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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는 귀찮다는 얼굴로 노트에 의미 없는 줄을 긋기 시작했다. 눈에 띄게 성적이 좋은 편도 아니면서 강의에 집중하지 않는 건, 지금 듣는 강의는 유리가 들으려고 하는 강의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들으려는 강의가 아닌데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제 연인이 들어야 하는 교양 강의였기 때문에, 저는 그 연인과 같이 있기 위함이었다. 그가 들어야 하는 강의라고 해도 이론만 구구절절 지겹게 늘어놓는 강의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제 연인, 델리코는 진지한 표정으로 노트에 필기까지 하면서 강의에 집중하고 있었다. 애초에 델리코를 상대로 저와 같이 강의 중에 딴짓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에도 같이 강의를 들으면서 말을 걸었다가 본인 입가에 손가락까지 대며 조용히 하라는 모습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었다. 분명 그 수업도 재미없는 교양 강의였는데. 그 강의를 집중하는 사람은 오로지 델리코 혼자였을 정도였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지도 않은데, 이럴 때면 같은 과가 아닌 게 마냥 아쉽기만 했다. 그렇다고 제가 델리코의 과로 옮길 수도 없고, 델리코가 저와 같은 과로 옮길 수도 없을 일이었다. 서로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은 확실한 탓이었다.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건 저와 델리코가 연인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기준은 델리코의 과 학생에 제한되어있지만. 유리에게 있어서 그걸로 충분했다. 델리코에게 자신이란 애인이 있는 걸 알면 제가 못 보는 동안 귀찮게 굴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델리코는 가끔 본인도 모르게 인기를 끌 때가 있으니 여간 신경 써야 할 게 한둘이 아니었다.

 

 

“델리코가 너무 모범생이야.”

“응?”

 

 

불만스런 말투로 툭하니 내뱉은 제 말에 알렉스는 무슨 말이냐며 고개를 기울였다. 더 정확하게는 모범생인 건 좋은 거 아냐, 라는 의문을 품고 있었을 테지만 그건 유리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은 아니었다. 공부를 열심히 듣는다거나 과제를 제때 낸다거나 하는 건 평범하기에 유리에게 있어 끔찍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의 공부만 하면 되잖아. 무리해서 한다거나 어느 선에 꼭 도달할 필요가 없는 거라고. 이런 말을 상위권 성적에서 머무는 유리가 해봤자 아무런 소용 없겠지만. 알렉스는 진정하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열정적으로 하면 좋은 거잖아.”

“그 열정이 나한테 왔으면 하는 거야.”

 

 

생각해 봐, 연인이 집중해야 하는 건 공부가 아니라 나잖아. 내가 최우선이잖아. 어떻게든 달래보려는 목소리에도 유리의 불만은 끝도 없었다. 평소라면 저도 이 정도로 불만스런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일이다. 유리가 바라는 대로 델리코는 연인에게 최선을 다했다. 만나자고 하면 만났고,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점심을 먹고, 여자들과 너무 가까이 있지 말라는 우스운 얘기에도 여자들 무리에 꼭 발을 빼며 유리의 말을 지키고자 했다. 그런 노력을 알고 있기에 유리도 델리코의 태도에 대해 말을 얹은 적이 없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시험기간이라고 나랑 만나주질 않아…!”

“그럼 시험기간 때마다 보기 힘들었던 거야?”

“아냐, 알렉스. 들어봐. 요즘 따라 만나주지 않아. 이상하지?”

“갑자기 그런 거라면… 당황스럽긴 하겠네.”

“혹시 나 모르게…”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진정하고, 일단 얘기를 해보는 게 좋겠어.”

 

 

*

 

 

워릭은 턱을 괸 채 제 앞에서 책과 공책을 늘어놓고 집중하는 델리코를 바라보았다. 델리코가 저와 함께 공부를 하는 일에 불만은 없으나 –델리코에 대한 불만은 결코 없었다. 유리에게서 돌아올 후폭풍이 번거로울 뿐- 왜 저와 같이 공부를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유리가 방해를 하나?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공부가 본인보다 중요하다며 투덜거린 게 분명하다. 다만, 그렇다고 의문이 풀리는 건 아니었다. 그 정도로 정이 떨어질 사이였으면 진즉에 헤어졌을 게 당연하다. 그만큼 유리의 투정은 억지스러운 면이 많았으니까. 그런데도 헤어지지 않은 건 정말 사랑일 수밖에 없는데. 항상 곁에 있어도 부족한 듯이 굴던 두 사람이 왜 떨어져 있는 건지, 델리코는 제게 무얼 바라고 저하고 있는 건지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너희, 싸웠어?”

“네?”

 

 

갑작스러운 말이라고 생각했는지 공책 위로 움직이던 펜이 멈추고 저를 똑바로 바라보는 시선에 워릭도 열어둔 노트북을 닫고 짐짓 엄한 척 팔짱을 끼고 델리코를 마주했다. 평소 선배로서 보이는 위엄 따위 전혀 없었지만, 가끔은 고민 같은 걸 들어줘도 괜찮겠지. 이래보여도 일단 선배이고. 워릭은 이해한다며 말해보라는 듯이 델리코에게 손짓했다.

