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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당 작품은 주의가 필요한 요소를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교살, 질식.

 

 

 

 

 

머리에 열이 몰린다. 심장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얼굴에 피가 고인다. 쇄골 사이 움푹 팬 곳을 엄지로 누르고, 기다란 손가락이 달아날 길 없이 목을 둘러 감았다. 폐에 공기를 채우려 입을 벌리고 헐떡거린다. 숨이 흘러가야 할 길이 단단히 막혀 쉰 소리가 난다. 미친 새끼야. 희미한 숨이 억지로 기도를 비집고 빠져나온다. 내뱉는 소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다. 복부를 걷어차여도 목을 조이는 손은 멀어지지 않는다. 사람 죽이는 손이 이렇게까지 예쁘면 보는 입장에서 배덕감이 든다고 낄낄거렸던 순간이 희미하다. 남의 피로 축축해진 손가락을 손수 닦아주었던 이유는 이 손이 결코 나에게로 향하지 않으리라는 오만이었다. 신재현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벗어나고자 긁었던 손등에 힘줄이 생생히 만져질 정도였다. 허나 낯짝만큼은 평온했다. 유쾌하지도, 안타깝지도 않은 건조한 낯으로 보아 내 죽음은 구겨진 휴지보다 하찮았다.

 

"미안해요, 확인해야 할 게 좀 있어서."

 

그걸 위해 내가 당신 옆에 붙어있던 게 아니었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묻기에는 숨이 모자라다. 완벽하게 차단된 숨구멍은 한마디 말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몸의 말단 부위부터 서서히 힘이 빠진다. 산소가 차단된 뇌는 이 이상의 초과근무를 원치 않았다. 물속에 잠긴 듯 시야가 흐리다. 몸뚱어리는 여전히 바닥에 붙어있는데, 안에 든 무언가가 바닥 아래로 꺼지는 기분이다. 아득하게 정신이 멀어진다.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작동을 멈추는 게 청각이라고 했던가. 틀린 말은 아닌지 꺼멓게 죽어가는 와중에도 재현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그래도…… 마지막은 당신 취향대로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었을지 모르겠네."

 

새끼, 끝까지 미친놈처럼 구네…….

 

 

 

예민한 사람

 

 

 

눈을 뜨자마자 폐는 본능적으로 산소를 찾는다.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은 등이 축축했다. 꿈인가, 아니면……. 슬리퍼에 발을 꿰어맞출 정신도 없어 맨발로 침대를 내려간다. 반쯤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끌어가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세면대 위 거울에 몇 번이고 목을 비추어 본다. 그동안의 숱한 경험상, 그 정도로 목을 졸랐으면 멍이라도 남아야 정상이다. 허나 목에는 어떤 자국도 없다. 흰 목의 구석구석을 벌레 잡듯 뜯어보아도 질식의 흔적이 남은 부위는 없었다. 사시나무 떨듯 요란하던 호흡이 잦아들었다. 여지껏 꾸었던 꿈 중, TOP 5 안에 들어가는 개꿈이었다. 몇 시지. 습관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화장실에 시계를 걸어두는 이는 드물다. 악몽에 비명을 지르던 뇌는 잠기운이 빠진 지 오래다. 어차피 일어날 거 세수라도 하고 나가자. 수도꼭지를 냉수로 돌리고 세면대의 물을 튼다. 매끄러운 대리석 위로 물줄기가 쏟아진다. 세면대의 굴곡을 따라 둥그렇게 미끄러지거나 사방으로 튀다 배수구의 구멍을 타고 빠져나간다. 수마는 달아난 지 오래임에도 뭉그러진 정신은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다. 넋이 나간 것처럼 초점 없는 시선은 흐르는 물보다 배수구에 더 많은 지분을 둔다. 물이 흘러야 할 통로를 사정없이 막고, 저들끼리 고이는 형태가 꼭…….

