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스페라도, 전에 그 아가씨랑 아직 계속 만나?”
데스페라도는 갑작스러운 물음에 총을 정비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싱글벙글 웃고 있는 블래스터는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저 물음에선 악의는 느껴지지 않았다. 필시 무슨 대단한 정보를 캐내려고 묻는 건 아니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데스페라도는 그것만으로도 불쾌함을 느끼고 냉정하게 대꾸했다.
“누구?”
“누구긴 누구야. 그 뱀파이어 아가씨 말이야.”
그래. 누굴 이야기하는 건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냥 더 묻지 말라는 의미로 저리 대꾸한 거였는데, 굳이 구체적으로 답하다니.
저건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모른 척하는 거다. 그걸 모르지 않는 데스페라도는 미간을 구기고 상대를 노려봤다.
“그건 왜 물어?”
“아니, 네가 침입자랑 사이좋게 지내는 게 신기해서.”
“친하긴 무슨.”
딱히 친하다고 할 만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가끔 마주치면 이야기를 하는 정도로 친하다고 하기엔 부족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데스페라도의 생각과 달리, 늑대인간인 동족들은 두 사람을 충분히 ‘친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데스페라도는 부족 안에서도 유명한 파수꾼이었다. 늑대인간의 영토에 들어온 이방인은 누구든 놓치지 않았고, 그게 부족의 원수와 같은 뱀파이어라면 반드시 제압했지. 그런 데스페라도가, 뱀파이어 아가씨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고 하면 누구나 놀라지 않겠나. 공격하지 않고 놓아 준 것만으로도 놀라울 텐데, 자주 만나는 사이가 되었다 하면 역시 친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블래스터는 딱딱한 대답만 하는 상대를 빤히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그 여자가 마음에 들어?”
그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얼어붙는다.
데스페라도는 총을 만지던 걸 그만두고 자신을 응시하는 블래스터랑 눈을 똑바로 맞췄다. 아까 전까진 냉담하긴 했어도 험악하진 않았던 그의 눈빛이, 지금은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반응에 아차 한 블래스터는 두 손을 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니까.”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순찰이라도 하고 와.”
“네, 네.”
직접 답하진 않았지만 저 행동은 충분히 좋은 대답이 되어주었다. 블래스터는 그걸로 족한지 히죽 웃으며 자리를 떴다.
가뿐한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상대를 기분 나쁘다는 듯 노려본 데스페라도는 정비가 끝난 총을 챙겨 제가 둘러봐야 하는 구역으로 향했다.
‘대체 그 유품이 뭐길래.’
블래스터가 말한 그 뱀파이어 아가씨, ‘루엔’은 아직도 계속 늑대인간의 영토에 드나들고 있었다. 동족의 유품을 찾기 위해서 온다고는 하지만, 대체 그 유품이 무엇이기에 아직도 찾지 못하고 이곳에 발을 들인단 말인가.
어쩌면 그냥 유품은 핑계고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자신과 나누는 이야기는 사사로운 것들뿐이니 짐작이 가질 않았다.
“데스페라도 형!”
생각에 잠겨 걷는 그는 제 옆으로 바짝 다가온 작은 그림자의 부름에 멈춰 섰다.
아직 다 자라지 않아 제 키의 반밖에 오지 않는 어린 동족은 얇은 줄에 보석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내밀며 웃었다.
“이거 봐, 예쁘지?”
“……이건?”
“골짜기 근처 풀숲에서 주웠어!”
목걸이를 자세히 살펴본 그는 새빨간 보석 장식 밑쪽에 적혀있는 문자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이 문자는 분명 뱀파이어들의 나라에서 쓰는 문자였다.
‘이건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루엔이 찾는 그 유품이라는 걸.
아무래도 그녀는 거짓말은 하지 않은 모양이다.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어린 동족에게 손을 내밀었다.
“줘.”
“뭐? 갑자기, 왜?”
“이건 뱀파이어의 물건이야. 위험하니 내놔.”
“히익.”
뱀파이어라는 말을 듣자마자 자그마한 몸의 털들이 쭈뼛 선다. 어른들에게 여러 무서운 이야기를 들어온 탓인지, 아이는 이러쿵저러쿵 따지지 않고 냅다 목걸이를 넘겨주었다. 괜한 입씨름은 하고 싶지 않은 데스페라도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그는 혹 물건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받은 목걸이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거 어떻게 할 거야, 형?”
“처분해야지, 기분 나쁘니까.”
“으응…….”
모처럼 발견한 신기한 물건이 제 손을 떠나는 게 아쉬운지, 소년은 서운함 가득한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안쓰럽지만, 데스페라도는 소년의 편을 들어줄 수 없었다. 이걸 찾는 이가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데, 어찌 엉뚱한 손에 넘겨주겠나. 그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오늘은 오려나.’
루엔은 3일에 한 번 꼴로는 얼굴을 비추는 편이었다. 요 며칠간은 보이지 않았으니, 오늘은 올 확률이 높다. 이렇게 숲을 돌아다니다 보면 또 기척도 없이 나타나 말을 걸어오겠지.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순찰이나 마저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발을 떼려는 순간.
“!”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더니, 날카로운 공격이 제 목을 향해 날아든다.
다행히 빨리 살기를 눈치챈 데스페라도는 몸을 돌려 공격을 피했고, 칼날은 허무하게 그의 옷깃을 스쳐 지나갔다.
리볼버를 뽑아 들고 물러선 그는 거리를 두고 착지한 습격자의 얼굴을 보았다. 눈처럼 희고 창백한 피부를 가진 청년은 검을 고쳐 쥐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저 복식과 생김새. 분명 뱀파이어다.
