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잎으로 만든 과자들, 오로라같이 여러 색이 공존하는 차, 나뭇잎같이 생긴 파이와 나무 열매가 들어간 젤리까지.
하지만 이 비현실적인 다과들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엄지공주처럼 작아진 자신의 몸이겠지.
아이렌은 제 앞에 놓인 차를 홀짝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금 이게 꿈이 아니란 말이지?’
제가 있는 곳은 집 근처 숲, 사람들은 잘 오가지 않는 꽃밭 속. 새벽이슬이 맺힌 꽃들 사이 만들어진 자연물로 된 다과회장은 판타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풀을 엮어 만든 테이블과 줄기를 엮어 만든 의자. 그리고 제 주변에 둘러앉은 날개 달린 인간들과, 맞은 편에 있는 왕관을 쓴 소년까지.
장밋빛 머리카락을 단정히 정리한 아름다운 소년, 리들은 차를 홀짝이며 아이렌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두리번거리는 거니? 혹 차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네? 아, 아뇨! 그냥 신기해서요!”
“신기해?”
“네. 이런 색의 차는 처음 마셔봐서요.”
사실 차보다는 이 상황 자체가 신기한 거지만, 이렇게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신기하지 않은 게 없어지니 이렇게만 대답하자.
차마 ‘무슨 방법으로 저를 작아지게 했으며 이 과자와 차는 어떻게 만들었고 가구들은 또 무슨 수를 써 제작한 거냐.’라고 전부 묻지 못한 그는 반쯤 비운 찻잔을 내려놓았다. 비록 색은 좀 수상하긴 했어도, 요정의 차는 대단히 맛있었다. 부담스럽지 않은 상큼함과 기분 좋은 단맛이 아주 훌륭했지.
아이렌의 말을 들은 양옆의 요정들, 에이스와 듀스는 흥미로워하며 초대받은 인간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인간은 차 안 마셔?”
“듣자 하니 인간들의 차는 녹색 아니면 붉은색이라고 하더라고.”
“그 두 가지 색밖에 없는 거야?”
“아마도? 나도 잘 모르지만.”
“헤에. 그건 따분하겠네.”
자신을 사이에 두고 조잘조잘 떠드는 얼굴들이 아름답다. 뻔한 표현이지만, 과연 요정답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지 모를, 때도 묻지 않는 새하얀 옷들은 또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등 뒤에 돋아난 반투명한 날개는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무지개색으로 빛나 눈을 부시게 했다.
‘처음 이 녀석들을 만났을 땐,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몰랐지.’
아이렌은 제 옆에 앉은 두 요정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때는 한 달 전 이른 아침. 평소보다 잠에서 일찍 깨어 기분 전환 겸 산책을 나온 아이렌은 숲의 안쪽에서 반짝거리는 빛 두 개를 보았다.
누가 전자기기라도 떨어뜨리고 간 걸까. 아니면, 짐승을 사냥하기 위해 날붙이 같은 게 설치된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눈으로 확인해야 호기심이 사라질 것 같아 다가간 장소에 있는 건, 덫에 걸린 두 명의 요정이었다. 그래, 바로 제 양옆에 앉은 에이스와 듀스 말이다.
나란히 날개가 끼여 움직이지 못하는 두 요정은 낯선 인간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지만, 상대가 자신들을 해칠 생각이 없는 걸 확신하곤 발버둥 치는 걸 멈추었다. 아이렌 또한 온몸에 빛을 발하는 손바닥 크기의 요정들을 보고 당황스러움에 빠졌지만, 곧 그들이 큰 곤경에 처한 걸 눈치채고 열심히 덫을 해체해 주었다.
그렇게 서투르게 두 요정을 해방해 준 아이렌은,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둘에게 얼떨결에 보상을 약속받았다.
“고마워, 꼭 보상하러 올게!”
“요정들은 약속한 건 꼭 지키니까, 기대하라고!”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요정을 보며 아이렌은 제가 꿈이라도 꾼 줄 알았지만, 놀랍게도 이건 현실이었다. 오늘 아침 일어나자마자 창가에 찾아온 둘에게 이끌려 숲까지 온 아이렌은 꼭 알약처럼 보이는 작은 과자를 얻어먹은 후, 이렇게 몸이 작아져 요정들의 다과회장까지 오게 되었다.
