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데이트 폭력과 그 후유증에 대한 묘사가 언급됩니다.
* 개인 연성을 합작으로 전환한 사례입니다. 원제목은 ‘동갑내기 후배는 밀당 할 줄 모른다.’입니다.
* 원작이 일본 배경이라 일본에 관련된 묘사들이 나옵니다.
산옥은 입학식장에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같은 학과생들을 찾던 중, 누군가 제게 말을 걸었다.
"어느 과 찾고 계세요?"
"아, 저. 그게. 무, 문예창작과요."
"아, 문창과예요? 저도인데! 그러면 이쪽으로 오면 돼요."
한 눈에 봐도 미인이라 다가가기 조심스러웠다. 그렇지만 길을 잃는 게 더 문제였다. 산옥은 미인을 따라갔고, 무사히 오리엔테이션까지 하게 되었다. 학회장의 인솔에 따라 빈 강의실에 앉았고, 어쩌다 보니 그 미인과 함께 앉게 되었다. 돌아가며 동기들과 자기소개를 마칠 즈음, 미인이 말했다.
"화남이라고 해. 잘 부탁해!"
그렇게 산옥은 화남을 인식했다. 화남은 과 내에서 가장 인기 많은 사람이 되었다. 과 미팅 때도 빠지지 않았고, 남학우들이 그녀를 둘러싸곤 했다. 그러면 산옥은 먼발치에서 화남을 보면서 절대 친해질 일 없는 사람일 거라고 굳게 믿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뜬금없는 시점에서 벌어졌다. 교양 수업 중에 화남이 산옥에게 다가왔다.
"산옥아, 산옥아!"
"어? 나?"
"응, 우리 조별과제 해야 하잖아. 같이 하자!"
산옥은 화남 곁에 있는 사람을 보았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집에 갈까?'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은 기숙사생이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한 그였다.- 눈을 몇 번 굴린 산옥이 어색하게 웃었다. 모르는 사람과 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인기인과 함께하는 조별과제를 견딜 자신이 없었다. 너 따위가 화남과 과제를 함께하느냐는 남학우들의 목소리가 잠깐 들리는 것 같았다.
"아, 아.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그러지 말고, 같이 하자. 우리도 지금 한 명 부족해서 그래. 안 돼?"
미인의 말을 거절할 방법이 있다면 누가 공유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화남 곁에 있던 사람 중 하나조차 미인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남이 기쁜 얼굴로 웃었다.
"그러면 서로 인사부터 해. 여기는 기계공학과 3학년 팔계고, 이쪽은 연극영화과 1학년 오정."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인사를 마친 그들은 조별과제 개요를 짜기 시작했다. 오정이 발표를 맡았고,(인상 탓인지 산옥은 그를 처음부터 신뢰하지는 못했다.) 산옥과 팔계가 자료를 정리, 화남이 프레젠테이션 작성을 맡았다. 같은 일을 해야 하는 탓에 어영부영 팔계와 전화번호를 공유한 산옥은 기숙사에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기절하듯 누웠다.
"평범한 내향인, 오늘 힘냈다……."
그러나 계속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자료부터 찾으려 도서관에 들를 작정이었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느라 열중하는데, 누군가 산옥에게 말을 걸었다.
"산옥?"
"어, 아. 안녕하세요……."
팔계였다. 산옥이 그를 보고 멋쩍게 웃었다. 팔계는 사람 좋게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자료 찾으러 온 거예요?"
"아, 네. 선배님."
"선배님?"
"그, 화남이 그러던데. 3학년이시라고."
"아."
팔계는 산옥을 보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덧붙였다.
"편하게 불러도 괜찮은데요."
"그렇다고 오빠라고 부르기에는 제 면역력이 허락하지 않아서요……."
팔계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도서관임을 자각하고 작은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어리둥절했지만 산옥은 그를 보고 말했다.
"선배님도 자료 찾으러 오셨나요?"
"네. 어떤 책 찾았어요?"
"저 이거랑, 이거랑……."
