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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지?”

 

금선의 손 안으로 제 힘을 담은 머리끈이며 옷자락에 다는 장식용 술 같은, 누가 보아도 어린 사내아이를 위해 따로 만든 것이 분명한 것들을 밀어넣어주던 복슬한 앞발이 문득 멈췄다. 서늘하게 식어가는 가을 바람으로 일렁이는 흰 털가죽은 달빛을 받아 푸르스름하게 반짝여 마치 밤바다의 파도처럼 보였다. 야생의 늑대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을 붓꽃의 눈동자가 순진하게 깜박였다. 길쭉하고 마른 얼굴이 문득 금선의 턱 아래로 드밀어졌다. 비단처럼 반질거리는 부드러운 털결에서는 때를 모르고 피어난 난초와 짙은 사향의 향기가 풍겼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신에게는 아무런 득이 될 게 없잖아.”

 

그러자 어린아이가 서툴게 떨어뜨린 우스갯소리에 반응해주는 어른처럼, 섬세한 선으로 빚어진 흰 늑대의 얼굴이 인간이 웃듯 물렁하게 일그러졌다. 재채기같은 웃음소리가 슬쩍 벌어진 선홍빛 혀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면 정말로 우스워 견딜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 명랑하기 짝이없는 표정을 바라보며 금선은 그렇지 않아도 잔뜩 힘이 들어간 미간을 엉망진창으로 우그러뜨렸다. 진지하게 꺼낸 말을 들어놓고 웃어대는 상대란 지위와 종을 막론하고 짜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었다. 그런 주제에 품 안에 코를 드미는 길쭉한 주둥이를 거칠게 밀어내며 금선은 이를 갈았다. 작작하고 제대로 듣지 못해! 눈 앞의 신령을 아는 이들이 보았다면 거품을 물고 넘어갈 불경어린 고함에도 흰 늑대는 불쾌한 기미 하나 없이 순순히 물러나주었다.

 

“미안, 미안. 그런데 금선, 네가 너무 웃긴 얘기를 하니까.... 그런 걸 신경쓰고 있었어?”

 

낙엽이 나뒹굴기 시작한 흙바닥 위로 가볍게 살랑인 꼬리는 누가 보아도 내놓고 꺼낼 수 없는 웃음소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기분이 상하는 것은 비슷했으나 그나마 티를 내지 않고 숨기려는 노력이 가상했기 때문에-그는 눈 앞의 신령이 얼마나 자기 감정을 충실하게 드러내는지 알고 있었다-금선은 구깃구깃 일그러지려는 미간을 꾹꾹 짓눌러 간신히 목 끝까지 치밀어오른 노호성을 삼켰다. 당연하잖아, 라고. 받아치기 위해 꺼낸 말의 앞머리가 잔뜩 짓눌린 것은 그 때문이리라.

 

“...지금 해주고 있는 일들이 어지간한 공물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 쯤은 나도 알아.”

 

보아서는 안될 것들을 너무 많이 보게 되는 눈을 눌러 감기고, 꼬여서는 안될 것들이 꼬이지 않도록 그 앞을 막아선다. 영산靈山의 흰 늑대 공주라고 불리는 눈 앞의 신령-적소공주가 금선과 금선이 맡고 있는 오공에게 베풀어주고 있는 것은 그런 일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금선의 책임으로 떠밀려 들어온 주제에 금선의 인생에서 너무나 무거운 자리를 차지하고야 만 어린 소년은 불확실한 출신과 신원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강대한 영력을 가지고 있었다. 금선, 저기 있는 아저씨는 누구야? 엄청 다친 것 같은데 도와주면 안돼? 제 옆에서 걷던 오공이 무구한 목소리로 아무도 없는 건물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물었을 때, 금선은 제 묶은 머리를 손잡이처럼 사용하는 오공에게 화를 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피안의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눈에 대한 공포 때문은 아니었다. 금선의 심장을 바닥까지 떨어뜨린 것은 그런 힘을 가지고 있기에는 불안한 오공의 위치였다. 그렇지 않아도 일족 내부에서는 후계 문제로 소리없는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 안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영력을 가진 존재가 어떻게 이용당할지, 그는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때 금선 자신 역시 그 진창 안에 있었으니까. 그러니 적어도 이 녀석이 제 영력을 다루는 법을 배울 때까지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등과 철렁하게 내려앉은 심장으로 어리둥절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오공의 손을 굳게 쥐어잡으며 금선은 그렇게 생각했다. 적어도, 적어도 이 녀석이 제 힘을 다룰 수 있을 때까지는, 그 때까지는 이 힘을 억눌러 두어야 한다고.

