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유의 마을, 페르제스트.
이곳은 정령들과 인간 마법사들이 함께 살며 아픈 이들을 돌봐주는 곳이었다. 마을은 오늘 유난히 활기찼다. 마법사 하나가 성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몰리는?”
“또 약초 찾으러 간 것 같은데.”
“얼른 와야지. 곧 성년식인데.”
“금방 올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머니.”
몰리의 모친이 안절부절 못하는 와중에도 그녀의 친구는 괜찮다는 듯 웃었다. 대체 어디까지 약초를 캐러 간 것인지. 성년식이 코앞이건만! 불안한 마음으로 모친은 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몰리 레인저스는 마을에 있는 아동, 청소년 마법사들 사이에서 맏이이자 중급 마법사였다. 상급으로 가기에는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력이 부족했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넘치는, 열정적인 마법사였기 때문이다. 몰리는 최근에 읽은 서적에서 흥미로운 약초를 발견했고 성년식을 앞둔 지금, 그것을 찾으러 갔다.
“그러니까 위치가 어디라고 했더라.”
헤르뎀 꽃. 그것은 태초에 자리 잡은 불의 정령이 피워놓은 것으로 인간 마멉사에게는 감히 허락되지 않은 명약이었다. 생으로 먹거나 즙을 바르면 장기에 입은 상흔이나 병까지도 낫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치유의 마법사인만큼 몰리에게는 가장 흥미로운 재료였다. 헤르뎀 꽃은 아무 곳에나 자라지 않았다. 그래, 그러니까.
“하일론.”
하일론은 앞서 말한 불의 정령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상스레 페르제스트와는 지척에 있는 곳이었으나 어른들은 몰리에게 늘 말하곤 했다.
“몰리. 명심하렴. 절대로 하일론에는 가면 안 된다. 그 곳에 가면 너는 다시는 예전처럼 살 수 없어.”
어째서 하일론에 가는 것이 금기시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대강 파악해 보자면 위험한 곳이기에 어중간한 마력을 가진 몰리에게는 큰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는 호기심이 왕성했고, 결국 하일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년식 전까지만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면서.
하일론은 검고 깊은 숲을 지나야 나왔다. 몰리는 안전을 위해 마법진을 치고 등을 밝혔다. 천천히 나아가는 동안 그녀는 한 번도 숲 끝까지 가 본 일이 없다는 것을 자각했다. 도대체 하일론에 무엇이 있기에 모두가 그녀를 말렸던 걸까. 축축한 땅을 밟고 끝까지 거의 도달했을 즈음, 갑자기 뭔가가 그녀의 시야를 덮었다.
“뭐야!”
“여기까지 온 인간은 오랜만이네. 한 백 년 만인가?”
이물감이 사라지자 몰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붉은 여우 정령이 그녀 눈앞에 나타났다. 둥실둥실 공중에 떠 있는 정령은 그녀를 보고 말했다.
“그런데 뭐 하러 왔어?”
“그게.”
“흠.”
정령이 몰리를 한 번 보더니 슬금슬금 그녀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뭔가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뜨고는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에 몰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바라는 게 뭔데?”
아까와 달리 정령의 목소리가 낮고 은근해졌다. 몰리는 이상한 것을 감지했지만 그것이 호기심에 미치지는 못했다.
“헤르뎀 꽃.”
“아아. 그거라면 내가 갖다줄 수 있지. 너는 못 갈 곳에 있거든.”
“내가 왜 못가!”
“너, 중급 마법사잖아. 아니야?”
훑어보면서 마력까지 감지한 건가. 정령이 한 말에 몰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정령이 씩 웃었다.
“상급 마법사들도 목숨 걸어야 갈 수 있는 곳을 네가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네가 직접 찾으러 갈래, 아니면 죽을래?”
살벌한 물음에 몰리는 한숨을 푹 쉬었다. 찾으러 갔다가 성년식 전에 요절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갖다 줘.”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이 뭔데?”
“그건 갖다 오고 말해줄게.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 정령은 숲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몰리 앞에 낯선 여우 인수가 나타났다. 그는 손에 검붉은 꽃을 들고 씩 웃었다.
“주문하신 헤르뎀 꽃 왔습니다, 레이디.”
“뭐, 뭐야?”
“뭐긴. 아까 너랑 이야기했던 그 정령이지. 자, 얼른 받아.”
