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인족들이 모여 사는 동쪽 숲 깊은 곳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깊은 동굴이 있었다.
오직 수인족을 이끄는 왕족만이 들어갈 수 있는 그 동굴에는 그들의 수호신이 살고 있고, 왕족들은 그곳에서 꼬리가 달렸음에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즉. 그 동굴은 수인족의 성역(聖域)이라는 뜻이었지만……. 아무래도 제2 왕자에게 그곳은, 마냥 신성한 곳이기만 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러기 선배, 레오나 씨는 아직입니까?”
성스러운 동굴 앞. 입구를 막아서듯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허공만 보던 러기는 조심스레 다가오는 잭을 확인하고 피식 웃었다.
어차피 전사들은 전사장을 빼곤 모두가 동등한 관계인데, 1년 먼저 들어왔다고 선배라고 불러주다니. 이 얼마나 성실한 녀석인가.
러기는 등 뒤의 어둠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보시다시피여.”
“하아. 대체 언제쯤 나오실지.”
“알아서 하시겠죠. 우리 왕자님이 왕위는 못이어도, 자기 몸 상태도 모르고 무리할 정도로 그렇게 바보는 아니지 않슴까?”
예민한 주제를 농담처럼 말하는 러기를 본 잭은 저도 모르게 꼬리를 바짝 세웠다. 늑대 수인인 탓에 풍성하고 긴 꼬리를 가진 그는 감정이 격해지면 쉽게 귀와 꼬리의 움직임을 보여주기 일쑤라, 툭하면 주변 전사들에게 귀엽다는 소릴 듣곤 했다.
물론 당사자는 그 칭찬 아닌 칭찬을 매우 싫어했지만. 190cm가 넘는 거구인 그는, 제가 절대 귀여운 체격과 외모가 아님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뜩 긴장해 솟아오른 은색 꼬리를 애써 모른 척한 러기는 한 손을 크게 휘저으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짓지 말라고여, 시시싯. 어차피 듣는다고 하셔도 별로 신경 안 쓸 검다.”
“……으음.”
하긴, 러기 쯤 되는 처세술의 대가가 뒷감당이 안 되는 일을 할 리는 없나.
본래 하이에나 수인들은 기회주의자가 많다지만, 러기는 특히 더 그런 사내였다. 영리하고 꾀가 많으며, 재치도 있는 전사였지. 덕분에 순수한 전투 실력은 전사 중에서도 특출난 수준이 아니었지만, 결투 때마다 이기는 위엄을 보이기까지 했다.
잭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현명한 이인자의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 잡고 앉았다.
“레오나 씨 말입니다만, 옛날에는 왕위를 잇고 싶다고 꽤 강하게 주장하셨다 들었는데……. 언젠가부터 완전히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지요.”
“그랬져. 저도 실제로 본 건 아니지만. 얼핏 들은 이야기로 그렇슴다.”
그들의 대장이자 수인족의 왕자인 레오나 킹스카라는 이제 갓 스물이 된 청년이었다. 즉, 자신들보다 고작 서너 살 정도 연상일 뿐이었다. 그렇다 보니 두 전사는 왕자의 어린 시절 같은 건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때 자신들은 더 어려서 주변 상황 같은 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왕족의 사생활은 언제나 비밀스럽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러나, 누구나 추측 정도는 할 수 있는 법이지 않던가.
러기는 등 뒤 어둠 너머 당사자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겁 없이 제 생각을 늘어놓았다.
“그냥 제 생각이지만, 머리가 크고 난 후엔 책임질 것 많은 왕의 자리보다는 왕국 최고의 전사장 자리가 더 낫다는 걸 깨닫게 된 게 아닐까여?”
“확실히, 전사장의 자리는 왕만큼 영광스럽고 권력도 있는 자리니……. 가능성 있는 이야기군요.”
조잘조잘 떠드는 두 전사의 목소리는 웅장하게 울려, 동굴 안쪽까지 퍼져나간다.
예리한 귀를 쫑긋거리며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이야기를 경청한 레오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다들 상상력이 풍부하군.’
겨우 그런 이유로 왕이 되고 싶지 않을 리가 있나. 자신은 그저, 제 능력이 제1 왕자인 형에게 뒤처지지 않는데도 두 번째라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당하거나 재질이 풍부한데도 계승권이 한참 뒤인 게 싫을 뿐이다.
하지만 뭐, 이제는 다 어찌 되든 좋은 일이지 않던가.
바닥에 등을 붙여 누운 채 숨을 고른 레오나는 귓가에 파고드는 잡담을 무시하며 상체만 일으켰다.