 

적소에게 도움을 청한 것은 그래서였다. 금선의 일족이 뿌리내린 땅을 둘러싼 산맥의 주인, 강대한 힘을 가진 늑대 일족의 막내 공주, 흰 털가죽을 달빛 아래 빛내며 달리는 늑대신은 그가 다스리는 산맥이 제법 험했음에도 그 안에서 길을 잃어 죽는 이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인간에게 관대했다. 언젠가 그 젊은 신령과 술 한 잔을 나눈 적이 있었다는 고모의 이야기 역시도 다급해진 금선이 그를 찾아가는 데에 일조했다.

 

하루에 서른 걸음도 채 걷지 않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한 채 맑은 술 한 병과 오공의 손을 각각 손에 쥐고 저를 찾아온 금선을 본 순간 적소는 악, 소리를 내며 달려와 금선의 등짝을 후려쳤다. 미쳤어! 아무리 인간이어도 그렇지, 이 지경인 애를 아직까지 내버려두고! 마치 며칠 전에도 인사를 나눈 이웃사촌처럼 스스럼없는 태도였다. 처음 얼굴을 본 신령에게 억울하게도 등허리를 얻어맞은 금선이 불경하게도 동갑내기 친우에게 하듯 목소리를 높여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야! 하고 짜증을 내고 만 것은 적소의 그런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대로 마주하는 시선,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아니라 풀숲을 헤치고 사박사박 옆으로 다가오는 걸음과 같은 것들 때문에.

 

고함과 잔소리로 점철되었던 첫만남이 무색하게도 적소는 금선의 부탁을 단박에 수락해주었다. 오공이 사용하는 물건들에 제 힘을 담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오공이 영력을 갈무리할 수 있도록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거나 직접 방법을 알려주는 등 세심하게 아이를 돌봐주기까지 했다. 제 힘이 닿는 땅에 살게 된 아이를 향한 신령으로서의 애정인지, 아직 일가를 이루지 못해 남아도는 모성인지 분간할 수 없는 살가운 애정을 듬뿍 받은 오공은 금새 적소를 적이 누나, 하는 애칭으로 부르며 따랐다. 덕분에 보호자 자격으로 오공을 적소에게로 데려오던 금선마저도 그와 가까워져, 그의 고모를 견제하던 세력이 보낸 저주가 순식간에 파훼되는 식으로 간간이 그 덕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토록 오공에게, 그리고 금선에게 힘을 베풀면서도 적소는 어떤 대가도 언급하지 않았다. 하다못해 예의상의 신주로 바치기 위해 가져온 술조차도 돌려보내는 모습을 보며 금선은 늘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신령들은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베풀지 않는다. 적어도 그가 아는 신령들은 그랬다. 인간이 그들에게 무언가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상응하는 대가를 바치고 머리를 조아려 은혜를 베풀기를 소망하는 것 뿐이다. 그런데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복잡하게 얽힌 시선을 마주한 흰 늑대가 느릿느릿 고개를 기울였다. 훅, 하고 길게 새어나온 숨은 인간의 태였더라면 한숨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기젖은 난초를 닮은 자색 눈동자가 깜박, 길게 짓눌러졌다 다시 돌아왔다. 금선. 아이를 부르듯 다정한 목소리가 살짝 벌어진 잇새 아래에서 관자놀이로 물길처럼 스며들었다.

 

“그런 자잘한 데에 너무 신경을 쓰니까 네가 늘 신경이 곤두서있는 거야.”

“나중에 뒤통수를 맞는 것보다는 나아.”

“내가 그 정도로 못 미더워? 그건 좀 충격인데......”

