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빛의 전사 드림주(여)×수정공
- 메인퀘스트 5.0 이후의 시점으로 스포일러(스토리, 캐릭터)가 있습니다.
그 영웅이 아모로트에서 수정공을 구해 돌아온 다음 날 아침, 영웅은 소리소문없이 사라져 버렸다. 본디 스스로 행동한 인간은 누군가의 눈엔 띄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는 제 발로 어디론가 나간 흔적도, 본 사람도 없으니 마땅히 사라졌다고 유추하는 것이 이치에 맞았다.
그래서 새벽의 사람들은 처음엔 악의에 의한 납치를 의심했다.
하지만 용의 선상을 추릴 수도, 좁힐 수도 없어 그 생각은 일찍이 그만두었다. 그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던 아씨엔 에메트셀크도 사라진 이 마당에 대체 누가 그렇게 배짱 좋은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목숨을 길가에 내다 버린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려운 일이었다. 그에게 직접 덤빈다는 것도 혀를 내두를 짓이지만,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더욱 못할 일이었으므로.
“……걱정되는 것도 있는데, 솔직히 누가 이런 짓을 한 건지 열 받아 죽겠어. 먀네는 그저 묵묵히 사람들을 구했잖아. 근데 왜. 이런.”
먀네가 사라진 지 벌써 열흘째, 알리제는 분한 얼굴로 말했다. 새벽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그 말에 공감을 표했다.
수정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먀네가 마지막으로 자신을 구한 후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렸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책임감을 느끼어 입을 다물고 있기는 했다. 수정공은 속으로 미약한 자괴감과 분노가 치고 올라오려는 것을 억누르며 애꿎은 맨주먹만 꽉 쥐었다.
각자의 영역에서 좀 더 먀네를 찾을 대책을 강구 하기로 의견을 모으고서야 성견의 방을 나서는 그들을 배웅한 수정공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가지도 못하는 자신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뿐인 제 영웅을…… 먀네를, 찾아내야 하는 걸까. 눈앞이 까마득했다.
하지만 수정공은 일이 막막하다고 해서 당장에 해야 할 것까지 져버릴 사람은 아니므로, 오늘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먀네가 머물던 펜던트 거주관으로 향했다.
먀네는 언젠가 수정공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
혹시나 자신이 오랜 시간 방을 비우게 되면 이 아이가 슬퍼할 테니 시간이 된다는 전제하에 돌봐줄 수 있겠냐고. 그리 말하며 소개해 준 먀네의 꼬마 친구―아기 오포오포는 뒷다리에 큰 상처를 입었는지 한쪽을 불편할 정도로 절고 있었다. 수정공은 자그마한 개체를 안쓰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물론 그대의 부탁이라면 기꺼이 해주겠노라고, 그렇게 말했었더랬다.
똑, 똑. 주인이 없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의례적인 노크를 하고 방 안으로 들어간 수정공이 자신을 보고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기 오포오포와 시선을 맞춰 자리에 수그려 앉았다.
“안녕.”
이제는 제법 가까워진 듯한 먀네의 꼬마 친구는 쪼르르 다가와 수정공의 푸른색 오른손에 뺨을 비볐다. 그 모습에 수정공은 하하,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것까지 닮았다니 신기하군……. 과연 파트너라는 건가.”
닮았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게 먀네는 종종 수정공의 오른손을 만지작거리곤 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 쓸어보기도 하고, 깍지를 껴보기도 했으며 끝에 가선 차가워서 맘에 든다는 이유로 손바닥을 직접 자기 뺨에다 가져다 댄 적도 있었다.
……내 손이 그 뺨 위에 안착했을 땐 지레 놀라 움찔거리기도 했었지.
슬그머니 치고 올라오는 그날의 기억에 뒤늦은 여파로 약하게 떨리던 수정공의 후드 자락이 이내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후드가 젖혀지며 대신 빼꼼 위로 솟아오른 미스텔족의 특징인 삼각 귀가 민망한 듯이 팔락거렸다.
마침 아무도 없으니 후드는 다시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마냥 아기 오포오포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어 주고 있을 즈음.
“…………!”
무언가가 제 귀를 쓸고 지나가는 느낌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퍼뜩 든 수정공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당연하게도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뭐지?
수정공에게 시선을 꽂고 있던 아기 오포오포의 고개가 갸우스름히 기울어졌다.
“아,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 앗……!?”
이번에는 정수리를 마구 헤집고 비비는 느낌이 들었음에 귀털을 바짝 세우고 등줄기를 굳힌 수정공이 덩달아 굳어버린 입매를 겨우 달싹였다.
“……‘A van ker-m sin’(나의 친구여, 거기 있나?)”
“오랜만의 부름인 것 같은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튀어나온 빛 덩어리가 요리조리 튀어가다가 수정공의 앞에 멈춰 서서는 요정의 형태로 변했다. 먀네를 대신해 티타니아의 자리에 올랐어도 특유의 발랄한 인상만큼은 여전한 페오 울이 수정공을 보고는 미소 지었다.
픽시족인 페오 울이라면 지금의 이 이상 현상을 조금은 알아봐 줄 수 있을 터였다.
“무슨 일일까?”
“아, 그게,”
“어머?”
친구의 말을 끊고 짐짓 놀란 감탄사를 뱉은 체오 울은 포르르 날아 자리를 이동했다. 다 이유가 있으니 저러는 걸 테지. 수정공은 말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크리스타리움에 있는 거주관 중에서 제일 좋은 전망을 자랑하는 먀네의 방 창문 앞. 아름다운 맑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는 커다란 창문 난간을 바라보고 멈춰 선 페오 울이 턱을 괴고는 잔망스럽게 웃어 보였다.