어리둥절해하던 몰리가 꽃을 받아들었다. 불의 정령들이 사는 곳에 있는 것이라 그런지 꺾인 꽃인데도 열이 느껴졌다.
“자, 그러면 이제 조건을 말할 때인가?”
“그래서. 그게 대체 뭔데.”
“간단해. 네가 나와 계약하는 거야. 쉽지?”
계약. 몰리가 눈을 깜빡였다. 성년식이 되면 마법사들은 평생을 함께 할 정령과 계약을 해야 했다. 페르제스트의 마법사들은 늘 봐 오고 친숙한 정령들과 계약을 해 왔고 몰리도 그럴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뒤이어 들려온 정령의 말 때문이었다.
“상급 마법사들이 목숨을 걸고 갔다 와야 하는 곳에 당당하게 들어가 꽃을 꺾어 오는 정령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 최상이라고. 너도 대단한 힘을 가진 마법사가 되고 싶지? 제약 하나 없이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약초를 얻을 수 있는 마법사 말이야. 난 그걸 이뤄줄 수 있어. 어때?”
몸이 약하다는 이유로 온갖 곳에서 제약을 받아 온 몰리였다.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부모조차 ‘네가 약하게 태어났으니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그녀는 거의 모든 것에서 제약을 받았다. 하지만 강해진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정령이 한 말도 허풍이 아니었다. 그가 말한 대로 헤르뎀 꽃은 하일론의 용암에서 피었고, 실제로 페르제스트 출신 상급 마법사들이 꽃을 찾으러 갔다가 죽은 경우도 많았다. 그들조차 함부로 갖지 못한 꽃을 주는 정령. 몰리는 다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계약 성립이네. 아, 맞다. 내 이름은 제이크야.”
“나는”
“알고 있어, 몰리 레인저스. 오늘의 성년식 주인공.”
제이크가 몰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어라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었다. 몰리의 눈이 감기고 천천히 몸이 기울었다. 그는 그녀를 받쳐 안아들고 작게 속삭였다.
“잘 부탁해, 북극성의 아가씨.”
왠지 모를 아득함에 눈이 감겼던 것 같았는데 몰리가 겨우 눈을 뜬 건 저녁 노을이 어슴푸레 보일 시각이었다. 화들짝 놀란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정신이 드느냐?”
대마법사의 물음에 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처한 얼굴로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대마법사가 한숨을 쉬었다.
“나와 네 부모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기어이 하일론에 갔다 왔구나.”
“그게. 숲까지는 다녀왔는데.”
“몰리. 대마법사님께 토를 달면 못 쓰잖니!”
어머니의 질책에 그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찌 되었든 지은 죄가 있으니 무어라 할 말도 없었다. 대마법사가 말했다.
“네가 만난 여우 정령은 최상급의 마력을 지녔다. 그런 대단한 것이 왜 너에게 꽃을 주며 제안을 했을까? 이상하다고 생각하진 않느냐?”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호기심이 앞섰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몰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래 전, 그러니까 백 년 전 페르제스트에 초대 대마법사님이 말씀하셨다. ‘북극성이 뜰 때 태어난 아이가 하일론에 간다면 생명을 쉬이 잃는다.’고 말이다. 급이 낮은 마법사가 하일론의 정령과 계약을 맺으면 단시간에 목숨을 잃는다. 정령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한 가지지. 마법사가 죽고 난 뒤 피어난 꽃을 삼키기 위해서란다. 북극성이 뜰 때 태어난 마법사가 피운 꽃이 가장 향기롭다 더구나. 너는 그런 계약을 한 거야.”
엄습해오는 두려움에 몰리의 얼굴이 굳었다. 계약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이미 본인도 느껴질 정도로 마력의 파동이 달라지고 있었다. 덜컥 겁이 난 얼굴로 대마법사를 보고 있노라니 여우의 모습을 한 제이크가 대마법사 머리 위를 빙 돌았다.
“괜한 말로 꼬맹이 겁주지 마.”
“제이크?”
“말라깽이같은 꼬맹이가 피워낸 꽃이 뭐가 맛있을 줄 알고 그런 말을 해?”
저걸 그냥. 두려움이 순식간에 날아가고 몰리가 거침없이 그를 향해 공을 던졌다. 하지만 제이크는 가뿐하게 공을 피하는 듯 하더니 입으로 덥썩 물어 다시 몰리 손에 내려놓았다.
