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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용 노동 상담은 국번없이 1350(유료)

"안 받아요."

"왜요?"

 

청려의 손가락에서 종이 한 장이 펄럭인다. 방금까지 빳빳하게 몸을 곧추세우던 것이 아래로 수그러졌다. 종이를 반쯤 휘었다가 손가락에 힘을 푼 탓이다. 안 받는다는 말을 하자마자 손에 힘을 풀어버린 게 얄밉다. 까맣고 길쭉하고 매끄러운 종이, 저 종이 한 장의 원가는 고작 몇백 원이겠지만 정가는 18만 원이다. 중고 장터에서는 …… 마지막으로 봤던 게 백이십이었던 것 같다. 팔려는 쪽이 아니라, 구하려는 쪽이 내놓은 가격이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이 몇 분 만에 매진되었다는 기사는 심심찮게 보지만, 명실상부한 1군 남돌, 그중에서도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있는 VTIC의 콘서트는 위세가 다르다. 몇 차례 보강을 거듭했다는 티켓 사이트의 서버를 터트리고, 몇 초만 새로고침을 늦게 해도 내 앞에 대기자만 수십만 명이 서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1분은커녕 1초만 지나도 티켓이 매진되는 일이 다반사인데 장장 1년 반에 걸친 월드 투어를 마치고, 신곡 공개가 확실시되는 간만의 '국내' 콘서트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같은 프로그램에 몸을 담고 있는 선배는 딸이 티카인데,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고 눈이 퉁퉁 부어서 학교에 갔다는 얘기까지 들었다. 왜 매크로 새끼들을 안 조지냐고. 딸은 현관을 나서기 전까지 티켓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고 했다.

청려는 지금 나한테 애도 울릴 수 있는 종이를 들이밀고 있다. 안 받는다, 말을 했음에도 멀어지지 않는다. 희고 단단한 손은 곧은 뼈대를 자랑하며 여전히 허공에 떠 있다.

 

"왜 당연히 받는다고 생각하시죠?"

"좋아하잖아요."

"뭘요?"

"내 얼굴."

 

입꼬리가 비죽하게 올라가는 건 고의가 아니었다. 물론 좋아한다. 그러나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청려의 행동을 감당하며 옆에 남아있는 이유는 첫째, 그가 업무에 상당히 중요한 인맥이며 둘째, 내가 그에게 굳이 연을 끊는다는 말을 할 정도로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이었고, 셋째, ……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얼굴은 고작 세 번째 정도인데 당연하게 가장 먼저 얼굴을 들이미는 저 사고방식은 가진 자의 기만이었다. 앞에서 미약한 바람이 분다. 청려가 티켓을 흔들고 있다. 보고 싶지 않아요? 콘서트. 작가님이 좋아하는 의상도 있을 거예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꼭 뱀처럼 교묘하다. 그나저나 이거 콘서트 스포 아닌가.

 

"아니, 물론 좋아하는데…… 그날 쉬는 날이거든요?"

"네, 알아요."

"쉬는 날까지 연예인 얼굴 보며 어색하게 인사하기 싫어요. 물론 아는 사람이 전혀 없을 수도 있지만, 전 티끌만 한 가능성도 배제하고 휴일을 지키고 싶어서요."

"……."

 

이 바닥에 몸 담근 지가 어느덧 8년 차다. 의도치 않게 예능을 전전하며 얼굴도장 찍어둔 이가 몇인데, 번호만 알고, 명절 인사나 주고받는 이들과 쉬는 날까지 어색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팔랑이던 티켓이 멈춘다. 청려는 초대권 좌석 번호를 확인하더니 이내 팔짱을 낀다. 옆으로 기울어지는 작은 고개, 낮은 침음과 함께 기댄 손가락이 톡, 톡, 느리게 팔을 찍었다.

 

"못 본 척한다면?"

"그게 그렇게 쉬울까요, 주차장에서 뒷모습만 봐도 절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모자랑 마스크."

