을 고려할 정도로. 리들은 떨리는 왼팔로 책을 덮었다. 리들은 시선을 다니엘라에게 고정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이 책을 찾아낸 것일까. 겉으로 보기엔 특별할 게 없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 뚱한 표정, 무심해 보이는 보라색 눈, 한쪽 눈을 가린 게 좀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던전이 생겨난 이후로 저 정도는 그리 특별하진 않았다. ‘그들’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을 사용하지.
어쩌면 그게 마법이 아니라 ‘주술’일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하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찾아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녀는 이 책에 걸린 암시를 꿰뚫어 보고, 책의 내용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주술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당신도 ‘그들’에게 능력을 받았군.”
리들은 드물게 활짝 웃었다. 누군가가 보이겐 제법 기묘한 표정이었다.
와, 저 표정. 학생 때 이후로 본 적 없는데.
다니엘라는 리들이 안 좋은 의미로 기뻐하는 표정-그녀는 이것 외에 다른 표현을 찾지 못했다.-을 지으며 ‘주술’과 ‘그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정확히는 레리가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방해했다고 하는 게 맞겠다. 중간중간 소리가 빠진 것처럼 들리는 통에 내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대충 들리는 이야기로 보아 리들은 다니엘라 또한 ‘사악하고 무정하며 위대한 존재들’의 힘을 빌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로의 목적이 맞는다면 그들의 눈을 피해 서로 협력하자는 이야기다. 다니엘라는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 다른 세계의 마법사여서 이곳과 다른 마법을 사용할 줄 아는 거지 네가 말하는 ‘사악하고 무정하며 위대한 존재들’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이야기 했을 때 리들은 과연 믿을 것인가. 다니엘라는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나 리들은 다니엘라의 표정에서 부정을 느꼈나 보다.
“나에게 협조할 생각이 없나 보군.”
[위험! 위험! 톰님이 사악하고 무정하며 위대한 존재들에게 받은 능력을 쓰려고 해요!]
“뭘 알고 있지? 나한테 협조할 순 없어?”
다니엘라는 리들이 자신과 눈을 마주치자 본능적으로 오클루먼시를 시전했다.
“난 아무것도 몰라.”
사실 이 정도는 오클루먼시를 사용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말이긴 했다. 그야 이게 사실이니까! 다니엘라는 머릿속을 파고들어 오는 듯한 느낌을 막아내며 리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적어도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오는 등, 복잡한 부분에 대해 들키고 싶진 않았다.
[헐, 다니엘라님 정신계열 능력을 방어하는 능력도 있으시네요? :o ]
레리의 문장을 보니 제대로 방어했나 보다. 원래 살던 곳의 리들만큼이나 이곳의 리들도 레질리먼시, 혹은 그것과 비슷한 이곳의 능력을 잘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레리의 문장에 따르면 그 능력은 각성 능력이 아니라 사악하고 어쩌구 놈들에게 받은 능력이고. 다니엘라는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들을 정리하며 다소 피로감을 느꼈다. 리들은 한참을 다니엘라의 눈을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확신할 수 없지만 넌 내 능력을 방어할 수 있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리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다소 언짢은-혹은 분노- 눈빛으로 변해있었다.
“네가 날 도울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한 것 같네.”
이런 극단적인 새끼. 다니엘라는 급격한 감정변화를 보이는 리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잠깐 생각했으나 금방 그 고민은 필요 없어졌다.
몬스터들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비상!!!!!!!!!!!! 비상!!!!!!!!!!!!!!!!!!!!!!! 몬스터가 몰려와요!!!!!!!!!!!!!!!!!! 언데드!!!!!!!!!!!!!!!!!!!!]
레리의 느낌표가 난무하는 문장이 눈앞을 뒤덮자마자 다니엘라는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도서관 입구 쪽에서 수없이 갉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일단 나중에 얘기해 지금은 몬스터 잡는데 먼저야.”
다니엘라가 리들을 쳐다보자 리들이 휘청거리는게 보였다. 아니 왜? 방금 전까지 날 원망하던 놈은 어디 가고?
[팔 때문에 이미 상태가 나빴는데 정신능력을 쓰면서 지쳤나 봐요. :( ]
다니엘라는 지팡이를 들지 않은 왼손으로 리들을 부축했다. 자기보다 한 뼘은 더 큰 성인 남성을 한 손으로 제대로 지탱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뭐야, 가볍네? 다니엘라는 각성을 하면 기본 근력도 일반인들과 달라진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리들은 다니엘라에게 제대로 기대지 않았으나 그 손길을 거부하진 않았다.
“날 놓고 가지 않은 것에 대한 칭찬이라도 해줄까?”
“또 한 번만 비아냥대면 그냥 마법으로 들어 올려버릴 거니까 조용히 해.”
