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의 가호가 있기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저 말은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거 같다. 그리고 물론 나도 일이기에 그 말을 입에 담아야 했다. 내 앞으로 다가온 신도에게 그렇게 인사를 하며 나는 갑갑한 예배실을 빠져나와 발코니로 향했다. 재미없기 짝이 없는 이 일은 재밌거나 흥미로운 사건 하나 생기지 않고 늘 언제나 똑같이 흘러가고만 있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지만 너무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에 하품이 절로 나올 뻔한 걸 예배실에서 얼마나 참았는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오늘 인도를 맡은 사람에게 하품했단 걸 들키면 엄청난 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에 가까스로 참았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 오늘 인도를 맡았던 내 친우가 다가왔다. 표정이 영 밝지 않은 게 내가 예배하는 동안 딴생각을 한 것을 눈치챘었나 보다.
"와~하데스. 오늘 예배 인도하느라 수고 많았어~잘하던데?"
"뭐가 잘하던데?야. 하나도 제대로 안들은 주제에. 휘틀로다이우스, 네놈이 신관이라면 적어도 예배 때는 집중하는 척이라도 해야 신도들이 믿고 따를 거 아니겠냐."
성실한 하데스는 내 태도가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다 봤던 거야~? 하데스는 나한테 관심이 많구나~ 능청을 떨었더니 하데스의 미간 주름이 더 깊어졌다. 더 놀렸다간 잔소리가 두 배가 될 테니 이쯤에서 슬슬 놀리는 걸 관두고 화제를 돌려야 했다.
그때 마침 좋은 타이밍에 신관 두 명이 지나가며 흥미로운 얘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더 따지려는 하데스에게 쉿 하고 조용히 해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게 진짜야? 악마가 나타났다고?"
"목격자가 벌써 5명이나 있다고. 나도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5명 전원 같은 얘기를 하니 믿지 않을 수가 없잖아?"
악마? 이런 시대에 무슨 악마 타령인가. 얼토당토 않는 얘기였지만 따분한 일상을 조금이나마 해소하게 해줄 주제였다. 하데스도 처음에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이어지는 내용에 표정을 굳히고 들었다.
"무슨 얘기를 하던데?"
"다들 저녁에 혼자 길을 가던 중에 악마를 만났다는 거야. 처음에는 그냥 사람인 줄 알았는데 천천히 다가온 그 사람의 송곳니가 길고 날카로웠대."
"세상에...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데?"
"그게... 다 멀쩡해. 그 악마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 거야."
무슨 그런 악마가 다 있어? 하며 어이없어하는 소리를 들었고 듣고 있던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체 그런 얼빠진 악마가 다 있단 말인가. 점점 더 신빙성이 떨어져 간다. 고개를 돌려 하데스를 쳐다보니 그도 똑같은 심정인지 시간 낭비했다며 고개를 젓고는 아무래도 정신교육이 필요한 거 같다며 조금 전에 그 얘기를 하고 간 둘이 걸어갔던 복도를 그대로 뒤쫓아 갔다. 나는 저 둘에게 무사를 기원하는 기도를 한 뒤 조금 전에 들은 얘기를 복기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얼빠진 악마라...
굉장히 재밌어 보인다. 어차피 매일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중이라 따분했는데 마침 잘되었다.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적어도 이 지루한 패턴을 한번은 끊어내고 싶었던 참이었다. 나는 늦은 밤, 잠이 안 와 산책하러 나간다는 핑계를 대고 낮에 들은 대로 밤길을 혼자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그들이 말한 악마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그럼 그렇지 하며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중 어둠 속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혼자 밤거리를 걷다니. 외롭지 않아?"
목소리의 주인은 어둠에서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달빛에 반짝이는 금발과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가 확실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하기 힘든 아름다움을 갖고 있었다. 이 자가 바로 소문의 그 악마구나. 그 악마는 점점 다가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서는 손을 뻗었다.
"나랑 걷지 않을래? 외롭지 않게 해줄게..."
내 뺨에 닿은 악마의 손은 굉장히 차가웠다. 악마의 손은 차갑구나 그렇게 능청스럽게 생각하며 내 목덜미로 다가오는 그 악마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냈다. 의외로 쉽게 밀려났다.
"음~싫어."
그 악마는 움찔하더니 나에게서 거리를 뒀다.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악마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 유혹당한 거 아니었어?!"
"유혹? 그게 유혹하던 거였어?"
물론이지! 소리치던 악마는 풀이 죽은 채 주저앉아서는 고개를 푹 숙였다. 왠지 불쌍해 보였다. 그런데 그 문구와 행동이 유혹이라니...대체 어딜 봐서? 그런 말에 유혹당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이 이상 불쌍하게 만들기엔 어쩐지 가여웠다.
"이게 몇 번째 실패인지 몰라... 벌써 며칠째 굶었다고. 일어설 힘도 없어..."
이대로라면 어느 곳의 뱀파이어처럼 정어리를 먹어야 할지도 몰라~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한탄하기 시작했다.
"힘으로 하면 되는 거 아냐?"
