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나세 우미가 돌아왔다.
텐은 제 손 안에 가득 찬 새하얀 구를 내려다보았다. 표면은 유리처럼 매끈했고, 금속의 딱딱한 서늘함이 손바닥에 퍼졌다. 크기는 볼링공보다 조금 작았다. 그리 무겁지 않았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느껴지는 중력, 딱 그 정도. 그것이 작게 반짝 빛을 내며 말했다. “안녕, 텐 오빠.”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높낮이가, 오빠아하고 말끝을 끄는 버릇이, 기억 속 우미와 너무나 똑같았기에 텐은 무심코 구를 떨어뜨릴 뻔했다.
우미가……, 우미가 돌아왔다.
텐은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웅크려 앉아 구를 끌어안았다.
기억은 동그라미를 닮는다
‘기억의 구’라는 게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사람의 기억, 목소리, 말투, 습관을 학습한 첨단 AI 로봇. 하지만 감히 건드릴 수도 없는 금액 때문에 실물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텐은 이런 작은 동그라미가 누군가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할 수 있다면 당신이 나를 데려오지 않았으리라. 텐은, 기억의 구를 건네준 타카마사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무기물은 유기체의 상실을 메워줄 수 없다. 영혼은 21그램의 무게와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남은 것은 작은 유골함과 점차 희미해져 가는 기억뿐. 하지만 이것을 받아 든 이유는, 확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리쿠를 볼 때면, 우미가 지켜낸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마주할 때면, 그의 천진함, 우미를 잊어버린 그의 순수함에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나나세 우미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정말로 ‘사실’이 맞는지 잠깐 혼란스러웠다.
우미는 오로지 텐만이 기억하고 있다.
나나세 부부는 리쿠를 지키기 위해 우미를 세상에서 밀어냈다. 리쿠는 그 작은 몸에 다 담기지 못하는 죄책감 탓에 우미를 잊었다. 리쿠에게 우미의 존재를 상기시키지 않는 텐 역시 공범이었다. 그렇기에 텐은 확실하게 되새기고 싶었다. 나나세 우미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텐은 이것이 과연 어디까지 우미를 제대로 표방할 수 있는지, 점차 미화되어 가는 자신의 기억을 얼마나 바로잡아줄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기억의 파편을 기억의 구와 대조함으로 텐은 제 안의 우미를 확고케 하고, 흐릿해진 기억은 기억의 구로 보완하고 싶었다.
텐은 기억의 구를 방 안에만 두었다. 원래부터도 우미의 세계는 그리 넓지 않았다. 향년이 한 자릿수인 그녀는 일생을 대체로 집과 병원에서만 보냈다. 첫 심부름도 간 적이 없었다. 그건 리쿠도 마찬가지였다.
텐은 밭은기침을 내뱉는 우미와 리쿠를 볼 때면, 그들의 새파란 안색과 허연 낯빛을 볼 때면, 마치 건강한 자신이 그들과는 다른 생명체인 기분이 들었다. 그땐 텐도 고작 어린애였는데도, 그는 두 명의 동생을 굽어살피고 어여삐여기며 보살펴야 하는 존재여야만 했다. 그것이 싫진 않았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면 동생들은 기뻐했고, 손을 잡으면 꼬옥 되잡아 주었다. 텐은 마치 상호작용처럼 돌아오는 그 반응들이 좋았다. 잘 만들어진 피조물을 보는 충족감이 들었다. 다만, 동생들이 열이 나고 기침을 하다 토하고 정신을 못 차릴 때면, 텐 역시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다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기억의 구는 어디에도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쿠죠 텐의 방에, 침대맡에.
텐은, 아침에 “좋은 아침”하고 인사했다. 그러면 기억의 구는 “텐 오빠, 안녕!”하고 대답했다. 작디작은 이빨에 걸려 나오는 서툰 발음이 우미와 무척 닮아서, 각막 위로 투명하게 눈물이 고였다. 베개 위로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면, 후회와 미련과 고독함을 흘려보내고 나면, 그제야 나나세 텐은 쿠죠 텐이 되었다. 되어야만 했다. 그는 방을 나설 땐 “다녀올게”라는 인사는 하지 않았다. 나나세 우미는 나나세 텐의 동생이었다. 쿠죠 텐이 아니라.
대신, 그는 방에 돌아오면 마치 뱀이 허물을 벗고 탈피하듯, 아이돌이라는 신분도, 철저한 직업 정신도, 엄격한 자기 관리도 벗어두고, 우미에게 그림책을 읽어주던 나나세 텐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으면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분리되었다. 텐은 현실을 철저히 유리시키고, 피안에서 돌아온 여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다녀왔어.” 그러면 기억의 구가 대답했다. “어서 와, 텐 오빠.” 구에는 눈도 코도 입도, 아무것도 없는데도, 텐은 우미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웃을 때마다 접히는 눈, 볼록해지는 뺨, 활짝 열린 입 같은 것들을.