 

 

“말하고 싶지 않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유리가 좀 극성맞은 면이 있는 거 알아. 그거 네가 다 참아준 것도 아마 다 알걸?”

“그런가요…? 전 유리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 그래. 델리코쨩이 이제와서… 응? 뭐라고?”

“갑자기 유리 얘기는 왜 꺼내시는 거예요?”

“응? 둘이 싸운 거 아냐?”

“전혀 아니에요. 요즘 못 만나긴 했지만.”

“그럼… 왜 못 만났는데?”

 

 

싸운 게 아니라고? 델리코가 유리에게 질린 것도 아니고? 그러면 더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둘 사이가 멀어지지도 않았는데, 같이 있지 않다니. 두 사람은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수록 주변에서 의심할 정도로 붙어 있는 CC였다. 그걸 가장 가까운 곳에서 본 사람도 워릭이었고. 워릭은 둘에 대해 가장 많이 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별 이유 없이 두 사람이 떨어져 있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제가 되묻는 말에 조금 침울해진 표정의 델리코는 겨우 입을 열었다.

 

 

“유리를 옆에 두고 있으면 공부에 집중이 안 돼요.”

“허…”

 

 

워릭은 겨우 그딴 이유로? 라고 곧장 내뱉고 싶었으나 제 예상과 다르게 그가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을 가지고 델리코의 말을 기다렸다.

 

 

“유리가 자꾸 신경 쓰여서요. 공부에 집중하려다가도 괜히 말 걸고 싶고…”

“됐다, 됐어. 난 또 뭐라고.”

“선배…”

 

 

그런 표정으로 바라봐도 난 몰라! 이게 염장질이 아니면 뭔데? 이런 상담 들어주는 건 질색이라고. 워릭은 더 이상 이야기를 들을 필요 없다는 듯이 자리를 옮겼다. 결국 좋아하는 사람이 옆에 있어서 공부가 안된다는 이야기를 저렇게 거창하게 할 필요 있냐고. 서로 좋아죽는 모습을 보려고 3시간 동안 애인 있는 남정네라 붙어 있는 게 아니었다. 결국 워릭은 끝까지 듣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델리코는 떠나는 워릭의 모습을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반응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공부를 못하는 모습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일까? 본인 때문에 공부를 못 한다는 걸 알면 유리도 분명 제게 실망할 것이다. 이미 스스로에게도 실망한 참이니. 이번에는 정말 좋은 점수를 받아 유리에게 떳떳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금방 습득하면 좋은 성적을 내는 유리에 비해 저는 부족한 게 한 두 개가 아니었다. 유리를 뒤쫓아 가려면 저는 여기서 더 노력해야만 하는데. 유리하고 보내는 시간에 집중하느라 성장이 없다니. 이 상태로는 유리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 게 벌써 일주일째이다. 오늘로 시험이 끝나가니 이제 결과를 기다려야겠지.

 

 

*

 

 

“미안, 늦었지?”

“늦었어. 델리코는 지금껏 늦은 적이 없었는데.”

“미안해, 오늘은…”

“나도 알아. 공부 때문에, 문제 하나라도 더 푸느라고.”

“응…”

 

 

델리코는 높아진 목소리에 고개를 반쯤 숙였다. 저에게 불만스런 모습을 보이는 유리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는 탓이었다. 게다가 제가 잘못한 일이니 변명을 해봤자 별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먼저 목소리를 크게 내야만 했다. 시험이 끝난 후, 델리코는 제 성적이 나올 때까지 유리를 볼 자신이 없었다. 앞으로도 평생 보지 않을 자신도 없었지만 적어도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공부에 집중하고 싶었다. 그래야 유리를 만나도 마음이 편할 테니까. 그리고 지금, 성적이 나온 이 순간, 델리코는 드디어 유리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유리, 나 이번에 너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됐어.”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번 성적이 좋게 나왔어. 매번 너랑 있으면서 공부에 집중이 안 됐는데…”

“뭐어? 델리코, 설마… 나와 있는 동안 공부에 집중하지 못한 거야?”

“응, 그래서 성적이 전혀 안 오르길래…”

“성적 같은 거 오르지 않았어도 델리코가 부끄러울 리가 없잖아. 난 그보다 델리코하고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해!”

“응? 그렇지만…”

“델리코는 내 성적이 나쁘면 나랑 있기 싫어?”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똑같은 거라고!”

“그런 거야…?”

“그런 거야! 바보!”

 

 

유리는 토라진 얼굴로 델리코를 끌어안았다. 성적 따위 아무래도 좋은데! 제 품에서 들려오는 말을 들으며 델리코는 눈을 깜박였다. 그러니까, 유리가 저를 부끄럽지 않게 생각했으면 하는 건 그저 제 욕심이었던 것이다. 유리는 단지 저와 같이 있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저는 무얼 놓치고 있었단 말인가. 유리가 제 품에서 심술궂은 투정을 부려도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제 잘못이었다. 미안해, 유리.

 

 

“…같이 밥 먹으러 갈래?”

“좋아. 이번에는 밥 먹으면서 공부 같은 거 금지야.”

“응, 다른 건 하지 않을 거야. 너하고만 있을게.”

 

 

잘못한 게 있으면 풀어줄 수밖에 없겠지. 델리코는 유리의 손을 잡으며 캠퍼스 안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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