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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도 길거리 캐스팅을 하나요?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

 

대학 생활을 한 줄로 요약하는 수많은 말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격언일 테다. 벚꽃이 피기 시작하면 중간고사의 시험 범위가 나오고, 곳곳에 후드를 뒤집어쓴 학점 좀비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벚꽃이 탐스러운 계절이 되면 학점에 대한 학생들의 욕망도 그만큼 영글고, 꽃잎 흩날리는 봄의 절정에는 시험지도 화려하게 흩날린다. 시험이 끝나면 벚은 생장을 끝내고 푸른 잎사귀만 빛내고 있으니, 끝내 꽃 아래에서 사진 한 번 찍지 못하고 지나가는 안타까운 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 고작 3점의 학점을 위해 한 학기의 등록금을 기꺼이 학교에 바친 졸업반과 그 격언은 거리가 멀었다. 커다란 호수를 옆구리에 끼고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그 앞 벤치는 벚꽃을 구경하기에도 사람을 구경하기에도 적절한 위치였다. 꽃잎 하나에 전공 서적, 꽃잎 하나에 노트북, 꽃잎 하나에 수기 리포트 …. 수심이 깊은 얼굴들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노상 까는 맥주 한 캔의 맛이란. 눈이 부실 만큼 반짝거리나 덥지는 않은 햇살과 적당히 부는 바람,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한 무더기의 꽃잎까지 천국이 따로 없었다. 등록금은 이미 내 손을 떠난 매몰 비용이었으니, 지난 학기의 멍청한 학점 계산을 후회하는 것보다 반년의 시한부 한량 인생을 즐기는 게 먼저였다. 이번 학기에 졸업만 하면 되는 거지. 오늘은 오늘의 인생을 즐기겠다 생각하며, 아직 열감 없는 맥주를 잔뜩 들이킨다. 자글거리며 여린 살 위로 튀는 탄산의 청량함이 꼭 봄이다. 느릿한 숨, 벤치에 기대 누운 채로 세상이 뒤집어진 걸 감상하고 있으면, 시야 사이로 똑같이 뒤집어진 얼굴이 쑥 들어왔다.

 

"한가해 보이네요."

"헐, 신재, ……교수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또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얼굴을 안 비출까. 궁금했는데. 강의실 코앞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네?"

 

여기서 교수만 하고 있을 얼굴이 아닌데, 반질한 얼굴이 뒤집어져도 기깔나게 잘났다. 대답 대신에 멀뚱히 뒤집어진 얼굴로 히, 웃어버리면 손에 있던 맥주캔이 어느새 신재현의 손으로 넘어갔다. 도톰한 스테인리스 밑바닥이 이마 위에 원을 찍는다.

 

애초에 학점이 모자랄 것이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다음 학기 수강 신청을 준비했을 턱이 없다. 학과 사무실에서 걸려 온 전화가 아니었다면 초과 학기가 아니라 제적이었다. 선오야, 너 졸업 안 되는데. 예? 내가 왜 졸업이 안 돼요, 나 졸작도 했고 학점도 다. 학점이 안 찼어, 너 전필 모자라. 벼락같은 말에 울면서 학기 등록을 하고, 교수와 맞지 않아 드랍한 전공을 다시 훑어본다. 이건 싫고, 저것도 싫고, 중간고사를 화끈하게 제낀 탓에 F를 받았던 전공을 바구니에 담았다. 당시의 나는 몇 학점 이하면 등록금 전액 납부가 아닌, 학점당 등록금을 내면 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이게 신재현을 만난 원인 중 하나였고. 또 하나는 당시 무용의 ㅁ도 모르면서, 무용수 얘기를 쓰겠다고 머리를 쥐어짜던 내가, 두 번째 원인이었다. 결국 다 내 탓이네.

무용미학, 누가 보아도 남의 과 전공 같은 과목이었으나 교양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었으니, 나 같은 사람이 몇 명은 더 기웃거리겠거니 싶었다. 무용, 좋잖아. 멋있잖아. 궁금하잖아. 미학, 단어가 끝내주잖아, 심장이 뛰잖아. 교양 치고는 15명 정원이라는 수강인원이 적다 싶었으나, 그건 교수의 사정이고 학교의 사정이지 내가 고려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수강 신청 당일 한참이 지나도 15명의 정원이 채워지지 않는 강의를 보았을 때,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은 했지만.

이윽고 대망의 개강, 교수 얼굴이 끝내줬다. 얼굴이 복지라는 문장이 이런 얼굴에서 나왔구나, 수긍할 수 있을 정도로 무엇 하나 모나지 않고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 말을 했다. 15명의 정원이 끝끝내 차지 않은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얼굴만 보면 씨 폭격기라도 기꺼이 내 성적을 대가로 한 학기 동안 행복할 수 있을 텐데, 왜 다들 이 수업을 안 듣는 거지. 한 글자, 한 글자 나긋한 목소리로 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고, 종종 아는 얼굴이 보이는가 하면 방학은 잘 보냈냐며, 얼굴이 좋아졌다며 말하는 모습만 보고 있어도 개강의 피로가 씻겨나가는 기분이다. 무용과는 좋겠다, 이런 교수님 있어서. 근데, 이 과목 무용과가 좀 많긴 하네, 다 아는 얼굴인가.