데스페라도는 곧바로 반격하려던 걸 멈추고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뭐야, 너?”
“그 물건을 내놓으십시오.”
뱀파이어는 주머니를 향해 칼끝을 겨누었다. 그 언행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데스페라도가 뭘 갖고 있나 파악하고 덤벼든 모양이었다.
게다가 얼굴은 낯설어도 목소리는 익숙한 것을 보니, 어쩐지 그가 누구인지 알 것 같기도 하다. 데스페라도는 제가 루엔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마다 저 멀리서 들려왔던 목소리를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네가 그 녀석이군, 제너럴이라고 하던가?”
이름을 불린 청년은 어깨를 움츠렸다. 자신은 통성명한 적도 없는데, 어떻게 정체를 들킨 것인지 의아한 모양이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그 녀석에게 들었거든.”
그 녀석이 누구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제너럴 또한 루엔이 눈앞의 늑대인간과 자주 만나 이야기하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조각상같이 아름다운 얼굴을 구기는 제너럴을 보고 소리 없는 비웃음을 지어 보인 데스페라도가 상대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늘은 혼자 나섰나? 그 녀석은?”
“제가 왜 당신에게 엔의 행방을 알려줘야 합니까?”
“하긴, 알려줄 의무는 없지.”
날이 선 반응을 능청스럽게 넘긴 그는 주머니에서 유품을 꺼내 흔들었다.
“이건 그 녀석에게 전해줄 테니, 본인을 불러와.”
“이해가 안 가는 요구이니 거절하겠습니다. 굳이 엔에게 전해줄 필요는 없으니까요. 저에게 넘기십시오. 그러면 얌전히 돌아가겠습니다. 전 싸우러 온 게 아니니까요.”
“내가 그러기 싫으니까, 데려와.”
“자꾸 그러시면 강제로 빼앗아가겠습니다.”
“네가? 그럴 수 있겠나?”
상대의 검술 실력은 잘 모르지만 웬만한 실력으로는 제 살가죽을 찢지도 못할 거다. 동족들에게는 최고의 파수꾼이라는 말을 듣고, 뱀파이어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알려진 제가 쉽게 질 리 있나.
데스페라도는 여차하면 정말 죽여버릴 생각으로 총의 안전장치를 풀었고, 제너럴 또한 일격에 목을 벨 생각으로 자세를 고쳤다. 하지만 두 사람의 긴장감 넘치는 대치상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잠깐!”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나타난 것은 아까 전부터 대화에 계속 언급되었던 인물이었다.
급히 뛰어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한 루엔은 서로를 노려보는 데스페라도와 제너럴을 번갈아 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대체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야?”
보면 모르나, 싸우려고 하는 거지.
그렇게 답하려던 데스페라도와 달리 제너럴은 곧바로 검을 내리고 루엔에게 다가갔다.
“엔, 어떻게 여기에…….”
“그건 제가 할 말이에요. 제너럴이 왜 여기 있어요?”
제너럴은 중앙귀족이다. 늑대인간의 숲에 오갈 정도로 한가한 처지가 아니었다. 같은 뱀파이어라서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루엔은 수상하다는 듯 그를 훑어보았다.
제너럴이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입을 다문 사이. 데스페라도는 들고 있던 목걸이를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마침 잘 왔어. 이거, 네가 찾던 거지?”
“응?”
그제야 데스페라도가 들고 있는 물건을 본 루엔의 두 눈이 커졌다. 그가 들고 있는 건 분명 제가 오래전부터 찾아다니던 동족의 유품이었다.
“세상에, 어디서 찾은 거야?”
“풀숲에서 꼬맹이가 찾아왔더군. 너희 문자가 적혀있어서 이게 유품이구나 싶었지.”
“아하.”
루엔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목걸이를 받았다. 혹 어디 흠이 난 곳은 없는지 면밀하게 유품을 살피던 그는 곧 물건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데스페라도에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이 은혜 잊지 않을게. 가요, 제너럴.”
“……네.”
검을 뽑은 이상 저 늑대인간과 승부를 내고 싶지만, 자신들의 목적은 애초에 이 목걸이였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먼저 자리를 뜨는 제너럴과 달리, 루엔은 이대로 떠나는 게 아쉬운지 데스페라도를 한 번 더 보고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아쉬운 건 데스페라도도 마찬가지였던 걸까.
“루엔.”
떠나려는 그를 부른 데스페라도가 잠깐 침묵했다가, 물어도 괜찮을지 모를 질문을 던졌다.
“이젠 안 올 건가?”
그답지 않은 질문이다.
루엔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미소가 지어지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글쎄다. 더는 올 목적이 없긴 한데…….”
장난스럽게 말한 루엔은 데스페라도의 굳은 얼굴을 보곤,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라 판단한 건지 곧바로 솔직한 마음을 드러냈다.
“네가 보고 싶으니까 가끔은 올까. 아, 물론 무사히 돌려보내 줄 거라고 약속한다면.”
“수상한 짓만 안 한다면 나도 공격 안 해.”
“정말이지? 약속이야.”
히죽 웃은 그는 제너럴과 너무 거리가 벌어지기 전 떠나버렸다.
우두커니 남은 데스페라도는 한숨을 푹 쉬고 근처 나무에 기대앉았다.
‘어쩌자고 그런 말을 했지.’
다시는 볼 일 없을 거라고 해도 모자랄 판에. 뱀파이어와 친하게 지내려 하다니, 제가 미쳤지.
하지만 이미 뱉어버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데스페라도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늘 높이 뜬 달만 바라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