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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보다 ‘에블린 카터’라는 활동명으로 더 알려진 소피아 블랙웰은 처음부터 크게 두드러지는 배우는 아니었다. 많은 영국인 배우들이 그랬듯이, 그녀의 첫사랑도 윌리엄 셰익스피어였고 그렇게 무대로 향하게 되었다. 무난한 데뷔와 크게 흠잡을 곳 없는 연기, 그리고 대본을 해석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집요함까지.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에 입단한 뒤에는, 몇몇 평론가로들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세기를 풍미할 재목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던 그녀에 대한 평가는 한 영화에서 조연을 맡으면서 완전히 다른 빛깔을 띠게 됐다.

로맨틱 코미디의 조연으로 등장한 그녀는 지금까지 보여준 정극 연기에서 탈피하여 위트가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연기를 선보였다. 동그란 생김새에 어울리는, 발랄하고 활기찬 역할로 관객들의 뇌리에 각인된 소피아는 주연 배우들이 갈등을 벌이고 있을 때도 작품이 유머러스함을 잃지 않도록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렇게 무대 밖에서도 ‘에블린 카터’라는 이름이 언급되었다.

하지만 거기서 그녀의 연기가 멈추었더라면, 이미지가 고착되었을 것이다. 항상 보여주는, 명랑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만족하지 못한 소피아는 새로운 영화에서 다시 한번 제 인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20세기 중반의 스팀펑크 세계에서 칠흑 같은 어둠을 틈타 자경단으로 활동하는 사립 탐정이 된 그녀는 감정이 실릴 때의 목소리가 갈라진다는 평가를 의식하기라도 한 듯, 나지막한 발성으로도 고혹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 그렇게 그녀는 ‘유쾌한 소녀’ 같은 역할에서 벗어나 연기의 지평선을 확장했다. 최근에는 굵직한 상에 여러 번 노미네이트되고 있을 정도로 주가가 오르고 있을 정도였고, 비록 아직 수상하지는 못했지만, 그 또한 시간 문제라는 반응이 지배적이었다.

소피아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입 모아 칭찬하는 부분은 그녀가 여전히 연극 무대에 꾸준히 오른다는 점이다. 많은 배우들은 실버스크린으로 진출할 때는 영화 연기에 집중하는 편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연극과 다른 분위기와 연기 방식에 적응하기 힘들었으니. 그런데 소피아는 연극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 첫사랑을 떠날 수 있겠냐,고 그녀는 웃으며 인터뷰했고 실제로도 매년 꾸준히 극단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리고 다이무스는 그런 소피아의 연기를 빠짐없이 챙겨봤다.

 

* * *

 

우수에 찬 표정으로, 눈을 아래로 내린 소피아가 한가득 담긴 포스터가 붉은 벽돌벽에 붙어있었다. 스스로를 감싸안은 듯한 모습은 처연해 보이면서도, 제 앞의 사람과 적극적으로 시선을 마주하지 않겠다는 고개에서는 고집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이무스는 하염없이 그 포스터를 바라봤다. 햄릿. 아버지의 시해 사건과 정치적인 불안감, 그리고 숙부와 어머니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덴마크의 왕자를 주인공을 내세운 연극이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주인공, 햄릿 왕자를 중심으로 홍보가 진행됐다. 중견 이상의 연기자들이 등장한다면 숙부 클로디우스까지도 홍보의 중심에 섰다. 이번에는 햄릿의 가련한 연인, 오필리아를 맡은 소피아를 전면적으로 내세울 정도로 그녀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그런 홍보에 소피아는 겸연쩍어하면서도 뿌듯해했다. 다이무스는 수줍어하던 소피아가 내민 팸플릿을 조심스럽게 받아서 사무실 책상에 고이 모셔둔 상태였다. 햄릿은 이미 몇 번이나 본 공연이라 팸플릿을 예습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소피아가 준 선물을 허투루 관리할 그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소피아의 얼굴을 그리는 곡선과 그 선들이 이루는 모든 빛과 그림자를 사랑했기에 시선이 머무는 곳에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다만, VIP 초대석 티켓은 다시 봉투에 잘 넣어두고 당일까지 꺼내지 않았다. 그는 초대받는 것과 별개로 항상 본인이 표를 예매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초대석이 비어 있으면 마음이 아프므로, 초대석이 비지 않도록 꽃다발을 대신 앉혀두고 그 대신 다이무스는 다른 곳에서 소피아의 연기를 조용히 감상하곤 했다. 그리고 무대가 마무리되면 소피아는 그 꽃다발을 회수해 갔고, 다이무스가 제게 보내는 찬사의 향기로움을 만끽했다.