“나의 어린나무! 이건 또 무슨 재미있는 상황이야? 용감한 건 진작 알았지만, 이제는 너의 힘을 구속하는 육체까지 버려버린 걸까?”
아니면 역시, 이번에도 알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 거에 가까우려나? 아무래도 인간들은 내 귀여운 어린나무를 가만히 두지 않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정말, 내 건데……!
페오 울의 입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반가움과 놀라움, 질투 따위가 섞인 문장들에 수정공은 입을 벌리고 사태 파악이 덜 된 얼굴로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버렸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물론 제 영웅은, 방금 페오 울이 말했듯이 늘 말이 안 되는 일에 휘말리기는 했지. 일단 수정공은 중심을 유지하고서 침착하게 제게 들어온 정보 값을 정리해 보았다.
아까 제 털을 만지던 영문 모를 느낌. 페오 울이 지금 허공을 바라보고 먀네를 칭하는 ‘나의 어린나무’라는 호칭을 쓰는 것. ‘육체’를 버렸다.
…………그럼 지금 페오 울이 보고 있는 먀네는, 대체 무슨 상태지?
“으응?”
명확하진 않지만, 심각한 시선으로 자신이 보고 있는 곳을 쳐다보는 수정공과 눈앞의 어린나무―먀네를 번갈아 보던 페오 울이 그제야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손뼉을 쳤다. 나의 어린나무가, 친구한테는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구나?
“말을 하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해볼게?”
“……부탁해.”
주어를 말하지 않았음에도 페오 울이 무얼 하려는지는 금방 깨달은 수정공이 다정한 웃음을 품었다. 그에 화답하듯 눈을 찡긋거리며 다시금 공중으로 포르르 날아오른 페오 울이 수정공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빛 가루를 뿌려댔다.
그로 인해 흐릿해지는 세상에 수정공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조심스럽게 시야를 밝혔다.
“어때? 보여?”
페오 울의 물음에 눈을 여러 번 깜빡여 초점을 맞춘 수정공이 내내 요정의 시선이 머물던 창가를 쳐다보았다.
그곳엔 그저 고요한 햇살만이 내리쬐고 있었다.
“……아니?”
“어라, 어딜 보는 거야? 내 귀엽고 장난스러운 어린나무는 그쪽에 있지 않은걸?”
“맞아, 여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제 오른뺨을 콕, 찌르는 느낌이 들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수정공이 자신의 어깨에 거의 붙어 있다시피 한 먀네의 얼굴과 마주하고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먀네는 반투명한 몸을 수정공에게 기대고 손을 흔드는 대신 눈을 잘게 껌뻑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는…… 거리감이 너무 없어…….
당황으로 뻣뻣하게 굳은 채 그 눈을 바라보고 있던 수정공은 이내 맘을 진정시키고는 먀네가 어떻게든 이 세계에 아직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에 일단, 크게 안도했다. 비록 지금은 저런 반투명한 영혼 상태일지라도 영혼이 있다는 건 육체도 어디엔가 남아있다는 소리일 테니까. 찾아주면 그만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없어도 해낼 테다.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먀네는 아까 그렇게 당황하다가도 금방 침착해져 수장 노릇을 하려는 건지 무게를 잡는 귀여운 얼굴이 마음에 들어 후후, 작은 소리로 웃어 보이고는 한 발짝 물러나 진담 반 농담 반을 섞어 말했다.
“몸을 찾아줄 거야? 나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난… 사실 지금도 마음에 들거든. 따라다닐 수 있고, 이렇게 귀여운 귀도 이렇게 만질 수 있고.”
진중한 태도와는 다르게 자신을 마주한 뒤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팔락거리기만 하는 수정공의 귀를 먀네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잡아 만지작거렸다. 변태 같을지도 모르겠지만, 귀여운 걸 어쩐담? 근데 예민한 부분이었으면 어쩌지. 음……. 그 생각에 슬쩍 손을 뒤통수로 옮긴 먀네가 마지막으로 뒷머리를 짧게 쓰다듬고는 손을 떼어냈다.
몸은 저렇게 됐어도 평소와 다름없는 안색인 것에 남몰래 안도하던 수정공은 먀네의 이은 말과 행동에는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 그런 소리는 하지 말아줘. 알리제가 너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지 알면 못할 말이야. 그리고 몇 번째 말하는 거지만, 지금의 나는 노인이라는 것도 잊지 말아줬으면 싶군…….”
아, 또 저 소리다. 이미 알고 있는데. 계속해 상기시켜 주는 것이 썩 마음엔 들지 않아 반투명한 손으로 제 뺨을 툭툭 치던 먀네가 수정공에게서 한 발자국 떨어져선 얼굴을 힐긋대며 말했다.
“네에, 할아버지.”
“……하, 할아버지……?! 아니, 그, 방금 내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만. ……먀네!”
수정공이 자신을 노인이라 칭할 때마다 한 번쯤 불러보고 싶었던 호칭이었다. 아니 근데, 자기가 먼저 노인이라고 주장했으면서?
억울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새빨개진 수정공의 얼굴이 사과 같았다. 원래부터 붉은 머리칼과 귀까지 포함해 한 치의 거짓 없이 머리끝까지 붉게 달아올라선 평소라면 높일 일 없는 목소리를 높이는 수정공의 모습이 참 볼만하다고 생각하며 먀네는 쿡쿡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