아, 씨발. 불현듯 치밀어오는 구역질을 참을 재간이 없다. 몸을 수그리고 다급하게 변기의 테두리를 쥔다. 위장이 꿀렁거리며 몸을 뒤틀 때마다 누런 위액이 새며 목을 지졌다. 저 구멍이 제 숨구멍도 아닌데, 드문드문 올라오는 기포가 꼭 버둥거리던 꼴 같아서 숨이 막힌다. 주체가 없으니 공포를 해소할 길이 없다. 차라리 위장에 뭉쳐지면 좋을 텐데. 속이 이 정도로 울렁거리는 걸 보면 제 털을 게워내는 짐승보다 말끔하게 토해낼 수 있었다. 더는 나오는 게 없었으나 경련을 시작한 위가 온몸을 비틀어댄다. 제 몸을 가누지 못해 변기에 반쯤 머리를 처박은 꼴이다. 산성이 훑고 지나간 목이 따갑다 못해 욱신거린다. 이물질이 걸린 것처럼 간지럽고 불편해 헛기침했다.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 몰래 술 마셨어요? 오전 여섯 시인데."

 

고개를 뒤로 돌릴 것도 없었다. 재현이 문틈 사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는 재현의 집에서 잠이 들었다. 별다른 일이 있었던 건 아니고, 내 소관이 아닌 잡무로 달달 볶이다 보니 새벽 두 시였다. 집까지 온전히 갈 정신이 없어 침대를 빌렸다. 흘러내린 위액과 침으로 엉망이 된 턱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절 미친 새끼로 보시네요."

"일하면서 그런 케이스를 좀 봐서, 아니면…… 이상하네요. 콘돔 없이 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제정신인가……."

 

제 행동이 잠을 깨운 게 분명하여, 잠시나마 미안했던 마음이 모조리 사라진다. 변기 커버를 덮고 물을 내린다. 미처 잠그지 못한 수도꼭지의 아래에서 손을 씻고, 물을 받았다. 입안이 온통 시다. 찬물로 여러 차례 헹구니 신맛은 가셨으나 점막 곳곳에 굳은 기름이 들러붙은 느낌이었다. 가글 없나. 세면대 옆 선반을 열어 내부를 살핀다. 자그마한 리스테린이 있다. 목에 안 좋아요. 손을 뻗기도 전에 재현이 선반의 문을 닫는다. 텁텁하고 꾸덕거리는 느낌이 싫어 물을 미지근하게 돌린다. 손바가지에 물을 채우고 입을 헹구려 고개를 드는 족족 거울 너머 재현과 눈이 맞았다. 대답을 요구하는 시선이다.

 

"그냥 꿈자리가 좀 안 좋았어요."

"일어나자마자 뛰쳐나갈 정도로?"

 

평소라면 그보다 시시껄렁한 토픽이 없다는 낯으로 그래요? 하고 말 얘기였는데, 재현은 드물게 뒷말을 덧붙인다. 무슨 꿈이었는데요? 단순한 개꿈이었으니 사실대로 얘기해도 무방할 테지만 뒤로 따라붙을 말들이 뻔했다. 지금은 '선오 씨는 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나 보네.' 따위의 빈정거림을 받아낼 기력이 없었다. 재현은 눈치가 좋다. 적당히 넘어가는 것을 알아차릴 테지만 동시에 내가 적당히 넘어가야만 하는 이유 역시 알 것이다. 다시금 되새기니 저 낯을 필터 없이 바라볼 자신이 없다. 입속에 든 것은 없었으나 뒤로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거울로 보는 낯 정도가 적당하다.

 

"트라우마랑 좀 밀접한 꿈이어서요. 어릴 때, 그러니까 중학생 때나, 초등학생 때 말고, 내 목도 제대로 못 가누고 종일 누워 있어야 했던 시기에, 그때 저 외갓집에서 자랐거든요. 우리 할머니는 부녀회장이었고, 할아버지는 교회 간사님이셔서 외가에는 늘 손님이 많았어요. 아마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났던 시기가 아닌가 싶어요. 아무튼, 보통 저는 안방에서 모빌이 달린 아기 침대에 누워있다가 손님이 오면 가끔 얼굴마담이 되는 역할이었는데, 그날은 드물게 내가 거실 소파에 누워있더라고요. 무슨 모임인지, 왜 누워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이 내가 있는 줄 모르고 그대로 소파에 앉았어요. 그것도 얼굴 위로. 엄청 오래된 일이잖아요, 지금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이렇게 말하니까 별로 대단치도 않고. 근데 그게 나한테는 좀 충격이었나 봐요. 아직도 생생해요, 얼굴이 짓눌리는 느낌이나 생각보다 딱딱한 사람의 엉덩이, 숨통이 꽉 막히는 느낌 같은 거……. 결론은, 그래서 숨이 막힐 만한 상황이나 감각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게 생각이 날 만한 꿈을 꿨다, 그 말이에요."

