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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바람이 부는 맑은 날.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아짐가(家)의 상선은 값비싼 물건들과 사람을 가득 실은 채 고향으로 향하고 있다.

가는데 이틀, 오는데 이틀. 그리고 물건을 사고파는 데에 사흘. 총 일주일이 걸린 이번 여정은 차기 당주가 동행한다는 변수에도 불구하고 큰 사고 없이 무난히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아직 상선이 고향의 항구에 도착하지 않았으니 방심할 수 없는 법. 오늘 밤이 되어서야 육지를 밟을 수 있는 걸 아는 쟈밀은 마지막까지 아무 사고가 없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혹시라도. 아주 만약에라도 차기 당주에게 문제가 생기면 큰일이었으니 말이다.

 

“카림, 부탁인데 제발 어디 갈 땐 말이라도 하고 가면 안 되는 거냐?”

 

상선의 뒤편. 모습이 보이지 않는 카림을 찾아 헐레벌떡 뛰어온 쟈밀은 한숨을 푹 쉬며 한탄했다. 상대가 아이도 아닌데 이건 너무 과한 대처가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종자인 자신은 한순간이라도 눈을 떼면 안 되기에 어쩔 수 없었다. 카림 알아짐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줄곧 조심성 없는 남자였으니까.

 

“쟈밀, 저기 봐! 돌고래야!”

“하아.”

 

상대의 초조함을 알 리 없는 카림은 배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헤엄치는 돌고래들을 가리켰다. 그 천진난만한 모습에 한숨만 내리 쉰 쟈밀은 배의 난간에 기댄 카림을 냅다 배 안쪽으로 당겼다.

 

“그러다가 바다에 빠지기라도 하면, 네 목숨 여부와 관계없이 이 배에 탄 사람 모두가 죽을 거라는 자각은 해주었으면 하는데.”

“에이,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바다가 이렇게 잔잔하고, 모두가 안전하게 항해하는데 어떻게 바다에 빠지겠어!”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다가 중심을 잃으면?”

“난 균형감각은 자신 있는데?”

 

아. 안 된다. 역시나 설득이 안 된다. 긍정적인 게 장점이자 단점인 녀석인 건 알지만, 어찌나 이리 위기의식이 없는지.

쟈밀은 도대체 어떻게 말해야 상대가 조심성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그 답은, 예상치 못한 제삼자가 알려주었다.

 

“혹시 모르죠, 세이렌에게 홀려서 바다에 빠질지도.”

 

대화에 끼어든 것은 아짐가의 사용인 중 한 명인 가딜이었다. 원래라면 짐칸에서 물건을 체크하고 있어야 할 그가 어째서 여기에서 나타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카림은 그 사실을 먼저 지적하기보단 상대의 말에 집중했다.

 

“가딜. 세이렌이라니?”

“어라. 모르세요, 도련님? 이 해협에는 세이렌이 산다고요!”

“그래? 그런데, 세이렌이 뭐야?”

“아.”

 

‘설마 거기서부터 설명해야 할 줄이야.’ 가딜은 황당함에 헛웃음 지었다.

하지만, 뭐. 이상한 일은 아니겠지. 일 때문에 배에 자주 오른 자신과 달리 카림은 놀러 갈 때가 아니면 배를 탈 일이 없지 않던가. 오히려 이번에 ‘자기도 차기 당주로서 무역 현장에 참여해 보고 싶다’라며 상선에 오른 게 이례적이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잡학다식한 쟈밀은 알지 몰라도, 카림은 기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것들 위주로 잘 알지 않던가.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다. 알지 않으려는 게 부끄러운 거지. 가딜은 궁금해하는 도련님에게 제가 아는 정보를 모두 알려주었다.

 

“말하자면 물귀신 비슷한 거라고 할까요.”

“물귀신?!”

“예. 노래를 불러서 사람을 꾀는데, 주로 항해 중인 사람들을 유혹해서 익사시킨다고 해요! 실제로 이 해협에서는 유난히 난파당한 배도, 익사한 사람도 많다고 하잖아요!”

“정말? 쟈밀, 너도 알고 있었어?”

 

아마 쟈밀은 알겠지. 가딜은 그렇게 생각하고 카림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가, 묘한 반응에 두 눈을 크게 떴다.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걸까. 표정이 싹 굳은 쟈밀은 팔짱을 끼고 손가락만 까딱거리다가, 시선을 배 안쪽으로 돌려버렸다.

