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리쬐는 햇볕이 따뜻한 토요일 아침.
아줄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고 담화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는 플로이드에게 다가왔다.
“플로이드, 아이렌 씨와 연락됩니까?”
제이드가 맞춰 둔 알람 때문에 원치 않게 일찍 깨어 부족한 잠을 보충하고 있던 플로이드는 가늘게 뜬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한 손에는 스마트폰을 꼭 쥔 채 가만히 서 있는 아줄에게서는 확실한 불안이 느껴졌다. 마치 아끼는 장난감이라도 잃어버린 아이 같은 꼴이다. 플로이드는 그런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웃어버릴 뻔했다. 어릴 적, 동글동글했던 아줄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뭐야? 연락이라면 아줄이 더 잘하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혹시 모르니까요. 전화를 아예 받지 않으셔서, 짐작 가는 게 없나 해서 물어보는 겁니다.”
플로이드는 그다지 믿음직한 연락원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줄이 굳이 그를 찾아온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이곳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아이렌과 가장 가까운 것은 눈앞의 이 남자였다.
아이렌의 곁을 맴도는 이는 많고, 그와 친밀한 이도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플로이드는 특별한 존재였다. 친절하고 무던하게 굴다가도 의외의 방면에서 선을 그어버리는 아이렌에게 유일하게 막역하게 굴 수 있는 건 이 남자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누구와 있더라도 플로이드와 관련된 일이라면 바로 자리를 떠버리고, 어떤 무리한 부탁이라도 플로이드의 소망이라면 다 들어준다. 그런 아이렌이니 플로이드에게라면 제 일정을 공유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아줄은 그렇게 추리했기에, 굳이 플로이드에게 와서 이렇게 추궁하고 있는 거였다.
플로이드는 잠깐 눈을 감고 침음 하더니, 고개를 기울였다.
“모르겠는데. 아, 그러고 보니 이번 휴일엔 외출한다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외출? 어디로?”
“바다로.”
“바다?”
갑자기 웬 바다인가. 그런 거라면 차라리 옥타비넬 기숙사에 놀러 와도 되지 않나.
아줄이 의아해하는 와중에도, 플로이드는 뭔가 떠오른 게 있는지 히죽 웃으며 눈을 떴다.
“뭐어, 그걸 써 보러 간 거겠지. 응.”
“그게 뭡니까?”
“아하하, 그런 게 있어.”
제기랄. 이럴 줄 알았다.
아줄은 이를 꽉 깨물고 돌아섰다. 그를 채근해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는 건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뺀질거리는 플로이드를 상대로 뭔가를 캐내는 것보다는 이미 알아낸 정보를 통해 추리하는 게 제 위장 건강에 더 좋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줄은 곧바로 믿음직한 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플로이드만큼이나 아이렌과 가까운, 또 다른 제 친우에게.
“제이드, 혹시 아이렌 씨랑 연락됩니까?”
*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거의 중천으로 향했을 무렵.
제이드에게서 믿을만한 정보를 들은 아줄은 곧바로 교외로 나와 인적이 드문 해변으로 향했다.
“헉, 허억.”
학교 건물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는 이 해변은 모래사장 여기저기 바위가 많아 섬의 주민들은 자주 오지 않는 장소였다.
정말 이런 곳에 아이렌이 있을까. 급한 마음에 체력이 좋지도 않으면서 거의 뛰는 거나 다름없는 바쁜 걸음으로 걸어온 아줄은 다급히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아이렌 씨!”
절박한 외침이 공허하게 울려 퍼진다. 여기저기를 오가며 이름을 부르는 아줄은 제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도 눈치채지 못하는지, 계속해서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 간절함에 하늘이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그가 네 번쯤 외쳤을 때, 익숙한 인영이 자신을 향해 돌아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가벼운 옷차림으로 물가에 서서 목소리를 내는 건, 분명 그가 찾고 있는 여자였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감독생. 이 학원 유일의 홍일점이자 트러블 메이커이자 해결사. 제가 모르는 세계에서 온 존재. 새까만 머리카락과 제비꽃색 눈동자를 가진 후배.