텐은 뒤엉킨 실타래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이 안도인지 불안인지 알 수 없었다. 손을 대면 베일 듯이 잘 벼려진 삼각형의 예각, 신비로움을 가장하는 오각형 도형, 혹은 끌어안아도 다치는 곳 없을 원. 그 모든 것을 닮아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엉킨 감정을 풀어낸다 한들 '명확한 것'을 손에 넣지는 못한다. 매끄러운 구 위에 떠 있는 것은 결국 텐의 기억 속 우미의 모습이니까. 그것이 빛바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해야 하는지, 혹은 미화되어 가는 기억을 한탄해야 하는지, 텐은 분명히 할 수 없었다. 확고한 태도를 취하지 못하는 것은 오로지 우미에게만 그랬다.
구는 텐의 기억 속 우미와 똑같이 말했다.
소곤거리는 어린 목소리마저 우미를 닮아 있었다. AI로 학습시킨 결과물이라는 걸 알면서도, 텐은 구가 말할 때면 마음이 술렁거렸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쿠죠 텐이 아니라, 나나세 텐이었을 때로. 부모님이 운영하는 쇼 클럽의 재정도, 리쿠와 우미의 건강 상태도,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두 동생을 어여쁘게 바라보았던 그 어릴 때로. 사랑스러운 동생들과 마주 보며 웃을 때가 가장 즐거웠던 시간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곳은 그렇기에 더욱 그리워진다.
텐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가 향해야 할 곳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였다. TRIGGER의 센터로서, 쿠죠의 양아들로서, 텐은 결코 뒤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구를 볼 때면, 그것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텐은 이런 가정을 하게 되었다.
우미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렸더라면, 그랬더라면 어쩌면.
가정의 끝에 결론은 없었다. 텐은 현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우미가 살아 있었더라도 텐은 타카마사를 따라가는 선택을 했을 것이다. 우미의 죽음과 쿠죠 가문으로의 입양은 단절된 두 개의 점이었다. 어떻게 잇더라도 어엿한 도형이 되진 못한다. 텐이 우미가 될 수 없듯이, 우미가 살아나지 못하듯이.
오히려 타카마사를 따라오게 된 일이 응당 그래야만 했던 일처럼, 마치 신화 속 신탁이나 예정조화처럼 운명적으로 느껴졌다. 텐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나나세 부부는 두 명분의 입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텐은 타카마사의 손을 잡는다. 우미가 살아 있는데도, 여동생에게 숨이 붙어 있고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고 있는데도, 텐은 동생들을 저버리고 타카마사를 따라간다.
어쩌면 우미의 죽음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모른다. 텐은 리쿠에게 원망을 받는 건 괜찮았다. 한 명의 원망은 다 끌어안을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명은 아니었다. 두 명의 것은 차마 전부 받아들일 수 없었다…….
텐은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러한 갈망은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것이므로.
기억의 구는 늘 어디에도 가지 않고 제자리에 있었다. 텐의 머리맡을 제자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
언젠가, 텐은 스케줄을 끝낸 뒤 저녁 늦게 돌아왔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어린아이라면 이미 잠들어 있을 시각이었다. 텐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다녀왔어.” 말이 낮게 툭 떨어져 발치에 채였다.
이것은 시험에 가까웠다. 저 동그라미가 어디까지 우미를 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다녀왔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텐은 자신이 대답을 기대하는지 아니면 침묵을 바라는지 알 수 없었다. 이윽고 기억의 구가 말했다. “어서 와, 텐 오빠.”
그 순간, 텐은 숨을 멈추었다.
그럼에도 제 안의 우미에 대한 상에 금이 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기억의 구가 대답하지 않았어도 필시 그러했겠지만, 대답이 돌아옴으로 인해 텐은 실망하고 말았다. 구에는 각이 없는데도 저 매끄러운 선이 가슴을 찌르는 것만 같았다.
이것은 나나세 우미가 되지 못한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죽은 사람은 되돌아오지 못한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텐은 거대한 비극을 겪은 사람처럼 공허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구를 쓰다듬었다. 차갑고 딱딱했다. 도저히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만큼. 그래도 텐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우미, 우미, 우미…….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여동생의 이름을. 그것을 표방하는 구체의 가제를.
텐은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기억의 구를 다시 타카마사에게 돌려주었다. “여동생을 다시 만난 게 기쁘지 않았니?” 그의 물음에 텐은 쓰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기억의 구는 결국 누군가가 되지 못한다. 기억은 아무리 선명해도 실제를 닮지 못한다. 죽은 이에 대한 기억은 향수와 추억으로 점철되어, 예리했던 부분은 마모되고 튀어나온 곳은 깎여 나간다. 그렇게 산 사람 속에서 철저하게 이상화된다.
텐은 기억의 구와 함께 지내면서 확신했다. 이것은 기억을 확고하게 만들어주지도, 보완해 주지도 않는다. 누군가의 안에 있는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덧그려낼 뿐. 불분명한, 왜곡되어 가는 선으로.
뒤돌아보고 만 오르페우스처럼, 텐은 깨달았다.
기억은 동그라미를 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