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봤는가?"
"예, 보살님."
"감상은?"
"특별한 건 없었습니다."
"재미없는 대답이로구나."
"...그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그게 너의 결론이라면야."
관세음보살이 바라보는 화면을 바라보며 유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는 화면에는 생전 처음 보면서도 마냥 어색하지 않은 인물들이 있었다. 벌써 환생이란 걸 할 만큼 시간이 오래 흘렀던가. 죽고자 하면 죽는 이면서, 살아가는 세월이 하계와 달라 제게 놓인 상황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이를 굳이 보여주는 보살님의 생각도,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 분명 금발에 삼장이라 불리는 이는 분명 금선님의 환생일테고, 저 붉은 머리가 권렴님의 환생, 오공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고. 그리고 팔계라 불리는 자는 분명...
"보러 가겠는가."
"본다고 하여 달라질 게 있을까 합니다."
"뭐든 가만 있는 일보다 낫겠지."
그때와 다르지 않은가. 관세음보살이 덧붙인 말에 유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때와 다르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제 취급이 여전히 반신이라고 하여도 보살님 곁에 그를 따르며 지낸 세월이 벌써 500년은 흐른 뒤였다. 막대한 권력은 없다고 해도 아무런 힘도 없는 신이 아니었으며, 화면에 보이는 이들도 제가 아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약속했잖아. 다음에 보게 된다면 그때는 제가 먼저 다가가겠다고. 그 뜻을 이룰 때가 이제야 온 걸지도 모른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희망이지만.
*
"관세음보살님의 명령으로 뵙습니다."
"그 노인네가 뭔 작정이지?"
"악의가 없는 분이란 건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꼿꼿하게 허리를 세운 채 표정없이 저보다 한참 위에 놓인 얼굴들을 바라보았다. 이분이 현장 삼장님, 그리고 사오정님, 저팔계님, 손오공님. 아무리 그들의 전생과 지냈다고 해도 그들은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며, 그들도 저를 알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과거에 연연해서도 안되고, 그들을 헷갈려서도 아니 된다. 보살님이 들으셨다면 괜한 고집이라 말했을 법한 규칙을 스스로에게 세우며 유하는 제가 그들 무리에 합류한 이유를 설명했다. 가는 길이 험하니 간단한 안내 정도 해주라는 게 보살님의 이유였다. 그 속에 숨겨진 내막은 그들이 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말한다고 믿을지 또한 의문이었다. 사실 당신들의 전생을 그리워 한 탓에 지금이나마 온기를 느껴보고자 왔습니다. 이런 설명은 아무리 보살님의 말이라고 해도 헛소리나 다름 없었다. 뭐, 스스로 세우는 규칙이라고 해도 아예 처음 보는 이들은 아니었다. 그들이 보살님을 뵈러 올 때, 보살님 곁에 서서 마주한 적은 충분히 있으니까. 그들도 분명 저의 존재를 알았을 터였다. 그저 지금처럼 가까이서 보살님의 존재 없이 마주하는 게 처음일 뿐이었다. 그것도 잠깐 얼굴 보는 게 아니라 잠시 같이 머물게 된 부분에 대해서도 처음인 건 분명했다.
"그게 이상하다는거지. 지금까지 알아서 잘하라고 내버려뒀잖아?"
"아무리 많은 요괴들이 덮쳐도 끼어들지 않으셨죠."
"엇, 새삼 우리에게 고마움을 느꼈나?"
"멍청아, 그럴리가 있겠냐."
"자, 자. 손님을 앞에 두고 싸우면 안돼요~"
저를 두고 오가는 말에 유하는 손을 제 입가에 대고 작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그러자 서로 바라보고 있던 오정과 오공의 시선이 유하를 향했다. 그들이 참으로 단순하다는 생각은 들었어도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제가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법한 생각이었기에. 유하는 말을 이어갔다. 제가 뭐라고 하든 남일처럼 듣는 삼장을 향해 시선만 흘긋 보내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으나 저는 먹고 자는 시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러니..."
"응? 그래도 배고프지 않을까?"
"음식 하나하나가 저에게 큰 영향은..."
"아무리 팔계 녀석이라도 잠 못 자면 졸음 운전을 하던데."
"...너무 오래 깨어 있으면 저도..."
"시끄럽고, 언제쯤 출발할 거야? 예정시간은 훨씬 지났어."
"... ..."
"하하, 이럴 때는 꼭 시간을 챙기네요. 삼장."
제 말 한마디에 오가는 얘기가 두 배, 어쩌면 그 이상인지도. 정신 없는 상황에 손으로 제 이마를 짚으면 자연스럽게 제 곁으로 다가와 괜찮냐고 묻는 팔계의 모습에 유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괜찮, 괜찮아요. 예전에 비해 딱딱한 말투를 쓰던 터라 제가 뱉은 말이 짧은 상황이 저에게도 어색했다. 그만큼 팔계의 존재가 제게 있어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였다. 또다르게 말하자면 그에게 기대하는 게 있는 꼴이었다. 전생의 연인이 환생한 후에도 서로 이끌리는 때가 있다고 소설에서 읽었는데. 그러한 상황이 제게 올지도 모른다. 우리는 연인은커녕 뭣도 아니었지만. 괜찮다는 답에도 당황한 모습을 보인 탓인지 팔계는 웃는 낯으로 정신 없죠? 라며 저를 다독였다. 그래서였나, 유하는 얼굴을 살짝 숙인 채 -이 순간 조금 붉어졌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다.- 갑작스런 말을 내뱉었다.
"저... 팔계님.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산책 가실래요?"
"예?"
"이거 이제보니 저 녀석을 노리고 왔구만!!"
