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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강의가 끝나자 미나가 속으로 나나걸즈라 부르는 여자애들 무리가 다가왔다.

 

레이나, 다이나, 니나. 화장이나 드레스 스타일은 비슷했지만 딱히 혈연관계는 없고, 인종도 다른 여학생들인데 단순히 개강 전 파티에서 친구가 필요한 신입생들끼리 의기투합하여 만난 거다. 이름 끝에 붙은 글자가 똑같은 게 괜히 신기해서 저런 별칭을 붙였으나 물론 얘들 앞에서 그런 것까지 솔직하게 말한 적은 없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에서나 통용되는 돌림 글자 문화를 이해할 것 같지도 않았으니.

 

 

"미나~ 우리 다이너 가서 점심 먹고 쇼핑도 할 생각인데, 같이 갈래? 레이나가 차 가져왔거든."

 

 

다이나가 친절하지만 아메리칸 특유의 과장된 화법으로 말을 건다. 미나는 처음엔 저에게 한 말이 아닌 줄 알고 얼떨떨해져선 눈만 깜빡였다.

 

그야 끊임없이 자극적인 소재를 찾는 파티걸들이 한국 출신 유학생에게 굳이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경험으로 미나는 금방 어찌 된 영문인지 눈치챈다. 아하, 내가 저들 모임에 끼워줄 만한 사람인지 간 보려는 거구나.

 

파티걸들은 콧대도 높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쓸데없이 높아―예외적으로 저들과 비슷한 속물에겐 관대해졌다―눈에 들기엔 허들이 꽤나 높은 편인데, 원래라면 이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아시아인인 미나 입장에선 새삼 의외였던 것이다. 드문 경우긴 했지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아가씨들 따라다니며 시녀 노릇 해줄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메리카 토박이 파티걸 3명과 입지가 약한 유학생 여자애라니 객관적으로 봐도 밸런스가 너무 노골적이다. 미나는 어느 쪽이든 장단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오늘은 마침 적당히 빠져나갈 구실도 마련돼 있었으니.

 

미나도 약간은 과장돼 보일 정도로 안타깝단 미소를 지으며 두꺼운 교재들을 한아름 안아 든다.

 

 

"미안해,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 오늘은 좀 어렵네."

 

 

다이나가 눈썹을 조금 꿈틀거렸는데,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남자친구 발언에 호기심이 발동했던 모양이다. 나나걸즈 같은 대학가 여자애들의 최대 관심사는 섹시한 옷과 파티, 그리고 남자다. 그래서 미나에게 흥미를 잃고 찬바람 일으키며 쌩 가버리는 대신 좀 더 말을 붙였다.

 

 

"남자친구가 있었구나! 학교에서 만났어?"

 

"고등학교 때 만났어. 이번에 운 좋게 같은 대학까지 와서...."

 

 

별로 친하지도 않은 상대의 관심은 좀 부담스럽다. 미나가 살짝 불편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하자 다이나도 어색하게 흐르는 기류를 읽었는지 더 물고 늘어지진 않았다. 동양인 여자애의 남자친구래봤자, 성별만 바꾼 똑같은 동양인 너드겠지 뭐. 마음속으로 아무렇지 않게 일반화하고는 관심을 끊기로 했는지 시큰둥하게 작별하며 여자애들을 데리고 나가버렸다.

 

 

 

*

 

 

 

미나는 잰걸음으로 건물 로비까지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계단을 내려오자마자 정문 앞에 우뚝 서 있는 거대한 사람이 몹시 눈에 띈다. 문틀에 머리가 닿을 것처럼 장신인데 덩치도 만만치 않게 두꺼웠다. 웬만큼 큰 사람들도 별것 아니게 보일 정도다. 게다가 까만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마스크까지 끼고 있어서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인상이었는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신경이 쓰여 한 번씩 힐끗거렸다. 미나는 고등학생 때부터 익숙한 차림이라 그닥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른다.

 

 

"사이먼!"

 

 

사이먼 라일리는 미나의 목소리에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그는 미나를 발견하자마자 큰 보폭으로 한달음에 다가가 손에 들려있던 무거운 교재들을 받아든다. 미나가 괜찮다고 해도 본인은 오히려 좋다는 듯 그녀가 사양하는 걸 가볍게 넘겨버렸다.

 

미나가 오기 전엔 무뚝뚝하고 쌀쌀맞아 보이기만 했던 눈빛이 지금은 거짓말처럼 다정하기만 했다. 행인들은 이제 다른 의미로 흥미를 가지고 두 사람을 구경했다.

 

 

"배고프지 않아? 뭐 먹고 싶어."

 

"으응, 그냥 간단하게 먹고 과제부터 해야 할 것 같아. 약속했던 대로 주말에 너랑 놀러 가려면...."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는 미나가 일정을 떠올리면서 대꾸했다. 사이먼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다란 손을 뻗어 미나의 뺨을 쓰다듬는다. 미나가 간지러워서 해실 웃으면, 그도 마스크 속에서 똑같이 미소를 짓고 있는지 얼굴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부분인 푸른 눈이 기분 좋게 휘어졌다.