그러자,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그림자가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왜 그러니, 레오나? 이젠 더 일어나지 못하겠어?”
자신을 바라보는 레오나를 향해 웃는 그건, 귀도 꼬리도 없는 무언가였다.
생긴 건 사람 같아도 진짜 사람은 아니다. 당연하지만 수인족도 아니고, 헛것도 아니었지.
흰 광채를 두르고 있는 그 여성은 이 동굴의 주인이었다. 수인족의 수호자이자 산의 거주자. 소문 속 ‘신’ 말이다.
“그럼 이만 돌아가는 게 어떠니. 나는 훌륭한 전사를 좋아하지만, 그런 전사의 목숨을 직접 앗아가고 싶지는 않은데.”
제비꽃색 눈동자를 빛내며 웃는 신은 꼭 벌레 한 마리 잡지 못하는 순진하고 연약한 묘령의 여인과 같아 보이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영험한 산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쭉 성장한 이 여신은 맨손으로도 거구의 남자를 집어던지는 괴력을 가졌고, 검까지 잘 다루었으니까.
가진 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해 한 미소를 짓는 신의 모습에 황당하다는 듯 한쪽 입꼬리만 비쭉 올린 레오나는, 쓰러질 때 놓친 목검을 도로 집어 들었다.
“나는 멀쩡해. 덤벼.”
“정말 괜찮니? 피곤해 보이는데. 아니, 당연히 피곤하겠지. 벌써 6시간 째잖니. 밥도 안 먹고 이게 뭐 하는 건지…….”
“하. 이거야 원, 말하는 것만 보면 신인지 엄마인지 모르겠군.”
어차피 둘 다 ‘돌본다’라는 점에선 비슷할지 모르지만, 자신은 지금 어미 품에서 아양이나 떨자고 여기에 온 게 아니다.
검을 몇 번이고 고쳐 쥐며 일어난 레오나는 고집스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 굳건한 모습에 한숨을 쉰 신은 적당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렇게 하자꾸나. 만약 이번에도 나가떨어지면, 그때는 식사 후 쉬는 거야.”
“재미없게 굴지 말라고, 신님. 난 멀쩡해.”
“내가 쉬고 싶어서 거는 내기니까, 오해 말고 응하렴. 물론 응하지 않는다면 강제로 쉬게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그렇게 말하는 신의 오른손에 신성한 기운이 모이더니, 이내 강력한 힘의 구체가 되었다.
아. 저걸 맞으면 단번에 기절할 거다. 지치지 않았을 때라면 한 번은 버틸지 몰라도, 지금은 맞는 즉시 의식을 잃겠지.
“쳇.”
비겁한지 현명한지 모를 수를 쓰는 상대를 으르렁거리며 노려본 레오나는,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갈 거니까, 각오하라고.”
“후후. 그래, 그래.”
마법 공격을 그만둔 신은 허공에서 날이 없는 검을 만들어내더니, 맹렬하게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신속하고 정확하게 파고드는 공격에 정신을 바짝 차린 레오나는 제 허리를 베려는 검을 흘려보내며, 무의식적으로 옛일을 떠올렸다.
“너, 내가 보이는 거구나?”
이 얄미운 신과 만난 것은 10년 전. 아버지와 형만 드나드는 신성한 동굴이 어떤 곳인가 궁금해, 밤에 몰래 성역으로 들어갔을 때였다.
등불 하나만 든 채 무작정 침입했던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여인이 제게 말을 거는 걸 보고 어깨를 움츠렸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땋은 머리는 동굴 속 어둠보다 검고, 희미한 빛에도 밝게 빛나는 제비꽃색 눈동자는 마치 불순물 없는 유리구슬 같다.
여러모로 비범함이 느껴지는 여인의 모습에 긴장하면서도 왕자로서의 위엄을 잊지 않은 그는 고개를 빳빳하게 세우고 물었다.
“누구야? 당신. 여긴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인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여긴 신성한 장소. 왕족과 그들이 허락한 자 외엔 들어올 수 없어.”
“내가 그 왕족이라면?”
“응?”
그제야 레오나가 사자 수인이라는 걸 눈치챈 신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산에는 사자 수인은 흔하지 않았고 몇 없는 그들은 모두 왕족이었으니, 그의 말이 진실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던 탓이다.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던 여인은 뒤늦게야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아. 그렇구나. 둘째인가? 첫째랑 닮았네.”
“닮아? 너, 우리 형을 알아?”
“그래. 왕과 함께 기도하러 온 걸 봤지. 신기하네. 그 둘은 나를 못 보는데, 너는 내가 보이다니.”
