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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의 액정을 들여다보던 최종수는 미간을 구겼다. SNS 스토리 속 분홍색 머리를 한 채은준이 낡고 지친 모습으로 작업실로 보이는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얘는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이 이런걸 공개로 올리는지. '과제가 안 끝나'라고 적혀있는 스토리를 심란하게 바라보다 보니 자동으로 다른 스토리로 넘어갔다.

 

최종수는 SNS를 종료하며 저 멀리 있는 건물을 힐끔댔다. 높은 부지 위에 지어진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은 미술대학 건물이었다. 높은 곳에 지어져서 나무나 다른 건물들이 가리지 않는 위치라면 멀리서도 잘 보였다. 최종수는 미술 관련 교양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아마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근처에 갈 일조차 없으리라. 체대건물은 큰 운동장과 강당 부지를 어떻게 확보한 건지 비교적 낮고 넓게 펼쳐진 평지에 지어져 있었으니까. 대학에 입학하고 학교생활에 제법 익숙해진 지금까지도 저 미대 건물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정확히는 그 건물에서 수업을 듣고 작업을 하고 있을 채은준이 신경 쓰였다. 전 여자친구와 같은 대학에 입학하다니. 최종수는 미대건물에서 시선을 떼고는 교양수업을 들으러 걸음을 옮겼다.

 

 

최종수가 채은준이 같은 학교에 입학했다는 걸 알게 된 건 굳이 따지자면 우연이었다. 같은 중고등학교 출신이라 그런지 SNS에 채은준의 피드에 자주 떴기 때문이다. 채은준의 SNS는 다른 사람들도 다 볼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었으며 SNS상에 자기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적어놨다. 공개적인 SNS에 개인 정보를 이렇게 막 올려두는 건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충고를 해줄 수 없는 사이였다. 둘은 헤어졌으니까.

 

 

 

여하튼 이후로 채은준의 SNS를 한 번씩 보게 되었다. 별일은 없어 보였다. 최종수도 들어본 적 있는 소꿉친구와 놀러 다닌 사진, 가족여행 사진, 과제, 과제, 과제…….

 

'미대는 과제밖에 안 하나?'

 

최종수는 정답에 근접한 추측을 할 수 있었다. 하여간 채은준은 제법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분홍색이 너무 좋지만, 교칙으로 인해 방학에만 하던 염색을 이제는 늘 하고 다녔고, 중학생 때도 열심히 다니던 전시회들도 꾸준히 다녔다.

 

입시 때문에 헤어지는 거면 입시 이후에 어떻게 되는데?

헤어질 때 물어보지 못한 질문은 지금까지도 목구멍을 맴돌았다.

 

어쨌든 둘은 이미 헤어진 사이였으며, 사실 최종수가 채은준의 SNS를 살피는 행위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행동은 아니었고, 저런 질문을 하는 건 전 남자친구로서 최악의 행동이며, 같은 학교에 다닌다고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걸 최종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최종수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가끔 욱해서 채은준이 왜 잘 지내는지에 대해 고민을 하곤 했지만, 대학 신입생 생활과 농구 선수 생활은 정신이 없었으므로 어떻게든 되는 것 같았다.

 

채은준이 왜 잘 지내는지 고민했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잘 지내지 말라는 건 아니었는데.

 

 

 

캠퍼스 내 치한 뜸

경비가 잡으려다가 놓침

경찰에도 신고 했는데 학교가 넘 넓어서 오래 걸릴듯;

ㄴ헐;

ㄴ미대 쪽으로 도망갔다는데

ㄴㄴ무서워ㅠㅠ

 

학교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글에 최종수는 몸을 굳혔다. 오후 7시. 학교에 남아있는 학생들도 그리 많은 시간은 아니었다. 훈련하느라 학교 체육관에 남아있다가 쉬는 동안 잠깐 휴대전화를 봤을 뿐인데. 최종수는 급하게 채은준의 SNS를 살폈다. 30분 전에 과제 하느라 야간작업을 한다는 스토리가 올라와 있었다. 아직 지우지 않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최종수는 그길로 체육관을 뛰쳐나왔다. 미대건물은 체대건물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심지어 학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 달리기가 더뎌지는 게 느껴질수록 심정만 조급했다. 중간중간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치한이 미대건물로 갔다고 해서 채은준과 마주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최종수는 그 약간의 가능성에도 미쳐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채은준은 까칠하게 생긴 주제에 솜사탕처럼 몽실몽실한 담력을 가진 애였다.

 

미대건물이 가까워지자 저 멀리에서 옅은 갈색의 옷자락이 보였다. 미디어매체에서 보고 듣기만 하던 계절감에 맞지 않은 트렌치코트에 그 아래로 나와 있는 맨다리. 최종수는 그 옷의 당사자가 익명게시판에 올라온 치한이라는 걸 눈치챘다. 그러나 치한과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느려졌다. 치한은 겁에 질린 채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뭘 보고 저러는 거지? 치한이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무심코 바라본 최종수는 발을 멈췄다.