 

생각보다 길어진 말에 조져진 목이 욱신거렸다. 선반을 닫으려 잠시 내부로 들어왔던 재현은 문틀에 기댄 채였다. 애초에 대단한 반응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다. 긴말은 '나 힘들다, 기운 없다, 시비 걸지 마.' 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적신다. 이로써 침대로 돌아간다는 전제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허나 되도록 신재현은 침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용건도 없이 남 세수하는 거나 보고 있을 정도로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는 이가 아닌데 재현은 수도꼭지의 레버를 완전히 잠글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다.

 

"이건 처음 듣네."

"그래요? 계속 나랑 일했다면서."

 

신재현은 이상한 사람이다. 2년 전의 나는 밥 벌어먹고 살길이 마땅치 않아 남의 치부를 팔며 살았다. 곱게 말하면 민간조사업체였고, 쉽게 말하면 흥신소였다. 큰돈을 번 건 아니었으나 동년배의 평균보다는 쏠쏠했다. 타인의 약점을 파는 주제에 내 안전에는 민감하여 3대 로펌 출신이라는 변호사를 고용하여, 법적인 책임을 교묘하게 회피했고 덕분에 등본에는 빨간 줄 하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굳이 홍보를 하지 않아도 일이 들어와 인맥이 아니고서는 사무실도 찾지 못하도록 꽁꽁 숨었다. 이대로 몇 년, 적당히 돈을 모아 예금을 들고 들어오는 이자로만 먹고사는 청렴한 생활을 할 생각이었는데……. 그 인생 계획을 하루아침에 무너트린 게 재현이었다. 재현은 불쑥 예약도 없이 찾아와 당신이 필요하니 하던 걸 모두 정리하고 자신과 일을 하자는 얘기를 했다.

차라리 사무실로 찾아왔다면 일이 이렇게 꼬이지는 않았을 텐데, 재현이 누른 건 자택의 벨이었다. 타인의 인생을 팔며 바라기에는 거창했으나, 내 모든 행위는 미래의 평탄한 삶을 위한 일이었다. 그러니 전체 수입의 삼 할을 떼어가는 변호사를 두었고, 영업의 중심이 되는 사무실도 숨겨가며 발각되지 않게 살았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집 주소를 들켰다는 공포감에 모든 걸 정리하고 제안을 수락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하지만 신재현이 이상한 이유는 이딴 게 아니었다. 재현의 '일'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내가 이곳에서 발을 뺄 수 없을 무렵 나는 물었다. 내가 거절하면 어쩌려고 그랬어요. 재현은 '선오 씨가 거절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라고 답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했다. 재현의 말에 따르면 그는 인생을 수십 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다시 살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다, 거기까지는 듣지 못했다.

 

"우리 이게 몇 번째 만남인데요?"

"양손은 다 채우고도 남았을 텐데,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필요하지 않은 수치를 세는 버릇은 없어서."

 

매번 그렇게까지 나랑 친하지는 않았나 봐요. 젖은 얼굴을 닦아내려면 필연적으로 등을 돌려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몇 마디의 대화가 꿈속의 재현과 현실의 재현 사이에 얇게나마 벽을 세웠다는 점이다. 마른 수건으로 얼굴의 물기를 닦는다. 특정 시점부터 반복되는 인생. SF 소설에나 나올 법한 문장이지만 그 말을 믿어도, 믿지 않아도 내 인생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래도록 얼굴을 맞댈 이라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속이 편했고 나는 신재현의 회귀를 믿었다. 머리야 두면 마르니, 얼굴의 물기만 제거하면 될 일이다. 수거함으로 던져넣었던 수건이 재현의 손에 안착한다. 그런가 봐요, 나는 늘 선오 씨와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재현은 화장실의 문틀에 기댔던 몸을 세운다. 젖지 않은 부분으로 물이 튄 부분을 부드럽게 털어준다.

