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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이 끝난 후 오후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적당한 핑계를 대고 보건실로 와 수업을 빼먹은 레오나는 얕은 낮잠에 빠져있다가, 소란스러운 발소리에 눈을 떴다.

 

‘뭐야.’

 

수업 중 다친 이라도 있는 걸까. 급히 보건 선생을 찾는 걸 보니 단순히 손가락이 베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귀찮은 일에 엮이고 싶지 않은 그는 베개로 귀를 덮고 소리가 잦아들길 기다렸다. 이런다고 수인족 특유의 예민한 청각이 완전히 차단될 리는 없지만, 그래도 아무 짓도 하지 않는 것보단 이렇게라도 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시끄럽게 떠들던 목소리들은 사라지고 두 사람 정도의 숨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온다.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고 판단한 레오나는 슬쩍 베개를 치웠다. 갑갑함에서 벗어난 귀가 처음으로 들은 말은 보건 선생의 한숨 섞인 추궁이었다.

 

“아이렌, 이게 몇 번 째니?”

 

아이렌. 그 이름을 들은 레오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둔한 녀석이 다쳐서 왔나 했더니, 설마 그게 저 여자일 줄이야. 운동신경도 위기감도 없는 이 학교 유일의 홍일점은 시시콜콜한 이유로 자주 다쳤고,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사고에 휘말리는 일도 잦았다.

그렇다면 이번엔 어떤 일로 여기까지 온 걸까. 조금이나마 흥미가 생긴 그는 무슨 대화를 하는지 가만히 살펴 들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후우, 됐어. 알면 좀 더 조심해 주겠니? 너는 마법사도 아니고, 평범한 인간일 뿐이잖니.”

 

다소 매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선생의 말은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다. 아이렌은 이 학원 내에서 내세울 게 그다지 없는 학생이었으니까. 물론 그게 곧 아이렌이 절대적 약자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는 노력파에 머리도 좋은 편이고, 잔꾀도 있으며, 무엇보다 타인의 의중을 파악하고 그걸 쥐고 흔드는 일엔 이골이 난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마법사 양성학교. 마법을 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신체 능력이 뛰어난 아인종인 것도 아닌 자가 살아남기엔 가혹한 곳이었지. 애초에 거울의 실수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면, 자신의 돌아갈 방법이 있었다면, 이런 곳에 있어선 안 되는 이가 아이렌이었다.

당연하지만 머리 하나는 이 학원의 평균 이상으로 굴러가는 그는 제 처지를 잘 알고 있었다. 아이렌은 쓴소리에도 기분 상하지 않고 차분히 답했다.

 

“조심하도록 할게요.”

“그래. 학원장도 너를 걱정하고 있으니까.”

“아, 예에.”

 

방금 대답에는 묘하게 힘이 없었다. 레오나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피식 웃어버렸다. 아마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학원장이 자신을 걱정한다는 건 그다지 믿기지 않는다는 거겠지. 크로울리가 영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건, 이 학원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터였다.

 

“그럼 쉬렴. 나는 교무실로 갈 테니.”

“예. 감사합니다.”

 

한 사람의 발소리가 밖으로 향하고, 다른 하나의 발소리는 제 옆의 비어있는 침대로 향한다.

칸막이 너머의 인기척을 확실하게 인식한 레오나는 아이렌의 행동을 소리로 관찰했다.

 

“아야…….”

 

어딜 다친 것인지 아이렌은 침대에 눕자마자 앓는 소리를 냈다.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걸 보니 찰과상은 아닌 모양인데, 멍이라도 든 것인가. 하지만 멍이 든 정도로 굳이 보건실에서 쉬라고 할 필요가 있나?

부스럭거리며 침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신경 쓰인다. 레오나는 결국 발소리를 죽이고 일어나 옆 침대로 향했다.

 

“또 무슨 일로 온 거냐?”

“히익.”

 

누가 또 있는 줄은 몰랐던 건지, 아이렌은 제 옆에 다가온 커다란 그림자를 보고 어깨를 들썩였다.

꼭 겁먹은 초식동물처럼 반응하는 상대를 보며 코웃음 친 그는 상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실험복을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아이렌은 오른손에만 장갑을 끼고 있었다. 살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왼손은 화상이라도 입은 것인지 손등이 새빨갛게 부어있었다.

