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 입학. 신입생. 첫 중간고사. 첫 뒤풀이.
처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특별함에 마음이 들뜨고 마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그냥 술 마시고, 마시다 보면 친해지고. 대학 생활 별거 없어~ 라고 심드렁하게 이야기하던 누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래빈은 몇 번이나 기대감을 버리려고 애썼지만 설렘과 긴장감이 묘하게 섞여 심장이 자꾸만 쿵쿵거렸다. 뒤풀이에 바로 합류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래빈은 장렬하게 망해버린 수강 신청 때문에 느지막한 수업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회식 장소로 합류할 수 있었다.
***
“안녕하십니까…!”
래빈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으나 제대로 받아주는 사람은 몇 없었다. 쉴 새 없이 강한 비트를 귓전에 대고 때려 박는 음악 소리, 거기에 목소리가 묻히지 않도록 다들 목에 핏대를 세워 소리지르듯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으며, 고작 1시간 30분 여 늦었을 뿐인데 그 사이에 술은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빈 병이 수북하게 테이블마다 쌓여 있었다. 친해지기 위해서는 술을 마셔라, 라는 말이 있다고 했다. …이미 술기운이 못해도 반쯤은 오른 학우들과 그럴만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주춤 뒤로 발을 물리던 래빈의 등이 누군가에게 막혔다.
“아, 죄송합니다.”
우두커니 서 있는 바람에 입구를 막고 있었구나. 아차, 싶어 몸을 뒤로 돌리며 고개를 숙이려던 래빈의 어깨에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우리 사이에 죄송할 것까지야.”
느긋하기 짝이 없는 조곤조곤한 어조. 익숙한 목소리. 손가락 딱 몇 마디만큼만 낮은 엇비슷한 눈높이. 느슨하게 묶은 머리카락이 자라의 고갯짓에 흔들렸다. 지척에서 안녕, 하고 입꼬리 당긴 자라의 숨결에서 술 내음이 났다.
“자라 형…?”
“목 빠지게 기다렸어. 수업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전화했는데. 섭섭하게 받지도 않고….”
“아, 죄송합니다. 늦어서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뛰어오는 바람에 휴대폰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자라는 래빈의 어깨를 끌어 이미 한껏 취한 학우들이 있는 자리로 걸어 나갔다. 카운터에서 먼 저 끝의 구석 자리. 그 구석에서도 자연스럽게 벽 쪽의 자리에 래빈을 앉혔다. 시끄러운 실내에서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래빈이 자라를 거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앞에 앉아 함께 술을 마시던 선배들도 애인이 부른다며 잠깐 밖으로 통화를 하러 나가 공석. 애인을 핑계로 다시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도 알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윤자라가 완벽히 김래빈을 독점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이었다.
“래빈이 없으니까 하나도 재미없더라.”
“그…으렇습니까?”
낯부끄러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자라에게 면역이 생길 법도 했으나 여전히 부끄러웠고, 동시에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특이할 정도로 자신에게 호의적인 동기 형, 윤자라.
래빈은 스스로가 빈말로도 첫인상이 좋다고 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분명 대부분이 첫대면인 OT 자리에서도 동기들은 절대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먼저 몇 번 말을 걸어도 “몇 년생이세요?”, “아….” 고작 몇 마디의 어색한 대화로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머쓱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뒤늦게 온 지각생이 말을 걸었다. 그게 바로 자라 형이었다. 일관되는 호의를 거절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살갑게 대하는 자라와 친해지지 않는 것이야말로 어려웠다. 함께 수업을 듣겠다며 망해버린 수강 신청 시간표까지 함께하려는 자라를 말리느라 래빈이 오히려 진땀을 빼기까지 했다.
“역시 그 수업 나도 같이 들을 걸.”
“아닙니다. 형은 통학하시지 않습니까? 다음 날 오전 수업까지 들으려면 너무 피곤하실 겁니다.”
“그럼 김래빈이 재워주면 되잖아.”
“예? 그, 갑작스럽게 집에 사람을 들이는 건 조금.”
“예고하고 가면 돼? 그것도 안 돼?”
“그,”
“가정해 보자. 내가 여기에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취했어. 막차까지 끊긴 상태야.”
뭐라고 더 말해보려는 래빈의 입을 막듯, 자라는 빈 맥주잔에 거품이 반 이상 그득 차도록 맥주를 콸콸 따랐다.
“그… 아, 감사합니다!”
“그럼 나 길바닥에 버리고 갈 거야? 난 친한 사람이라고는 래빈이 너밖에 없는데.”
제가 하겠습니다! 래빈은 소주를 대충 맥주잔에 털어 넣어 맥주를 마저 부으려는 자라의 급하게 붙잡았다. CXSS로고가 반쯤 잠길 만큼만 딱 맥주를 채워 넣고 나서야 자라에게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일단, 형을 집에 데려가기 싫은 게 아닙니다. 정돈되지 않은 상태라 갑자기 남을 들이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남이야?”
“가,족은 아니지 않습니까…?”
눈을 흘기는 자라의 옆모습을 쳐다보다가 래빈은 어색하게 맥주잔을 들어 보였다. 짠. 잔이 부딪히자 황금빛 물결이 작게 출렁였다. 목울대 몇 번 꿀꺽거리는 것만으로도 한 잔을 단숨에 비워버린 자라는 래빈을 끌어안으며 어깻죽지에 뺨을 기댔다. 래빈의 어깻죽지가 금세 뜨끈해졌했다.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면서.”
기적의 논리를 펼친 자라가 어리광 부리듯 뺨을 몇 번 더 문질렀다.
“그야 형은 저보다 연상이시고…. 형도 동아리 선배들을 다 가족이라고 생각하진 않잖습니까.”
“그쪽은 선배고, 나는 형이잖아.”
웃기지도 않은 유치한 논리를 내세우며 자라는 계속 억지를 부렸다. 자라는 목이 타는지 혼자 연거푸 맥주를 마시다가 애착인형마냥 다시금 래빈을 끌어안았다. 형은 술기운이 오르면 스킨십을 좋아하시는구나.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많이 신경 쓰일 것 같은데. …애초에 여자친구가 있으셨던가….
“서운하다니까…. 형은 이렇게 김래빈을 좋아하는데. 우리 래빈이는 아닌가 봐….”
“아닙니다. 저도 형을 좋….”
래빈아, 끝끝내 말을 기다리지 못하고 인내심 없이 채근하는 자라의 숨결에서는 아까 전보다 더 진득한 술 내음이 났다.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일삼던 자라는 머지 않아 눈을 감았다. 곧 곤히 잠든 것처럼 규칙적인 숨소리가 이어졌다.
***
….
좋아합니다. 그 말이 왜, 끝까지 안 나왔던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