다이무스는 제 연인이 다른 이들에게도 사랑받는 걸 바라보기만 해도 좋았다. 영국을 넘어서 유럽, 유럽을 넘어서 미국까지도 그녀의 표정과 손짓, 목소리와 침묵에 매료되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소피아가 향하는 곳을 지척에서 관찰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가장 빛나는 건 소피아 본인이었다. 사람들의 박수를 들으며 벅차오르는 표정에서 반짝이는 아름다움은, 볼 때마다 다이무스의 가슴을 뛰게 했다.

이번에도 소피아가 보낸 VIP석에는 다이무스대신 꽃다발이 있을 예정이었다. 소피아는 짐짓 토라진 말씨로 왜 직접 전해주지 않냐고, 백스테이지로 와도 되지 않냐고 할지도 몰랐다. 그러면 다이무스는 소피아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엷은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대답할 테다.

 

“수줍어서 그런 거니, 미안하다.”

 

 

오늘의 공연도 성공적이었다. 배우들이 하나씩 나와서 박수를 받고 소피아도 그중 하나로 등장했다. 소피아가 남자 주연과 함께 손을 잡고 나오고는 죽음에 의해 갈라진 연인처럼 애틋하고 다정한 포즈를 취하다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다이무스는 소피아가 이렇게 배역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순간이 경이로웠다. 배역에 몰입하는 배우들은 많고, 몰입하지 못하는 배우는 그보다 많았다. 하지만 소피아는 배역의 몰입에서 벗어나는 순간, 가장 생동감 넘쳤다.

어쩌면 그의 콩깍지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의문에 대한 정답을 찾지 못한 채, 다이무스는 항상 그랬던 것처럼 꽃다발과 꽃 사이에 숨은 카드로 제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극장을 빠져나오는 사람들과 함께 나섰다.

 

집에 도착한 다이무스는 소피아의 다음 공연을 예매했다. 연극이 올라오는 시즌에는 소피아의 연기를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좋았다. 영화관의 거대한 스크린에 비치는 그녀도 좋았고, 드라마의 생생함을 담은 그녀도 좋았지만, 무대에 선 소피아는 특별히 더 빛났다. 반려견 루나의 귀 뒤를 살며시 긁어주면서 혼자만의 조용함을 만끽하던 다이무스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머, 둘이 똑같아요!”

 

방금 루나랑 똑같았던 거 알아요, 당신? 명랑하게 웃으며 소피아가 들어왔다. 얼굴을 반쯤 가린 트렌치코트 깃을 내리고, 마스크를 벗은 그녀의 곁으로 다이무스가 다가가서는 손을 내밀었다. 자연스럽게 제 코트를 넘겨주면서 반가움에 펄쩍 뛰는 루나를 진정시키던 소피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아내와 같은 극장에 있다가도 혼자 오신 다이무스 홀든씨 아닙니까?”

“같은 극장이지만 반대편에 있었으니, 어쩔 수 없지.”

 

토라진 것처럼 말하지만 사랑스러운 어투다. 다이무스는 소피아의 코트에 주름이 가지 않도록 깔끔하게 걸어두며 생각했다. 그러자 그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피아가 뒤에서 그를 와락, 끌어안고는 계속해서 투덜거렸다.

 

“그렇긴 한데, 연애할 때처럼 당신이랑 같이 걸어오는 것도 좋았을 텐데. 오늘은 어디에 앉았어요? 왜 내가 주는 티켓은 안 써요? 마음에 안 들어요?”

 

소피아가 다이무스의 등에 얼굴을 부비며 조잘거렸다. 다이무스는 제 허리를 감싼 아내의 손가락 사이로 손을 밀어 넣고 손깍지를 끼고 그 보들보들하고 통통한 손등에 살짝 입 맞췄다.

 

“티켓을 더 예매하면 좋지 않나?”

“참나, 당신이 내 에이전시예요?”

 

그렇게 받아쳤지만, 다이무스의 입맞춤이 기분 좋아서 소피아는 얌전히 그에게 손을 내어주었다. 그렇게 부부는 잠시 침묵을 음미했고 남편의 등에 천천히 볼을 문지른 소피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윽고, 그녀가 다이무스의 허리를 살살 매만지며 속삭였다.

 

“그래요, 여기가 우리의 백스테이지니까. 너그러운 내가 용서해 드릴게요.”

 

그리고 다이무스는 그 뻔뻔스러움이 못내 사랑스러워, 제 허리를 만지는 아내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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