 

“……그런 건 다 헛소문이야. 해협은 원래 물살이 사나워서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것뿐이라고.”

“그래?”

“당연하지.”

 

단호하게 말하고 있긴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눈치가 빠른 가딜은 제가 느끼는 위화감을 무시하지 않고 상대를 떠보았다.

 

“역시, 쟈밀 씨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건 또 무슨 의미지, 가딜?”

“그거야, 쟈밀 씨는 이런 이야기 잘 안 믿잖아요? 귀신이나 정령이나 뭐 그런 거.”

 

평소 쟈밀이라면 당연하다며, 그런 걸 믿는 쪽이 순진하다고 비웃을 텐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꾹 다물린 그의 입은 카림이 재차 질문하고 나서야 겨우 열리게 되었다.

 

“그런데 물길이 사나워 사고가 나는 거라면, 노랫소리 이야기는 어떻게 된 거야?”

“고래나 물새 소리겠지.”

“헤에, 역시 쟈밀은 똑똑하구나!”

 

애초에 세이렌이나 선박사고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카림은 쉽게 그 말에 넘어간 모양이었지만, 가딜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못했다. 그거야, 그는 다른 두 사람과 달리 수십 번도 넘게 배를 탔고 실제로 사고가 난 것도 몇 번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직접 본 적은 없으니 정말 세이렌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른다지만……. 쟈밀은 배를 거의 타지 않는데도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가며 전설을 부정하려 들지 않는가.

가딜은 그 점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이리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좀 묘하네요. 쟈밀 씨는 바다에 자주 나오지도 않는데, 고래 울음소리는 들어본 적 있어요? 어릴 때 이후로는 웬만하면 바다 근처로도 안 가셨잖아요.”

 

제대로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쟈밀이 그를 노려본다.

이러다가 아주 눈빛에 찔려 죽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즈음, 쟈밀이 고개를 비뚜름하게 기울였다.

 

“오늘따라 말이 유난히 많은데, 가딜.”

 

이 이상 떠보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런 말이 담긴 한 마디에, 가딜은 더는 말장난하지 못하고 물러섰다. 겉으로 보기엔 자신이나 쟈밀이나 같은 사용인일지 몰라도, 현실은 사용인들 사이에도 서열이라는 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제가 온 목적을 밝히며 대화를 끊어버렸다.

 

“……아, 맞다. 점심 드시라고 말하러 온 거였는데 깜빡했네요! 자, 자. 식사하러 가죠.”

“오!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됐네! 오늘 점심은 뭐야?”

“도련님이 좋아하는 코코넛 주스랑 닭요리랍니다!”

 

넉살 좋게 웃는 가딜은 카림을 데리고 배 안쪽으로 향한다. 먼저 걸음을 떼는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던 쟈밀은 그제야 팔짱을 풀고 바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염료라도 풀어놓은 듯 새파란 바다와 새하얀 포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오래 보고 있으면 어쩐지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리게 된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숨을 삼킨 쟈밀은 그대로 몸을 돌려 식당으로 향하려 했지만, 그 순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쟈밀.”

 

파도 소리에 섞여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낯설다고 하기엔,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

속삭이듯 작은 음성임에도 확실하게 그 소리를 들은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보았다. 당연하지만, 배 위에도 바다에도 사람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왜 그래, 쟈밀?”

“……방금, 누가 나 부르지 않았나?”

“응? 아니. 나랑 가딜은 안 불렀는데.”

“…….”

 

환청인가. 그래, 환청이겠지.

쟈밀은 그렇게 믿으며 앞서나가는 두 사람을 따라갔지만, 그리운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쟈밀, 여기야. 쟈밀.”

 

그 부름은 높낮이와 박자감이 있어 꼭 노랫소리 같았다.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는 마치 반주 같이 들리고, 심지어 제 발소리마저도 음률로 만들어버리는 목소리.

쟈밀은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바다 쪽은 바라보지 않으려고 했다.

 

 

✻ ✻ ✻

 

 

한 번 시작된 환청은 저녁이 다 되어 갈 때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한 육지와 정박을 준비하느라 바쁜 뱃사람들, 해가 저물어가는 붉은 하늘을 천천히 번갈아 보던 쟈밀은 귀를 막은 채 그늘진 구석에 웅크려 앉았다.

 

‘제기랄.’

