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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뢰, 분명히 떼 버렸는데 왜 다시 붙어있는 거지?”
배세진이 짜증스레 중얼거리는 소리에 김래빈이 고개를 돌렸다. 눈살을 살짝 찌푸린 배세진이 모서리가 찢긴 의뢰서를 들고 내용을 다시 살펴보고 있었다. 지난 주에 떼어버린 의뢰지와 같은 내용이라는 것을 확인한 배세진이 헌터 협회 직원에게 항의하러 데스크 쪽으로 걸어왔다. 마침 의뢰 게시판과 데스크 사이의 둥근 테이블 앞에 앉아있던 김래빈이 제 쪽으로 다가오는 배세진을 불러 세워 질문했다.
“세진 형, 무슨 의뢰이길래 그러십니까?”
“뱀파이어 사살 의뢰야. 테스타가 맡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아서.”
“이상한 일이군요. 협회에서 위험도를 측정해 의뢰를 분류하지 않습니까?”
“위험도는 적당해. 지난번에 거절한 건데 다시 들어와서.”
헌터 협회 소속 S급 헌터 팀 테스타는 몰이사냥에 특화된 마물 사냥단이었다. 뱀파이어 한 개체를 상대하는 것은 그들과는 잘 맞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급에도 맞지 않는 일이었다. 김래빈은 의아한 얼굴로 다시 데스크로 걸어가기 시작한 배세진을 졸졸 따라갔다.
“의뢰번호 902, 분명히 지난번에 거절했을 텐데 다시 들어왔어요. 확인 다시 부탁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분류 팀이 분명히 다른 쪽으로 넘겼다는데…… 이게 왜 이 쪽으로 다시 왔지.”
사과하는 데스크 직원을 앞에 두고 김래빈이 배세진에게서 의뢰서를 받아 읽었다. 의뢰는 검은 숲의 마녀라 불리는, 오래 묵은 뱀파이어를 사살하는 일이었다. 애초부터 유명한 개체였기 때문에 김래빈은 조사를 하지 않아도 그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십 년쯤 전 강원도 깊은 산에 생긴 이상한 숲, 통칭 검은 숲에 사는 마녀. 숲이 생긴 이후부터 많은 헌터들이 깊은 숲에 도전했지만 그 중 누구도 살아나오지 못했다. 숲에 마녀가 산다는 사실도 숲에서 살아남은 소녀의 “맨발을 한 붉은 눈의 마녀가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나가고 싶으면 이 박쥐를 따라가라 했다”는 진술로 겨우 알게 된 것이다. 위험도도 높으며 굳이 개발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험준한 산 속의 숲이기에 단순히 그 숲에 들어가지 않기로 숲이 나타난 지 6개월만에 결정되었던 장소다. 그런 장소인데 갑자기 마물 구제驅除를 결정하다니? 김래빈은 의뢰서 마지막에 적혀 있어야 할 의뢰인 란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의뢰인 란은 텅 비어 있었다.
“확실히 의심스러운 의뢰이긴 합니다. 정부 주도 마물 구제인 줄 알았는데 의뢰인 란도 공란이고, 보수도 말도 안 되게 높아요.”
“그렇지? 선수금이 다른 의뢰의 의뢰금만큼 있어.”
“누가 붙였는지도 알 수 없는 의뢰인데다 금액도 이상할 정도로 높다라…….”
김래빈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의뢰서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김래빈의 눈에 호기심이 깃드는 것을 본 배세진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김래빈.”
“예?”
“너, 이거 할 생각은 아니지?”
“…….”
“대답해. 인마.”
배세진이 도끼눈을 떴다. 김래빈은 배세진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무시하고 오히려 동그란 눈으로 질문했다.
“안 됩니까?”
“안 돼!”
“그렇지만, 호기심이 들지 않습니까? 뱀파이어 한 개체 구제에 이 금액을 낼 수 있는 부호는 흔하지 않습니다. 익명으로 의뢰를 하는 일도 많지만 그 때에는 공란이 아니라 익명이라고 적혀 있기도 하고요. 게다가 그 일대는 개발할 가치 없는 곳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갑자기 의뢰를 할 이유가 없는데…….”
“김래빈.”
“네.”
“어차피 우리가 한번 거절한 의뢰야. 다른 사람이 처리하겠지. 관심 가지지 마.”
“예…….”
김래빈이 어째서인지 고집을 부리지 않아 배세진은 어쩐지 불안한 기분이 되었다. 가끔 엉뚱한 짓을 벌이는 김래빈이 뭔가 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따라서 배세진은 김래빈에게 절대 그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약속을 단단히 받아 두었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은 막으면 막을수록 커지는 법. 배세진은 일주일 뒤 김래빈이 검은 숲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야 만다.
김래빈은 제 자동차에서 내렸다. 몇 달 전에 뽑은 신식 지프차를 숲 초입에 며칠간 방치해 두어야 한다는 게 아쉽긴 했으나 제가 선택한 의뢰였다. 자동차 문을 꼼꼼히 잠근 김래빈은 높이 솟아 있는 나무들을 눈으로 쓱 훑었다. 음기가 강한 마물인 뱀파이어가 산다는 숲답게 어두운 기운이 숲 안에 가득했는데, 음기는 숲 안에 갇힌 것처럼 나무 그림자 바깥으로는 나오지 못했다. 김래빈은 가만히 서서 숲의 결계를 응시했다. 음기마저 갇혀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약한 결계가 아님은 분명했다. 결계의 파훼법을 찾기 위해 가져온 도구들이 모두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확인한 김래빈은 한숨을 쉬었다.
‘몸으로 부딪혀 봐야 하는 건가.’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결계의 술식을 제대로 알아챌 수 없었다. 그러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로, 직접 몸으로 부딪혀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계가 어떤 방법으로 출입을 금하는지 몰라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둔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김래빈은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무 그늘 아래로 한 걸음 옮겼다.
몸이 튕겨나가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처음부터 결계 따위는 없었다는 듯이 김래빈은 숲의 그림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숲 안에 가득한 어둡고 축축한 기운이 몸을 내리눌렀다. 마치 거대한 늪 한가운데에 들어온 것 같았다. 김래빈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한 걸음을 더 내딛었다. 달리 나가고 싶다거나, 숲 안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장치는 없는 것 같았다. 흔한 인식 장애 결계조차도 걸려있지 않았다.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김래빈은 천천히 숲 속을 걸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숲답지 않게 숲 안으로 난 길은 땅이 보일 정도로 정리되어 있었다. 넓은 잎 나무의 낙엽도 떨어지지 않은 깔끔한 오솔길. 김래빈은 기괴할 정도로 깔끔한 숲길에서 오는 반발심을 내리누르고 잠시 가만히 서서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쉽게 이질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이상하다면 이 공간 전체가 이상하지만, 숲 경계에 가득했던 음기가 숲의 중심으로 가까워질수록 줄어들고 있었다. 음기를 품은 마물인 뱀파이어가 머무는 곳은 자연스레 어두운 기운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길이 이어진 곳에 뱀파이어가 사는 곳이 있다면 이럴 리 없었다.
그렇지만 이상하다 느끼면서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검은 숲의 마녀에 대한 자료는 극히 적어 김래빈이 알고 있는 것이 끝이었다. 숲의 마녀는 여성형 뱀파이어라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사실은 뱀파이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마물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존재가 인간이라면 어째서 이런 곳에 살고 있으며 어째서 그런 의뢰가 도착한 것인가?
숲은 보기만큼 넓지 않았다. 혹은 누군가에 의해 공간의 왜곡이 일어난 것일지도 몰랐다. 김래빈은 얼마 걷지 않아 숲의 가장 깊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음기와 양기가 적절히 섞인 편안한 환경. 그곳에는 작은 벽돌집 하나가 있었다. 김래빈은 잠시 고민하다 집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그러나 대답은 뒤에서 들려왔다.
“네가 아니길 바랐는데.”
동물 소리, 바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한 숲이라 작은 목소리라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들려온 것은 약간 낮은 톤의 여자 목소리였다. 김래빈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돌려 멀리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을 한 날카로운 눈매의 여자.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것 이외에는 외형적으로 완전히 평범한 여자였다.
“결국엔 너구나.”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여자는 그렇게 말했다.
김래빈이 무어라 질문할 새도 없이 여자는 타박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김래빈에게 다가왔다. 김래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나 여자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옆구리에 낀 채 김래빈을 지나쳐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김래빈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굳어 여자가 하는 양을 쳐다보기만 했다. 여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안 들어오니?”
여자는 김래빈을 집에 들이고도 혼자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움직임은 느릿했으나 손놀림은 빨랐다. 바구니에 담아 온 나무열매와 약초 따위의 흙을 털고 대강 정리하더니 곧 물을 끓이기 시작했다. 김래빈은 여자가 안내한 대로 둥근 식탁 앞에 앉아 멍하니 그 하는 양을 쳐다보기만 했다. 말을 걸려 “저기…….” 따위로 운을 떼면 여자가 심드렁한 얼굴로 “조금만 더 기다려.” 하는 상황이 세 번이나 반복되니 김래빈도 포기한 것이다.
그래서 김래빈은 차라리 집 안을 둘러보기로 했다. 집 안은 제법 현대적인 모습이었으나 전기와 같은 문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어두워지면 벽에 달린 초 모형에서 마법처럼 빛이 흘러나오는 등 믿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다. 김래빈은 멍하게 하얀 빛을 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이런 실용적인 아티팩트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서서 알 수 없는 방법으로 주전자에 물을 끓이던 여자가 곧 식탁으로 찻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가져왔다. 여자는 익숙하게 차를 우려 찻잔에 차를 채운 이후 김래빈에게 찻잔 하나를 밀어주었다. 김래빈은 영문도 모른 채 “감사합니다.” 했다. 김래빈이 차를 마시지 않고 여자를 응시하기만 하니 여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 마디 덧붙였다.
“다즐링이야. 이상한 건 안 탔으니 마셔도 돼.”
