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포우드니차(Południca): 슬라브 전설에 나오는 초자연적 존재. 여름 정오에 들판에 부주의하게 있던 사람들을 사냥하는 악의적이고 살인적인 악령. (출처 : 위키피디아)
유난히도 여름이 더운 어느 해.
최근, 셴하이트 후작령에 있는 어느 농가에선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어이가 없군, 이게 도대체 몇 번째지?”
“내가 모르는 피해자가 있는 게 아니라면, 에펠 군이 13번째 피해자겠군.”
“내가 횟수를 묻자고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이런, 이런.’ 신경질적인 대답에 루크는 소리죽여 웃는다.
빌은 그 능청스러운 웃음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가,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힐끔 흘겨보았다.
듣자 하니, 최근 몇 년 중 가장 더운 여름이라고 그러던가. 일사병도 열사병도 끊이질 않을 날씨라고, 제 아버지가 말해주었었지.
그는 내리쬐는 햇빛에 자신의 흰 피부가 타지 않도록 모자를 고쳐 썼다.
“에펠의 상태는?”
“듣자 하니 큰 피해는 없다던가. 며칠 푹 쉬면 건강을 회복할 거라고 했어.”
“그건 그나마 다행인가.”
만약 큰일이라도 났다면 올해 여름 농사는 힘들어졌으리라. 안 그래도 하루 걸쳐 사람이 픽픽 쓰러지는데, 목숨에 지장이 가는 이상이라도 생긴다면 누가 일하려 하겠나? 아무리 급여를 올려준다 해도, 목숨이 아까운 이는 낮에는 일하기 싫어하겠지. 아니, 오히려 일하려 들면 그쪽이 더 곤란하다. 사람의 목숨이란 농사보다 소중한 것 아닌가.
당장 지금도 가장 더울 때는 일하지 않도록 주의 주었는데, 어째서 그 아이는 쓰러지고 만 걸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채 마을 병원에 도착한 빌은 병상에 누워있는 에펠에게 다가갔다.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는 에펠은 고운 얼굴을 찌푸린 채 뒤척거리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안쓰러운 모습에 젖은 앞머리를 정리해 주자, 앓는 소리를 내던 에펠이 눈을 떴다.
“빌 씨?”
“정신이 들었니, 에펠?”
“네. 저는 괜찮습니다.”
보기에는 힘겨워 보여도 실제 몸 상태는 그리 나쁘지 않은 걸까. 힘겹게 상체를 일으킨 에펠은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제 손으로 얼굴의 땀을 닦았다.
‘이렇게나 씩씩해 보인다면 물어봐도 괜찮겠지.’
빌은 그의 상태만 보고 돌아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기억이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지니, 이왕 이렇게 된 이상 지금 당장 당시의 상황을 묻는 게 좋겠단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 여자’를 봤다고 하던데.”
올해 더위에 쓰러진 이들은 모두 의식을 잃기 전 상황을 진술할 때 똑같은 내용을 말하곤 했다. ‘대낮에 일하다 말고 갑자기 나타난 낯선 여인과 대화하던 중, 갑자기 잠들 듯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고 쓰러졌다’라는 거였지.
흰옷을 입고 낫을 들고 있는 그 여인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 정도의 나이로 보였으며, 이 근방에서는 본 적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쓰러지기 전 상황은 모두 달랐을지언정, 여인의 외견만큼은 누구 한 명 다르게 본 사람 없이 모두가 같은 내용을 설명하였다.
에펠은 그 스산한 기억을 떠올리고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네.”
“정확하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증언해 줄 수 있니?”
“그럼요. 어어, 그러니까…….”
그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오늘 정오. 간단히 식사한 후 오전에 끝마치지 못한 일을 하기 위해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밖으로 나선 에펠은 조부모의 사과 농장에서 혼자 잔가지를 잘라주고 있었다고 한다.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와 더운 바람. 모자를 쓰고 있음에도 느껴지는 따가운 햇빛.
그 모든 걸 이겨내며 땀범벅이 된 채 일하던 에펠은, 농장에 있는 나무 3분의 1을 돌본 후에야 제 옆에 다가와 말을 거는 여인의 존재를 눈치챘다고 했다.
‘안녕. 너는 왜 이렇게 더운 낮에 쉬지도 않고 일하고 있는 거니?’
그때 자신은 뭐라고 답했던가. 에펠은 그걸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걸 통해 추측하자면, 특별히 불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언성을 높이거나 하진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그 대화는 아주 즐거웠다고, 말을 주고받을수록 계속 이야기하고 싶어져서 일하는 것도 잊고 떠들어 댔다고 하던가.
하지만 기껏 게으름을 부리며 대답해주고 있었음에도, 그 대화는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땀 좀 봐. 너. 쉬어야겠는데.’
여인이 그렇게 말하며 땀이 흐르는 제 이마를 쓰다듬는 순간, 에펠은 의식을 잃었다고 했다.