 

"그래도, 배까지 맞댄 건 이번이 처음이네요."

"허, 전 항상 변하는 것 없이 그대로일 텐데 이번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기셨을까……."

 

굳이 한 마디를 더 붙여 상대방을 언짢게 만드는 건 시작부터 가지고 있던 버릇일까. 재현은 수건을 다시금 수거함으로 던지며 어깨를 으쓱였다. 대부분 할 말이 없거나, 하고 싶지 않을 때 저랬다. 정말 처음인 건지 짐작하고 싶진 않다. 타인의 이야기로도 귀가 어지러운 마당에 굳이 과거의 날 끌고 와 뼛가루까지 털어먹을 필요는 없다. 재현은 거실로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출입구에 서 있다. 아무튼, 그런 꿈이었어요. 이제는 비켰으면 하는 마음이 커 나누던 이야기를 끝냈다. 눈치도 좋은 인간이 팔짱을 낀 채 여전히 버티고 있다.

 

"할 말이 남았어요?"

"꿈에서 말이에요."

"그건 이제 그만 얘기하고 싶은데요."

"혹시 내가 선오 씨 목을 조르지 않았어요?"

"……."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은데."

"……이런 꿈을 꾼 게, 내가 처음이 아니에요?"

 

아니면, 회귀하다 보면 사람 마음도 읽나? 터무니없는 뒷말은 생략했다. 글쎄요, 어떨까. 재현의 대답이 명확하지 않다. 만약 이전 회차에서 같은, 혹은 비슷한 꿈을 꾼 내가 있었다면 이 사람이 한가하게 화장실 앞에 서서 잡담이나 주고받는 이유가 티끌만큼은 이해가 됐다. 비록 그 기반이 동정일지, 위로일지, 혹은 비슷한 꿈을 꾼다면 행동 패턴도 동일한가, 따위의 확인 절차일지는 알 수 없으나 내 입장에서는 배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속이 왜 이렇게 미슥거리지. 중요한 무언가를 놓친 것처럼 찜찜한 기분이 석연치 않다.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재현이 제공하는 단편적인 것들뿐이다. 하나, 대부분의 과거는 누군가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달라지지 않고. 둘, 신재현은 회귀 중 얻은 괜찮은 정보는……. 넌지시 힌트라도 줄 목적이었는지 벌어지려던 입을 노려본다. 재현은 내가 멱살을 쥐어 잡아도 도망가지도, 불쾌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파리하게 시든 낯을 내려다볼 뿐이다. 비슷한 꿈을 꾼 내가 있었다면 재현은 트라우마를 처음 듣는다는 말 따위 하지 않았을 테다. 애초에 내 과거에 친히 개입하여 사건을 바꿔놓을 만한 인물은 빌어먹게도 신재현 말고는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진짜…… 재현 씨를 믿고 싶어서 하는 말인데, 죽였어요? 나를?"

"앞뒤가 좀 안 맞네요. 얼굴은 이미 철천지원수를 보는 표정인데."

"말 돌릴 생각 하지 말고요. 이거 꿈 아니죠, ……전생이에요?"

"음, ……사정이 조금 있어서요."

"사정은 무슨 빌어처먹을 사정!"

 

한껏 애석함이라도 자아냈다면 역함이 덜했을까, 사정을 운운하기에는 마주 본 낯이 싱거워 고양된 감정마저 헛것 같다. 애매한 기시감은 간혹 재현의 곁에서 느꼈으나, 그 대상이 결코 자신이지는 않으리라 착각하며 무시했던 감각이다. 오래 곱씹지는 않는다. 한껏 절망하거나 배신감에 치를 떨 여유는 내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눈앞의 이가 지난 생에 나를 왜 죽였을지, 죽여놓고 이번 생에 왜 나를 다시 찾았는지, 무슨 생각으로 꿈이 아님을 자각시켰는지, 내가…….