 

"임선오."

"넴."

"…… 타과 학생이 있네?"

"……네?"

"아뇨, 어서 와요. 무용에 관심이 많은가 봐요."

 

예, 근데 지금은 교수님 얼굴에 관심이 좀 더 많습니다. 얌전히 웃고는 고개만 끄덕이니 교수는 조용히, 그리고 길게 내 얼굴을 바라보다 다음 이름을 불렀다. 신재현을 만난 세 번째 원인이 있다면, 마땅한 인맥도 없는 주제에 에타를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신재현은 얼굴만큼 끝내주는 수업을 했다, 이 교수는 필연적으로 내 학점을 완벽하게 끝내줄 수 있다는, 그런 직감이 강하게 들었다. OT 없이 첫 주부터 풀강. 무슨 말인지 모를 주제의 리포트, 다음 주는 연습실에서 만날까요? 예고 없는 실습. 모든 것에 지친 나는 개강 삼 주차, 강한 결단을 내렸다. 교수님 얼굴 보고 싶을 때만 들어가자, 고. (진작 드랍할 걸.)

한 주 수업을 제끼니 눈은 허했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전공 과제 따위는 마음의 짐이 되지 않았다. 오로지, 이번 학기에 무용미학만이 나의 짐인 것이다. 그래도 이번 학기에 수업 꼴랑 두 개 듣는데, 조금은 부지런하게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다음 주 수업은 착실하게 출석했다.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출석을 부를 것도 없이 눈으로 한 번 훑고는 오늘은 다 왔네요, 말하는 교수의 행동에 다음 주는 도망쳤다. 교수와 밀당을 하자는 징그러운 생각은 아니고, 담당 교수도 아닌 타 과 교수가 내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여 본능적으로 도망친 것뿐이다. 그렇게 두 번이나 도망쳤으니, 이번 주 역시 당당하게 강의실에 들어갈 깜냥이 생기지 않았다. 마침 날도 좋고, 전공은 중간고사를 보지 않으니 꽃이나 보고 사람 구경이나 하자, 까지가 계획이었는데. 그 계획에 교수의 난입은 없었다 …….

 

"……"

"다음 주도 안 나오면 F인데."

"…… 학점 포기하려구요."

"왜요? 무용에 관심이 많다더니."

 

신재현은 여전히 내 맥주캔을 손에 든 채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오가는 사람도 많은데 학생이랑 이상한 소문이라도 돌면 어쩌시려고요, 하고 싶은 말은 많았는데 입 밖으로 당연히 나오지는 않았다. 맥주캔을 두어 번 흔들더니, 아직 남았네. 중얼거린다. 맥주캔이 손으로 돌아온다. 이걸 교수 앞에서 마셔도 되나, 싶은 의문만 가득하다.

 

"기왕이면 끝까지 들어요."

"네?"

"본인 학점을 망치는 건 학생 책임이니, 이런 부분에 크게 간섭하는 일은 없는데 … 과제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이상하게 내 교양은 타 과 학생들이 잘 안 와서, 과제에서 완벽하게 신선한 시각을 보기는 힘들었는데. 선오 학생 과제는 참신하고 웃겼어요, 그렇다고 정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한 것도 아니고."

 

갑작스레 다가온 교수의 선의가 무겁기만 하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내가 무용과였다면 이건 대학원으로 향할 수 있는 완벽한 그린라이트였을 텐데. 그저 아, 네. 짧은 대답 이후로 이어갈 말을 찾지 못해서 손이 축축해진다. 감사합니다, 말고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지? 왜 안 오는지 이유를 말할 수는 없잖아. 교수는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슬그머니 곁눈질을 하면 신재현과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눈을 피하면 상황이 더 어색해질 것 같아 멍청하게 웃는 게 전부다. 신재현이 잘난 얼굴로 느리게 웃었다. 아무래도, 그 얼굴이면 내 얼굴이 … 웃기긴 하겠지.

 

"다음 주가 중간고사인 건 알아요?"

"가서 …… 편지 쓸까요?"

"하하, 어차피 조교가 볼 텐데. 쓸 거면 미리 말해요, 내가 채점한다고 말해둘 테니."

 

드디어,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인사도 할 겸 자연스레 따라 일어나서 허리를 굽힐 준비를 하니 곧장 걸음을 옮기는 대신, 자리에서 빤히 훑는 모습이 어째 찝찝하다. 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입을 열려던 순간 교수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까딱거린다.

 

"혹시 다리 찢기 잘 해요?"

"각목인데요."

"아쉽네. 그래요, 다음 주에 강의실에서 만나요."

 

다리찢기를 잘했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등줄기가 서늘해져 쥐고 있던 맥주캔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무래도 이번 학기 한량으로 사는 것은 이쯤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지, 편지에 어떤 내용을 적어야 교수가 즐거울지 고민하며 빈 맥주캔을 쓰레기통에 던졌다. 림을 치고 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인생이 갑자기 꼬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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