다니엘라는 도서관 입구 쪽을 경계한 채로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도 도서관에는 뒷문이 있었다. 다니엘라는 리들을 끌고 뒷문 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몬스터들이 도서관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숫자가 어찌나 많은지 파도 몰려드는 것처럼 보였다. 언데드의 썩은 냄새가 풍기자 다니엘라는 인상을 구겼다.
“언데드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능력은 없나 보지?”
“넌 할 줄 알아?”
“정신계열 능력의 파편밖에 받지 못했는데 그들의 수족을 다룰 능력을 받았을 리 없지.”
리들이 자조적으로 내뱉었다. 다니엘라는 묵묵히 뒷문 바깥으로 리들을 내팽개쳤다. 리들이 넘어지며 신음소리를 냈다. 다니엘라는 몰려드는 언데드들을 바라보다 책장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처음 도서관에 들어왔을 때부터 느꼈지만 이곳의 책장들은 다소 불안정하게 고정돼있었다. 마법이 걸려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 간단하지. 다니엘라는 불안정한 책장 하나를 지팡이로 겨눴다.
“봄바르다.”

폭발이 일어났다.
책장이 터지는 것은 물론이고, 불붙은 파편들이 이리저리 튀며 불이 옮겨붙었다. 무엇보다 터진 책장이 다른 책장들로 연쇄적으로 넘어지며 도미노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책장에 언데드들이 깔려 불타올랐다. 살갗이 그을리는 냄새가 났다. 다니엘라는 폭발과 책장을 기적적으로 피한 언데드들에게 인센디오를 날리고 있었다.
[헐;]
레리가 짧은 감탄사를 남겼고, 리들은 불타는 도서관을 바라보며 할 말을 잃었다.
다니엘라는 미끄러져 내리는 리들을 추슬러 올렸다.
“왼쪽 팔 통증이 그렇게 심하면 그냥 여기서 해결할 순 없어?”
“……재료가 부족해.”
리들의 목소리에서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아마도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수치심이나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에서 오는 짜증이리라. 다니엘라는 계속 복도를 걸었다. 도서관이 파괴된 것과 별개로 던전은 여전히 공략되지 않았다. 다니엘라는 진심으로 리들을 마법으로 들어 올리고 싶었으나 다소 피곤한 상태여서 자칫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떨어뜨릴까 봐 걱정되었으므로 묵묵히 부축 중이었다.
리들에게 탈출석 사용을 권했으나 리들은 거부했다. 이유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그, 그래도 자잘한 몬스터들은 아까 다 처리됐고, 보스 몬스터는 곧 나올 거예요! :D]
다니엘라는 레리의 문장을 흘긋 보고는 리들을 다시 추슬렀다. 리들의 식은땀으로 축축해진 옷가지에 다니엘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좀 쉬었다 가자.”
“…….”
도서관이 불타고 난 이후부터 리들은 심기가 나빠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레질리먼시-그것과는 다른 정신계열 능력이라고 했지만-를 사용하려다 실패한 이후로부터 쭉 그랬다. 다니엘라는 리들을 벽에 기대게 하고는 레리가 띄워준 지도창을 바라봤다. 성 구조에 마법이 걸린 게 아니라면 제법 기형적인 구조였다. 이 아무것도 없이 길게 이어진 복도 끝에 보스 몬스터가 있다고. 다니엘라는 지도를 곰곰이 살피다 문득 입을 열었다.
“이 안에 들어온 지 제법 된 것 같은데 아무도 미확인 던전 신고를 안 했을까?”
[여긴 톰님과 다니엘라님만 인식할 수 있어요!]
“여긴 정상적인 던전이 아니야.”
레리와 리들에게서 동시에 답이 튀어나왔다. 다니엘라는 의문을 가지고 리들과 레리의 창을 번갈아 가며 살폈다. 리들은 자신의 상태창을 보는지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여긴 ‘그들’에 관한 정보를 찾기 위해서 내가 직접 연 미확인 던전이야.”
왼팔을 주무르는 모습이 성말랐다.
“‘그들’과 관련이 있지 않다면 인식조차 못 할 던전이지. 직접 연 당사자는 탈출석을 사용해도 바깥으로 나가지 못할 만큼 악랄한 곳이야.”
하지만 넌 이 던전을 찾아냈어. 리들은 속삭이듯 말했다. 다니엘라는 자신에게 꽂히는 리들의 시선을 피했다. 피한 곳에는 레리의 창이 바들바들 진동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레리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 ]라고 적혀있는 창을 보며 다니엘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리들이 휘청거리며 일어나자 다니엘라는 급하게 리들을 부축했다. 리들은 자신을 받치는 다니엘라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가까워진 얼굴에 다니엘라는 고개를 살짝 뒤로 뺐다. 머릿속을 무언가가 헤집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느껴지자마자 오클루먼시를 다시 시전했다. 아니, 얘는 레질리먼시 쓰고 상태가 이 모양이 됐으면서 또 저 능력을?