그러며 제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제가 먼저 차를 홀짝였다. 뜨거운 찻물에 혀를 데었는지 여자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김래빈은 그 표정에 저도 모르게 바짝 긴장했다. 이 여자가 사람인지 마물인지, 혹은 알 수 없는 생물인지 모르면서 여자에게 휘말려 집 안으로 들어와 알 수 없는 차까지 받아 버렸다. 첫눈에 쏘아버렸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존재와 이렇게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김래빈은 식탁 아래로 주먹을 꼭 쥐고 여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여자는 그 눈빛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받아칠 뿐이었다.
결국 진 것은 김래빈이었다. 김래빈은 결국에는 질문을 뱉어냈다.
“저는 ‘검은 숲의 마녀’라고 불리는 뱀파이어 개체를 찾고 있습니다. 그 개체에 대해 아십니까?”
“……나는 마물 따위가 아니야.”
홍차를 후후 불어 다시 마시던 여자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김래빈은 잠시 굳어 그 여자를 노려보았다.
“마녀. 저는 당신을 죽이러 왔습니다.”
“응. 알고 있어.”
“……알고 있으면서 그렇게 여유롭습니까?”
“래빈아. 네가 나를 죽이려 했다면 몇 초 전에 내 목이 날아갔을 거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제 이름을 아십니까?”
“당연히.”
마녀는 도자기끼리 부딪히는 쨍 소리를 내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눈을 내리깐 얼굴은 어쩐지 처연하고 슬퍼 보였다. 그러나 그 표정은 마녀가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김래빈에게로 향하면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여자는 처음 보였던 무감한 표정으로 김래빈을 응시했다.
“내가 너를 불렀으니까.”
잠시 정적이 흘렀다. 김래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여자를 쳐다보았다.
“부르셨다 함은, 의뢰인이 본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것도 맞아.”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기라도 하듯 눈을 한번 깜박였다. 김래빈은 자신도 모르게 질문했다.
“어째서 그런 의뢰를 하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 전에, 그 존대부터 치워버리면 안 될까.”
“처음 뵙는 분에게 존대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나는 차소희야.”
“이름을 불리길 원한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내 이름을 부를 일이 있으면.”
“저를 아십니까?”
차소희는 김래빈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눈살을 찌푸린, 익숙한 불만스러운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의아함만이 그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저 애는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그런 주제에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다시 내게 왔구나.
그런 생각을 숨기며 차소희는 태연히 대답했다.
“응.”
차소희는 제 몫의 차를 다 마시지도 않고 일어섰다. 이어질 질문에 더 이상 대답하기 싫다는 완곡한 거절이었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는 차소희 때문에 질문할 기회를 놓친 김래빈은 멍하니 그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용비늘민들레 꽃잎을 말려야겠어.”
“예?”
“차는, 안 마시니?”
“차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렇담 나는 언제 죽여줄 거니?”
다음 방문일을 묻는 양 여상하게 묻는 꼴에 김래빈은 잠시 말을 잃었다.
“……죽길 원합니까?”
“응. 언제나 그랬지.”
“그러면서 약재를 말린다고요.”
“다음 순간에 죽더라도 지금 할 일은 해야 해.”
“그것이 당신의 살아가는 방식입니까?”
“그래.”
김래빈은 주머니 안에 든 천궁권총을 지긋이 쥐었다. 특별한 힘도, 방어수단도 없어 보이는 여자. 회복력이 뛰어나 보이지도 않고 특별한 마법적인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이든 마물이든 이 세계에서 태어난 존재라면 이 권총에 맞는 즉시 죽어버릴 테다. 죽이려면 당장 죽일 수 있지만…….
“고민하고 있는 것 같구나.”
차소희가 김래빈을 내려다보았다.
“일주일의 시간을 줄게. 일주일간 검은 숲에 머물다 가렴. 빈 방이라면 있으니.”
그렇게 말하는 차소희는, 어쩐지 슬퍼보이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결론만을 말하자면, 김래빈은 제안을 수락했다. 거절할 이유가 차고 넘치는 제안이었지만 거절할 마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엇 하나 제대로 말해주는 것이 없는 의뭉스러운 마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인가, 혹은 다른 이유 때문인가. 김래빈은 정리되지 않는 마음으로 차소희가 안내해준 방을 둘러보았다. 크림색 벽지가 발려 있는 방에는 책이 가득 찬 책장과 검은색 책상, 그리고 역시 무채색인 침대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흑단으로 만들어진 검은 피아노였다.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는 그 자체만으로 골동품처럼 보였다. 방은 넓었고 사용 흔적이 없었지만 살뜰하게 관리된 듯 먼지 하나 없었다. 더럽고 정리 안 된 방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방에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김래빈이 말없이 방 안을 둘러보기만 하고 있자 차소희는 여전한 태연한 얼굴로 문간에 기대어 말했다.
“방이 마음에 안 들면 말해. 다른 방을 내 줄게.”
“아니요. 방은 마음에 듭니다. 단지…….”
“단지 뭐.”
“방이 너무 깨끗해서요.”
“그래서 싫어?”
차소희가 의아한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깨끗한 방이 더러운 방보다는 낫지 않나? 정도의 의문이 담긴 눈빛이었다. 애초 깨끗한 방이 싫지도 않았지만 그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 싫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김래빈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묘한 기분에 질문했다.
“손님이 자주 옵니까?”
“이상한 걸 묻는구나. 이 숲에 묵어가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니?”
“손님방이 깨끗해서요.”
“손님방이 아니니까.”
김래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다면 누구의 방이란 말인가. 김래빈의 시선에 차소희는 속을 읽을 수 없는 얼굴로 김래빈을 쳐다보기만 했다. 묻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대답해주지 않겠다는 양 그리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는 것에 김래빈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러면 누구의 방입니까?”
“남편의 서재로 쓰던 방이었어.”
남편의 서재라는 말을 듣자 속이 꾹 막힌 듯 답답해졌다. 결혼을 하기엔 이른 나이 같아 보이는데 벌써 결혼을 했단 말인가? 그는 차소희의 왼손을 힐끗 보았다. 아까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왼손 약지에 깔끔한 디자인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죄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 무엇 하나 꺼낼 수 없었다. 결국 그가 꺼낸 말은 한심한 것이었다.
“……그런 방을 내어주어도 됩니까?”
“손님방보다는 이 방이 깨끗해.”
“남편분은요.”
“죽었어.”
차소희는 별것 아니라는 듯, 오늘 저녁 메뉴를 말하는 것처럼 평이한 어투로 말했다. 김래빈은 분명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왜? 죽은 사람이 쓰던 방이라서 꺼림칙하니?”
“남편분과의 추억이 깃든 방이 아닙니까?
“내가 괜찮으니 방을 내준 것 아니겠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손님방을 치워줄게.”
“……괜찮습니다.”
내키지 않는다는 투였기에 김래빈은 결국에는 그 남편의 서재였다는 방을 사용하기로 했다. 어쩐지 꺼림칙한, 질투와 비슷한 색채의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김래빈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힌 책들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제목이 쓰여 있었다. 그제서야 김래빈은 이 숲이 던전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던전 안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오지 않았을 뿐, 검은 숲은 갑작스럽게 생긴 던전이다. 그리고 던전 안에서 멀쩡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 차소희는 인간이라기보다는 던전의 보스 몬스터에 가까울 테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김래빈은 괜히 올라오는 거북함에 한숨을 쉬었다. 나는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건지.
보스급으로 강한 몬스터는 인간과 보통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드래곤은 인간으로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도 가능하다고 들었다. 차소희는 몹시도 인간다워 보이긴 했으나 섣불리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데, 이 기묘하게 긴장이 풀리는 감각은 무엇이란 말인가. 김래빈은 이상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책등에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책에 손을 뻗었다.
책등에 제목이 적혀 있지 않은 그 책은 악보집이었다. 서투른 바느질로 엮여 있는 악보는 사람이 직접 베꼈거나 혹은 직접 쓴 것이었다. 적혀 있는 글자는 여전히 모르는 것이었지만 오선지 위에서 춤추는 음표들과 기호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김래빈은 낮게 그 악보에 적힌 음악을 허밍해 보았다.
그 악보에 적힌 선율이 듣기에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즈음 바깥에서 쿠당탕거리는 소리가 났다. 무언가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사람이 이쪽으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숲에는 김래빈을 제외한 사람이 차소희밖에 없었으니 이렇게 달려올 사람도 차소희뿐이었지만 김래빈은 차소희가 그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매사에 심드렁하고 태연할 것 같던 그 여자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므로 차소희가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열어젖히고 간절한 표정으로 제 얼굴을 바라봤을 때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김래빈?”
급하게 뛰어와 가쁜 숨으로 차소희가 말한 것은, 고작 그의 이름이었다. 울고 싶은 듯 간절한 표정, 희망에흔들리는 눈동자, 주먹을 꽉 쥔 손. 김래빈은 당황하여 악보집을 든 채로 차소희에게로 다가갔다.
“왜 그러십니까?”
한 마디를 꺼내자마자 순식간에 그 얼굴에 실망감이 가득 찼다. 차소희는 고개를 떨군 채 애써 웃으며 말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한숨 같았다.
“아까 전의 허밍…… 네가 부른 거니?”
“예.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냐, 아무 문제도…… 아무 문제도 없어.”
그렇게 말하는 모습은 아무 문제도 없다기보다는 아무 문제도 없어야 한다는 다짐에 가까워 보였다. 김래빈이 그에 대해 추궁하려 운을 떼자 차소희가 말허리를 잘랐다.
“아무 문-.”
“그나저나, 저녁은 뭘로 할래? 곧 해가 질 거야. 저녁 먹어야지? 너도, 나도.”
“……아무거나 좋습니다.”
“그래. 준비가 다 되면 부를게.”
그리 말하는 차소희의 얼굴은 아까 전부터 계속 보았던 그 심드렁한 무표정이어서, 김래빈은 더 이상 그를 추궁할 수 없었다.
차소희는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김래빈의 방으로 그를 데리러 왔다. 차소희를 따라 다시금 부엌 겸 식당으로 향한 김래빈은 꽤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을 보고 차소희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차소희가 뾰로통한 투로 질문했다.