양 손 가득 들린 책을 보고 팔계가 몇 권을 집어들었다. 산옥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이만큼은 내가 보고 분석하고, 나머지는 산옥이 하는 것 어때요?"
"그래도 되나요?"
"네, 그럼요."
감사 인사를 하고 빈자리에 가려던 산옥은 팔계의 손짓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제 맞은편을 향해 손짓했다. 설마 여기 앉으라는 건가. 안 지 24시간도 안 된 사람과 마주 앉아 뭔가를 한다는 건 산옥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속으로 사회 생활하자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둘은 자료 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참 다행스럽게도 과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는 목표 의식이 생기자 눈앞의 상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노트에 내용을 정리하고 있노라니 팔계가 물었다.
"그러고 보니, 산옥은 동아리 가입했나요?"
"아, 저는… 동아리 생각을 안 해 봐서."
"그러면 우리 동아리 들어올래요? 보드게임 동아리인데."
"보드게임이오?"
"화남은 과 내 동아리 하고 싶다 해서 없지만, 나도 오정도 속해 있어서 아주 어색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때요?"
지금 가장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이 팔계라고 하고 싶었지만 산옥은 참았다. 보드게임 동아리면 말 그대로 보드게임만 하는 건가. 그러면 해 볼 만할지도. 다음에 산옥은 제 어림짐작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 자책하게 되었다.
어영부영 자료 정리가 끝나고 팔계와 함께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산옥 입장에서 인상이 더러운 사람과 오정이었다.
"어이."
"아, 강류."
"과제했냐?"
"네. 아, 그렇지. 불교학과 3학년인 강류예요. 이쪽은 문예창작학과 1학년인 산옥. 우리 동아리 들어오라고 막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예?"
"뭐냐, 그 얼빠진 표정은. 내가 불교학과인 게 그렇게 아니꼽냐?"
"어……."
저 껄렁한 인상에 불교학과가 말이 되나? 산옥은 대답할 거리를 찾았다. 그러나 강류가 빨랐다. 그는 거리낌 없이 산옥에게 꿀밤을 놓았다.
"아프잖아요!"
"누가 멍청하게 속내를 다 드러내랬냐?"
"어우, 인상만큼 성질머리도 더러우시네."
"야, 팔계. 이런 걸 정말 우리 동아리에 들여야겠냐? 오정만으로도 벅찬데?"
"아예 사람을 물건 취급하시면 되냐고요!"
"자자, 두 사람. 도서관 근처니까 조용히 하고 따라와요."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팔계의 목소리에 살기가 어려 있음을 모를 산옥이 아니었다. 쭈뼛쭈뼛 동아리방에 들어오자마자 산옥은 저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도대체 동아리방에서 뭘 하기에 담배 찌든내와 술 냄새가 진동을 하느냐고. 저도 모르게 세 사람을 훑었다.
"솔직히 말해 주세요. 동아리 활동 안 하고 담배 피우고 술 마시죠?"
"활동도 하면서 같이 하는데?"
"자랑이냐?"
"그래서, 너 보드게임 뭐 할 줄 아냐?"
"……원카드?"
"마작은."
"할 줄 몰라요."
"마작이야 가르쳐 주면 되죠.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동아리 들어오는 대신 저 올 때 환기 시켜도 뭐라 하지 말아주세요."
"그렇게 냄새가 심하다고?"
"못 느끼는 당신들이 문제야!"
초장부터 잔소리한 산옥을 보며 팔계가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했을 때 산옥은 어리둥절해했지만, 만족스러운 웃음이 자신을 향하고 있어 그 역시 웃음 짓고 말았다.
순식간에 산옥은 동아리 사람들과의 관계에 스며들었다. 약간 동아리 사람들에게 그는 똑 부러지면서도 헐렁한 구석이 아주 많아서 여러모로 손이 많이 가지만, 한편으로 곁에 있으면 든든한 무언가가 되어 있었다. 강류는 그런 산옥을 한 마디로 '집 지키는 멍멍이'정도로 평가했고, 산옥을 제외한 모두가 동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특히 산옥은 오정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는데, 비슷하게 다혈질적이고 그러면서도 잔정이 많은 게 둘 사이 공통점이었다. 거기에 어른의 대화도 자유로이 할 수 있는 사이이기도 했다. 그즈음, 산옥은 사회복지학과 남학우와 교제 중이었는데 오정이 마작 중에 물었다.