아이렌은 다급히 뛰어오는 아줄을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부를 뿐.
“아줄 선배?”
“후우, 정말로 여기 계셨을 줄이야. 그래도 바로 발견해서 다행이군요.”
겨우 한숨 돌린 아줄은 그제야 여유를 되찾고 찬찬히 상대의 모습을 살필 수 있었다.
아이렌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어 있었다. 긴 땋은 머리도, 옷도, 얼굴도 축축한 그는 파도가 발목까지 오는 곳에서 바다를 향해 서 있었다.
“뭐 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다 젖어서…….”
아이렌이 추위에 약한 건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날이 따뜻한 편이지만, 이렇게 젖은 채 바닷바람을 쐬다간 감기에 걸릴 게 분명했다.
아줄은 상대가 걱정되어, 파도가 발끝에 닿을 정도로 거리를 좁혀 다가갔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를 두고 아이렌이 몸을 돌렸다. 마주 보고 선 두 사람 사이에 소금기 있는 바람이 불어 들었다.
“바다에 들어갔어요.”
“예?”
“그냥 들어가고 싶어서요.”
아이렌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평소와 똑같은 옅은 미소를 지은 얼굴. 살짝 푸른 빛이 도는 입술 외에는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모습.
그렇지만 아줄은 상대의 돌발행동을 이상하다고 여긴 건지 미간을 구기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물속에 있는 옥타비넬 기숙사를 두고 굳이 바깥의 진짜 바다로 올 정도면, 무언가 속사정이 있는 걸 테다.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던가, 고민이 있다던가.
상대가 걱정되긴 하여도 그 생각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아줄은 바짝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마른침을 삼켰다.
“아뇨.”
“정말이지요? 그, 이상한 생각을 하셨다던가…….”
“풉.”
상대의 지나친 염려에 아이렌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절대 타인의 걱정을 가벼이 여기거나, 유난스럽다고 생각해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웃은 건 그저 제게 이렇게까지 마음을 써주는 아줄의 행동이 기뻤기 때문이었다.
“제가 선배를 두고 어딜 가겠어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달콤한 말을 내뱉는 그의 눈동자가 바다에 반사되는 햇빛을 머금고 반짝였다.
아줄은 그 눈동자가 정말로 자수정 같아 보여, 잠깐 숨 쉬는 것도 잊고 말았다.
아이렌은 누구에게나 저런 말을 내뱉진 않지만, 저런 말을 들을 수 있는 게 아줄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박애의 화신 같은 이 여자는 제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이에겐 쉽게 달고 따뜻한 밀어를 속삭여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아줄은 뛰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건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은 이미 저 온기에 길들어져 버렸으니, 몸이 반응해 버리는 걸 어쩌겠는가.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열기에 아줄이 입을 닫자, 아이렌은 침묵을 깨보려는 듯 농담 같은 말을 툭 던졌다.
“설마 모래사장에 구덩이라도 파두고 그 안에 들어가 있을까 봐 걱정했어요?”
“네?”
“아녜요, 그런 게 있어요.”
영문 모를 소릴 한 아이렌은 파도가 밀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원래 바다 좋아해요.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어요. 놀러 온 것뿐이니까.”
그래, 알고 있다. 아이렌은 바다를 좋아했다. 본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항구 도시에서 나고 자라 바다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그랬던가. 그래서 자주 옥타비넬에 놀러 와, 모스트로 라운지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거짓말이 아닌 말에 반박할 말은 없다. 아줄은 소리 없는 한숨과 함께 발치의 파도로 시선을 돌렸다.
“갈아입을 옷은 가져오신 겁니까?”
“그럼요.”
“그렇다면 다행……, 자, 잠깐. 아이렌 씨?”
찰박찰박. 물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멀어진다.
놀라서 고개를 든 아줄은 갑자기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아이렌을 보고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아이렌 씨!”
그 부름을 듣지 못한 걸까. 아이렌은 순식간에 깊은 곳까지 들어가더니 수면 아래로 사라져 버렸다.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에 머리가 새하얗게 질린 아줄은 상대가 수영할 줄 안다는 걸 알면서도, 구두만 겨우 벗어 둔 채 물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혹시나, 혹여나, 만약에라도. 아이렌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진 않을지 걱정된 탓이었다.