“과격하기도 하지.”
“야!”
“아무튼 걱정 마. 그게 가장 맛있다는 이야기는 나도 들었는데, 확실한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잘 버텨, 몰리. 내 힘이 강해서 죽지는 않더라도 죽기 직전까지 갈지도 모르거든.”
“어디 가!”
“아플지도 모르는 레이디를 미리 간병할 준비하러 간다고 하면 되려나. 아무튼 며칠 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 그리고 페르제스트의 대마법사.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잠깐, 제이크라면. 하일론의 정령왕?”
“그만 이야기 하라니까. 레이디 기겁할라. 그럼 난 갔다 올게, 몰리. 쉬고 있어.”
제이크는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제게 계약을 제안한 자가 정령왕이라니. 혼란스러운 이야기들이 연달아 들려온 바람에 몰리는 침상에 쓰러지듯 누웠다.
“몰리!”
“저 좀 쉬고 있을게요. 죄송합니다, 대마법사님.”
그 말을 끝내고 몰리가 눈을 감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제이크가 말한 대로 죽기 직전까지 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불이 그녀의 몸을 감싸서 태우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굴복할 수 없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모두가 자신을 억압하는 곳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이를 악물고 마음 속 화마를 견딜 작정이었다. 순간 제이크가 가져다 준 헤르뎀 꽃이 떠올랐다. 필사적으로 그녀가 꽃을 집으려는 찰나 시원한 감촉이 느껴졌다.
“성질이 제법 급한 레이디였구나, 몰리는?”
“어지럽고 뜨거워.”
“알아. 그렇지만 헤르뎀 꽃으로는 안 돼. 그건 마력 외의 상흔에만 반응하는 약초니까.”
여우 인수의 모습을 한 제이크가 그녀를 쓰다듬자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몰리는 눈을 감은 채로 물었다.
“네 능력으로 가라앉히는 거야?”
“그렇지?”
“불의 정령인데 이상하네. 물을 끼얹어 준 것 같아.”
“왕이잖아. 그래도 대단한걸. 중급 마력으로 며칠이나 버티다니.”
“놀리는 거야?”
“놀라는 건데. 보통 이 정도 마력을 받아들이면 5분 만에 죽어.”
“끔찍한 소리도 가감 없이 하네.”
“칭찬하는 거야. 정신력이 대단하다고. 이 정도 버텼으면 슬슬 마력을 운용하는 법을 알려줘야겠네.”
제이크가 하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몰리는 차츰 정신이 돌아왔다. 제이크는 여전히 그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상했다. 뭔가 편안한 기분이었다. 괴롭게 한 상대에게서 느낄 만한 것이 아니었다.
“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몰리의 물음에 제이크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붉은 귀가 쫑긋거렸다.
“북극성이 뜰 때 태어난 마법사가 죽고 난 뒤에, 핀 꽃이 그렇게 정령에게 맛있는 거야?”
“몰라. 나도 먹어본 적이 없거든.”
“왕이라며.”
“백 년 전에 왕이 됐는데 그동안 너 같은 경우는 없었거든. 다들 순진하고 착실해서 위험하다고 하면 곧잘 말을 들었어. 그런데 네가 특이한 경우였던 거야.”
“내가 겁 대가리 없다는 말이네, 결국.”
“그래서 마음에 들기는 해, 사실.”
시원해진 몸으로 몰리가 다시 침상 위에 앉았다. 그러자 제이크가 그녀 옆에 앉아 씩 웃었다.
“또 뭐가 궁금해?”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을 것 같은데?”
몰리는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백 년 전에도 있었다고 했으니 무슨 일이든 자신보다는 금방 꿰뚫고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제이크가 말했다.
“북극성의 아이는 모든 정령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야. 특히 강한 정령일수록 관심을 갖지.”
“왜? 능력이 자기보다 부족할 텐데. 당장 나도 그렇잖아.”
“뭐, 그것 외에 사정이 좀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지금은 좀 어때?”
“괜찮아.”
“다행인걸.”
제이크는 나긋하게 그녀를 쓰다듬더니 금방 평소와 같이 여우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금세 눈을 감고 고롱고롱 잠든 그를 보며 어처구니 없다는 듯 쳐다보던 몰리도 작게 키득이다 눈을 감았다. 기묘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