"네 애인 우리랑 동갑 이랬냐?"
"응. 사복. 왜?"
"사복이면 사회를 복지 해야지 왜 네 연애 복지를 하고 있냐, 걔는."
"죽을래?"
가차없이 산옥이 오정에게 다가가 목을 졸랐다. 처음에는 말렸던 팔계도 그냥 흔한 친구 간의 싸움 정도로 받아들이게 됐는지 그저 웃으면서 넘어갔다. 물론 정도가 지나치다 싶으면 제지하긴 했지만.
"조그만 게 힘은 왜 이렇게 좋냐고!"
"왜 나 개라며, 물어버릴 거야. 이리 와, 빨리."
"이미 붙잡고 있잖아. 악! 아파! 아프다고!"
"으와아앙!"
오정의 팔뚝을 물고 늘어지며 산옥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가 한 개새끼 하지? 하며 깔깔 웃는 그를 보며 오정은 질린 얼굴을 했다. 학부 생활이 나름대로 재미있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좋은 친구들도 생겼고, 연애도 하고. 만족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내향인인 산옥에게는 여러 가지 시련이 있었다. 과 내 MT, 체육대회, 대면식 등. 다수 사람들을 대해야 하면 피가 바짝 마르는 것 같았다. 그럴 때는 그나마 친한 화남과 같이 있으면 딱 좋았겠지만, 하필 화남은 과 내 최고 인기인이었다. 화남 때문에 시선이 몰리면 산옥은 슬그머니 구석으로 갔다. 서로 가벼이 인사 나눌 정도인 동기 및 선배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 내심 동아리 MT를 기대했다. 친한 사람들과 한껏 즐기는 시간! 쾌감 넘치는 기분에 애인에게 연락을 취했다.
-거기 남자들만 있는데 괜찮아?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야?
-그 동아리에 남자들만 있잖아. 혹시라도 눈 맞으면.
-응. 내가 그 안에서 제일 못생겼죠? 얼굴에서 밀리죠?
-아니,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닌데.
-그리고 어차피 그쪽들도 나한테 그런 관심 없어. 나 과제해야 한다. 잘 자고, 사랑해.
-응. 사랑해.
기숙사 룸메이트가 산옥에게 기웃거리다 마지막 문구를 보고 탄성을 내질렀다. 산옥이 그를 보고 물었다.
"뭐야, 왜."
"너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는구나. 신기하다."
"나 그런 이미지야?"
"어, 너 그런 이미지야."
그런가. 잠깐 생각하던 산옥은 문득 궁금한 게 있어 화남에게 연락을 취했다. 통학생인 그는 지금쯤 집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뭐 해?
-집에서 과제 하지. 무슨 일 있어?
-그냥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팔계 선배도 연애할 때 막 남자들 경계해?
-몰라?
-왜 몰라?
-남동생 연애에 관심 두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어? 예상치 못한 답변에 산옥이 어리둥절해졌다. 분명 두 사람, 연인 아니었나? 그런데 남동생이라고?
-팔계 선배가 남동생이라고?
-내가 말 안 했어? 우리 쌍둥이인데.
-팔계 선배는 3학년이잖아.
-팔계는 영재교육 받아서 월반했고, 나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어.
-...나 약간 지금 드라마 주인공 출생의 비밀을 알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야.
-그러고 보니, 산옥이 너는 팔계랑 별로 안 친하지?
-그 선배…는 조금… 대하기 난감해.
-어떤 게?
화남의 물음에 산옥이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동아리실에 갔을 때, 강류와 오정이 말 그대로 술떡이 되어 있었다. 어쩌다 팔계와 같이 동아리방에 들어가려던 산옥은 팔계가 자신을 향해 웃는 걸 보고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산옥."