“나한테 협조해. 제발.”
악에 찬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나도 협력할 테니, 너도 부디 나한테 협력하라고.”
애절해 보이기까지 한 리들의 눈빛을 보며 다니엘라는 감탄했다. 다니엘라는 언제나 리들의 얼굴에 한없이 약한 편이었다. 호그와트 입학식 때 보고 첫눈에 반해 지금까지 온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다니엘라는 숨을 들이마시며 리들의 뺨을 손으로 감쌌다.
“네가 남의 목적에 끌려다니는 걸 믿을 바엔 네가 갑자기 코 없는 대머리가 되는 게 더 믿기 쉽겠어.”
물론 얼굴에 약하다는 건 오로지 시각적인 부분에서였고, 다니엘라의 이성을 언제나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는 편이었다. 다니엘라는 그렇게 말하며 리들의 얼굴을 뒤로 밀었다. 레리가 [헉, 사실 다니엘라님은 빙의 드림주신가요? 원작 읽으신 거 아니에요?]라고 띄운 창을 가볍게 무시했다. 레리의 영문 모를 소리도 이제 슬슬 익숙했다.
“난 널 도와줄 거야.”
다니엘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왜 너는 내가 너에게 협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어. 내가 너에게 내 정신을 열어주지 않아서?”
다니엘라는 이제는 파르스름해 보이는 리들의 안색과 왼팔을 살폈다. 소매와 장갑에 사이로 살짝 보이는 손목이 검게 물들어 있었다. 저주의 일종인가? 다니엘라는 인상을 찌푸리며 습관적으로 리들의 볼을 꼬집다가 똑같이 생겼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금방 놓았다.
“……방금 내 볼을 꼬집은 거야?”
“물론, 내가 너에게 협력하는 건 내 가치관에 위배되지 않는 데까지야.”
리들이 당황스러워하며 질문했지만, 다니엘라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리들은 갑작스럽게 친근한 스킨십에 어이없어 해야 할지 어쨌든 조건부라도 자신에게 협력하겠다는 데에 만족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는 듯 했다. 다니엘라는 리들에게 배려를 하기로 했다. 빠르게 보스 몬스터를 조우하면 생각할 필요도 없겠지. 몸 상태가 나빠보여서 안 쓰고 있었는데 굳이 레질리먼시를 한 번 더 쓸 수 있는 정도면 몸상태가 괜찮은 거 아니야? 다니엘라는 다소 심술궂은 생각을 하며 리들을 부축했다. 그리고 한 바퀴 돌며 순간이동을 시전했다.
리들은 온몸을 사방에서 압박하는 듯한 느낌을 느꼈다. 힘이 빠지고 아픈 몸에 가해지는 압박감에 신음하는데 앞쪽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소리에 리들이 고개를 들었지만, 다니엘라가 천 같은 걸로 리들의 시야를 가려버려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지금 우리 앞에 보스 몬스터가 있는데, 넌 보면 안 돼.”
다니엘라의 말에 리들은 아연했다. 이 자가 방금 사용한 게 그럼 순간이동인가? 리들은 다니엘라의 팔-로 추정되는 신체 부위-을 꽉 잡았다.
“앞을 보지 않고 전투할 순 없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진 몰라도 내가 보고 미칠만한 존재는 아직 지구상에 없어. 심지어 넌 보고 있잖아?”
“전투할 상태는 되고?”
리들은 할 말은 없었으나 천을 벗으려고 했다. 하지만 천을 벗겨지지 않았다. 마법인가? 리들은 이를 갈았다.
“할로웨이…….”
“가만히 있어.”
리들은 다니엘라가 자신을 잡고 뛰는 걸 느꼈다. 옆을 스치는 바람이 느껴졌다. 아마 공격을 피한 것이리라. 리들은 무력감에 짜증이 났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다니엘라가 너무 빨리 움직이는 중이라 입을 열면 혀를 깨물게 뻔했다. 리들은 이를 갈며 얌전히 다니엘라에게 기댔다.
다니엘라는 리들을 단단히 붙잡으며 앞을 응시했다. 리들의 착각과 달리 사실 다니엘라도 보스 몬스터를 제대로 보고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8(상태창).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db505a947bc243d9b1030765aede6e9f~mv2.png/v1/fill/w_800,h_64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8(%EC%83%81%ED%83%9C%EC%B0%BD).png)
정신보호 필터라는 건 저 모자이크겠지. 다니엘라는 눈을 가늘게 떠도 절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보스 몬스터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험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흑흑!]