 

너한테는 제법 진심으로 잘 해주지 않았어? 그렇게 묻는 얼굴은 늑대라기보다는 인간의 손을 오래 타 야생성을 잃은 번견처럼 온순했다. 그러니 나를 믿을 수 있지 않느냐고, 침묵으로 졸아드는 말 끝으로 묻고 있는 신령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며 금선은 눈을 깜박였다. 부정할 수 없는 물음이었다. 금선 역시도 적소가 그와 오공에게 드문 애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인간의 세계보다는 신의 세계에 가까운, 영험하고 비밀스러운 영역에 대한 지식이 해박한 지인 역시도 그렇게 말했다. 금선 당신, 아니, 어쩌면 오공일까요? 어느 쪽이든 정말로 편애받고 있네요. 이 정도의 비호를 보통 애정으로 해줄 일은 아니죠. 조금은 질렸다는 얼굴로, 그리고 약간은 놀리고 싶어하는 듯한 표정으로.

 

손 안에 쥐인 자잘한 비단끈이며 장식술이 문득 손가락의 틈새로 뭉그러졌다. 무심코 손에 힘을 주어 쥔 모양이었다. 손 끝으로 섬세하게 놓은 자수의 감촉이 느껴졌다. 당초문, 그게 아니면 파초문이겠지. 적소가 오공에게 건내주는 것은 늘 장수와 회생의 소망을 담은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니까. 그 도톰하고 까실한 감촉을 따라 금선은 쓴웃음처럼 경련하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난초의 꽃잎이 만개해 벌어지듯 둥글게 떠오른 자색 눈동자를 향해 쏟아지는 목소리의 끝이 삐죽하게 갈렸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

 

한없이 애정을 쏟아붓고 영원히 오공과 금선을 편애할 것처럼 구는 무르고 오지랖 넓은 신령은 가끔씩 무언가에서 도망치듯 금선과 거리를 벌리고 서먹하게 굴 때가 있었다. 평소의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거리감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것을 닮은 관계의 형태는 눈 앞의 흰 늑대신이 훌쩍 물러나는 순간 존재했다는 확신 한 점 느낄 수 없도록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내가 당신을 너무 많이 들여놓은 것 같네. 그 순간의 자색 눈동자는 분명히 금선에게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당신을 여기에 두면 안돼.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당신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돼. 그렇게 웅얼거리는 눈동자는 수상할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금선이 억지로 그의 빗장뼈를 비틀어 열고 내장 안으로 기어들기라도 한 것 같은 시선이었다.

 

상대가 숭상받는 이상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 영험한 신령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순간이 올 때마다 금선은 울컥 화를 내듯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고 거리를 두려고 했는데도 선을 넘어온 건 당신이잖아. 위에서 내려다보지 않고 옆을 비집고 들어온 건 당신이라고. 바라지도 않은 편애를 쏟아놓고 익숙해지게 만든 것은 결국 당신인데. 기어코 익숙해지게 만들고서는 대체 왜 혼자서만 도망쳐버리는 거냐고. 대체 눈 앞의 신을 왜 이렇게나 신경쓰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같은 인간조차도 그렇게 신경쓰지 않는 자신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랬다.

 

달빛을 받아 자색의 옥처럼 반들거리는 눈동자가 물끄러미 금선을 응시했다. 질책도 의문도 담겨있지 않은 눈동자가 문득 서늘한 늦가을의 밤하늘을 가볍게 훑고 돌아왔다. 인간은 어렵구나. 은빛으로 빛나는 송곳니 틈새로 새어나온 목소리는 조금 풀이 죽은 것처럼 들렸다.

 

“대가를 원해도 대가를 원하지 않아도 믿어주질 않으니, 정말로 어렵네.”

“정확하게 따지면 당신 태도의 문제라는 뜻이라고.”

 

퉁명스럽게 반문하자 그것만으로도 따끔한 잔소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복실한 앞발이 낑낑 소리를 내며 길쭉한 콧잔등을 매만졌다. 누군가 그 겉모습만 보았더라면 사고를 친 대형견과 혼을 내고 있는 주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이런 식으로 굴어놓고 때때마다 후다닥 물러서서 경계하는 것이 더욱 약이 오르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자잘하게 가득 차 있는 손 안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던 금선의 손 끝으로 문득 밀려온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그럼, 너를 원해서 그랬다고 하면 믿어줄래?”

“......뭐?”