그러나 그것 또한 아줄의 기우일 뿐이었다.
“어라.”
발도 닿지 않는 물속에서 여유롭게 헤엄치는 아이렌은 자신을 찾아온 아줄을 의아하다는 듯 보고 있었다.
게다가 무슨 일인지, 그는 분명 인간임에도 수중에서 자연스럽게 숨 쉬고 말하고 있었다. 마치 인어처럼 말이다.
“선배는 갈아입을 옷도 없으실 텐데, 들어오셔도 되는 거예요?”
혹시 제가 지금 꿈이라도 꾸나.
아줄은 그런 생각도 했지만, 온몸을 감싸는 차가운 물의 기운은 진짜였다.
“그, 어떻게…….”
“플로이드 선배가 마법약을 만들어줬어요.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게.”
아. 이것이 플로이드가 말하지 않은 ‘그런 게 있다’인가.
아줄은 의문이 풀렸음에도 속 시원해하지 않고, 되려 새롭게 든 의문을 풀기 위해 물었다.
“왜 저한테 부탁하지 않으시고…….”
“선배는 늘 바쁘니까요. 부탁하기 죄송스럽달까.”
그건 너무나도 서운한 말이다. 아줄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이렌은 늘 이런 식이었다. 타인에게 쉽게 베풀면서 본인은 신세 지는 걸 싫어하는, 기브 앤 테이크가 제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다못해 신도 공물을 받는데, 어찌 이 여자는 그리도 타인에게 기대지 않으면서 일방적인 베풂을 행하는가.
제 서운함을 모르는 잔인한 여자는, 수면을 바라보며 혼잣말했다.
“신기하다. 물속은 어디든 다 똑같게 느껴지네요.”
아니다. 그건 당신이 인간이기에 그리 느끼는 거다. 인어인 제게는 이 바다는 고향인 산호의 바다의 것과 다르고, 기숙사의 것과도 다르다. 당신이야 이 바다에서 이 세계인 고향의 바다를 떠올릴 수 있겠지만, 자신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아줄은 그렇게 사실을 고하기보다는 침묵하기를 선택했다. 지금은 그냥,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으니까.
“그거 알아요, 선배? 사람 양수는 바닷물 성분이랑 비슷하대요.”
“……그렇습니까?”
“네. 염도도 바닷물이랑 비슷하게 3% 정도라던가.”
그래서 지금의 아이렌은 그토록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까. 고향에라도 돌아온 듯, 제가 구축되고 정립되었던 모친의 뱃속에라도 들어온 듯. 저렇게나 무방비하게 흩어지는 걸까.
“모든 생물은 바다에서 시작되었다는데, 그래서 그런 걸까요.”
아줄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로 바라보는 상대의 펄럭이는 옷자락과 머리카락은 꼭 지느러미처럼 보였다.
“이러고 있으니 저도 인어가 된 거 같아서 좋네요.”
정말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물속에서도 당신 같은 여자는 없으니, 다른 인어들이 받아줄지는 조금 걱정된다.
한참을 묵언수행 하던 아줄은 차가운 손을 맞잡고 겨우 한 마디를 꺼냈다.
“돌아가실 거지요?”
“네. 슬슬 돌아갈까요.”
아이렌은 그 손을 잡고 태양을 향해 다리를 저었다.
인어에게 끌려가는 것도 아니고, 인어를 끌어당기며 수영하는 인간은 아마 이 여자 정도밖에 없지 않을까.
아줄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허탈하게 웃었다.
*
외출 후 돌아온 아줄은 샤워 후 옷을 갈아입고 가장 먼저 플로이드를 찾아갔다.
“대체 왜 아이렌 씨에게 마법약을 만들어 준 겁니까?”
물론 찾아간 이유는 명확했다. 느긋하게 침대에 누워 쉬던 플로이드는 제 기준에선 상당히 뜬금없는 추궁에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건 내 마음 아냐? 왜 아줄이 화를 내나 모르겠구.”