중간 대화는 다 잊어도 마지막 저 말 만큼은 기억하고 있던 그는 아직도 그때의 감촉이 생생한지 제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 병원에 누워있었어요.”
“그렇구나.”
상황은 조금 다를지라도, 전체적인 흐름은 다른 피해자들과 거의 같은 진술이다. 빌은 이번에도 이 현상에 대한 명확한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음에 한탄했다.
안 그래도 후작인 아버지가 이런저런 일로 바빠 이번 사건은 제 손으로 처리하고 싶은데, 이렇게나 진전이 없다니.
조용히 혀를 찬 빌은 에펠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 주었다.
“푹 쉬렴. 사과 농장에는 내가 따로 일손을 보내놓을 테니.”
“감사합니다, 빌 씨.”
“뭘.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가자, 루크.”
뒤에서 조용히 곁을 지키던 루크와 함께 병원을 나온 빌은 저택으로 곧바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 카페로 향했다. 이렇게 더운 날에는 오래 걷는 건 미련한 짓이었으니까, 당연한 결정이었다.
주스 두 잔과 간단한 간식거리를 주문한 두 사람은 음식이 나올 때까지 이번 사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포우드니차를 잡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빌?”
먼저 입을 연 것은 루크 쪽이었다. 실내에 들어왔음에도 모자를 벗지 않고 있는 그는 이 사건이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는지, 은근슬쩍 웃으며 들뜬 티를 내고 있었다.
빌은 호기심을 의인화해놓은 듯한 자신의 기사를 노려보며 모자를 벗었다.
“포우드니차는 무슨. 다 더위 먹어서 헛걸 본 게 당연하잖아?”
“오, 그거 이상하구나. 그런 논리대로라면 모두가 각자 다른 환상을 봐야 할 텐데, 피해자들의 진술에는 공통된 부분이 있잖아?”
“처음 진술한 사람의 이야기가 퍼져서 모두가 비슷한 걸 본 거겠지. 사람은 보는 대로 믿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대로 보는 생물이니까.”
빌은 지극히 논리적인 말을 하며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애초에, 포우드니차 같은 게 있을 리가 있나? 그런 건 그냥 전설 속 유령일 뿐이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포가 만들어 낸 환상이란 말이다.
언제나 지극히 현실적인 그는 환상에 젖어 사는 루크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정오에 일하는 걸 금지하거나 해야겠어. 그동안은 더위 먹기 싫어서 알아서 일을 중단하고 쉬곤 했는데, 생산량 좀 늘려보겠다고 무리하는 사람이 나오니 이 지경이 되어버렸네.”
물론 애초에 한낮에 일하는 사람 자체가 드물긴 하다. 법이나 규칙으로 정해놓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가혹한 환경에서는 노동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그래서 낮에 일하겠다는 미련한 사람이 있어도 사람들은 ‘더위 조심해라’라는 말만 하고 적극적으로 상대를 말리진 않았지만……. 이젠 뜯어말려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루크, 괜찮으면 낮에도 마을 순찰을 해주겠어? 일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려줬으면 하는데.”
“물론이지, 빌. 나는 너의 기사니까. 명령한다면 수행해야지.”
얼핏 보기에는 가벼워 보이는 남자여도, 루크는 단호할 때는 누구도 꺾을 수 없는 의지를 보이곤 했다. 이렇게 기사로서 명령을 따를 때면 검을 뽑아 드는 한이 있더라도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니, 이제 이 이상 피해자는 나오지 않으리라.
빌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사태는 그리 간단히 해결되지 않았다.
“큰일입니다! 루크 경이 순찰 중 쓰러졌습니다!”
며칠 뒤. 루크가 순찰을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은 날. 빌은 황당한 소식을 듣고 곧장 헌트 가의 별장으로 향했다.
낮에 일하지 못하도록 막았더니 이제는 순찰하던 이가 쓰러지다니.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은 이럴 때 쓰는 게 아닐까.
골치가 아픈 와중에도 혹 루크가 크게 아프진 않을까 걱정되는 그는 걸음을 서둘렀다.
“루크, 몸은 좀 어떠니?”
루크는 제 방에서 편히 쉬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고 식은땀이 흐르고 있었지만, 보아하니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로 아파 보이진 않았다.
“오, 빌. 내가 걱정을 끼쳐 버렸구나.”
“잘 알고 있네. 그래서, 어쩌다가 쓰러진 거지?”
“이런. 가차 없구나, 후후.”
주변 농민들을 대할 때와는 확연하게 차이 나는 태도다. 루크는 소리죽여 웃더니, 미지근한 물로 입을 적셨다.
“포우드니차를 만났어. 놀랍게도 말이지.”
“뭐?”
“아무래도 이 마을에 사는 포우드니차는 농부만 노리지는 않는 모양이야, 후후.”