 

희미해질지언정 사라지지는 않는 목소리는 자꾸만 자신을 바다로 향하게 한다. 무시하고 싶어도, 이건 제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철이 자석에 이끌리고, 나무에 불이 붙는 것이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지 않던가. 그건 당연한 자연의 법칙이었다. 거스를 수 없는, 하나의 법칙.

 

“쟈밀.”

 

배가 육지에 닿을 때까지만 버티자. 배에서 내린 후 항구를 떠나면, 더는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제가 그때까지 버틸 수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문제는, 바로 그 점이었다.

멈추지 않는 부름에 정신이 한계까지 몰린 쟈밀은 끈이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가만히 앉아있다가, 돌연 벌떡 일어나 저벅저벅 걸어갔다.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비틀비틀 걸어가서 도착한 곳은 작은 구명정이 몇 척 달린 선박의 측면이었다. 밧줄이나 판자도 사용하지 않고 맨몸으로 구명정까지 내려간 그는 제가 타고 있는 조각배를 수면 가까이 내리더니, 망설임 없이 물방울이 튈 정도로 가까워진 바다를 향해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노을 때문에 붉게 물든 수면 아래에서 사람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아이렌.”

 

구명정에 몸을 기댄 채 물 밖으로 상체를 드러낸 건 젊은 여인이었다. 쟈밀은 제가 기억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나타난 ‘그것’을 보며 깊게 숨을 토해냈다.

허리 아래까지 기른 새까만 머리카락은 정갈하게 땋아져 있고, 적색과 청색이 고루 섞인 보랏빛 눈동자는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물귀신이라 하기에는 심히 미형인 ‘그것’은 드디어 부름에 답한 쟈밀을 반겨주었다.

 

“많이 컸네, 쟈밀. 이젠 어른이나 다름없어.”

“너는 그대로군. 정말, 하나도 안 변했어.”

 

쟈밀이 이것을 만난 건 아주 어릴 때의 일이었다.

태어남과 동시에 아짐가의 사용인으로서 살아갈 운명을 짊어진 그는 아이일 때부터 늘 자신의 처지에 답답함을 느꼈고, 밤마다 몰래 집을 빠져나와 근처의 항구까지 놀러 가곤 했다. 누구도 오가지 않는 외딴곳에 앉아, 바다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서러운 마음도 조금은 진정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갑자기 바다에서 튀어나와 말을 건 것이 바로 이 여자. 아이렌이었다.

 

‘얘, 이런 늦은 시간에 왜 혼자 있니?’

 

다리 대신 비늘이 붙은 꼬리를 가진 사람이라니. 그는 그 기묘한 모습에 잠깐 겁을 먹었지만, 이내 그 독특함을 신비함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열었다.

쟈밀과 아이렌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쟈밀은 그날 있었던 일이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속상한 마음을 상대에게 털어놓았고, 상대는 바닷속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노래를 불러주며 그를 위로해 주었지.

그러나 약 1년 정도 지속된 그 만남은, 쟈밀이 제가 만난 신비한 존재를 모친에게만 몰래 말해주는 바람에 끝이 나버렸다. 세이렌의 전설에 대해 알고 있던 그의 어머니는 혹 제 아들이 익사하지 않을까 두려워져, 호되게 쟈밀을 혼내고 무서운 전설을 말해주며 다 자랄 때까지 바다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어, 쟈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아이렌은 쟈밀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그 차갑고 축축한 손길에 혀가 얼어붙은 쟈밀은 문득 제 어머니가 얼마나 현명하였는가 감탄하면서도, 그리운 이를 만난 기쁨에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보고 싶었나? 아니면, 다시 만나면 어쩌나 걱정했던가?

쟈밀은 그리움과 두려움 중 어떤 쪽 감정 더 강렬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린 자신은 그저 여러모로 서러워했던 것 같긴 한데, 자라오며 쭉 바다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던 탓에 이제 와선 뭐가 어땠는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고 입만 뻐끔거리는 사이.

 

“……아!”

 

아이렌은 두 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고, 그대로 수면 아래로 상대를 끌고 내려갔다.

순식간에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간 쟈밀은 본능적으로 상대를 밀어내려 했지만, 물소리를 지워내는 한마디를 들은 후에는 그런 저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로 보고 싶었어.”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에 힘이 빠진다.

아. 그래. 나도 그랬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입술 사이에서 수많은 거품이 보글보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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