사오정의 외침에 유하는 어떠한 부정도 하지 않았다.
*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저한테 용건이 있어 오신 건가요?"
"...아뇨, 단지... 제가 아는 사람이 팔계님과 비슷한 분이셔서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인가 보군요."
유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차린 건 그가 눈치가 빠른 탓인 걸까, 같은 경험이 있는 탓인 걸까. 만약 후자라면 슬픈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천계에서 떠나고 다시 태어난 당신이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그러나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때도, 지금도 그하고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혹여 사소한 계기라도 만들 수 있다면 좋을텐데. 지금이라도 좋으니 팔계하고 연을 쌓아 앞으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면... 새로운 연을 쌓을 수 있다면. 분명 좋았을테지만. 이 또한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그를 천봉원수로 보고 있는지 저팔계란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던 탓이다. 자신이 지금 이곳에 있는 건 제 욕심을 부리기 위한 탓이 아니라 제가 아는 사람이 아니란 걸 확인하러 왔을 뿐이다. 어떠한 미련도 없이 나아가는 쪽이 천봉원수도 반겨주지 않을까.
"그렇지만 제 생각에는... 그분이 저보다 더 좋은 분이실 거예요."
"예?"
"그분을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잖아요."
"아... 물론, 그분도 정말 좋은 분이셨지만 팔계님도 분명 좋은 분이세요."
"하하, 말만으로도..."
"아뇨, 좋은 분이세요. 좋은 분이 아닐 수 없어요. 그래야만 해요."
"유하님, 혹시 저를... 아뇨, 아닙니다. 하하,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어서 기쁘네요."
"...죄송해요."
"아뇨, 아뇨. 괜찮아요. 저라도 다를 바 없어서요."
"네에."
"무슨 일인지 안 물어보시네요?"
"... ..."
"이미 알고 계시는 군요."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면 불쾌하실까요. 유하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말에 대꾸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정말요. 괜한 마음에 덧붙인 말이 상대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알 수 없었다. 어떠한 사심도 없었냐고 한다면 거짓이기에 강렬하게 부정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이 뒤로 팔계를 볼 자신이 없을 거란 생각만 들뿐이었다. 그가 뭐라고 답하기 전, 유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제 표정이 어땠는지 몰라도 팔계의 표정은 놀란듯이 보였다. 그 반응에 유하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로가 보여주는 감정을 애써 넘기며 두 사람은 한참 떨어진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돌아갈까요?"
"...그래요, 그럼."
*
"어땠어?"
"나쁜 분은 아니세요."
"너한테 나쁜 사람은 대체 뭔데?"
"하하, 삼장도 참. 나쁜 분은 아닌데...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요."
"뭔 말인지 알아듣게 설명해."
"흐음,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요. 적어도 저한테만 볼 일이 있다는 건 알겠네요."
"그러면?"
"제 선에서 잘 해결할게요."
"...그러든가."
"걱정했어요?"
농담 같은 말에 삼장은 혀를 작게 찼다. 보살이고 뭐고 무슨 연유로 개입했는지 모르겠으나 팔계는 믿지 못 할 동료는 아니었다. 적어도 오정이나 오공보다는. 그가 알아서 한다는 건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는 의미일테고, 당장 해를 끼치는 기색은 없어보이니 일단 안심이었다. 다른 쪽도 아니고 천계에서 직접 내려왔으니 뒷통수 치는 건 아니겠지. 뭐, 여차하면 보낼 수 있고. 삼장은 오공과 대화를 나누는 유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귀찮게 됐군.
*
애초부터, 하계에 태어났다면 당신이 그리 떠나지 않았을까요. 유하는 동료들 사이에서 웃음을 터트리는 팔계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늦은 시간까지 떠드는 모습이 마치 벚꽃이 흩날리는 나무 아래 술잔을 기울이는 그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달랐다. 대화를 나눈 오공은 보살님의 말대로 어떠한 기억도 갖고 있지 않았다. 아예 없다기보다는 특정 단어에 반응하는 걸 봤지만, 그게 곧 금선동자로 이어질 만한 부분은 없었다. 그런 분이 계셨다는 걸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태양이라고 했나. 밝게 빛난다고 했고. 제게 있어 가장 빛나던 건 당신들이었는데. 가벼운 산책 끝에 얻은 건 생각보다 더 깔끔한 결론이었다. 자신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천봉원수의 환생이라고 해도 보이는 모습은 제가 알던 천봉원수가 아니었다. 분위기는 조금 비슷한 듯하지만, 보이는 웃음이나 행동, 사고방식 하나하나가 달랐다. 당연하면서도 눈으로 직접 보지 않는 이상 믿을 수 없던 현실을 결국 인정한 것이었다. 예상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만약 그가 하계에 태어났다면 저런 느낌이었을까, 하는 상상 뿐. 이러나 저러나 해도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으니 상상도 길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정말 죽었고, 새로운 삶에도 당신을 찾을 수 없다. 이미 지나간 시간은 영영 되돌아오지 않는다. 당신을 향해 제가 남긴 감정은 오로지 후회 뿐이다. 그런 제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건 단지 하나였다. 관세음보살님은 이를 알고 저를 보내주셨던 걸까요. 앞으로 그들과 지내며 제 감정이 어찌 변할지 모르겠으나 앞으로도 저는 평생 후회하며 살아갈 겁니다. 그에게 손을 뻗지 못한 일을 그리워하게 되겠지요. 그치만 그 후회만큼 오로지 단 하나를 바라게 될 것이고요. 그러니... 그저 바라건대, 당신의 이어지지 못했던 꿈을 여기서 이루기를. 그리고 그 끝에 행복하기만 하기를.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저 또한 행복해질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