내가……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한번 죽어놓고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살을 갉아 먹어가며 상대를 이해하려던 행동에 맥이 풀린다. 굳이 재현을 이해할 필요성을 찾을 수 없다. 찾고 싶지도 않다. 손이 떨릴 정도로 부여잡았던 옷깃을 놓고 고개를 떨군다. 무어라 말을 얹으려 입술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길게 숨을 들이켜고 고개를 든다. 재현은 여전히 한결같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버티고 서 있는 몸을 치울 생각이 없는 것 같아 가슴팍을 밀쳤다. 미동도 하지 않는다.

 

"비켜요, 난…… 이제 당신이랑 일 안 해."

"무슨 사정인지 궁금하지는 않아요?"

"내가 나 죽인 새끼 뒷사정까지 궁금해해야 합니까? 그동안 내가 얼마나 관대하게 굴었으면, 그렇게까지 호구로 보였지……."

"앞으로는 그런 일 없을 거니까."

"그런 말이 다 진짜면 전과범은 왜 있을까요."

"확인해야 할 게 있었어요."

 

죽어도 제 의지로는 비키지 않을 목소리다. 새벽부터 악몽과…… 악몽이 아니지. 차라리 악몽인 편이 좋았을 것과 구역질로 떨어대던 몸으로는 차마 저걸 밀어낼 수 없다. 끝내 두어 발짝 멀어진다. 적어도 신재현이 팔을 뻗어도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화장실 벽에 기댄다. 혼란이 식은 몸이 서서히 싸늘해져 습관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지껄여봐요.

 

"내가 좀 곤란했거든요."

"내가 알 바는 아니죠."

"선오 씨와 관련된 일로."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이조년의 시조를 사랑할 정도로 고풍스러운 성장 과정을 보내지는 않았는데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르는 까닭은 별 것이 아니다. 나는 기억에도 없는 이 사람의 시간을 자꾸만 헤아리게 되는 버릇에 이런 다정은 나를 좀먹는 병이 맞다는 시답잖은 생각 탓이다. 나야 고작 2년에 약으로도 쓸 수 없는 치졸한 배신감뿐이라지만 이 사람은 나의 몇 배나 되는 '나'를 만나온 사람이다. 금방이라도 죽이고 싶었다가 또 숨 쉬듯 재현에게 약해지는 꼬라지가 스스로도 볼만하다. 두통이 가시지 않아 양쪽의 관자놀이만 누른다. 계속 …… 해봐요. 애초에 신재현의 입을 막았어야 했는데. 자그마한 수작도 부릴 수 없게, 잘 벼려진 혀를 움직일 수 없게, 애초에 숨도 쉴 수 없게 손가락으로 목을 촘촘하게 동여매고…… 실속 없는 망상으로 머리에 열이 오른다. 공백이 길어지는 탓이다. 재현은 흔치 않게 말을 고르는지 매끄러운 손으로 제 입술을 여러 차례 매만진다.

 

"알다시피…… 나는 목표가 있는 사람이거든요. 근데 지난 생의 선오 씨는 나를 좀 혼란스럽게 해서요."

"죽어야 할 정도로요? 뒤통수라도 쳤나."

"아뇨,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마음이라도 편했지. 당신은, 당신과 내 목표를 저울질하게 만들었어."

 

예상과 크게 다른 말이다. 뒤통수를 쳤다거나, 정보를 빼돌렸다거나, 먼저 죽이려고 했다거나, 대충 말은 달라도 비슷비슷한 맥락의 이유를 유추했는데 모두 꽝이다. 도무지 얼빠진 표정을 갈무리할 수가 없어 벌어진 입이라도 다물고는 재현에게 눈길을 둔다. 처음의 공백이 길더니 재현은 자신이 해야 할 말의 정리를 모두 끝낸 듯했다. 퍽 멍청하게 보일 낯을 마주하고도 웃음기 없이 짜인 대본을 읽는 것처럼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느 날 문득 당신만 있으면 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계획에 차질이 좀 생겼어요. 당신은 나한테 쓰다 버릴 장기 말 같은 거였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졸 하나를 살리려고 장을 죽이는 순간이 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먼저 졸을 죽였어요. 대체할 수 있는 졸은 많으니까."