레오나는 그 말을 듣고, 불현듯이 시종장에게 들은 옛이야기를 떠올렸다.
성역의 동굴에는 수인족을 지키는 신이 사는데, 그 신은 아무에게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오직 그 시대 최고의 전사라 불릴 이의 앞에만 모습을 드러내, 더 큰 깨달음을 주어 왕국이 역경을 이겨내고 번영을 이루게 도와준다고 하던가.
그걸 처음 들었을 때는 그저 금지구역을 만들기 위해 별 헛소문을 다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사실이었을 줄이야.
소리 없이 탄식한 소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그래, 그 설마가 맞아.”
그렇다는 말은, 자신이 이 시대 최고의 전사가 될 몸이라는 건가.
뜻밖의 진실에 벅차오른 어린 레오나는 냅다 신의 옷자락을 붙잡아 당겼다.
“이봐, 나를 왕으로 만들어 줘.”
“이런. 그건 내가 아니라 너희 아버지에게 부탁해야 하는 게 아니니?”
“너는 신이잖아? 그러면 이런 것 정도는…….”
“아니지. 나는 그저 너희를 지켜보고 도와줄 뿐, 너희의 생활과 관습에 관여하면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냐, 라고 말하고 싶지만. 신의 말은 타당했다. 이런 식으로 하나하나 수인족의 생활에 간섭하게 둔다면, 어느새 신은 자신들을 가지고 마음대로 인형 놀이를 하게 될 수도 있었으니까.
신의 말을 이해한 레오나는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신은, 옷자락을 잡은 아이의 손에 제 손을 겹쳐보았다.
“억울하니?”
“뭐가?”
“아니, ‘위대한 전사인 내가, 어째서 왕은 되지 못하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억울해할 것 같기도 해서.”
신 주제에 자신들의 마음은 용케 아는구나. 레오나는 정확한 지적에 할 말을 잃었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신은 제 손보다 작은 왕자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여기저기 굳은살이 있는 손은, 그가 얼마나 훈련에 열심히 매진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증거와도 같았다.
“오히려 난 궁금하구나. 그놈의 왕좌가 뭐라고, 그렇게 서로 죽이고 탐내고 빼앗는지. 위대한 영혼은 어디에 있어도 빛을 내며,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얻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신은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레오나의 귀에는 그게 꼭 제게 하는 위로처럼 들렸다.
너는 왕이 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도 위대한 영혼이며, 네 형은 왕은 될 수 있을지라도 위대한 전사는 될 수 없다는. 그런 위로 말이다.
“정 뭣하면, 네 손으로 형을 죽이지 그러니? 그러면 확실하게 네가 왕이 될 텐데.”
“신이 그런 소리를 해도 되는 건가?”
“하하하. 그럼 신은 어떤 말을 해야 하지?”
호쾌하게 웃으며 손을 거두는 신의 얼굴은 은은한 빛이 가득했다.
그야말로 속세의 법칙과는 완전히 무관계한 성스러운 얼굴.
아름답다든가 하는 수식어보다는 오싹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 흰 얼굴을 가만 올려다본 레오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은?”
신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아이렌. 그렇게 불리지.”
“그렇게 불린다는 건 또 뭐야? 본래 이름은 따로 있는 건가?”
“그런 건 없어. 그저 난 나로 살아가고 있었는데, 날 처음 볼 수 있었던 누군가가 내게 그 이름을 준 거지.”
즉, 초대(初代) 위대한 전사가 지어준 이름이라는 건가.
레오나는 이해하기 힘든 신의 말에 인상만 찌푸렸지만, 아이렌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실실 웃으며 레오나를 관찰했다.
“그 녀석도 널 많이 닮았는데. 아, 지금 보니 꽤 닮은 거 같기도. 역시 위대한 전사는 인상도 비슷한 건가.”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레오나의 머리를 쓰다듬은 아이렌은 몸을 숙여 시선을 맞춰주었다.
“네 이름은 뭐니?”
“레오나.”
“그럼…… 레오나 킹스카라겠구나. 좋은 이름이야. 용맹한 전사다운 이름이군.”
너무 귀여워하면 토라질 거라는 걸 아는지, 아이렌은 금방 손을 거두었다.
레오나는 딱 제가 짜증 나기 직전에 물러서는 신을 보며, 새삼스럽게 신의 신통력은 믿을만한 걸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여전히 거리를 좁힌 채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얄미운 신은, 킥킥 웃으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왔다.