“왜, 의외니?”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마녀는 본래 약제학과 연금 등에 밝아. 요리를 못하는 게 이상하지.”
본래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하고는 있으나 어쩐지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느껴졌다. 차소희는 말을 마치기도 전에 아까 전 제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다. 정말로 그런 이유로 본 것은 아니었는데. 김래빈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그런 이유에서 본 게 아닙니다. 굳이 의외인 부분을 찾자면 이런 곳에서 파스타를 발견했다는 점 정도고요.”
“나도 다른 사람 먹는 거 먹어. 남의 피를 마시거나 하지 않는다고.”
차소희는 그런 말을 하며 제 몫의 파스타를 포크에 돌돌 말았다. 김래빈도 곧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식탁 위에 차려진 어린잎 샐러드나 돼지고기 스테이크, 제 앞에 놓인 알리오 올리오 파스타 따위를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이런 곳에서는 이런 평범한 재료들을 구하기 힘들지 않습니까?”
“다 공급해주는 이가 있기 마련이지.”
“어떤 이입니까? 감히 이곳에 오는 일반인이나 헌터는 없습니다.”
“너는 알 것 없다는 뜻이었어.”
“그런 말을 하면 더 궁금해지는데요.”
“아무렴, 다 방법이 있단다.”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며 차소희는 입으로 파스타를 가져갔다. 입안 가득 파스타를 우물거리며 너도 얼른 먹으라는 듯 포크를 김래빈에게로 향해 까딱거렸다. 김래빈은 포크를 들고서 가만히 차소희를 바라보았다. 대답해주지 않으면 먹지 않겠다는 듯 완고한 표정이었다. 차소희는 입 안에 든 것을 억지로 삼키고선 김래빈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어린애니? 밥 안 먹는 것으로 시위하게?”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습니까? 다행히도 굶주림에는 익숙합니다.”
“그래. 내가 졌어. 매달 1일마다 황새가 식재료를 물어다 준단다. 됐니?”
“정말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말을 믿겠습니까?”
“먹는 것 가지고 투정하는 것을 보면 어린애나 다름없지. 어린애를 어린애 취급하는 게 뭐가 나쁘니?”
“어린애도 본인을 어린애 취급하면 화냅니다.”
차소희는 머리가 아픈 듯 관자놀이 부분을 꾹꾹 눌렀다. 본래 래빈이 유치한 이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너무 심하지 않나? 차소희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김래빈은 차소희가 하는 양을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차소희가 한숨을 쉬었다. 항복의 뜻이었다.
“하아……. 너는 정말, 변하질 않는구나.”
“저를 아는 듯이 말하는군요. 저를 이전에 만난 적이 있습니까?”
“이래 봬도 바깥세상에 밝단다. 돈만 주면 뭐든 하는 남자 덕분에.”
“숲을 오가는 이가 있다는 뜻이군요. 남편은 죽었다 하셨으니 남편은 아닐 테고, 그 자가 저에 대해서도 말해주었습니까?”
차소희는 아차 하는 얼굴을 했다. 김래빈은 어느새 포크마저 놓고 흥미로운 얼굴로 차소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차소희는 짐짓 엄격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먹지 않으면 이야기하지 않겠어.”
“어린애 둔 어머니처럼 구는군요.”
“그럼 네가 내 아들이라도 된다는 소리니? 헛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으려무나.”
“어린 시절에는 제법 착한 아이였습니다만.”
“그런 아이, 둔 적 없어. 애초 아이를 가져본 적도 없으니.”
차소희는 결국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김래빈을 노려보며 차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화나 보이는 얼굴에 말문이 턱 막혔다. 차소희는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결국에는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 남편과 나의 아이를 가지고 평범한 여자처럼 사는 것을 원한 적도 있었지. 그렇지만 내 남편은 죽었고, 나는 여전히 검은 숲의 수인임을 어찌하겠니?”
“…….”
“괜한 이야기를 했구나. 그 못된 입 다물고 저녁이나 먹으렴.”
“……예.”
그리고 두 사람이 밥을 모두 먹을 때까지 식탁 위에는 그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김래빈은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그는 숲길을 걷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가는 길이라 길이 아무리 길고 험하든 상관없었다. 아내는 이 숲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매번 그는 아내를 두고 바깥에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걸어간 곳에는 옛 양식으로 지어진 저택이 있고 사랑하는 아내는 정원에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곧 울타리 밖의 그를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그에게로 달려왔다. 그는 제게로 달려온 아내를 끌어안고 그대로 한바퀴 돌았다. 아내는 즐거운 듯 까르르 웃다 그의 뺨에 부드럽게 키스했다. 그 또한 아내의 얼굴에 열정적으로 키스를 돌려주었다. 사랑하는 아내는 종달새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다녀왔어?” 물었다. 그는 그녀를 꽉 껴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내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드럽게 긴 숨을 쉬었다. 그녀가 내쉬는 달콤한 한숨소리를 듣던 그는, 문득 제 아내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떻게 그 얼굴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얼굴인데. 방금도 본 얼굴이었는데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얼굴 생김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불안감에 휩싸여 품 안의 아내에게 얼굴을 보여달라 속삭였다. 아내는 김래빈의 가슴에 얼굴을 비비며 “싫어.” 장난스럽게 말했다. 닿아오는 숨결에 가슴 안쪽이 간지러웠다.
그가 다시금 얼굴을 보여달라 보채기 전, 아내가 품 안에서 고개를 반짝 쳐들었다.
그 얼굴을 확인한 순간 김래빈은 잠시 굳을 수밖에 없었다.
제 품 안에서 차소희가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김래빈은 잠에서 깨어났다.
하루 종일 심드렁하고 지루함을 숨기지 않는 얼굴로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던 차소희. 그 삭막하고 냉정한 얼굴이 그리 환하게 웃을 수 있다니……. 그 웃는 얼굴이 방금 꽃잎을 펼친 나팔꽃처럼 사랑스러워 김래빈은 괜히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신산한 기분으로 방의 풍경을 바라보다 김래빈은 이 괴상한 꿈의 출처를 문득 깨달았다. 그 꿈, 차소희의 남편이란 자의 기억이구나. 그것이 아닐 리 없었다. 이 방은 차소희의 남편이 서재로 쓰던 방이었고, 이 집은 그와 그 남편의 기억들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 남편은 차소희를 사랑했을 테니까. 그러므로 지금 차소희에게 느끼는 감정은 아직 잠에서 덜 깨어, 차소희의 남편에 대한 이입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어제 차소희가 말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하자면 차소희 또한 남편을 지극히 사랑했음이 분명했다. 그 남편의 기억에서 엿본 애교라거나, 기쁘고 행복해 보이는 차소희의 표정으로도 알 수 있었다.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 리 없다. 그 사랑이 다른 이에게 향했다고, 지금도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질투로 가슴이 불탔다. 어제 처음 본 마녀를 이렇게 깊이 사랑할 수 없다고. 그러므로 이것은 남의 감정일 터임을 머리로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남편과 살면서 자신은 본 적 없는 맑은 웃음을 지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 웃음이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전까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폭력적인 상상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김래빈은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잠에서 깨어 정신이 또렷해졌음에도 감정이 가시지 않았다. 마녀의 얼굴을 어찌 보면 좋나. 고민하다 김래빈은 방에서 나갔다.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였다.
짧은 고민이 무색하게도 차소희는 보이지 않았다. 제 방에 틀어박혔을 수도 있고, 어제처럼 밖에 나갔을 수도 있겠다. 거실로 나가자 연결된 식당에 간단한 빵과 베이컨, 계란 프라이 따위가 올려진 것이 보였다. 차소희는 수많은 사람을 해쳤다는 마녀답지 않게 세심한 구석이 있었다.
김래빈은 마련된 음식을 먹고 설거지를 한 뒤 집 바깥으로 나갔다. 하루종일 이 집에서 제 것 아닌 감정을 곱씹고 있는 것보다는 산책이라도 나가는 것이 생산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김래빈이 울타리 사이의 작은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가려 하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차소희가 뒤에서 김래빈을 불렀다.
“어디 가니?”
“잠시 산책을 다녀오려 합니다.”
“숲은 위험한데.”
“괜찮습니다.”
“그럼 함께 가지 않겠어? 마침 약재로 쓸 무화덩굴의 꽃을 따러 갈 참이라.”
“방금 숲은 위험하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숲의 것들은 날 해치지 않아.”
차소희가 태연하게 말했다. 차소희는 이 숲의 주인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차소희의 눈을 보니 그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따라갈 것 같아 보였다. 몰래 따라오게 하는 것보다는 같이 가는 게 낫나. 김래빈은 오늘의 두 번째 한숨을 쉬었다.
“아침 산책이라 오래는 걷지 않을 생각입니다.”
“무화덩굴은 가까이 자라 있어. 오래 걸을 필요도 없단다.”
“하아…….”
“기왕 걷는 거 기분 좋게 걷는 게 좋지 않겠어? 표정 피려무나?”
“예.”
김래빈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차소희는 김래빈을 흘겨보다 먼저 문을 열고 나섰다. 김래빈이 곧 그 뒤를 따랐다.
집에서는 매사 느릿한 몸짓으로 천천히 걷던 이가 집 밖으로 나오자 발걸음이 빨라졌다. 종종거리며 걷는 차소희의 걸음이 김래빈의 예사 걸음을 따라잡을 정도로 빨랐다. 차소희는 옆구리에 갈대로 엮은 것으로 보이는 바구니를 끼고 길을 안내하듯 김래빈의 한 걸음 앞에서 걸었다. 걷는 것에만 집중하는 듯 차소희는 말이 없었다. 잘 모르는 이와 걷는 것이 어색해 김래빈은 차소희에게 질문했다. 언젠가 죽여야 할지도 모르는 대상에 대해 자세히 아는 것은 독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무화덩굴은 꽃이 없는 식물 아닙니까?”
“맞아.”
차소희가 의외라는 듯 고개를 돌려 김래빈을 보았다. 그걸 알 줄 몰랐다는 눈빛에 김래빈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 정도는 압니다.”