"……당신 지금 무슨 말 하는지 알아요?"

"그런데, 졸만 죽여서 될 일이 아니더라고. 깨달았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는 걸. 그래서 다시 시작했어요. 신기하죠? 정말 졸을 살리려고 장이 죽었잖아요. 아무튼, 당신 없이는…… 일이 안 되더라고. "

"내가 너무 뛰어나서?"

"아뇨, 내가 당신이 보고 싶어서."

 

마음 같아서는 재현의 모발을 뽑아 아무 키트에 넣고 싶다. DNA가 신재현의 것이 맞는지, 맞다면 지금 제정신인지, 제정신이라면…… 이제 딱히 숨통을 막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반으로 갈라보고 싶다. 정수리부터 정확하게 절반으로 갈라 저 몸은 대체 어떻게 구성되어 있길래, 매 순간 색다르게 자신을 기막히게 하는지. 재현은 이야기가 끝나 속이 후련한 듯싶다. 허공에서 작게 손뼉을 치더니 보다 산뜻한 어투로 말했다.

 

"장기는 그만뒀어요. 대신 체스를 두기로 했지."

"그럼 뭐해요, 난 여전히 폰일 텐데."

"네, 다만 퀸이 되겠죠."

 

세상에서 제일 산뜻한 미친 새끼가 나직하게 웃었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더는 버티고 서 있을 자신이 없었다. 하하, 쭈그려 앉은 채 웃었더니 신재현이 따라 웃는다. 천산갑처럼 몸을 둥그렇게 말 작정으로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가 머리만 벅벅 긁었다. 다시 고개를 드니 재현이 눈앞에 있었다.

 

"살다 살다 이딴 구린 고백을 다 받네……."

"그래도, 당신 취향인 거 알아요."

 

.

.

.

 

나는 제 발로 화장실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혹사당한 몸이 최종적으로 파업을 선언했다. 재현에게 짐짝처럼 들리는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신재현의 애착 짐짝 노릇은 처음이라, 어깨가 아닌 양 팔 위에 있는 몸이 어색하긴 했다.

 

"근데요, 나 아까부터 자꾸 걸리는 말이 있네?"

"뭔데요?"

"당신이 꿈, …… 지난 생에 그랬거든요. 내 취향대로 준비했다고. 아까도 그렇고, …… 대체 재현 씨가 생각하는 '내 취향'은 뭐예요?"

"음, 간단한데."

 

재현이 무언가를 하려다 잠시 봉쇄된 팔을 내려다본다. 흠, 짧게 숨을 내쉬고 짐짝을 고쳐 든다.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몸이 쑥 꺼질 게 분명한 자세에, 급하게 두 팔을 재현의 목에 두른다. 아씨, 떨어지는 줄. 재현은 내 두 다리를 허리춤에 걸치고는 손목 부근으로 허벅지 밑을 받쳤다. 그 뒤로 뭘 하려나 싶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거실만 두어 바퀴 돈다. 침대에 버려달라고 했던 내 말은 잊은 게 분명하다.

 

"말 안 할 거면 저 그냥 좀 자도 될까요? 지금 진짜 피곤한데."

 

팔을 걸친 김에 늘어져 있었더니, 재현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다. 옆통수끼리 톡톡 부딪히는 게 귀찮아 상체를 세웠다. 신재현의 기깔나는 얼굴이 코앞에 …….

 

"보여주려고 했는데, 고개를 안 들어서."

"……아 진짜 존나 짜증 난다……."

 

부정할 수도 없는 취향이었다. 난 내가 대단한 권력이 없는 평범한 소시민임을 ……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미인으로 망치는 건 나 하나면 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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