 

갑작스럽게 떨어져내린 질문은 짧고 간결했지만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말들로 가득했다. 귓바퀴 안으로 흘러들어와 혀 끝으로 고인 문장에 숨을 헛삼킨 금선이 그것을 다시 뱉어내기도 전에 품 안으로 은실같은 백발이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마치 품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던 흰 늑대처럼 금선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두르고 안긴 미녀가 때늦게 피어난 붓꽃의 꽃잎처럼 만개한 자색 눈동자를 요염하게 휘었다. 늦가을의 바람에 어울리지 않는 얇은 비단 소매 너머 석고처럼 창백한 피부가 어른어른 비쳤다. 가늘게 휘어진 눈매를 둘러싼 속눈썹이 눈 아래 뼈의 둥근 가장자리 위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금선. 불리는 이름은 온통 나직해 녹진하게 녹아있었다.

 

본체의 모습으로는 손을 너무 많이 타 야성을 잃기 직전인 늑대처럼 굴던 신령은 인간의 태를 뒤집어쓰고 나면 달빛 아래에서 푸르스름하게 반짝이는 만년설처럼 인간의 시선을 홀렸다. 겉모습의 아름다움으로는 사방에서 칭송만을 받아왔던 금선마저도 이 순간의 적소에게는 목구멍 안으로 마른침만을 삼키며 시선을 붙잡히고는 했다. 코 끝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흰 뺨에서는 난초와 사향의 향기가 짙게 묻어 문득 정신을 아찔하게 만들었다. 가늘고 찬 손 끝이 뺨을 덮은 긴 금발을 가볍게 말아 귓바퀴 위로 넘기고 가만히 속삭였다. 그럼 정말로 당신이 신랑으로 와줄래? 언젠가 마음에 든 인간을 홀려 숲의 안으로 삼키고 말았다는 어느 신령의 이야기처럼, 이번에는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깨물었다......

 

그러나 미혹 섞인 혼란은 오래가지 않았다. 적소가 충분히 아름답지 않아서라기 보다는 금선이 사방을 감싼 유혹 속에서도 장난기가 가득 담겨 비죽비죽 휘어지는 입가를 너무 빨리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툭 하고 찔러본 고슴도치가 펄쩍 뛰며 온 몸을 둥글리는 것을 본 늑대처럼 비죽대는 입가를 발견한 금선은 지금까지의 모든 미혹을 악몽처럼 깨부수며 정신을 차렸다. 이 빌어먹을 신령님께서는 눈 앞의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칠 때가 있었다. 진짜 신령이고 나발이고 한 번만 매다 꽂아버리면 안되나. 제 체력으로는 불가능할 희망임을 알면서도 분노로 구겨진 이성으로는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입 안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고함을 간신히 깨물어 삼키며 금선은 제 뺨을 감싼 손을 거칠게 쳐서 떨어뜨렸다. 제법 힘을 주어 쳐냈는데도 흰 손등에는 붉은 기 하나 없는 것이 제일 화가 치밀었다.

 

“됐어, 당신한테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한 내가 멍청이였지!”

“으하하, 미안, 미안! 근데 네가 너무 진지하게 말하니까 나도 모르게...”

 

품 속으로 파고들 듯이 기울어진 몸을 능청스럽게 세우며 평소 금선과 오공 앞에서 보여주는 인간의 태를 입은 적소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지나치게 화가 치밀면 뒷덜미의 뼈마디까지 욱신거린다는 것을 금선은 이 인간 속도 모르고 제멋대로 굴어대는 신령의 앞에서 깨닫게 되었다. 이것마저도 적소의 “거리두기” 라는 것을 눈치챘기에 더더욱 그랬다. 방금 전 금선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정도로 적소는 둔감하지 않았다. 오히려 금선이 그 안에 담은 것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흐지부지하게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분노는 의문을 덮을 수 있는 가장 큰 힘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것을 알면서도 제멋대로 밀려들어온 주제에 또다시 혼자 빗장을 닫아 건 문 안으로 도망쳐버리는 것을 보고있으면 속이 엉망으로 뒤집혀서. 금선은 제 앞에서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선 적소를 멀뚱하게 남겨둔 채 등을 돌렸다. 어차피 받을 것은 받았으니 혼자 빗장을 닫아 건 문 앞에 서 있어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 이상 대화를 지속해봤자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 정도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공경 어린 절은커녕 인사조차 남기지 않고 몸을 돌리는 금선을 웃음기 머금은 눈으로 지켜보던 적소가 가볍게 팔짱을 끼는 기척이 느껴졌다. 가려고? 평소처럼 길이 어두워서 위험하다느니 달이 온전히 나올 때까지 차라도 한 잔 들고 가라느니 붙잡지 않는 것이 제 생각에 확신을 더해주는 것 같아 금선은 와지끈 미간을 우그러뜨렸다.