 

사이먼이 마스크를 조금 끌어 내리곤 미나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했다. 가벼운 색깔의 립글로즈가 발린 분홍빛 입술을 쪽 빨았다가 떨어졌다. 과일처럼 달짝지근하고 향긋한 냄새가 사이먼의 코끝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짧은 키스가 제법 아쉽다는 듯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끈질기게 문질거렸다. 조금 빨개진 미나의 얼굴이 아래로 기울어졌다. 키 차이 때문에 사이먼을 올려다보는 까만 눈이 글리터를 바른 것처럼 예쁘게 반짝거린다. 하이 스쿨 시절과 똑같이 수줍어하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만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잘 어울리는, 그림 같은 장면이다.

 

사이먼은 문득 이쪽을 응시하는 시선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추적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무시해버린다. 그는 저에 비하면 훨씬 작은 미나의 손을 소중하게 감아쥐곤 밖으로 나갔다.

 

한편 사이먼이 무심하게 시선을 줬다가 치워버린 자리엔 아직 건물을 떠나기 전이었던 나나걸즈가 서 있었다. 비실한 동양인 너드는 무슨, 쿼터백처럼 덩치 큰 핫가이가 등장한 반전에 나나걸즈가 입을 떡 벌린 채 두 사람이 떠나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

 

 

 

"....해서, 이렇게 쓰는 거 아니야?"

 

"음, 무슨 뜻인지는 알겠는데 문법이 틀려. 이건...."

 

"사이먼."

 

"음?"

 

"영어 진짜 구리다."

 

"나도 가끔은 그렇게 생각해."

 

 

미나가 불평하는 말에 사이먼이 키득거리며 웃는다. 애처럼 살짝 부풀린 뺨이나 불만스럽게 튀어나온 도톰한 입술이 귀여웠다.

 

대학가의 작은 까페에 자리 잡고 앉아 미나의 에세이 과제를 해결하는 중이었다. 벌써 몇 년 동안 유학생활을 하고 있고, 이제 미나의 영어 회화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지만 종종 쓰기 영역에서만큼은 약세를 보였다. 회화와 작문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었으니 공부하는 입장에선 두 배로 골치가 아플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미나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턱 위로 펜 끝을 톡톡 두드렸다. 오늘은 에세이 선생님으로서 옆에 앉은 사이먼은 노트와 씨름하는 미나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약간 관심을 끌고 싶어졌다. 워낙 고지식한 성격이라 본래 미나가 뭔갈 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는 법이 없었지만, 글쎄. 가만히 두기엔 오늘따라 미나가 너무 예뻤던 걸 수도 있고, 드물게 사이먼의 장난기가 발동하는 날이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사이먼은 본인만의 금기를 깨고 슬그머니 드림주에게 가까이 몸을 붙였다.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붙인 채 부드럽고 장난스럽게 쪽쪽, 터치하길 반복했다. 노트 위의 글씨를 노려보느라 바빴던 미나는 그냥 무시해 보려 했지만.... 실패다. 사이먼이 애처럼 관심 표현하는 경우가 적다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 모르는 척해? 웃음을 참는데 실패한 미나가 키들거리며 손바닥을 펼쳐 사이먼의 입술을 밀어내려 했다.

 

 

"아아, 안 돼~ 나도 네가 좋지만.... 이거 끝나야 너랑 놀러 간다고 했잖아."

 

"그럼 이렇게 해."

 

 

사이먼이 미나의 손을 감싸선 고운 손바닥 위에 제 입술을 꾸욱 누른다. 사이먼의 머스크 냄새와 더운 입김이 훅 끼쳐와 미나를 약간 긴장시켰다. 그가 눈꺼풀이 살짝 내리깔린 그윽한 시선으로 미나를 응시했다. 키스나 스킨십이 하고 싶어질 때면 그가 자주 쓰는 유혹 방식이었다. 미나는 유독 그 눈빛에 약하다.

 

사이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브리티시 악센트가 섞인 긁는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섹시하고 듣기 좋았다.

 

 

"키스해 주면, 과제 끝날 때까지 얌전히 있기로 할게."

 

"거짓말. 그러고 10분 있다가 또 같은 소리 할 거잖아."

 

"흠, 그건 그때 돼봐야 아는 거고."

 

 

남자친구의 능청스러운 수작질에 미나는 그저 기분 좋게 웃어줄 뿐이다. 사이먼은 끈기 있게 미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결국 못 이긴 척, 사이먼의 얼굴을 쓸어내려주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뻗어 입 맞춰주었다.

 

사이먼은 미나의 달콤한 입술을 제 입술로 부드럽게 눌렀다 떨어트리길 반복하는 사이 기쁜 듯 눈을 휘면서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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