"네?"
"두 사람 마실 커피 사러 같이 갈래요?"
"그… 그럴까요?"
단순히 커피 사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엉겁결에 따라 간 산옥은 제 몫의 아이스 초콜릿이 나오기를 기다리다 흠칫 놀랐다. 팔계가 비장한 얼굴로 아메리카노 두 잔에 시럽을 아낌없이 처넣고-도저히 그 단어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있었다. 꿍꿍이 가득한 미소를 보며 그는 팔계를 위해 입을 다물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시럽이 듬뿍 들어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괴로워했는데, 팔계는 은근히 통쾌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몰라, 아무튼 좀 무서워.
-팔계, 생각보다 그렇게 무서운 사람은 아니야.
-그건 화남 네가 팔계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그나저나 놀랐네. 네가 선배랑 남매라니. 난 그냥 둘이 같이 다니면 절경이라서 커플인 줄 알았어.
-다들 그러더라. 우리 커플인 줄 알더라고.
-보기 좋은 미인들의 조합이라서가 아닐까.
-그러니까 팔계랑 친하게 지내. 내 동생이기도 하니까.
-오히려 더 잘 못 대하겠는데……. 이거 괜찮나…?
화남과 대화를 하는 동안 어느새 산옥은 팔계 이야기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째 다른 사람들과 자기 애인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팔계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그가 말했듯 팔계와 산옥은 뜻밖에 어색한 사이였다. 데면데면하게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가 뜻밖의 계기로 친근해진 사이가 되었다. 산옥이 호르몬의 농간에 놀아날 즈음, 애인과 대판 싸웠다. 100일 기념으로 케이크를 샀던 날 뭘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는 지적을 받아 서러움이 폭발한 상태였다. 결국,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 날 수업 끝난 후 혼자 울먹이며 학교 근처 무한리필 야키니쿠집에 갔다.
"맥주 한 병도 같이 주세요!"
혼자 와서는 엉엉 울며 이야기하는 걸 보고 사장은 산옥을 안타까이 쳐다봤다. 맥주와 맥주잔, 고기가 같이 놓였다. 울먹이며 고기를 불판에 올리는데, 맞은편에서 드르륵, 하고 의자 끄는 소리가 들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앞을 보니 팔계가 있었다.
"왜 혼자 그러고 있어요."
"…선배애애애애!"
엉엉 울며 하소연을 하니 팔계가 산옥의 어깨를 가만가만 토닥였다.
"그러면 지금 배는 많이 안 아파요?"
"네, 괜찮아요."
"그래요, 그래요. 잘했어요. 많이 먹고 나중에 애인이랑 이야기하면서 잘 풀어 봐요."
"네에……."
"의외로 산옥도 그런 걸 챙기는군요."
"저도 애인 간의 가벼운 기념일 챙기는 건 좋아한다고요...... 알콩달콩한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음."
"선배도 많이 드세요. 이야기 들어 주셨는데 제가 살게요."
"산옥한테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요."
"그래도, 그래도 이번만은 사게 해 주세요. 선배 근로 장학생인 거 알고 있는데요. 그래도 사게 해 주세요. 제발요."
눈물 콧물을 만인의 우상에게 보였다는 게 좀 창피했지만, 그 우상이 자신에게 엄청난 호의를 보인 게 너무나도 기뻤다. 팔계에게 무한히 충성하겠노라 다짐한 밀당 할. 동갑임을 알았지만 팔계의 연상미를 느낀 이후 그에게 '팔계=선배'라는 공식이 생겼다.
동갑내기 3인방이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산옥은 사소할 정도로 팔계에게 장난을 걸 정도가 되었고, 게임 내기를 먼저 건다거나 과제 메이트로 함께 했다. 팔계의 발표를 그 누구보다 좋아하는 게 산옥이었다. '와, 잘생긴 얼굴이 잘생긴 목소리로 꼼꼼한 자료를 토대로 발표한다.'라고 생각하는 게 기본이었다.(산옥은 내향인에 무대 공포증이 조금 있었다.) 팔계가 발표를 마치면 목캔디를 갖다 놓는 일도 했다. 뭔가 아부를 어느 정도 떨 수 있는 후배가 된 것이 나쁘지 않았다. 말술인 팔계 옆에서 무리하게 술을 마셨다가 산옥이 영혼까지 토해냈을 때, 숙취 해소제를 사다 주는 그의 매너에 무한히 감탄하는 후배였다.