“내가 뭐라 했니?”
“의외라는 눈빛이 돌아와서…… 오해였다면 죄송합니다.”
김래빈의 사과에 차소희가 깔깔 웃었다. 장난기 묻은 맑은 웃음소리였다. 김래빈은 그 웃음을 듣고 어리둥절하여 차소희를 바라보았다.
“왜 웃는 겁니까? 제 말에 웃을 구석은 없었던 것 같은데요.”
“진지하게 사과하는 모습이 우스워 그런다, 왜? 너, 정말 순진하구나. 너는. 예나 다름없어…….”
“저를 잘 아시는 것 같이 말하시는 게 매번 당황스럽습니다. 정작 제 기억에는 당신이 없는데.”
“그럴 수밖에.”
차소희가 픽 웃었다. 만난 적 없는 이가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듯 말하면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차소희는 김래빈을 ‘정말’ 잘 알고 있었다. 그 본질에 대해 차소희보다 김래빈을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다. 그러나 그에 대해 말해주지 않고, 차소희는 대화 주제를 돌렸다.
“무화덩굴은 꽃이 없는 식물인데도 이곳에서는 꽃이 피고, 너는 나를 모르는데도 나는 너를 알지.”
“예.”
“무화덩굴은 원래 꽃이 있는 식물이었어. 원래는 서리꽃이라 불렸단다. 남쪽이 아니라 북쪽에 피는 식물이었고. 그 차가운 성질 때문에 꽃을 피우고는 바로 죽어버려. 그래서 꽃을 없앤 거지. 살기 위해.”
“그렇군요……. 이는 몰랐습니다.”
“저길 봐. 저게 서리꽃이란다.”
차소희가 손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차소희의 손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백합처럼 생긴 꽃덩굴이 군데군데 얼어붙어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냉기가 훅 끼쳐왔다. 차소희는 맨손으로 얼어붙은 꽃잎을 하나하나 따기 시작했다. 김래빈은 식물을 가만히 지켜보더니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다.
“바로 죽어버린다더니, 살아있네요.”
“서리꽃의 냉기를 뿜는 것은 꽃잎이야. 그러니 꽃잎을 제거해 주면 모조리 얼어죽지는 않아. 손님을 청한 것을 잊지만 않았더라도 미리 했을 텐데.”
차소희가 그리 말하며 혀를 쯧 찼다. 김래빈은 그게 제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과를 않을 수 없었다.
“저 때문에 죽은 것이군요. 미안한데요.”
“모조리 죽지는 않았으니 서리꽃에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단다.”
“그래도요.”
“오늘 만들 약물을 만드는 데에는 이 정도 냉기가 딱 좋으니 미안해하지 말려무나? 내게는 오히려 잘 된 것이니.”
“그렇습니까?”
차소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얼어붙은 꽃잎을 살며시 떼어내는 손끝이 섬세했다. 차소희가 꽃을 따는 것을 멍하니 쳐다보던 김래빈이 문득 물었다.
“그런데, 약을 만든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말 그대로야. 마녀의 소일거리지.”
“어디가 아픕니까?”
“그렇진 않아.”
서리꽃 덤불에 피어 있던 꽃은 애초 그리 많지 않아 차소희는 금방 모든 꽃잎을 딸 수 있었다. 말을 마치며 차소희가 바구니를 들고 일어섰다. 김래빈이 냉기에 새파랗게 질린 차소희의 손을 잠시 쳐다보았다. 잡아주고 싶은데. 그러나 손을 잡아주거나 차게 질린 손에 대한 언급 없이 일어나 걸어가는 차소희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돌아가는 길이 괜히 멀게 느껴졌다.
차소희는 집 앞으로 도착하자마자 바구니를 정원 한 구석에 놓아두고 집 뒤편의 창고로 들어갔다. 차소희도 할 일이 있는 모양이고, 이 깊은 숲 안에는 결계가 쳐 있는 모양이라 바깥과 통신도 되지 않았다. 핸드폰을 꺼내 벽돌 깨기 게임이나 하던 김래빈은 곧 그것도 지루해져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무얼 하면 좋나. 고민하던 김래빈의 눈에 커다란 테이블을 들고 나르는 차소희가 눈에 띄었다. 김래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거운 것을 들 일이 있다면 도와 달라 하면 좋을 것을. 김래빈은 냉큼 일어나 차소희에게로 다가가 테이블을 뺏어 들었다.
“저를 부르지 그러셨습니까. 무거운 것이라면 당신보다는 제가 더 잘 들 텐데.”
“괜찮아. 이런 것은 익숙하니.”
“이것, 어디에 놓아두면 됩니까?”
“저기. 바구니 옆에 아무렇게나 두면 된단다.”
차소희는 손짓으로 아까 전 무화덩굴 꽃잎을 가져온 바구니를 가리키더니 다시 창고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김래빈은 꽤 넓은 직사각형 책상을 바구니 옆에 놓아두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약을 만드는 준비를 한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무언가 또 도와줄 일이 있는지 창고 앞에서 김래빈은 차소희를 기다렸다. 차소희는 얼마 걸리지 않아 웬 수레를 끌고 나왔다. 수레 위에는 실험 도구처럼 생긴 병과 알 수 없는 아티팩트, 그리고 약재로 보이는 것들이 담겨 있었다. 창고 밖으로 나온 차소희는 김래빈을 발견하고는, 그의 눈을 가만 쳐다보며 말했다.
“심심하니?”
“무거운 것을 들고 나를까 걱정되어 왔습니다.”
“괜찮다니까 그러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소희는 익숙하게 김래빈에게 수레의 손잡이를 넘겨주었다. 김래빈은 토 달지 않고 차소희 옆에서 묵묵히 수레를 끌었다.
“약을 만드는 겁니까?”
“응.”
“어디에 쓰려고요?”
“다 쓸 데가 있단다.”
“그런 대답을 들으려 질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차소희는 고개를 홱 돌려 김래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김래빈은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차소희의 눈길을 고요한 얼굴로 받아 쳤다. 차소희는 못마땅한 얼굴로 김래빈을 노려보더니 결국엔 입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줄 약이야.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선물할 용도로 만든 약이면 그냥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내 선물이 그에게 약일지, 독일지 몰라서.”
“자신이 없는 거군요.”
“그래. 그렇다고 봐야겠지.”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이전까지의 말과 행동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차소희는 자신의 일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 같아 보였는데,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 남편에게 주려는 걸까? 깊은 숲 속에서 혼자 사는 차소희에게는 그 이외에는 소중한 사람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김래빈은 곧 그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누구에게 줄 약입니까?”
“…….”
“이것도 저는 알 것 없는 일입니까?”
“아직은 말 할 수 없어.”
“제 것입니까?”
차소희는 대답하지 않고 도구들을 수레에서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김래빈은 그 침묵에서 그 약이 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말았다. 김래빈은 어디에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질문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아티팩트에 불을 당기는 차소희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약을 완성한 차소희는 완성된 투명한 미색 액체를 준비해 둔 유리병에 닫아 봉했다. 차소희는 김래빈의 도움을 받아 도구와 실험대를 정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오전 시간이 거의 다 지나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김래빈이 요리를 도와주겠다는 것을 “손님에게 일을 시키란 말이니?” 하는 말로 사양한 차소희는 스테이크를 굽고 쌀을 물로 볶아 리조토를 만들었다. 빵과 샐러드를 함께 식탁에 내고선 김래빈을 불렀다. 김래빈은 괜히 미안한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차소희는 그 얼굴을 무시하고 고기를 잘랐다.
식사가 진행되는 식탁 위에는 별 말이 오가지 않았다. 음식의 맛은 어제처럼 나쁘지 않았고, 김래빈과 차소희는 차려진 음식을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김래빈이 깨끗하게 비워진 접시들을 보고 차소희에게 말을 걸었다.
“식탁 정리하는 것정도는-.”
“-그냥 앉아 있으렴. 차를 내올 테니.”
말을 끊고 차소희는 접시를 척척 정리해 개수대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괜히 죄책감이 든 김래빈은 차소희가 아직 우러나지 않은 차를 식탁 위에 울려 놓을 때까지 불안한 눈길로 차소희를 눈으로 좇았다. 차소희는 김래빈의 시선을 무시하고 끝까지 자기 할 일을 했다. 김래빈은 말을 걸어도 어제처럼 “조금만 기다려.” 할 것 같아 말을 차마 걸지 못했다.
차소희가 찻잔까지 모두 식탁 위에 올리고 제 자리에 다시 앉자 김래빈이 말을 걸었다.
“찻잔을 가져오는 것정도는 도와줘도 되지 않습니까?”
“나를 손님에게 일 시키는 주인으로 만들 생각이니? 괜찮단다.”
“아까 전에 실험대 정리는 돕도록 용인하지 않으셨습니까?”
차소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뭐가 다릅니까?”
“부엌일과 약 제조는 다른 일 아니니.”
“다를 것은 있습니까? 둘 다 불 쓰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같은데.”
차소희는 김래빈의 말을 무시하고 제 찻잔에 차를 따랐다. 김래빈은 차소희가 하는 양을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차소희는 그에 대답하지 않고 준비한 차가 어떤 것인지 설명하려다 대답하지 않는다면 귀찮게 될 것을 예감하기라도 했는지 김래빈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며 말했다.
“위험한 일 전혀 못하는 귀한 영애처럼 나를 보는구나. 이 숲에서 너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나일 텐데도.”
“저를 해치려면 간밤에 하셨겠지요.”
“마음이 지금 바뀌었을 수도 있지 않니?”
“손님을 해치는 주인이 되실 생각입니까?”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김래빈은 이미 한 번 죽었을 것이다. 차소희는 김래빈을 노려보던 눈길을 거두고 각설탕을 집게로 집어 차에 넣었다.
“정말, 한 마디도 안 지는구나.”
“질 이유가 없으니까요.”