 

“이미 닫아걸린 문 앞에서 소리 지르는 취미 같은 건 없어.”

“에이, 또 무슨 말을 그렇게 한담. 아무튼 다음에 올 땐 오공도 데려와. 산 너머에서 받은 사슴 가죽이 괜찮더라고. 애 겨울 옷이라도 한 벌 해줄게.”

“내가 알 바 아니야. 버리든지 다른 누구한테 넘기든지.”

 

애기 아빠도 참, 심술궂기는! 안도가 가득하게 섞인 웃음소리가 돌린 등 뒤로 부슬부슬 떨어져내렸다. 그 소리를 따라 엉망으로 우그러진 미간을 손 끝으로 거칠게 누른 금선은 입 안에 가득하게 찬 짜증섞인 한숨을 목구멍 안으로 집어삼키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안심한 얼굴로 손이라도 흔들고 있겠지. 그렇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은 채로,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에 금선이 찾아오면 다시 편애로 기울어진 애정을 냅다 쏟아부어버릴 것이다. 금선이 저를 전혀 믿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까먹은 것처럼. 신령이고 뭐고, 정말이지 사람의 짜증만 있는대로 돋우는 여자 같으니라고. 늑골의 뼈마디까지 치밀어오른 말들을 어거지로 삼키며, 금선은 산밑으로 이어지는 숲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람을 따라 흩날리는 긴 금발은 돌아보지도 않고 성큼성큼 산의 끝자락을 향해 걸었다. 인간은 신기하기도 하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다리를 덜덜 떨면서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는 했는데. 애써 끌어올린 시답잖은 감동을 곱씹던 적소가 문득 한 손을 들어 입가를 감쌌다. 금선이 더 이상은 파고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혹여라도 제가 지른 빗장에 손이라도 얹으려고 했다가는 적소는 제 마음에 든 인간에게 속에도 없이 모질게 굴어야 했으리라. 정말로, 인간은 어렵구나. 있는 힘껏 명랑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한 입가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정말로, 고작해야 100년 살면 장생하는 주제에 건방지고 어렵고..... 그래서 사랑스러웠다.

 

“뭐어, 그래도. 절대로 더 가까이 오게 할 생각은 없지만.”

 

영산의 흰 늑대 공주, 한 때는 일족의 번영을 불러올 약속으로 사랑받았다가 짓지도 않은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일족의 땅에서 쫓겨나듯 독립한 젊은 신령은 향이 짙게 가라앉은 붓꽃의 눈동자를 무겁게 깜박였다. 그것이 부조리한 원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자신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은 금선에게도 오공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다. 너도 참 너다. 이미 실컷 편애하고 있는 주제에 거기서 더 들이든 덜 들이든 차이가 있냐? 산맥 아래의 인간과 계약을 맺어 식신으로 머무르는 친우가 그렇게 핀잔을 주었으나 적소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미 제 발길을 묶는 덩굴과 제 눈 앞에서 굳게 닫힌 채 풀릴 리 없이 단단하게 선 빗장에 고개를 숙인 후였으므로.

 

그러니 첫 눈에 반해버린 인간에게 의심받고 미움받는 것을 감수하는 수 밖에 없겠지. 적소는 입가를 매만지던 손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금선이 사라진 숲길에서 마주 등을 돌렸다. 가장 연약한 권속인 반딧불이들의 혼이 덜 마른 낙엽을 밟는 발길을 따라 희미하게 길을 밝혔다. 사향과 난초의 향기가 머무르던 비단 소매가 바람결에 부드럽게 부풀었다 지면을 내딛는 흰 앞발로 변해 달려나갔다. 영산을 다스리는 다정한 흰 늑대 공주는 여전히 시선을 빼앗긴 인간에게는 어떤 것도 내어주지 않은 채로, 반딧불이의 불빛만이 반짝이는 산맥으로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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