 

눈부분이 불투명한 유리로 덮인 마스크와 두껍고 팔까지 연결되어 있는 앞치마를 입은 사람 두어 명과 치한이 대치 중이었다. 정체불명의 그들은 손에 망치와 톱을 들고 있었는데 치한은 바들바들 떨며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최종수는 다소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마침 경찰과 경비원이 그들 쪽으로 뛰어왔다.

 

상황은 금방 정리되었다. 최종수는 머쓱해져서 자리를 떠나려고 했는데 아까 특이한 복장에 망치를 들고 있던 사람이 최종수에게 다가왔다.

 

"……너 왜 여기 있어?"

 

들고 있던 망치를 앞치마에 있는 주머니에 집어넣은 사람이 마스크를 벗었다. 그 안에 또 방독면 같은 걸 끼고 있는지라 보이는 부분은 하관 위쪽밖에 없었지만 누군지 알아보는 데 문제는 없었다. 분홍색으로 물들인 머리에 고양이같이 올라간 눈매. 채은준이었다.

 

"……솜사탕?"

 

두 사람은 급격하게 어색해졌다. 서로 대화 안 한 지 오래돼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로 대치 중인데 뒤에서 톱을 들고 있던 사람이 채은준에게 다가왔다.

 

"나 먼저 가 있을게!"

"어, 어. 그래!"

 

같은 학과 동기인가? 최종수는 생소한 차림새를 한 사람을 보다 다시 채은준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새 방독면을 벗은 채은준은 머쓱하다는 표정으로 방독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그런 차림새로 위험인물을 상대하고 있어?"

"상대하려고 한 게 아니라……."

 

채은준은 금속 용접 과제 하는 중에 다른 과제 제출 일자가 빨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다른 과제를 하러 가는 중이었다고 떠듬떠듬 설명했다. 급하게 가느라 용접 보호구를 미처 벗지 못하고 가는 도중이었는데 치한과 마주쳤을 뿐인데 무언가에 찔린 치한이 혼자 겁먹고 대치하고 있었다고 했다. 최종수는 채은준의 앞치마 주머니 너머로 튀어나온 망치를 보며 조소과는 대체 뭘 하는 학과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넌, 날 아직도 그렇게 불러?"

"뭐가?"

"솜사탕 말이야."

 

너무 당황해서 사귈 적에나 부르던 애칭이 튀어 나왔었나 보다. 최종수는 잠깐 당황했다가 이내 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잖아."

"그건 그렇지만……."

 

채은준은 시선을 피하다가 입을 열었다.

 

"체대랑 여기는 멀지 않아?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그렇게 땀범벅이 된 채로……."

 

최종수는 차마 치한이 미대로 갔다는 거 듣고 네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뛰어왔다고 말할 수 없었다. 최종수는 말을 돌렸다.

 

"내가 같은 학교인 거엔 안 놀라네.“

"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어떻게?

 

"근데 나한테 연락을 안 했어?"

 

진심이 툭 튀어 나갔다. 최종수는 스스로 내뱉고는 발끝부터 차가워지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저런 말이 나갔지? 말을 수습할 만한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우리는 이제 이런 문답을 할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서술자도 계속해서 성을 붙여가며 딱딱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은가.

 

최종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만 굴리고 있는 동안 채은준도 당황해서 굳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최종수보다는 먼저 스스로를 수습한 채은준이 입을 열었다.

 

"……같은 학교인 건 모를 리 없지. 너 대학 붙었을 때 온 학교가 떠들썩했었는데. 같은 반 친구들이 알려줬어."

 

최종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생각해 보면 최세종의 아들이 어느 대학 갔다고 기사도 났었지.

 

"그리고 연락 안 한 건."

 

채은준은 눈을 두어 번 깜박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SNS DM 남긴 적 있는데 확인 안 했잖아."

"……내가?"

"응. 네가."

 

최종수는 황급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SNS DM 목록에는 채은준의 내역이 없었다.

 

"너 연락온 거 없는데?"

 

채은준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전화했었네……." 최종수는 채은준의 중얼거림을 못 들은 체했다. 마침내 채은준은 자신의 DM 목록을 최종수의 얼굴에 들이밀었다.

 

"이것 봐. 연락했었잖아."

 

최종수는 입을 살짝 열었다 다물었다. 채은준이 연락했다는 계정은 이전에 쓰던 계정이었다. 최근에 채은준의 스토리에 흔적이 남을까 사용하던 다른 계정으로만 사용했더니 원래 계정으로 온 연락을 못 본 모양이었다. 최종수를 한참을 말 못 하다가 입을 열었다.

 

"……계정 옮겼어."

"아……."

 

채은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최종수는 자기 뒷머리를 헤집다가 채은준의 휴대전화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자신의 다른 계정을 검색해서 건네줬다.

 

"어, 이 계정……."

 

채은준이 고개를 들어 최종수를 쳐다봤지만, 최종수는 이미 저 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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