“……틀릴 말은 아니구나. 그래. ‘너’에게는 그럴 이유가 없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김래빈에게서 다른 이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주 아득히 멀리 있는 사랑하는 것을 보는 표정이었다. 그 눈에서는 어떠한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는데, 그 감정의 이름을 알 것 같아 김래빈은 괜히 불쾌해졌다. 김래빈은 지금 나에게서 누굴 보고 있냐고 따지려 했지만, 그를 따져봤자 제 기분만 더 상하게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차소희는 그런 김래빈의 속내를 알 리 없어, 그의 속을 긁는 질문을 하나 더 뱉었다.
“그래. 그래서 난 언제 죽여줄 거니?”
“……당신, 정말 죽기를 원합니까?”
“그렇지 않으면 의뢰를 하고, 나를 죽일 마음이 없는 이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할 이유가 없지.”
“……그런 겁니까.”
괜히 속이 상했다. 차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래빈은 차소희를 노려보았다. 차소희는 언제부턴가 다시 심드렁한 표정, 고요한 눈빛으로 김래빈을 보고 있었다. 김래빈은 이유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불타는 것을 억지로 삭혔다.
“이 궁금증이 풀리고 나면. 그 때 결정하겠습니다.”
“너, 나에게 도대체 무엇이 궁금한 거니? 너에게 흥미로울 법한 것은 이 숲에 아무것도 없는데.”
“당신을 보면 이상한 궁금증이 치솟습니다. 이 숲에 왔을 때부터 제 것이 아닌 감정. 이유 모를 기분이 저를 휘감고 있습니다. 당신은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이유도, 해법도 알다마다.”
“그는 무엇입니까?”
김래빈은 어느새 주먹을 꼭 쥐고 있었다. 차소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김래빈 쪽으로 다가갔다. 김래빈은 괜히 긴장해 허리 벨트에 걸어둔 천궁권총에 손을 가져갔다. 김래빈의 옆에 선 차소희는 김래빈의 손을 가져다 어루만졌다. 그 손길에서 당장 손을 빼야 함을 알았지만 김래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이 순간이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김래빈은 괴롭게 차소희를 올려다보았다.
차소희는 김래빈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를 죽이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자살은!”
김래빈은 더 이상은 가슴에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어 소리쳤다. 차소희가 놀란 듯 김래빈의 손을 놓고 살짝 뒷걸음질쳤다.
“본인이 알아서 하십시오. 남에게 이런 것, 부탁하지 말고.”
“그렇지만…… 정말로 나에겐 부탁할 사람이 없단다.”
차소희가 눈을 내리깔며 속삭였다. 김래빈은 그 처연한 얼굴을 보고 나서야 제가 느끼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는 분노도 질투도 아닌, 슬픔이었다.
“나는 이 숲의 주인이야. 이 숲에서는 그 어떤 것도 날 해할 수 없지. 날 해할 수 있는 건 오직 너뿐이란다, 래빈아.”
차소희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의 앞에 앉았다. 굳은살 박인 김래빈의 손을 제 부드러운 손으로 다시금 감쌌다. 김래빈은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상했지만, 그 손길을 감히 뿌리칠 수 없었다.
“너의 천궁권총도 이곳에선 날 해칠 순 없어. 그러니 이렇게.”
차소희는 김래빈의 손을 들어올려, 그 손에 제 목을 쥐어주었다.
“손을 올리고, 힘을 줘서…….”
“……그만하십시오.”
김래빈이 고개를 푹 떨구고 중얼거렸다. 슬픈 마음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나도 괴로워 감히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차소희의 목을 쥔 손이 힘없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던 차소희가 소스라치게 놀라 손을 놓았다. 김래빈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김래빈은 얼굴을 가리지도 못하고 울고 있었다. 그 눈물을 본 차소희는 급히 일어서서 그를 감싸 안았다. 가슴에 머리를 대고 규칙적인 심장 소리를 들려주며 등을 쓸었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 래빈아. 내가 잘못했으니 제발 울지 마…….”
김래빈은 그 말이 누구를 향하는지 몰라 슬펐다.
한참을 김래빈을 끌어안고 달래던 차소희는 그가 조금 진정하자 그를 방에 데려다준 이후 집을 나가버렸다. 어느새부터인가 밖은 비가 오고 있었다. 우산이라도 가져다줘야 하는데. 김래빈은 부은 눈으로 그 남편이 썼다던 침대에 앉아 창문 밖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아까 전까지 함께 있던 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못된 말이나 하는 그 녀석이 뭐가 예쁘다고. 그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김래빈 자신에게는 더더욱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제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그런 생각을 하던 김래빈은 자신이 떠올린 생각에 놀라 그대로 굳었다. 애초 차소희가 그를 이 숲으로 불러들인 목적은 자신을 죽여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으며, 김래빈은 차소희와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다. 그를 며칠 보았다고 그런 생각을 하는가. 마녀에게 홀린 것이 분명했다.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하면서 김래빈은 제 손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마물들을 죽이고 다른 헌터들을 불구로 만든 손이다. 이미 피로 젖어버린 손에 또 다른 피를 묻힌다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데 차소희의 피만은 제 손에 묻히고 싶지 않았다. 이 감정도 아침에 꾼 꿈의 연장선인가. 고작 꿈 하나에 이렇게 휘둘리는 자신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김래빈은 그 감정에 저항할 마음을 먹지 못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는 사이,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이 숲에는 차소희와 저밖에 없으니 차소희임이 분명했다.
“들어오십시오.”
닫혀있던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차소희는 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서서 김래빈을 바라보았다. 입고 있던 검은 원피스가 축 젖어 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김래빈은 차소희의 몰골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차소희는 그 구겨진 얼굴에 조금 놀란 듯하나, 이내 작은 목소리로 그의 방을 찾아온 용건을 밝혔다.
“사과하러 왔어.”
“……무엇을 말입니까?”
“너에게, 그렇게 대한 것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애초 그럴 목적으로 저를 부른 것이 아닙니까?”
말이 절로 날카롭게 나갔다. 이렇게 대하고 싶지 않은데, 다정하고 상냥하게 대하고 싶은데 아까 전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김래빈은 차소희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이렇게 전전긍긍할 거면서 왜 그런 말을 하나. 래빈은 작게 조소하며 말했다.
“당신께 저는 당신을 죽일 도구일 뿐 아닙니까. 당신은 그저, 그걸 깨닫게 해줬을 뿐입니다.”
“래빈아.”
차소희가 급히 김래빈의 말을 끊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러나 김래빈은 그에 신경도 쓰지 않고 제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당신도 참 너무합니다. 그런 것이었다면 당신은 나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됐어요.”
김래빈은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차소희는 입을 열지 못하고 괜히 제 입술만 깨물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겨우겨우 할 말을 찾아낸 듯 차소희가 말을 꺼냈다.
“래빈아, 나는…….”
“저에게서 당신의 남편을 찾지 마십시오.”
래빈이 차갑게 말했다. 순간 차소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차소희를 앞에 두고 김래빈은 말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차소희는 작은 목소리로 미안, 중얼거리고는 문을 소리 없이 닫았다. 도망치듯 그 방에서 멀어졌다. 젖은 발소리를 들으며 김래빈은 다시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김래빈은 차소희가 서 있던 문 쪽을 쳐다보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잠에서 깨어나자 비는 어느샌가 그쳐 있었다. 너무 심하게 대했나. 어제 보았던 상처받은 얼굴을 생각하자 괜히 속이 상했다. 그러나 가슴은 여전히 답답하고 마음 역시 꼬여 있었다. 당분간은 차소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그의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야 했다. 붕 떠 있는 것 같던 마음에 현실감이 되돌아왔다. 이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낼 순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차소희를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이 숲의 주인은 차소희였고, 이 숲에서 나가려면 그의 허락이 필요할 테니.
식탁 위에는 어제처럼 간단한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김래빈은 그를 무시하고 집 밖으로 나갔다. 차소희는 젖은 잔디 위에 쪼그려 앉아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김래빈은 차소희에게 가까이 다가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의 그림자가 제 위에 덮였음에도 차소희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김래빈은 태연하게 질문했다.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신경 쓸 것 없지 않니.”
그렇게 대답했지만, 차소희는 보고 있던 것을 가리거나 하진 않았다. 김래빈은 어렵지 않게 차소희의 시선 끝에서 하얀 꽃을 찾을 수 있었다. 던전 내 자생하는 식물들에 대해 해박한 김래빈이 모르는 꽃인 것을 보니 이세계의 것이거나 평범한 들꽃임이 분명했다. 신경 쓰이는 모양으로 앉아있질 말던가. 김래빈은 그렇게 대답하려다 한숨을 쉬며 질문했다.
“아직도 죽고 싶습니까?”
계속해서 하얀 꽃잎을 쳐다보던 차소희가 고개를 반짝 들었다. 그러나 그 얼굴에는 기대감이나 들뜸 따위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첫날 보았던 심드렁한 표정 그대로였다. 김래빈은 같은 표정으로 차소희를 내려다보았다. 차소희는 대답하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김래빈과 눈을 맞추지도 않고 몸을 움직였다. 김래빈이 자리를 뜨려는 차소희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렇습니까.”
“……무엇이.”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혼자 수긍하는 태도에 차소희가 뒤를 돌았다. 어디 말이나 한번 들어보자, 하는 심드렁한 얼굴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김래빈은 그 무심한 낯에서 한 줄기 감정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음이 단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여리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김래빈은 그리 생각하며 차소희를 내려다보았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은 죽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차소희가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별 관심 없다는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화를 내리누르고 있다는 것을 김래빈은 알 수 있었다. 울타리 밖의 검은 나무들이 불안하게 진동했다. 그러나 김래빈은 마녀가 두렵지도 않은지 태연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상대를 쳐다보는 사람은 오히려 차소희 쪽이었다. 김래빈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외로운 거지요? 당신.”
차소희는 반박하려 입을 열었다가 금방 입을 다물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을 꺼내더라도 결국에는 그에 대한 원망으로 귀결될 것만 같았다. 뱉어낼 수 없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차소희는 황망한 얼굴로 뒷걸음질쳤다. 문장이 되지 못한 단어들을 중얼거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래빈아, 너는. 너는…….”