그런 와중에 산옥에게 사건이 벌어졌다. 타 대학을 다니던 애인이 산옥을 단속하겠다는 이유로 손찌검을 벌인 것이다. 일이 터지고 바로 헤어졌지만, 그 때문에 그는 가뜩이나 갖고 있던 대인기피증이 더 심해졌다. 후유증이 커 혼자 있을 때면 눈물이 흘러내렸고, 동아리방에 가는 일도 급격히 줄었다. 과에서도 화남 곁이나 룸메이트가 아니면 누구하고도 대화하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면 기숙사에 짱박혀 과제를 하거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 있었다. 룸메이트는 산옥 곁에 머물면서 계속 그를 살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할 거 해."
"너 지금 상태로는 그냥 두면 죽을 것 같아서 이러는 거야."
"사는 거 왜 이렇게 힘드냐……."
"그 망할 새끼, 길 가다 뒤져 버려라."
룸메이트는 산옥을 토닥이며 얼굴을 살폈다. 처음 봤을 때보다 눈가에 멍이 많이 가라앉았다.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룸메이트가 그를 꼭 안았다.
"그 새끼 죽이고 싶으면 말해. 내가 도와줄게."
"그런 새끼 때문에 네가 왜 피를 묻혀……. 좀 더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우울하다고 밥 안 챙겨 먹으면 안 돼. 너 과제하다가 쓰러진다. 화남이라도 데려가서 먹어."
"화남은 바빠. 과대잖아."
"핸드폰 줘 봐."
휴대전화를 받아 든 룸메이트가 자판을 두드리더니 다시 산옥에게 건넸다.
"화남한테 밥 먹을 사람 하나라도 붙여달라고 했어."
"안 그래도 되는데……."
"걔도 네 상태 알 거 아니야. 내가 안 말 해 줘도 신경 쓸걸."
"고마워……."
"고마우면 정신 바짝 차려. 몸 축내지 말고."
"응……."
룸메이트가 오후 수업 때문에 방을 나서자 산옥은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점심을 아이스 초콜릿으로 때웠다. 뭐라도 먹을까 해서 기숙사를 나섰는데,
"팔계 선배?"
"가요. 밥 먹게."
화남이 붙여 준 사람이 팔계인가. 잠깐 생각한 산옥은 슬그머니 그의 뒤에서 걸었다. 팔계도 굳이 그에게 같이 걷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식당에 들어가서도 아무 이야기 없이 그저 산옥의 앞 접시에 음식을 올려 주기만 할 뿐이었다. 주책 맞게 또 눈물이 흘렀다. 팔계는 휴지만 건네줄 뿐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산옥과 같이 식사하고, 과제를 하고, 도서관에 같이 가고, 카페에도 가고……. 아무 말 없이 그것들을 당연하다는 듯 함께 해 주었다. 덕분에 산옥은 서서히 일상생활을 회복했다.
"그동안 신세 많이 졌습니다!"
"너 어디 가냐?"
"그냥 너무 민폐 끼친 것 같아서."
"뭔 민폐야. 한잔해."
"적당히 마셔요. 산옥 술 잘 못 하잖아요."
동아리 부원들과 같이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해 돌아가는데, 팔계가 산옥을 따라나섰다. 기숙사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팔계가 말했다.
"앞으로 산옥이 힘들어할 때 계속 내가 옆에서 챙겨줘도 돼요?"
"아이고, 선배. 물론이죠. 선배가 챙겨주시면 이 후배는 평생 무릎 꿇고 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까지는 안 해도 되는데…….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네! 잘 부탁드립니다!"
"산옥, 산옥. 조심. 또 넘어질라."