"연예인들도 그렇게까지는 안 하겠다……."

"무시해요, 그럼. 못 들은 척하고."

"어떻게 그래요, 그것도 다 호의인데."

 

방금의 말은 완벽한 자충수였다. 삐딱하게 기울었던 청려의 고개가 바로 선다. 팔 사이에 끼워둔 게 아닌지, 여전히 반듯한 티켓이 다시 한번 몸 앞으로 다가온다. 작가님이 생각하기에, 나는 호의를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다? 뼈가 있는 말을 던지며 웃는다. 차라리 정색했으면 좋겠다, 무서우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여태까지는 안 이랬잖아요. 갑자기 이러니까 저도 부담이 되는 거죠."

"그동안은 월드 투어였으니까, 비행기 표에 숙소까지 챙겨준다고 한들…… 안 왔을 거잖아요?"

"당연하죠, 저도 일이 있는 사람인데."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그냥 받아요. 본래는 부모님 몫의 표였는데, 공교롭게도 두 분 다 첫날에는 일이 있어서. 물론 다음날 오실 거니까 마음 쓸 필요도 없고, 멤버들도 더 이상 돌릴 곳이 없다고 해서 남은 거예요. 이러면 부담이 좀 덜한가?"

"……부모님 다음이 저라니. 청려 씨, 그렇게 친구가 없어요?"

"하하, 작가님도 같은 사람이랑 비슷한 대화 패턴을 수십 번 반복하면 헷갈릴걸요. 내가 여기까지 알고 있어도 되는 건지, 아직 아닌지, 이게 무슨 의도로 말을 했던 거였는지. 이상한 꼬투리를 잡힐 바에는 안 만드는 게 낫지."

"뭔 말을 못 하게 하네."

"그래서, 이제 받는다?"

"……안 받는다고 하면?"

 

표가 아래로 뚝 떨어진다. 청려가 양손을 떨어트린 탓이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보이는 심드렁한 표정, 저 낯이 진심인지 연기인지 구분이 가질 않는다. 포기해야죠, 표는 회사에 반납하고. 이어지는 말에 희미한 성취감이 터진다. 신청려의 손에서 비로소 내 휴일을 지켜낸 거다. 낯짝만큼은 아쉬운 티를 내며 눈썹을 축 늘어트린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따위의 말을 뱉으려다가 얇은 입술이 벌어지는 걸 보며 입을 닫는다.

 

"하지만 가끔 생각날 것 같네요. 라디오나, 인터뷰, 토크쇼……. W앱을 하다가 콘서트 얘기가 나와도 문득 떠오를 것 같고."

"……네?"

"작가님의 귀중한 휴일을 위해서라니 어쩔 수 없지만, 나도 이런 기억이 별로 없어서요. 갑자기 튀어나와도 내 의사가 아닐 것 같은데, 이해 가능하죠?"

 

청려의 말이 무의식인 건 모르겠고, 내 손이 튀어 나가는 건 본능이다. 요령 좋게 청려가 팔을 위로 뻗지만 않았어도 콘서트 티켓은 이미 내 손에 있었을 테다. 용을 쓴다면 닿지 않을 높이는 아니지만 이 남자가 순순히 티켓을 내어줄지 장담할 수 없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두 손을 내밀었다.

 

"……너무 가고 싶어졌습니다."

"아뇨, 쉴 때는 쉬어야죠."

"휴일은 또 오지만 콘서트는 한 번이니까요."

 

잘 생각했어요. 청려는 내민 손바닥 위로 티켓을 사뿐히 올려둔다. 반질한 종이가 날짜와 시간을 선명하게 각인시킨다. 당신 이거 갑질이야……. 부드럽게 웃는 낯 위로 외치고 싶은 소리가 가득하지만 그저 눈물만 삼킨다. 안녕, 휴일. 안녕, 몰아보려고 빌려두었던 내 책들아. 도서관 대출 기한이 지나지 않았다면 다음 휴일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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