검은 숲의 바람이 주인에게 응답하여 요동쳤다. 김래빈은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차소희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차소희 본인보다 더 잘 알았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치 없는 소리나 해 대지만, 결국에는 그 본질을 꿰뚫어 사람을 무너뜨리고 만다. 차소희는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바람이 사람을 찢을 듯 날카롭게 불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김래빈은 당황하여 차소희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를 붙들고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차소희는 그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고 있었는데, 바람 소리에 가려 무엇을 말하는지는 불분명했다.
그렇더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사람을 찢을 듯 거세게 부는 바람 속에서, 차소희는 제 손에 얼굴을 묻고 서럽게 울고 있었다.
놀란 김래빈은 그 전날 차소희가 그랬듯 그를 제 품 속으로 끌어안았다. 힘없이 끌려온 작은 몸이 제게 맞춘 듯이 꼭 맞았다. 가슴이 이상한 감정으로 부풀어 올랐다. 서로의 숨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붙자 드디어 작게 웅얼거리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결심했는데. 너는 왜 이번에도 나를 찾아와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휘몰아치던 건조한 바람이 뚝 멈췄다. 그 품속에서 차소희가 김래빈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김래빈은 멍하게 차소희의 눈 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심드렁한 표정이었던 차소희는, 요사스러운 붉은색 눈을 가졌다는 숲의 마녀는. 연인을 잃은 평범한 여자처럼 울고 있었다.
下
우는 김래빈에게서 도망쳐 집 밖으로 나오니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숲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비가 오겠구나.
숲 위 하늘에 빠른 속도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제 마음도 모르는 주인을 위해 숲이 구름을 부른 것이다. 차소희는 작은 울타리의 문을 열고 마당 밖으로 나가 한 나무의 몸통에 손을 얹었다. 주인을 위로하듯 숲이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로 울었다. 어느새부턴가 가슴에서 느껴지는 아린 감각에 차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제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댔다. 두근거리며 맥박이 고동치는 게 느껴졌다. 어째서 심장이 이다지도 세차게 뛰는 걸까? 너무 오랫동안 박동을 잊어버리고 살았기에 차소희는 제 마음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다. 마녀의 심장은 감정의 증거. 마녀가 인간이었다는 유일한 증거품. 심장의 존재를 잊어버린 마녀는 인간의 마음을 잊는다. 그러므로 차소희는 제게 인간의 감정이란 없어져 버린 줄로만 알았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감정이 죄 마모되어 깎여나간 줄 알았다. 그러나 마음은 시간과 기억에 덮여 감춰져 있었을 뿐 그곳에 존재했다. 원래 있던 그 자리에 오랜 세월만큼의 먼지가 쌓여서는.
녹슨 감정의 움직임은 심박만큼 새삼스럽고 내쉬는 숨만큼 어색했다. 하늘로 쳐든 얼굴에 빗방울이 톡, 떨어졌다. 곧 갑작스러운 소나기가 숲을 덮었다.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차소희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여전히 마른 가지의 겨울나무에 손을 댄 채로 질문했다.
“내가 어떡해야 좋을까.”
비만 세차게 내릴 뿐 숲은 대답하지 않았다. 차소희는 비식 웃었다. 숲의 주인과 숲은 당초 같은 것이라 차소희가 원하는 정답을 내어주지 못한다.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알려줄 수 있을 뿐 숲은 대답할 수 없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빗방울은 더욱 굵어져만 갔다. 그러나 빗물이 살을 때리고 발을 적셔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가면 그 애를 어떻게 할지 결정해야 했다. 그 애를 숲에서 내보낼까. 숲을 잊게 할까. 그렇게 또다시 나 혼자 그 애 없는 영겁을 살아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외로운 혼이 그 애 없이 살 수 있냐고 질문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당연히 ‘그렇다.’지만, 차소희는 도저히 그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다. 그게 자신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랬다.
한참을 비를 맞던 차소희는 머리를 가득 채운 고민 대신 그 애를 생각했다. 차소희를 아주 잊고 말간 얼굴로 이치에 맞는 말만 골라서 하던 그 애. 목을 조르라 종용해도 쥐어 잡지 못하던 그 애. 제가 쥐어준 목을 놓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리던 그 손. 상처받았을까. 그런 얼굴로 저를 봤으니 필시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러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픔이 넘쳐흐르던 그 검은 눈. 차소희는 그 눈을 생각했다. 원래 그 애는 그랬다. 차소희가 했던 가벼운 말 한마디에도 애닯아하던 이다. 세계를 건너고 새로운 생을 얻었다 하여 본질이 변할 리 없다. 고소를 머금던 차소희는 한숨을 쉬었다. 언젠가 그 애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소희야, 사과하는 건 아주 쉬워. 눈을 맞추면서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면 누구라도 네 사과를 받아주고 말걸.’
차소희가 숲을 뛰어다니던 철없는 꼬마였던 시절. 같은 꼬마 김래빈은 그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 없었던, 건방지고 제멋대로인 여자아이에게 사과하는 법을 가르쳤다.
‘……너도?’
‘응. 나도.’
차소희는 더 이상 그때의 순진한 아이가 아니었다. 어린아이일 때도 그랬지만 숲의 마녀가 된 차소희는 그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 없는 이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사과해본 기억은 너무 멀었다. 그간 저질러왔던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사과한다 해서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도 않는다. 그렇지만 김래빈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그 애는 항상 차소희의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를 용서해주었으니까. 이번에도 그러지 않을까? 어리석은 기대다. 그럴 리 없다. 그렇지만……. 차소희는 조금은 성급한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었다.
문 앞에 서서도 괜한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이 됐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돌아갈 수는 없다. 집이 조용해 제 발소리를 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차소희는 불안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그 때문인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성마르게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문을 직접 열어줄 마음은 없어 보였다. 차소희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긴장에 가슴이 맥동했다. 이러한 감각도, 이렇게 불안한 기분도 너무나 생경했다. 차소희는 김래빈을 가만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물에 부어오른 눈을 하고 있던 그는 차소희를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일까? 아니다. 그렇다면 들어오라 했을 리 없었다. 그는 헷갈리게 하지 않는, 확실한 사람이니까.
“사과하러 왔어.”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지 확인할 정신 따위는 없었다. 김래빈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차소희를 노려보고 있었다. 차소희는 마지막 용기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할 새도 없이 김래빈이 질문을 돌려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너에게. 그렇게 대한 것에 대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차소희는 당황에 눈을 깜박였다. 처음 들어보는 날카로운 말투였다. 그대로 얼어붙어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애초 그럴 목적으로 저를 부른 것이 아닙니까?”
그런 게 아니야. 그럴 목적이었다면 ‘너’를 이곳으로 부르지 않았을 거야. 말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무너져내리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김래빈이 그 표정을 보며 작게 조소했다.
“당신께 저는 당신을 죽일 도구일 뿐 아닙니까. 당신은 그저, 그걸 깨닫게 해줬을 뿐입니다.”
“래빈아.”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차소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김래빈은 그 부름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당신도 참 너무합니다. 그런 것이었다면 당신은 나를 그렇게 대해서는 안 됐어요.”
쓰게 웃음 짓는 얼굴에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차소희는 두렵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그에게 해야 할 말을 찾았다. 그럴 목적으로 너를 부른 게 아니었으며, 나는 그저……. 차소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뒤에 무엇을 더 말해야 하나? 그러나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차소희는 무작정 입을 열었다.
“래빈아, 나는…….”
“저에게서 당신의 남편을 찾지 마십시오.”
차가운 목소리에 자신을 담고 있었던 이제까지의 세계가 깨져 흩날리는 듯했다. 가능하다면 뒷걸음질 쳐 도망치고 싶었다. 이 사람은 누구지? 분명 차소희가 알던 김래빈과 같은 얼굴, 같은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 같았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차가운 목소리. 차소희는 미안, 속삭이며 문을 닫고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옷에서 떨어지는 물에 바닥이 젖는 것도 신경 쓸 수 없었다. 맨발로 숲으로 달려나가, 비에 젖은 진흙이 발에 달라붙는 것조차 관심 밖이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저 남자는 누구지? 저 사람은 차소희가 아는 김래빈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얼굴과 듣기 좋은 목소리, 섬세한 행동거지와 다정한 말투. 심지어 영혼의 향기마저 모두 그의 것 그대로인데, 어째서……. 추격하지 않는 이를 피해 도망치며 차소희는 깊은 숲속을 헤매었다. 숨이 차는 것조차 모른 채 맨발로 한참을 달리던 차소희는, 어느 순간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졌다. 다리의 피부가 까졌는지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숲속에서는 그 어떤 것도 주인을 해칠 수 없다. 차소희는 오랜만에 느껴보는 통증에 당황하여 다리를 쳐다보았다.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지만 방울져 흐르던 피는 멈추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차소희는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비구름이 하늘을 덮고 있었다. 붉은 피가 흘러 땅에 스며들 듯 눈물 같은 비도 줄어들지 않았다. 문득 어디선가 환각 같은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소희.
익숙한 목소리였다. 다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 어린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근사한 어른으로 자랐고, 아주 오래전에 죽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함께 살던 집에서 혼자 괴로워하고 있을 터였다. 상처 주는 말을 해 놓고서도 상처받을 이를 생각하여 심란해하는 이니까. 그 목소리의 주인이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차소희는 두려운 마음을 한 채 소리의 진원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래빈…….”
그는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있었다. 통통한 볼, 순진한 얼굴, 성질 사납게는 생겼다지만 여전히 미숙하고 사랑스러운 얼굴……. 차소희는 오랫도록 보지 못했던 어린 김래빈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2차 성징도 오지 않았을 나이. 대여섯 살쯤일 것이다.
너희 할머니는 너를 찾아올 필요 없다 하셨지만, 아버지께서 밤의 숲은 위험하다고 하셨어.
“그래서…… 나를 찾아온 거니?”
그래. 길을 잃고 울고 있을까 봐.
차소희는 엉망인 꼴을 정리하려 제 손을 들어 올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손이 저 어린 김래빈의 손처럼 작았다. 앉아 있어 몰랐는데, 어느 순간부터 시야도 확 낮아져 있었다. 차소희는 그제야 깨달았다. 숲이 그녀에게 과거를 보여주고 있었다. 잊으려고 노력했던 아주 오래전,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시간을.