아까 제가 먹은 건 대체 뭘까. 원래 크기로 돌아갈 수는 있을까.
뭐 그런 현실적인 걱정을 하면서 남은 차를 비운 아이렌에게 다가온 것은 자신을 케이터라고 소개한 요정이었다.
“차는 입에 맞을까?”
“아, 네. 감사합니다.”
“다행이다~ 그런데, 넌 왜 우리에게 존대하는 거야? 보통 인간들은 자기보다 작은 존재에겐 말을 놓던데.”
“아니, 그건 무례한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닐까요. 초면엔 당연히 존댓말을 해야죠. 에이스나 듀스는 저랑 구면이지만, 다른 분들은 아니잖아요.”
자신은 대단히 상식적인 답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요정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리들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과연, 너는 대단히 예의 바른 인간이구나. 에이스와 듀스를 도와준 것도 그렇고, 요즘 시대엔 보기 드문 아이라는 걸 인정할게.”
자신은 누가 봐도 다 컸는데, 설마 아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이야. 보기에는 저쪽이 더 아이 같은데 말이야. 역시 상대는 요정이니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게 아닐까.
칭찬을 받았지만 어째 기분이 묘해진 아이렌은 감사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후후. 다과회에 인간을 초대하는 건 처음이었는데, 나쁘지 않구나. 인간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흥미롭고. 트레이, 한 잔 더 주겠어?”
“그럼. 자.”
리들이 빈 찻잔을 들어 보이자, 바쁘게 움직이며 다과를 추가하던 한 요정이 차를 보충해 주었다.
왕과 시종 사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격의 없는 그 모습을 가만 보던 아이렌은 제 오른편에 앉은 에이스에게 물었다.
“저, 이런 걸 물어봐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저분이 요정들의 왕이지?”
“응. 그런데?”
“왜 저 초록 머리 요정은 왕에게 편하게 말을 하는 거야? 그래도 돼?”
“아. 트레이 씨는 임금님의 소꿉친구거든. 특별대우라는 거지.”
“그렇구나.”
하긴, 생각해 보니 인간들이나 권력에 집착하지, 초자연적 존재인 요정들은 대단히 자유로운 모양이니 저럴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아이렌은 제 세계와 요정 세계를 비교하는 걸 관두고, 제 손으로 차를 따라 마셨다.
찻잔이 다시 오색 빛의 차로 가득 차오르자, 양옆의 요정 친구들의 권유가 이어졌다.
“아이렌, 이거 먹어볼래?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자야.”
“고마워, 듀스.”
“잠깐! 그 과자는 이걸 올려 먹어야 맛있어. 자!”
“그래? 고마워, 에이스.”
앞다투어 인간 손님을 대접하려는 두 요정의 모습이 퍽 귀엽다. 리들은 자신들끼리 차를 마실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을 보이는 둘을 보며 턱을 괴었다.
“저 녀석들도 좋아하는 것 같고, 몇 번 더 부르도록 할까.”
“네가 즐거운 거 아니고, 리들?”
“그것 또한 맞지. 애초에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다과회에는 발을 들일 수 없으니까.”
트레이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리들은 여유로운 태도로 세 사람을 구경했다. 그사이 경쟁이 붙은 건지, 에이스와 듀스는 손님을 두고 아웅다웅 싸우고 있었다.
“아, 그만 좀 끼어들어! 되게 시끄럽네, 너!”
“끼어드는 건 네 쪽이잖아? 에이스.”
“말 다 했냐!”
“다 했다, 왜!”
날개가 파들파들 떨릴 정도로 감정이 격해져 싸우는 둘 사이에 낀 아이렌은 헛웃음 지으며 차만 홀짝였다. 갑자기 싸움의 원흉이 된 이 상황이 난감하긴 하여도, 딱히 불편하진 않았던 거였다.
‘혹 말리겠다고 말을 얹었다가 싸움이 커지면 곤란하니 가만히 있자.’ 그리 판단한 아이렌은 괜히 자신들을 지켜보는 리들에게 말을 걸었다.
“요정들도 인간들처럼 사소한 걸로 싸우나 보네요.”
“당연하지. 정말이지, 시끄럽다니까.”
하지만 그런 소란스러움이 요정들의 정체성 아니겠는가.
리들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저리 말하면서도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