다친 손을 등 뒤로 감춘 아이렌이 눈을 가늘게 뜨고 대꾸했다.

 

“선배는 또 농땡이인가요?”

“네가 상관할 것 없지 않나?”

“그건 저도 똑같이 할 수 있는 말일 텐데요.”

 

하여간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꼴하곤. 레오나는 퉁명스러운 대답을 비웃음으로 넘기고 등 뒤를 가리키며 턱짓했다.

 

“그 손은?”

“다쳤어요.”

“그 정도는 보면 알아.”

 

제가 뭘 물어보는지 잘 알면서 저런 식으로 답하다니. 하여간 밉게 구는 짓에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여자다. 다른 놈들에게는 사근사근하게 굴면서 제 말투가 조금이라도 짓궂어지면 저 모양이 된다. 레오나는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나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두에게 친절한 감독생의 모난 부분을 볼 수 있는 건 어찌 보면 특별한 일이었으니까.

레오나가 지그시 바라보자 못 이긴 듯 왼손을 꺼내 보인 아이렌은 무덤덤하게 제 상태를 설명했다.

 

“수업하다가 다쳤어요. 가벼운 화상이니 잘 치료하면 괜찮을 거래요.”

“손을 다친 건데 왜 남아있지?”

“혹시 모르니 쉬었다 가라고 해서요. 저도 얼른 수업하러 가고 싶다고요.”

“하. 모범생 같은 소릴 하는군.”

 

사실 아이렌은 모범생이 맞지만.

레오나는 열기가 느껴지는 왼손을 힐끔거리다가 시선을 돌렸다. 마법 약학 수업에서 사고가 생긴 거라면 약품이 묻어 다쳤을지도 모르니 쉬었다 가라 한 거겠지. 이해는 가지만, 제 방이 아닌 곳에서 아이렌과 단둘이 있는 건 달갑지 않아 불평이 절로 나왔다.

저 녀석이 있으면 신경 쓰여서 제대로 잘 수도 없고, 쉬는 시간이라도 되면 병문안을 오는 놈들 때문에 금방 시끄러워져서 자리를 떠야 할 게 분명했으니까.

 

“조용히 있다가 가라고. 나는 자야 하니까.”

“그렇게 종일 자면 밤에 잠이 와요?”

“시끄러워.”

 

어투를 보아하니 방금 질문은 아마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은 거였겠지만, 레오나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에 냉정하게 돌아가 제 침대에 누웠다.

아이렌은 잠깐 아무 말이 없나 싶더니, ‘나 참.’이라는 작은 불평과 함께 자세를 고쳐 누웠다. 칸막이 너머로 들리는 침대와 옷이 스치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레오나는 오지 않는 잠을 다시 끌어오기 위해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노력은 곧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쉬는 시간이 되기 무섭게, 그가 가장 껄끄러워하는 인물 중 한 명이 아이렌을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아이렌, 여기 있나?”

 

우아한 걸음걸이. 차분한 목소리. 등장 만으로도 압도적인 존재감.

레오나는 자신을 지나쳐 뒤쪽 침대로 다가가는 그림자를 무시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큰 키와 삐죽 솟은 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간 말레우스는 아이렌이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말레우스 선배?”

“있었군.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나?”

“별거 아녜요. 그냥 화상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졸다가 깬 것인지 아이렌의 목소리는 살짝 잠겨있었다.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는 음성에 저도 모르게 코웃음 칠 뻔했던 레오나는 숨을 죽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것보다 어떻게 아신 거예요?”

“세벡이 제 친구에게 말하는 걸 들었지.”

“아…….”

 

‘그 녀석이.’ 아이렌은 못 말린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마 조용히 넘어가면 되었을 일을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되어 걱정을 산 게 불편한 모양이었다.

그 속내를 읽어낸 것인지, 말레우스는 채근하듯 사건의 개요를 읊어나갔다.

 

“연금술 수업 중 작은 폭발사고가 있었다지. 너는 거기에 휘말렸고. 대체 마법도 못 쓰면서 맨몸으로 옆 사람을 지키려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군.”

“제가 사는 세계의 전설에는 가끔 있었어요.”

“그건 전설일 뿐이지.”