“내가 널 왕으로 만드는 건 도리에 어긋나지만, 네가 더 훌륭한 전사가 되길 도와줄 수는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
거기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지금 이 상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레오나는 잡념이나 다름없는 회상을 관두고, 반사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막아내던 검의 각도를 바꿔 휘둘렀다.
“큿!”
아이렌은 그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더니, 곧바로 반격을 준비했다.
하지만 배움이 빠르고 자질이 뛰어난 레오나는 이를 가만 놔두질 않았으니. 상대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 깊숙하게 파고들도록 돌진한 그는 제게 향하는 검을 손에서 떨어뜨린 후, 나풀거리는 아이렌의 긴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잡았다.”
이번엔 제가 이겼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강이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져 온다.
“커흑!”
검을 놓아버렸으니 더는 공격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게 오산이었을까. 아래를 슬쩍 본 레오나는 제 정강이를 걷어찬 발이 뒤로 슬쩍 물러나는 걸 보고 말았다.
머리카락을 놓고 뒤로 물러선 그는 그대로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방심했구나, 왕자님.”
“……그 말투, 새삼 열받네.”
“하하.”
아, 취소다. 말투보다 저 웃음이 더 열받는다. 자애롭고 따뜻하지만, 너무나도 완벽한. 신의 모습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이질감을 느끼게 하는 저 웃음을 볼 때마다, 어찌나 열이 받는지.
“레오나 씨, 괜찮습니까?!”
주저앉은 채 숨을 고르던 레오나는 갑자기 안으로 들어온 잭을 보고 눈썹을 까딱였다.
보아하니, 아까 제 비명이 너무 커서 동굴 밖까지 들린 모양이었다.
“뭐야. 왜 들어와? 나가.”
“하지만……. 일단 그 상처는 치료하시고 마저 수련하시죠. 무슨 수련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신의 존재를 느낄 수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잭은 아무것도 없는 동굴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에는 이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대체 무얼 하는지, 왜 왕자는 상처투성이가 된 건지 알 수 없겠지.
“하아.”
문득 부하들 눈에는 제가 미친놈같이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레오나는 한숨과 함께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정리했다.
어찌 되었든, 약속은 지켜야겠지. 신벌을 받는 건 사양이니까.
제 앞을 알짱거리는 아이렌을 흘겨본 레오나는 여전히 동굴 밖을 지키는 러기를 불렀다.
“어이, 러기! 밖에 있나?”
“예, 예~! 무슨 일임까!”
바쁜 걸음으로 달려온 러기는 잭의 옆에 섰다.
그 또한 아이렌이 보이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워낙 레오나를 신뢰해서 그런 건지 주변을 둘러보거나 왕자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내려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레오나는 그런 러기에게 주머니 속 지갑을 던져주었다.
“밥이다. 밥. 너희 몫까지 해서 사 오든가 해.”
“정말임까? 저희 몫도요?”
“그래. 경비 서다가 배고프다고 도망이라도 가면 안 되니 말이지.”
자신은 당연한 걸 챙겨주는 것뿐인데, 그리도 좋은 걸까. 밥 이야기가 나오자 러기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그 귀여운 꼴을 본 아이렌은 슬그머니 두 부하의 뒤로 가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었지만, 신이 보이지 않는 이들은 무언가가 제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사 오도록 하겠슴다! 잭 군, 혼자서도 경비 볼 수 있지요?”
“물론입니다. 다녀오십시오, 러기 선배.”
그렇게 두 부하는 밖으로 도로 나가버리고, 동굴에는 다시 왕자와 여신만 남게 되었다.
레오나는 떠나는 부하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아이렌이 황당하다는 듯 비웃음 담아 물었다.
“그렇게 귀여워한다고 알아봐 주지도 않는데, 뭐가 재미있지?”
“재미있구나. 내가 너희에게서 보답받고 인정받을 필요가 있니?”
“하.”
그래. 그렇겠지. 몇천 년을 살아온 신이 고작 백 년 남짓 사는 자신들에게 무엇을 바라겠나.
근본적으로 수평적인 형태가 될 수 없는 관계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헛웃음 지은 레오나는 머리카락을 움켜주었던 손을 쥐락펴락하며, 명주실처럼 부드러웠던 감촉을 떠올려 보았다.
‘……다음번에는 절대로 깔아 눕혀 주겠어.’
그게 자신을 단련시켜 준 저 잘난 신의 은혜에 보복……, 아니, 보답하는 방법 아니겠나.
제 밑에 깔려 항복하는 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 레오나는 그제야 정강이에서 사라지지 않는 아픔을 잊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