[약점을 알려드릴게요! 우선 불은 안 통해요!]
다니엘라는 준비하고 있던 공격 주문 몇 개를 머리에서 지워냈다. 불과 폭발마법을 좋아하는 다니엘라에겐 몹시 유감인 일이었다. 거대한 모자이크의 공격을 또 회피한 다니엘라는 주문을 외웠다.
“스튜페파이!”
음, 안 통하네. 마법내성이 있나? 리들이 계속 이야기하는 ‘그들’의 능력이 마법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그들의 숭배자들이 유적을 지키라고 비치해둔 저 몬스터에게 마법내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리는 거나 밀어내는 것도 안 되고, 멈추는 것도 안 되고, 베는 것도 안 통하고……. 어, 면역이 너무 많아요! 어쩌죠?]
“지금 그걸 나한테 묻는 거야?”
다니엘라는 육성을 내뱉으며 공격을 피했다. 다니엘라를 붙잡고 있는 리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상태창이 헛소리를 해.”
“……상태창이 헛소리를 한다는 게 무슨 소리지?”
[어어, 자아를 가지고 대화할 수 있는 건 레리 밖에 없어요! 다른 각성자님들의 상태창은 제가 아니거든요.]
다니엘라는 입을 다물었다. 무언으로 시전한 프로테고에 모자이크의 공격이 반사되었다. 까만 무언가가 뻗어오고 있었는데, 그 또한 모자이크 처리되어 대체 무슨 공격인지 알 수 없었다. 모자이크는 자꾸 공격이 통하지 않자 화가 났는지 아마 발로 추정되는 부위로 바닥을 부쉈다. 다니엘라는 진동으로 인해 넘어질 뻔 했지만 겨우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흘러내리는 리들을 추스른 다니엘라는 이대로는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걸 직감했다.
“……이건 찝찝해서 쓰기 싫은데.”
이 동네엔 마법부가 있는 것도 아니라 상관없겠지만. 리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다니엘라의 중얼거림과 함께 눈을 덮은 천 너머로 어두운 초록빛이 번쩍이는 것을 보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진동했다. 리들은 여전히 자신을 부축하는 다니엘라에 의해 걷기 시작했다. 이윽고 던전의 출구에서 주로 느껴지는 익숙한 마나의 뒤틀림을 느꼈다.
“아, 내가 눈 풀어주는 걸 잊었구나.”
다니엘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을 가로막던 천이 사라졌다. 리들은 눈앞에 던전 출구를 보고는 고개를 돌려 다니엘라는 쳐다봤다. 여전히 뚱한 표정.
“멀미라도 해?”
리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나가자. 여기는 지긋지긋해. 다니엘라는 리들의 오른팔을 잡아끌며 던전의 출구로 빠져나갔다. 리들은 바깥으로 완전히 나가기 전, 뒤를 돌아봤다.
‘그것’은 리들이 알고 있는 사악하고 악랄한 생물 중 하나였는데 ‘그들’이 지구에 풀어놓은 생물 중 가장 위험한 것이었다. 몸 상태가 멀쩡한 자신조차 ‘그것’과 맞붙었을 때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던전에 저게 있어선 안 됐다. 리들은 이 던전 자체가 ‘그들’이 자신을 농락하기 위한 저열한 함정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속았다는 분노와 함께 자신을 부축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의문이 솟았다. ‘그들’이 날 죽이려고 한다면 ‘그들’과 협력하는 게 분명한 이 자는 어째서 날 구했지?
‘그것’의 시체와 조우한 바람에 아득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리들은 던전 밖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밝은 빛 때문에 인상을 찌푸려야 했다. 던전 안에서 있던 시간이 길었던 것만큼 밖은 밤을 지나 동이 트는지 오래였던 모양이었다. 리들은 한참이나 눈을 감고 있다가 자기 고개를 잡아 내리는 손길에 슬쩍 눈을 떴다.
하나밖에 없는 보라색 눈과 마주쳤다. 자기 얼굴을 유심히 살피는 눈빛에서 아까는 미처 읽지 못했던 염려를 발견했다. 리들은 왠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웹진 멀티버스_Teapot_톰 리들] 삽화-09(그림).png](https://static.wixstatic.com/media/83ea9d_d79c9539603f4ee5acc1b381bc76c017~mv2.png/v1/fill/w_800,h_800,al_c,q_90,enc_avif,quality_auto/%5B%EC%9B%B9%EC%A7%84%20%EB%A9%80%ED%8B%B0%EB%B2%84%EC%8A%A4_Teapot_%ED%86%B0%20%EB%A6%AC%EB%93%A4%5D%20%EC%82%BD%ED%99%94-09(%EA%B7%B8%EB%A6%BC).p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