차소희의 기억에 의하면, 김래빈이 차소희를 찾아낸 날 그 둘은 어른들에게 크게 혼났다. 김래빈은 위험한 숲에 혼자 들어간 데에 대한 질책을 들었고, 차소희는 친구를 걱정시켰다는 이유에서 손바닥에 매를 맞았다. 그때의 차소희는 그 누구에게도 나를 찾으러 오라 부탁하지 않았다며 바락바락 대들었다. 사실은 누군가가 찾아내 주었으면 했으면서. 찾으러 오지 않는다면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아예 숲에서 도망가 버릴 것이라 생각했으면서 말이다. 숲에서는 나갈 수 없다는 것을 몰랐으니 그럴 수 있었다. 그때의 차소희는 아집으로 가득한 어린아이였다. 검은 숲 숲지기의 핏줄답지 않은 불같은 성정이 어릴 때부터 선명히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차소희는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아이 시절에 검은 숲으로 보내졌다. 당대 검은 숲의 숲지기인 차소희의 이모할머니가 그를 맡았다. 차소희의 할머니는 차소희의 눈을 보고 쯧, 혀를 찼다. 그 기억만이 선명했다. 숲지기가 되기 이전의 기억은 모두 드문드문 이가 빠져 있었다. 남아있는 대부분의 기억은 행복했던 기억이었기에 차소희는 그 시기를 막연히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기억했다. 늙은 숲지기는 어린 후계에게 엄격했지만 숲지기를 돕는 하인은 아이에게 무척 친절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동갑내기인 아들을 데려와 같이 놀게도 해 주었다. 어려운 공부를 하는 것보다는 그 아이와 함께 숲을 뛰어다니는 게 더 재밌었다. 비록 수업을 빼먹으면 혼나긴 했지만, 혼나는 것 따위는 개의치 않을 만큼 즐거웠다. 숲은 전혀 무서운 곳이 아니었다. 숲의 거대한 곰도 차소희가 눈을 부라리면 도망쳤고 늑대 무리는 잘 훈련된 개들만큼이나 그를 따랐다. 어른들도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진 어린것의 말을 되도록 들어주었으니,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김래빈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런 김래빈도 결국에는 차소희에게 져주기 마련이었다. 차소희는 숲의 작은 지배자였다. 날 때부터 숲의 주인이었고 인간을 벗어나 된 것도 숲의 주인이었다. 숲에서는 모든 것이 차소희의 마음대로 이루어졌다. 숲지기가 된 이후, 숲의 주인이 된 지금까지 숲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서 차소희가 모르는 것은 없었다. 그런데, 이 작은 존재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차소희는 작은 손을 김래빈에게 뻗었다. 꼬마 김래빈은 자연스럽게 그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래빈아.”
응.
“나를 왜 찾아온 거야?”
말했잖아, 아버지가 밤의 숲은 위험하다고 하셨다고.
“숲은 내게 위험하지 않아. 알잖아.”
그래도 걱정됐어.
“바보네, 너도.”
바보 아니야.
“알아. 그래서 바보라는 거야.”
어린 김래빈은 의아한 얼굴이었다. 차소희는 힘없이 비식 웃었다. 눈에 선명히 보였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로 그가 할 법한 말과 표정으로 그녀를 대하지만, 지금 제 앞에 있는 존재는 김래빈이 아니었다. 하지만 차소희는 꼬마 김래빈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 숲에 들어온 이상 그 어떤 것도 차소희를 해칠 수 없었다. 그리고, 차소희에게는 어쩐지 이 꼬마 김래빈이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어린 김래빈의 인도로 차소희는 숲의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갔다. 김래빈과 함께 걷는 길은 아는 길이었지만 동시에 모르는 길이기도 했다. 그 길은 숲지기의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차소희가 수천 번, 수만 번은 걸었던 길이었다. 그러나 차소희는 알고 있었다. 어린 김래빈의 탈을 쓴 무언가는 그를 ‘진짜’ 숲지기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었다. 숲지기의 집은 차소희의 집이었고, 진짜 김래빈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차소희는, 제가 그곳으로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차소희는 가짜 숲지기의 집에 도착했다. 꼬마 김래빈은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돌아온 차소희는, 아주 오래전 김래빈이 정원에 두었던 테이블 앞에 앉았다. 의자의 감촉도, 테이블도 모두 방금 전 만진 것처럼 생생하게 기억났다. 당연한 일이다. 이곳은 차소희의 기억 속이니까. 서글픈 감정으로 테이블을 매만지던 차소희는 아주 오래전을 생각했다. 그때도 차소희는 이곳에 앉아 김래빈을 기다리며 소리를 듣고 있었다. 숲에는 여러 소리가 있었다. 새와 바람의 소리, 나뭇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 작은 동물들이 낙엽을 밟으며 내는 자박자박 소리, 동물의 울음소리, 그리고 반려가 걸어오는 발소리. 차소희에게로 돌아오는 그의 발소리는 언제나 조금 바쁜 걸음이었다. 그의 서두르는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차소희는, 그 소리를 들으면 언제나 작게 미소짓곤 했다. 기억 속 숲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차소희는 그 소리를, 성급한 발걸음을 언제나 선명히 상상해낼 수 있었다. 차소희는 테이블을 쓸며 슬프게 웃었다. 이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면 김래빈이 어디선가 돌아올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결국에는 돌아왔지만 차소희가 바란 모양으로는 아니었고, 차소희가 따라온 어린 김래빈은 기억 속 집 안에 있다. 차소희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시작될 것이다. 기억의 재생이든, 혹은 차소희가 예측할 수 없는 또 다른 사건이든.
잔디를 밟는 걸음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 차소희는 느릿느릿 문을 열었다. 기름칠 되지 않은 기억이 끼익거리는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이 집에는 그 존재가 있을 것이다. 그는 향기로운 것과 아름다운 음악을 좋아했다. 제가 작곡한 음악을 들려줄 사랑하는 이는 이제 이곳에 없으니, 아마도 그는 홀로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터였다.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들어간 차소희는 생각했다. 그래. 내 예상이 맞았지. 차소희는 식탁 앞에 앉아 향기로운 아삼의 홍차를 마시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보고 서글픈 웃음을 지었다. 아주 오래전, 김래빈이 도시에서 사 온 고풍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는 숲은, 투정하듯 울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다 날이 새는 줄 알았어.
“내가 너를 그렇게 오래 기다리게 할 리가 없잖아.”
차소희는 그리 말하며 그 존재의 맞은편에 앉아, 당연하다는 듯 준비된 제 몫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차는 마시기 딱 좋은 온도로 식어 있었다.
“내 결정이 마음에 안 드는 걸 알아.”
무슨 결정?
“너를 물려주지 않고 죽겠다는 것 말이야.”
그 이야기를 하려고 그 꼬맹이의 모습까지 자처하며 널 부른 게 아니야.
숲은 언짢은 표정이었다. 차소희는 미간을 찌푸린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서운할 줄 알았는데.”
서운한 건 맞아. 그렇지만 네가 나고, 나는 너니까.
“그렇다면, 왜…….”
숨기고 싶었던 걸 알려주려고.
“네가 알고 있는 건 나도 아는데.”
사실이다. 숲이 알고 있는 것은 숲의 주인도 알고, 숲의 주인이 알고 있는 것은 숲도 알게 된다. 그 두 존재는 둘이지만 본래 하나였으니까. 숲은 말했다.
그래. 너도 알지. 그렇지만 외면하고 있잖아.
“내가 뭘?”
내가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차소희는 들고 있던 찻잔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았다. 받침에 찻잔이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만 말하라는 뜻이라는 것을 숲도 알 터였다. 그러나 숲은 계속해서 지껄였다.
네 안에 있던 나는, 세계를 건너오며 사라졌잖아.
차소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그녀는, 진심으로 죽고 싶었다.
차소희가 숲지기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은 열여섯 살이었다. 차소희의 이모할머니는 차소희에게 숲지기의 역할을 물려주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차소희는 김래빈의 아버지와 함께 숲에 그의 무덤을 만들려 했지만, 그 시신은 차소희의 눈 앞에서 덩굴식물이 되어 숲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차소희는, 자신도 언젠가는 이 숲의 일부로 환원되리라 생각했다. 이모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 숲의 모든 숲지기가 그랬던 것처럼.
숲지기는 결혼하지 않는다. 정해진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두가 그러했다. 아마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테다. 그들은 혼자 있으면서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았다. 숲이 항상 그들의 곁에 있었으니까. 그러나 열여덟이 된 차소희는 김래빈에게 청혼했다. 김래빈이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며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그가 떠나는 것이 싫어서 그랬다. 내가 떠나는 것이 왜 싫냐는 질문에 차소희는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마음을 고백했다. 그는 3년이 지나기 전 돌아오겠다며 떠났다. 그리고 그들이 스물한 살이 되었을 때, 차소희는 돌아온 김래빈과 영원을 맹세했다.
김래빈이 죽은 것은 스물다섯의 나이였다. 차소희 때문이었다. 검은 숲 바깥 마을의 사람들은 숲을 싫어했다. 뻔한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숲지기가 없으면 숲이 사라지리라 믿었다. 숲지기가 숲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외로운 숲이 숲지기의 가문에게 아이를 요구하는 것임에도. 차소희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앞두고 숲 바깥으로 나간 김래빈은 숲지기가 깊은 숲의 마녀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숲에 사는 그 여자는 마녀이며, 숲 바깥 마을에서 벌어지는 모든 나쁜 일들은 그 마녀 때문이라고. 그리고 마녀의 남편인 그는 그들에 의해 죽었다.