“화내는 게 아니라, 당신이 남의 부탁을 그냥 들어준 게 신기해서 그럽니다.”
사실 화가 난 건 맞다. 혹시나 무슨 사고라도 생기면 어쩌자고 덜컥 마법도 쓰지 못하는 아이렌에게 마법약을 만들어 준 건지, 그 무책임함에 화가 나긴 했으니까. 그렇지만 굳이 거짓말을 한 건, 제 감정보다 더 중요한 게 있기 때문이었다.
아줄의 추궁이 장난이 아님을 느낀 걸까. 플로이드는 상체를 일으켜 앉더니 제 나름 성실히 답해주었다.
“그냥, 아기새우가 뭔가 부탁해 온 게 신기해서?”
“허어?”
“아기새우는 곤란한 일이 있어도 본인이 해결하려고 하지 남에게 부탁 같은 건 안 하잖아? 그런데 갑자기 나보고 ‘마법약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해서 재미있어서 해줬어.”
겨우 그런 이유로, 라고 하기엔 설득력 있는 이유였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아줄이었다.
누구에게도 약한 소리는 하지 않으려는 아이렌이 도와달라 말한다니. 웬만해서는 그 기회를 놓치기 싫으리라. 본디 남자란 제 필요성을 증명하는 걸 좋아하는 족속들이지 않나.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아 하는 홍일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될 기회를 어찌 마다하겠나.
……물론 플로이드는 그런 속 시꺼먼 이유보단, 단순히 의외성에서 느낀 재미로 행동한 거겠지만. 아이렌은 또 그 단순한 반응을 좋아했을 거고.
이리 보면 정말이지 지독하게 죽이 잘 맞는 한 쌍이다. 분할 정도로, 둘은 너무 잘 맞았다.
“뭐, 대가도 제대로 받았지만. 아기새우랑 단둘이 수업 중 놀러 갔지. 재미있었는데.”
아줄의 속이 뒤틀리는 걸 알 리 없는 플로이드는 싱글벙글 웃으며 계속 입을 놀렸다.
“마법약은 잘 들었어?”
“……예.”
“흐음.”
‘같이 갈 걸 그랬나.’ 그리 중얼거리는 모습이 어찌나 얄미운지.
일은 제가 벌여놓았으면서 이리도 무책임하게 반응하니 할 말이 없다. 아무리 아이렌이 수영을 잘한다 해도, 갑자기 약효가 떨어져 잠겨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속으로만 한탄하는 아줄의 시선이 따가웠던 걸까. 플로이드는 자신을 뚫어지게 보는 상대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왜 그래, 아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 그런데 왜 빤히 봐?”
이건 능청 떠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다. 아줄은 그걸 알기에, 굳이 불편한 이야기를 제 입으로 다듬어 내뱉었다.
“당신은 정말 아이렌 씨 일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 같아서요.”
아이렌은 늘 플로이드가 최우선인데, 플로이드는 아이렌을 좋아하면서도 그보다는 자기 자신이 더 우선이었다. 아줄은 그 기울어진 저울이 상인으로서 너무나도 거슬려, 이렇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플로이드는 그 불균형에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예?”
“이해하고 생각하는 건 아기새우가 할 일. 나는 나 좋을 대로 하면 그만이야. 아기새우도 딱히 내가 신경 써주길 바라는 건 아닐걸? 아니, 아기새우는 알려고 할수록 도망쳐 버릴 거고.”
플로이드의 말에는 강한 확신이 있었다. 한 치의 의심도, 걱정도, 불안도 없는. 상대를 향한 강철같은 확신.
대체 그 누가 아이렌에 대해 이리 확신할 수 있을까. 그 믿음은 분명 애정에서 자라난 것이겠지. 아줄은 그걸 알기에 말문이 막혔다.
자신은 평생, 폭력적일 정도로 일방적인 애정을 퍼붓는 그 여자의 속내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아기새우가 날 가장 좋아하는 건 말이야.”
승리자의 미소를 짓는 플로이드는 심각함 같은 건 없는 목소리로 사실을 직시시켜왔다.