존재할 리 없는 걸 만났다 주장하는 루크는 들뜬 어린아이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오늘 정오. 다른 이들보다 일찍 식사를 챙겨 먹은 그는 늘 그래왔듯 일하는 이가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밭과 농장을 둘러보았다고 한다.
일하러 나온 이가 있다면 그늘에서 쉬게 하고, 뛰어노는 아이들에겐 실내에서 놀 걸 권한다. 그렇게 성실하게 제 본분을 다하던 그는 마을에서 좀 떨어진 농지로 향하다가 ‘그것’과 만나고 말았다.
‘기사님, 왜 이런 땡볕에 아래에서 마을을 순찰하고 계세요?’
새하얀 옷,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형형하게 빛나던 제비꽃색 눈동자까지.
손에 든 낡은 낫이 아니었다면 그저 낯선 여인일 뿐이라 생각했을 ‘그것’은 소리 소문도 없이 나타나, 살가운 미소를 지으며 루크에게 다가왔다.
루크는 소문으로만 듣던 포우드니차를 만난 것이 기뻐, 해가 머리 위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도 잊고 길 한가운데 서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여인은 제가 초자연적인 존재가 맞냐 묻는 루크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것에는 적극적으로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고 한다. 다만, 안타깝게도 루크는 대부분의 대답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여인이 한 말 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했으니.
‘어머, 땀 좀 봐. 이만 가셔서 쉬는 게 어때요?’
짐짓 걱정된다는 듯 충고한 여인의 손끝이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훔친 순간, 자신은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그리 진술하는 루크의 말을 들은 빌은 황당하다는 듯 대놓고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돼. 너까지 그런 헛소리를…….”
“빌, 나는 지금 너를 농락하려는 게 아니야. 그 여자는 정말 존재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푹 쉬기나 하렴. 올해 여름은 유독 더워서 별일이 다 일어나는구나.”
더는 듣고싶지 않다. 이런 이야기를 자꾸 듣고 있다 보면, 자신까지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다.
빌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대화를 끊고 곧장 밖으로 나섰다. 정오는 지났지만, 오히려 더 더워진 것 같은 바깥에는 일하는 사람은커녕 행인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빌은 피부에 와닿는 열기에 손부채질하며 저택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이런 날씨엔 밖에 돌아다니지 않고 어디든 실내로 들어가 쉬었겠지만, 헌트 가의 별장은 셴하이트 후작저와 멀지 않았던 탓에 바삐 걸어가면 몸에 무리가 가기 전 도착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포우드니차? 그런 게 존재할 리가 있나. 이렇게나 더우니, 다들 더위를 먹은 거겠지.’
얼른 집에 들어가서 시원한 곳에서 푹 쉬어야겠다. 해가 지면 업무에 복귀해야 하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쉬겠나.
커튼을 친 서재 구석에서 책이라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어가는 빌은 제 발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앞만 향했다. 제가 어느 방향으로 걸어가는지도 모르는 채, 태양을 피해 땅만 보며 걸었지.
그렇게 10분이면 갈 거리를 몇 분이나 걸었을까. 어쩐지 오늘따라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이 멀다 느낀 빌이 고개를 들자, 광활한 밀밭이 나타났다.
“……허.”
언제 여기까지 걸어온 거지.
아니, 애초에 제가 방향은 맞게 걸어온 건가.
저택은 보이지도 않는 먼 곳에서 정신을 차린 빌은 그대로 걸어온 길을 그대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그의 걸음은 어이없는 이유로 멈춰지고 말았다.
“어라.”
뒤를 돌아보자, 어디선가 많이 들었던 모습의 여인이 서 있다.
녹이 슨 낫을 든, 얼룩 하나 없는 새하얀 옷을 입은 새까만 머리카락을 땋아 내린 여인. 모두가 말하던 그 여인이, 발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오며 묻는다.
“영주님의 아드님 아니세요. 이 대낮에, 어딜 다녀오시나요?”
말도 안 된다. 이게 현실일 리 없다.
혹시 자신은 더위를 먹은 건가. 하지만 이렇게나 정신이 멀쩡한데, 더위를 먹었다고 할 수 있을까?
빌은 땀으로 젖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가볍게 입술을 깨물어 보았다. 생생하게 느껴지는 고통으로 보아하는데, 이건 꿈도 환상도 아닌 현실인 모양이었다.
“너는…….”
“아, 세상에.”
뒷걸음질도 치지 못하고 가만히 얼어있는 빌에게 다가온 여인은, 시체처럼 싸늘한 손으로 축축함이 남아있는 뺨을 쓰다듬었다.
“고운 얼굴이 땀범벅이 되었네요. 조금, 쉬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시원하다.
사람인지 아닌지도 모를 존재의 손에서 기분 좋은 냉기를 느낀 빌은 저도 모르게 잠들 듯 쓰러져서 잠들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