돌아오지 않는 이에 대한 원망은 길지 못했다. 마녀의 남편을 죽인 마을 사람들이 숲에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차소희는 그날 처음으로 자신 안에 있던 숲을 보았다. 차소희의 밖으로 나와 비를 부른 숲은 다시 차소희의 안으로 돌아왔다. 김래빈을 찾아올게, 숲에게 이르고 차소희는 무작정 마을로 향했다. 한 번도 숲 밖으로 나올 수 없었던 여자는, 너무 쉽게 마을로 나아갔다. 마을 사람들은 외지에서 왔다는 차소희에게도 친절했다. 숲의 마녀도, 마녀의 남편인 악마도 죽었으니 이제 모두 평안할 것이라 일렀다. 차소희는 질문했다. 마녀의 남편이 죽었다고요? 그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래빈은 악마 따위가 아니었는데.
그 애는 내가 이곳에 주저앉힌, 선량한 남자아이였을 뿐인데.
차소희의 안에 있던 숲이 질문했다.
복수하고 싶니?
그렇다고 대답한 순간, 차소희는 숲지기가 아닌 숲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검은 숲의 주인은 사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숲의 주인으로 사는 것은 지루하고 외로웠다. 과거의 숲이 왜 숲지기를 불렀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그렇지만 차소희는 다른 사람들을 검은 숲으로 부르지 않았다. 같은 하루를 억겁이 지나도록 반복했다. 세계가 무너질 때까지.
너를 이곳으로 튕겨낸 이후, 나는 죽었어.
차소희는 숲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앞에 있잖아. 그대로 존재하잖아. 검은 숲이, 숲의 나무들이 있잖아. 너는 사라지지 않았잖아. 간절한 바람에도 숲의 눈은 무감정했다. 차소희의 얼굴을 한 숲은 다시금 말했다.
그러니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김래빈과 네가 모르는 이 세상에서 다시금, 내게 빼앗긴 인생을 누릴 수 있어……. 차소희는 숲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했다. 그러나 차소희는 숲에 아무것도 빼앗기지 않았다. 자신을 숲지기로 만든 것은 가문의 어른들이었고, 어렸던 차소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을 뿐이다. 차소희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그 말이, 다야?”
응.
차를 마시던 숲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소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단지 눈을 감았다. 외면하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들은, 곁에 있어주던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자신만이 홀로 남았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다시 시작하고 싶지도, 인간의 생을 살고 싶지도 않았다. 숲과 함께 불타 사라지고 싶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평범한 인간의 생을 살며 넓은 세상을 보고 다시금 사랑하고 싶었다. 양립할 수 없는 원망願望 속에서 차소희는 눈을 떴다.
차소희가 있는 곳은 숲이었다. 더 이상 검지 않은, 환상이 사라진 숲.
차소희는 울지 않았다. 대신 숲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어두운 숲을 벗어나자 하늘을 가리던 비구름은 어느새 사라지고 오로지 맑은 하늘만이 숲 위를 덮고 있었다. 어느새 해가 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차소희는 몸을 씻고 몸에 달라붙던 옷을 갈아입었다. 늘 그랬듯 간단한 아침 식사를 차렸다. 한사람 분을 더 해서 놔두었지만 그가 먹을지는 알 수 없었다. 제가 만든 것이라면 손도 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굶는 것은 익숙하다 하였으니, 아예 숲에서 내보내 줄 때까지 굶겠다 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차소희는 한숨을 쉬며 젖은 잔디밭에 쪼그려 앉았다. 비가 내리더니 잔디밭에 데이지, 팬지, 제비꽃 등의 꽃들이 제멋대로 피어나 있었다. 저 이가 떠나면 모조리 뽑아 버리자. 꽃 따위, 원래 없었던 것처럼 숲을 태워 버리자…… 그리 생각하고 있을 즈음, 사람의 그림자가 제 위에 덮였다. 누구의 그림자인지는 위를 올려다보지 않아도 뻔했다. 그는 태평스럽게 질문했다.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내 마음을 보고 있단다. 억겁의 세월을 지나서도 피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그러나 그를 말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어제 그가 말했듯이 이 남자는 ‘차소희의 김래빈’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므로 차소희는 긴 숨을 내쉬며 속삭이듯 말했다.
“신경 쓸 것 없지 않니.”
머리 위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자신을 바라보던 시선은 어느새 제가 보던 들국화에 꽂혀 있었다. 쪼그려 앉아 꽃구경이나 하는 모습이 청승맞다 여기는 건 아닐까. 그것이나 괜히 걱정되었다.
“아직도 죽고 싶습니까?”
차소희는 급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에서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차소희가 기대하지 않는 것으로 억겁의 시간을 견뎠듯이, 그 또한 그런 얼굴이었다. 그런 이에게는 대답해줄 말이 없었다. 그 어느 대답도 그에게 돌려주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이제 차소희와는 상관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숲은 그가 숲에서 나가는 순간 사라질 것이다. 차원을 옮겨가며 오랫도록 살아남았던 숲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자멸할 것이다. 차소희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이 숲에서 나가란 말밖에는 없었는데, 그 말이 도저히 입에서 나오지 않아 일단 자리를 피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습니까.”
차소희가 뒤를 돌았다. 김래빈은 여전한 얼굴이었다. 차소희가 알고 사랑하던 얼굴. 그러나 그 얼굴의 주인과 이 이는 이제 다른 사람임을 안다. 그러므로 이젠 그에게 아무것도 바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가 저를 이해했으면 했다. 제 오랜 기다림을, 그리움을, 그리고…… 사랑을. 그러나 저 무심한 이가 그럴 리 없다. 만일 그랬다면 나를 조금은 가여이 여겼을 것이 아닌가…….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당신은 죽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럼 뭔데?”
차소희를 사랑했던 김래빈이 죽고 난 이후 차소희가 무엇이 되었는지 그는 모른다. 숲의 마녀가 된 차소희가 죽음을 얼마나 오래간 바라왔는지 알 리가 없다. 그 짧은 인간의 생애로는 이해도 못할 오랜 세월 아래의 절망을. 죽어버린 그가 이해할 리 없다. 울타리 밖의 검은 나무들이 불안하게 진동했다. 차소희의 눈이 흔들렸다.
“사실은 외로운 거지요? 당신.”
목소리에는 한숨이 섞여 있었다. 차소희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내용보다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그는 인간으로서 그녀를 이해했다. 복수심도 절망도 희망도 모두 옅어진 이후 그저 살아가기만 하던 시절을 넘어. 다른 이의 온기를 갈구하는 마음을 간파했다. 그러나 그 한숨 섞인 목소리는…….
“래빈아, 너는. 너는…….”
그 어떤 말도 문장이 되지 못했다. 뱉어낼 수 없는 마음은 소용돌이가 되었다. 검은 숲의 바람이 날카롭게 불었다. 김래빈은 언제나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차소희에 대해서라면 언제나 차소희 본인보다 더 잘 알았다. 차소희를 사랑했던 그는 마음의 주인도 모르는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졌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바람이 사람을 찢을 듯 날카롭게 불었다. 머리 위로 먹구름이 다시금 몰려들고 있었다. 차소희는 제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강한 바람에 휘청거리다 결국에는 주저앉았다. 눈물로 손이 축축해지는 것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이리도 흉하게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외로운 마음 따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네가 보고 싶다는 마음도, 이제는 네가 아닌 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이해받기는 더 싫었고, 그에게 안타깝게 여겨지고 싶지도 않았다. 모르는 이에게 제 마음을 낱낱이 간파당한 이후는 비참했다. 그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차소희의 앞에는 김래빈이 있었다.
김래빈은 날카롭게 피부를 찢는 바람을 헤쳐 그 안으로 들어갔다. 차소희의 어깨를 붙들고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서럽게 우는 마녀를 그는 무작정 끌어안았다.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래…….”
김래빈의 품 안에서 차소희는 중얼거렸다. 사실은 모두 알고 있으면서 그랬다. 이 생의 김래빈은 차소희를 모르고, 그러므로 당연히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알았어도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과거는 단순히 과거일 뿐이고, 새로운 생을 얻은 그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의 과거를 돌려주면 안 되었다. 끔찍한 과거는 그곳에 놔두고 그는 먼 곳으로 나아가는 게 옳다. 차소희의 남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기억 따위는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모든 것을 나 혼자 지고, 검은 숲을 불태우는 것이 맞다. 그렇지만……
“나는 이번에야말로 결심했는데, 너는 왜 이번에도 나를 찾아와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차소희는 김래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차소희의 고통에 제가 더 괴로워하고 있었다. 소용돌이치던 감정이 순간 가라앉았다. 이젠 그 어떤 고민도 의미가 없었다. 차소희는 그 품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어 울었다. 등을 쓰는 손길이 따뜻해 못내 서러웠다. 울음이 잦아들자 김래빈이 질문했다.
“저는 당신의 무엇이었습니까?”
“그걸 알아야 하겠니?”
잠긴 목소리로 차소희가 대답했다.
“저는 제가 모르는 제가 있다는 게 싫습니다.”
“……너답네.”
차소희는 김래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래. 너는 이런 사람이었지. 그에게 선택지를 빼앗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이 행동이 그에게 또 다른 미래를 빼앗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알려주십시오, 제가 모르는 제 과거를.”
그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의 자신을 돌려달라고.
“조건이 있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이 숲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줘.”
“예?”
김래빈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차소희는 제 주머니에서 이전 만든 약을 꺼냈다. 영혼에 각인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약이었다. 차소희는 그의 손에 약병을 쥐여 주었다.
“내가 이 숲 바깥으로 나가면, 이 숲은 사라져. 그렇지만 나는 혼자 이 숲 바깥으로 나갈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말이야. 숲을 나가면 이 약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려줄게.”
“그럴 순 없습니다. 당신은 이 던전의 주인이고, 밖에 나가 어떤 해악을 미칠지 모릅니다. 제가 당신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 말을 들은 차소희는 크게 웃었다.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상관없었다. 그 오랜 세월을 건너온 그가 여전히 그라는 것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차소희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아니면 누가 나를 막을까. 그리고 나는, 이제는 인간으로 살고 싶어졌거든.”
김래빈은 오래 차소희를 바라보다 결국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소희의 미소와 함께 숲의 검은 나무들이 사라졌다. 며칠 방치된 김래빈의 자동차가 눈 앞에 있었다. 검은 숲의 마녀는, 구제救濟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