"모르는 소리! 뱀파이어는 거절당하면 더는 다가갈 수가 없어. 그리고 힘으로 하는 건 폼도 안 살고 멋지지도 않잖아?"
의기양양하게 웃는 얼굴을 보니 웃음이 절로 터져나왔다. 악마... 가 아닌 이 뱀파이어는 유혹도 제대로 못 하면서 멋은 챙기려고 한다니. 정말 웃기고... 꽤 마음에 들었다.
"그럼 다시 허락하면 어떻게 되는데?"
"허락하면 언제든 다시 접근할 수 있지!"
되는구나? 그 사실을 확인한 뒤 나는 주머니에서 호신용 겸 잡다한 일에 쓰려고 갖고 있던 단검을 꺼내 소매를 걷고 팔을 주욱 그었다. 날카로운 칼이 긋는 선대로 화끈한 통증이 일어났고 벤 상처에서 피가 방울방울 맺히다 천천히 흘렀다.
"대체 무슨 짓이야? 자해 취미라도 있어?!"
"어라, 걱정해주는 거야? 상냥한 뱀파이어도 다 있네~"
나는 상처를 내 피가 흐르는 팔을 그에게 가까이 내밀었다. 뭔가 불만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보다가 피가 흐르는 팔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참고 있는 건지 바라보기만 할 뿐 먹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러면 내 피가 아까운데...
"왜 안 마셔?"
"내가 아무리 굶주렸다지만 인간에게 동정을 사서 제공받는 피 따위는 마시고 싶지 않아. 자존심이 있지. 난 내가 유혹에 성공할 때까지 절대 마시지 않을 거야."
마시고 싶어서 손은 덜덜 떨고 있는 주제에 자존심은 살아있다고 눈에 힘을 주고 이쪽을 노려본다. 그 모습이 정말 바보 같고 우스운데 재밌었다. 모처럼 지루한 일상을 깨주는 자를 이렇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팔을 그었던 것이고 마시지 않는다면 설득을 하는 수밖에 없겠지.
"이대로 마시지 않는다면 죽는다 해도? 죽으면 유혹에 성공이고 뭐고 끝일 텐데~"
그 사실을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건지 그제야 조금 고민하는 눈치였다. 나는 팔을 좀 더 그에게 가까이 대고 아예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훑은 뒤 입 가까이에 들이대었다.
"죽으면 끝이야. 그렇게 쓸데없이 자존심 세울 바에는 이번만 눈 딱 감고 마셔보는 게 어때?"
그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그 뱀파이어는 내 팔을 잡더니 내 팔을 게걸스럽게 핥아대기 시작했다. 혀가 상처 부위에 닿을 때는 좀 쓰라려 움찔했더니 미안했던 건지 그 후로는 상처 부위는 조심스럽게 핥는지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뱀파이어는 혀까지도 차가웠다.
한동안 내 팔을 핥아대던 뱀파이어는 얼굴을 떼고 민망한지 시선을 맞춰오지 않은 채 작게 고맙다고 하며 대가가 뭐냐고 물었다.
"대가?"
"공짜로 주는 건 아닐 거 아냐. 원하는 게 뭐야?"
대가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그저... 그래. 배고픈 길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느낌으로 들었던 것 뿐인데 대가라니. 생각하고 베푼 건 아니지만, 대가를 지불한다니까 받기로 했다. 딱히 갖고 싶은 것도 없고 하물며 누군가를 해치길 원하지도 않는데... 과연 이 뱀파이어에게 받을 게 뭐가 있을까.
"너의 유혹 연습 상대가 되는 걸 허락해줘."
"뭐? 그게 어떻게 대가가 돼. 그리고 연습 상대라니?"
"말 그대로야. 매번 유혹에 실패한다며? 도와줄게~이래 봬도 성직자고 성직자들은 말하자면 너랑 비슷하게 유혹 같은 걸 해서 상대를 꾀어야 하거든~"
하데스가 들으면 무슨 헛소리냐고 놀라 뒤집어질 내용을 내뱉었다. 확실히 성직자로서 할 말은 아니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아 그리고 되도록 나한테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약속해줘. 이 근처에는 사람들이 사는데 지금에야 소문에 그치지만 너의 존재가 사실임을 알게 되면 바로 퇴치하러 올걸~?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는 싸우기 힘들잖아?"
피라면 내가 또 제공해줄게.~라며 팔을 들어 보이자 살짝 찡그리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네가 준다는데 나야 거절할 이유는 없지만... 정말 이상한 인간이네. 라고 말하며 그 뱀파이어는 픽하고 웃었다.
"인간 성직자들은 대게 헌신적이라던데 정말 그런가보네."
"음... 뭐 그런 셈이지."
절대 그런 의도로 한 게 아니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그렇다고 하고 넘어가야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그 뱀파이어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행동이나 사고가 얼빠진 바보 같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저런 모습을 보니 확실히 뱀파이어는 맞긴 하는가 보다. 특이한 장난감이 생긴 것에 즐거워져 무료한 일상이 깨질 앞으로가 기대되었다. 나는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기숙사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