“내가 많은 걸 궁금해하지 않아서야. 아기새우는 남에 대해서 알아가는 건 좋아해도,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알아가려고 하면 화내거든.”
기형적인 교류다. 이해받지 않길 바라는 박애주의자라니. 문장으로 쓰니 그 아이러니함에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다.
하지만 저 말은 모두 참이었다. 아이렌은 제가 아는 이의 수만큼 많은 페르소나를 가지고 상대가 바라는 모습을 연기하긴 했지만, 그 누구에게도 쉬이 본모습을 보이진 않았으니까.
굳이 뒤집어쓴 가면을 벗기려 해봐야 관계만 망치고 자신도 상처 입을 뿐이다. 언젠가 고물 기숙사가 탐이 나 그에게 다가갔다가 호되게 당한 적 있던 아줄은 플로이드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마음으론 이 모순을 이해하지 못했다.
상대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아야 사랑받을 수 있다니. 그건 연인끼리의 사랑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가호받는 신도와 신의 관계에 가깝지 않나. 이해하지 못할 신의 총애를 필멸의 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이치를 모르는 신도. 자신은 정녕 그런 처지밖에 되지 못한다는 건가.
문답이 이어질수록 착잡함만 늘어간다. 그 와중에도 플로이드는 억울한 점이 있는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리고 내가 정말 아기새우에 관심이 없을 리 있어? 이렇게나 아기새우를 좋아하는데?”
“그런 것 치곤 늘 당신 좋을 대로 휘두르기만 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아기새우는 그걸 좋아하니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서 좋고, 아기새우는 원하는 대로 어울려주고. 서로에게 이득이잖아.”
말이야 간단하지, 어디 그게 쉬운 일인 줄 아는가. 상대가 제가 뭘 해도 휘둘려주고 기뻐해 줄 거란 생각을 하는 건 훈련으로 되는 게 아니다. 겉과 속이 같고 심각하게 솔직한 플로이드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뭐, 본인은 그걸 모르니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겠지만.
아아, 만인의 연인에게 최우선이 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줄은 문득 언젠가 제이드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아이렌 씨는 아줄과는 상성이 나쁘긴 하죠. 그 사람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지만, 남이 원하는 건 본능적으로 찾아내 이뤄주거나 부숴버리니까. 아줄에겐 불리한 거래 상대일 수밖에요.’
제이드는 아이렌에 대해 잘 아는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그는 아이렌이 뒤집어쓴 가면 아래 그늘에 파고들어 얼굴을 보는 대신 그림자 속에서 숨 쉬는 걸 즐기는 남자였고, 본능적으로 상대의 난폭한 면에 공명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플로이드와는 다른 방면으로 아이렌에 대하여 무어라 정의를 내릴 수 있었지.
그리고 그 의견은 아줄에게도 도움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거래 상대가 아니라면 그런 건 상관없지 않겠습니까. 베풂만 받을 수 있는 관계라는 건 귀하니까요.’
그래. 귀하긴 귀하지. 천성이 상인. 주고받는 게 익숙한 제게 아이렌은 육지에서 찾아온 축복이자 시련이었다.
그리고 아마 눈앞의 이 녀석, 플로이드에겐 더 큰 축복이었겠지.
아줄과 눈이 마주친 플로이드는 아무렇게나 벗어둔 재킷을 걸쳐 입었다.
“아기새우는 어디 있어?”
“본인 기숙사로 돌아갔습니다.”
“그래? 그럼 잠깐 다녀올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지는 얄미운 뒷모습을 노려보는 아줄의 머릿속에 또다시 제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플로이드에게는 잘된 일이지요. 바다에서도 뭍에서도, 아이렌 씨만큼 플로이드를 이해하고 받아주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요.’
자신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상대에게 어리광부릴 수 있었다면, 제가 최우선이 될 수도 있었을까.
의미 없는 가정을 한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이 총애받는 신자 역할만으로도 벅찬 자신이니, 괜한 상상은 말아야지.
땅이 꺼지게 한숨 쉰 아줄은 제 방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