"헤헤, 선배 최고다. 선배 짱! 이과였으면 기계공학과 갔을 텐데. 선배, 기계공학과 가면 라면 끓이는 기계도 만들어요?"
"그걸 시도해 보는 사람은 있을 수도 있죠. 안 되겠다. 업혀요."
"싫어요 .선배 키 커서 업히면 무섭단 말이야! 저 고소공포증 있단 말이에요."
칭얼거림에도 팔계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업었다. 산옥이 등에 얼굴을 푹 묻었다.
"네. 안 무섭게 얼굴 내밀고 있지 마요. 갈게요."
무사히 기숙사까지 팔계는 산옥을 업고 갔다. 룸메이트와 동아리 부원들의 잔소리 폭격에도 산옥은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듯 헤실 거리며 웃었다.
그 날 이후로 산옥은 팔계와 사적인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다. 어떨 때는 강류나 오정과 있을 때보다 진솔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자연스레 쌓이는 감정은 애정이었다. 팔계를 좋아한다고 판단한 후, 그에게 다가갈 자신이 없어 전처럼 멀어지고 말았는데, 팔계는 그런 그를 기다려 주었다.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함께 놀던 동아리 부원들도 과제와 시험공부로 정신이 없었고, 산옥도 마찬가지였다. 기말고사 시즌이 다 끝나갈 무렵, 화남과 산옥은 전공 시험을 마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토할 것 같아……."
"조금만 참아. 이것만 끝내면 종강이야."
"빨리 종강시켜 주세요……."
"맞다, 산옥아. 나랑 팔계랑 같이 종강하고 놀러 갈래?"
"…나 비주얼 남매 사이에서 평범한 사람 역할 해 주면 돼? 아니면 노예나 심부름꾼이야?"
"아니야, 진짜 놀러 가는 거야. 정말로."
"나 운전 못 하는데."
"글쎄, 너를 시킨다거나 그런 거 안 한다니까? 아무튼, 가는 거다. 알았지?"
"그런데 왜 셋이서 가? 다른 사람들 껴서 가거나 둘만 가도 되잖아."
"아냐. 꼭 네가 있어야 해. 그리도 다른 사람들까지 있으면 시끄럽잖아."
그건 그러네. 머릿속으로 생각난 오정과 강류를 떠올리곤 산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계 선배도 괜찮대?"
"팔계가 원한 거야."
"정말?"
"응. 정말. 나랑 가는 김에 너한테 좀 좋은 것도 보여주고 싶대. 너 요새 많이 힘들었잖아."
그것도 그렇고 화남으로선 산옥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근래 들어 팔계가 산옥 곁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보살피고 있는데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는 물음에 얼굴을 붉히지 않았던가. 분명 서로 같은 마음인데 완전하게 맺어지질 못하는 게 보였다. 이번 기회에 둘을 완전히 묶어 두는 게 화남이 품은 계획이었다.
동아리 MT도 아니고 그냥 친한 친구들과 여행은 처음이라 산옥은 들떠 있었다. 1박 2일의 짧은 코스여도 좋았다. 운전은 팔계가 종일 한다 해서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조수석에서 화남이 있어 주면 그나마 잠도 깨고 좋지 않을까 했다. 그런데.
"나 뒤에 앉아도 돼?"
"어? 그럼 내가 조수석에 가?"
"나는 조금 있다가 잠들지도 몰라서. 멀미 있거든."
"아……."
잠들지도 모른다면 어쩔 수 없지. 산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띠를 맸다.
"그, 잘 부탁드립니다."
"갑자기 왜 또 진지해진 거예요."
"팔계 차 잘 몰아. 걱정하지 마."
"아니, 그걸 걱정하는 게 아니고."
조수석은 대화해야 하는데 할 대화가 없다고! 선배와 나 사이에!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산옥은 그저 멋쩍게 웃었다. 제발 그 사이에 아무 일도 없어라. 그는 그렇게 빌었다.