 

후우. 깊은 한숨이 묵직하게 울려 퍼진다.

말레우스는 제가 느끼는 답답함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절대 공감하지는 않는 인간의 아이를 야단치지 않았다. 자신은 그의 선배이자 친구이고, 때로는 더 깊은 감정을 공유하기도 하는 사이였지만……. 주종관계나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렌을 상대로는 조금도 고압적인 느낌을 보이고 싶지 않은 그는 말을 고르고 골라, 신중히 내뱉었다.

 

“너는 늘 네가 해낼 수 없는 것까지 해내려고 하는군.”

“한계를 정하는 건 좋지 않으니까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일 또한 중요하다는 걸 알 텐데.”

 

그는 화상으로 엉망이 된 자그마한 왼손을 자신의 손 위에 가볍게 얹었다. 약을 발라둔 다친 손에서는 평소 나는 핸드크림의 향 대신 은은한 연고 향이 풍기고 있었다.

 

“제 몸을 소중히 여겨야지.”

“예.”

“대답만 그렇게 하지 말고.”

 

아이렌은 옳은 말에 반박할 정도로 고집뿐인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입으로는 그러겠다고 말한 후 돌발행동을 하곤 했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아이렌을 봐온 말레우스는 오히려 이렇게 순순히 원하는 답을 들었을 때 더 불안해했다.

아니나 다를까. 말레우스가 한 번 더 지적하자 아이렌은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몸은 고칠 수 있잖아요. 낫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는 썩어서 없어지고요. 하고자 하는 일에 몸을 너무 사리면 괴로워지더라고요. 중요한 건 이 그릇을 담고 있는 혼이니까요.”

“네가 다치면 걱정하는 이들이 있을 텐데.”

“있어요?”

“…….”

“……장난이에요. 여기 이렇게 있잖아요. 그렇지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 그건 인형이나 다름없잖아요. 저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인간 여자애일 뿐이지만 제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존재니까요.”

 

막힘없이 제 생각을 늘어놓는 아이렌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말레우스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꼭 80살은 족히 먹은 노인 같은 소리를 하는 후배라니. 게다가 단순히 애늙은이라고 하기엔 보편적 인류 가치관과는 다른 그 생각들은 언제나 제 흥미를 자극했다.

대체 어떤 혼을 타고나서 이런 존재가 만들어지고 태어난 걸까. 뿔도 꼬리도 없지만, 그의 눈에 아이렌은 충분히 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였다. 비록 그 육체는 나약하고 생명의 길이도 짧다 못해 허무하지만, 적어도 그는 그리 생각했다. 이 아이는 인간보다는 다른 종족에 더 가까울지 모른다고.

아아, 단생종의 마음에 장생종의 혼을 담고 살아가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상대를 흥미로워하면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말레우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혼잣말처럼 읊조렸다.

 

“……너는 도무지 인간의 아이 같질 않아.”

“그게 제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하.”

 

물론 그렇지. 제가 아이렌에게 끌리는 이유도 분명 그것 때문이니까.

허탈한 웃음을 지은 말레우스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같이 돌아갈까.”

 

호의를 담아 신사적으로 내민 손을 거절하는 건 쉽지 않을 일이다. 특히 그게 그 말레우스 드라코니아라면, 웬만한 소녀들은 쉽게 그를 따라갔겠지. 하지만 아이렌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 더 쉬었다 갈게요. 약품이 직접 손에 닿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졸리기도 하고…….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로.”

 

쉬겠다는 사람을 데리고 갈 수는 없는 법이다. 말레우스는 쉽게 아이렌의 거절을 받아들였고, 곧바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보건실 안. 도로 자리에 누운 아이렌은 금방 잠들어 버렸다.

숨소리가 조금씩 작아지고, 규칙적으로 색색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즈음.

어느새 일어나 아이렌의 자리로 온 레오나가 잠든 상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멍청한 녀석.’

 

아니, 이 녀석이 멍청하다면 이 학원의 반절 이상은 진짜 바보가 될지도 모른다. 이때는 멍청하다기보다는 불쌍하다고 해야 좋을까.

갓 태어난 영양 마냥 몸을 웅크리고 누워있는 아이렌의 땋은 머리를 가볍게 손에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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