화남은 정말 멀미가 심한지 금방 곯아떨어졌다. 어색하게 조수석에 앉아 있던 산옥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르파초, 빠에야, 오르되브르, 리조또, 디저트는 없습니다."
운전하던 팔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뒤이어 들려오는 가사에 멈칫했다.
"무덤까지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뭐야, 이 노래. 갑작스러운 전개에 어리둥절해진 그가 신호등 빨간 불이 들어올 때 산옥을 보았다.
"오늘 밤은 마지막 풀 코스 요리."
"무슨 노래예요?"
"동요인데요. 테시마 아오이 씨가 불렀어요."
심지어 동요라고. 눈을 깜빡인 팔계가 차를 몰고 가다 갓길에 세웠다. 어리둥절해진 산옥이 그를 보았다.
"내 휴대전화에 그 노래 틀어 줘요."
아무렇지 않게 내민 휴대전화를 본 산옥이 천천히 키패드를 눌러 노래를 튼 후 다시 거치대에 올려놓았다.
*원곡: https://youtu.be/EYGGd2NKwtI?si=P0Jj8awnwmBGqstH
그렇게 해서 둘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이 노래를 같이 불렀다.
사실 이 여행에는 목표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산옥을 살피는 것과 팔계와 그 사이에 한 가지 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었다. 팔계는 산옥과 함께 지내며 차츰 연애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으나 산옥 또한 같은 마음인지 알 수가 없었을 뿐 아니라, 개인적인 사건까지 벌어지는 바람에 선뜻 '연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마음을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역시 화남이었다. 산옥에게 큰일이 벌어진 후로 줄곧 그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주며 정서적으로 위로를 많이 해 주는 팔계를 보며 그가 품은 감정이 심상치 않다는 건 알았다. 그렇기에 이 여행을 제안받았을 때,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숙소에 도착하자 산옥은 화남을 깨웠다.
"잘 잤어?"
"응. 나 자는 동안 별일 없었지?"
"응. 그냥 같이 노래 부르고 그게 다야."
"재미있었겠다."
"속은 좀 어때?"
"자고 일어났더니 괜찮아졌어. 들어가자!"
세 사람이 쓸 숙소는 자그마한 일본식 가옥이었다. 대학생들이 여행 경비에 쓸 수 있는 돈은 으레 한정적이었으니 아무도 이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다만 방은 두 개로 예약해서 팔계가 독방을, 산옥과 화남이 같은 방을 쓰기로 했다. 짐을 풀자마자 셋은 간단한 요기를 하고 주변을 산책했다.
"기분 좋다."
"그러게. 산옥도 이제 마음이 조금 편안해진 게 보이고."
"두 사람과 동아리 분들 덕분이지, 뭐."
"우리는 뭐 딱히 한 게 없는걸요."
"거짓말. 팔계가 제일 많이 도왔잖아."
한참 그런 이야기를 나누자니 산옥이 입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다만 묘하게 얼굴이 상기되어 있어 눈치 빠른 두 사람이 물었다.
"어디 아파?"
"응? 아니, 안 아파.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산옥은 걱정 섞인 팔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더 얼굴이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걸 본 화남은 의심을 확신으로 굳혔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있었던 일이다.
"산옥."
"응?"
"너, 팔계를 어떻게 생각해?"
"어떻게, 라니?"
"말 그대로.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그런 거 말고."
날카롭게 찌르는 질문에 산옥은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계속 말이 없던 그가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어."
"어떤 게?"
"그냥, 가까이에 있을 때 불안해."
"불안하다고?"
"응."
"어떤 게?"
"자세히 설명하진 못하겠어. 그렇지만……."
"유쾌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니구나."
"응."
"아이고. 마음이 좀 더 편해져야 할 텐데. 걱정이다."
"괜찮아."
그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산옥이 말하는 불안이란 팔계가 자신을 모질게 대할까 걱정한 게 아니라, 함께 하는 순간이 찰나처럼 사라질까 마음을 쓰는 게 아닐까 하고 화남은 생각했다.
"우리 밤에 술 마시자!"
"…팔계 선배는 운전해야 하잖아. 대리운전 부를 거야?"
"그건 그러네."
"그러면 간단하게 야식 먹어요."
"네."
화남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생각했다. 오늘은 일찍 자자. 서로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둘 다 제대로 된 속내를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는만큼, 따로 주어진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한편 산옥은 산옥대로 신경이 쓰였다. 폭력에서 벗어난 이후 팔계가 조금씩 건네는 호의와 다정에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거기다 교양 수업 때는 부러 같은 조를 하기도 했고, 지칠 때 말없이 다가와 음료를 건네주곤 했다. 기계공학과 여학우들한테는 안 그런다고 하던데. 뭐지. 왜 그러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의 범벅이라 산옥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어영부영 화남과 함께 식사를 마친 그였다.
다짐한 대로 화남은 일찍 잠들었다. 어색하게 앉아 서로를 보던 둘 중 산옥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팔계를 볼 때마다 자꾸만 열이 올랐다. 마루에 가 앉으려니 팔계가 따라왔다.
"앉아도 될까요?"
"아, 아. 네."
다시금 말 없는 시간이 찾아왔다. 하지만 아까와 다르게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아서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공기가 흘렀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인 산옥이 물었다.
"…선배는 저를 왜 자꾸 도와주세요?"
"네?"
"그, 어떨 때는 선배 역할을 해 주시는 것 이상으로 챙겨주시는 것 같아서. 저기, 제가 오해하고 있다면 죄송해요. 제 말뜻은."
"오해 아니에요."
"네?"
"오해 아니에요."
연거푸 같은 말을 반복하는 팔계로 인해 산옥은 결국 얼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에 작게 비명을 질렀다.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니 말 한마디가 덧붙여졌다.
"좋아해요."
"흐아아, 제발 그런 이야기 다짜고짜 하지 말아주세요…!"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못 알아들을 것 같았는걸요."
당신이라니. 누가 들어도 애정 가득한 호칭에 산옥이 고개를 돌렸다. 팔계가 처음으로 환히 웃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냅다 품에 안겼다.
"언제부터 좋아했어요?"
안길 때 무턱대고 덤벼든 탓에 두 사람은 마루에 누워 있었다. 다소 부끄럽긴 했지만 산옥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기억이 안 나요."
"하긴. 저도 기억이 안 나네요. 언제부터 선배 좋아했지."
큰 손이 산옥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가 팔계 품에 바싹 붙었다.
"그래도 어떤 것 덕분에 좋아하게 됐는지는 말 할 수 있어요."
"뭔데요?"
"그 힘든 상황에서도 할 일은 다 한 거."
"아."
하긴. 감정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산옥은 그렇지 않았다. 집요하리만큼 일에 매진한 것도 아니지만, 그럭저럭, 무탈하게 모든 것들을 해 왔다. 그게 팔계가 자신을 바라보게 된 계기임을 알자, 산옥이 눈을 마주했다.
"선배는, 참 다정한 분이세요."
"그런 소리를 들을 만큼 산옥에게 많이 사로잡힌 모양이네요."
주위가 어둑해지자 두 사람은 마루에서 일어났다.
"슬슬 자러 가야죠?"
"네. 화남도 혼자 있으니까 신경 쓰이고."
"잘 자요."
그 말이 끝나자 산옥이 발돋움을 했다. 입술에 짧은 입맞춤이 닿았다 떨어졌다. 얼굴이 붉었다.
"…잘 자요, 선배."
다음날 아침, 화남과 동아리 사람들이 두 사람이 연인이 되었음을 축복했다. 그렇게 서로 눈치만 보더니 잘 됐다면서 어깨를 두드리는 오정이었다. 강류는 무감한 얼굴로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건 그렇고, 너희 수업 안 듣냐? 교양 같이 듣는다며."
"앗, 곧 시작이네. 저희 먼저 갈게요, 강류 선배님! 선배랑 오정, 얼른 가요."
"네."
늦지 않게 강의실로 달려가는 세 사람 중 산옥에게 시선을 준 강류였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는 환하게 웃으며 팔계, 오정과 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