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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노_천봉원수.png

유하는 책상 위에 놓인 재떨이를 바라보았다. 그가 하계에서 구했다는 개구리 모양 재떨이는 입을 떡 벌린 채 안에는 그가 잔뜩 피운 꽁초로 가득했다. 유하는 그 안에서 꽁초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가 봤다면 더러운 건 만지는 게 아니라고 답하겠으나 지금은 혼자였으니 잔소리를 들을 일이 없었다. 잔소리라고 해도, 사고치는 쪽은 제 쪽이 아니라 보통 그였지만. 유하가 그의 방에, 천봉원수의 방에 있는 건 단순한 이유였다. 각별한 사이니까. 아니, 각별한 사이가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니까? 유하는 작게 중얼거렸다. 천봉원수와 저의 관계를 설명하자면 어떠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었다. 유하는 분명 천봉원수에게 마음이 있었다. 보통 신이라고 한다면, 하나를 대상으로 사랑에 빠져도 되는 걸까요. 언젠가 관세음보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보살님의 답은 간단했다. 너 또한 그렇게 태어났잖니. 그 대답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온전한 인간도 신도 아닌 건 어떠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제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이유가 천봉원수를 마음에 둔 이유인지도 몰랐다. 모든 건 원인과 결과가 있다고 유하는 생각했다. 비록 그가 저와 같은 마음인지는 알 수 없어도. 유하는 한참 그의 입에 머물었던 꽁초를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내려놓았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방의 문이 열렸다. 제가 이곳에서 한참 기다리던 사람이었다. 유하는 느리게 눈을 깜박거렸다. 짙은 흑색의 눈에 들어오는 모습은 사람 좋게 웃어보이는 얼굴이었다.

 

 

"여기 있었나요?"

"네에, 저를 찾았어요?"

 

 

그 대답에 천봉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사들이 이쪽으로 갔다고 알려주더군요. 덧붙인 말에 유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제가 마음에 둔 사람이 저를 찾았다는데, 기분이 나쁠리가 없었다. 그의 행색을 보아하니 평소랑 같아 보여 저를 급하게 찾은 건 아닌 듯하지만. 그런 건 신경 쓸 일이 아니지. 평소처럼 웃는 얼굴에 안경을 올린 천봉원수는 한쪽 벽을 더듬더니 손을 떼자 곧 어둡던 방의 불이 켜졌다. 갑자기 밝아진 주변에 유하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가 떴다.

 

 

*

 

 

"그리 보내도 괜찮은 것이냐."

"보살님도 나서지 않는 일에 제가 나설 수는 없는 걸요."

"너나 다른 녀석들이나 어찌 그리 앞뒤 막혀서 살고 있는 건지..."

"지켜야 하는 일을 지킬 뿐이에요. 보살님 같은 분이 계시니 저 같은 이들도 있어야..."

"균형에 맞는다고? 그래, 그래. 말은 잘하는구나. 내가 묻고자 하는 의미를 모르지 않으면서."

"...전혀 괜찮지 않아요. 그렇지만..."

 

 

그의 선택이에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 말과 동시에 유하는 고개를 숙였다. 하계로 가겠다는 무리에 끼어들어 그를 제지하는 건 기껏 해야 반신인 유하에게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를 막은 이후 일어날 일에 자신할 수 없었다. 천봉원수를 포함한 권렴대장, 금선동자와 손오공이 반역죄로 도망가는 이상, 이를 도와주면 자신 또한 반역죄로 잡힐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더라도 반역죄로 확정된 그들이 하계가 아니라 지금 잡히면 그들을 구할 힘은 유하에게 없었다. 관세음보살정도로 되는 권력이 없는 반쪽짜리 신. 본래라면 천계에 자리할 수 없을 존재가 보살님의 자비로 머무는 이상, 유하는 눈 밖으로 나지 않기 위해 노력했었다. 지금 이 순간 나서는 일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포기하는 일이며, 어느 쪽도 무사할 수 없는 결말이었다.

 

 

"저는 겁쟁이일 뿐이에요."

"그 누구도 너를 탓할 수 없을 거란다."

 

 

관세음보살이 위로하듯이 내뱉은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하계로 내려가겠다는 이들이 저를 탓하지 않을 것이며, 반역자를 도운 게 아니니 나무랄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어쩌면, 뭐 하나라도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르는데. 유하는 엉망이 된 방을 둘러보았다. 안에 놓인 가구들이 망가지고, 피로 뒤범벅인 된 방에 원형을 이루고 있는 물건이란 몇 없었다. 그들이 탈출한 게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라고 했었지. 저 피가 과연 누구의 피인지 생각한다면 유하는 절로 미간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잡히지 않았어. 관세음보살은 제게 기회라도 되는 양 속삭였다. 하지만 움직일 수 있었으면 벌써 움직였을 터였다. 제가 기껏 하는 거라고는 엉망이 된 길을 따라 가는 일. 그의 흔적이라 생각한 탓에 방에 머무는 시간이 길었을 뿐이다. 결코 그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참 그곳에 서서 발견한 건, 바닥을 굴러다니는 개구리 모양의 재떨이 하나였다. 유하는 재떨이를 들어 제 품 안에 안았다. 재떨이 안에도 남아 있는 꽁초 같은 건 없었다. 그와 제 사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저를 두고 가는 일에 망설이지 않았고, 저는 그를 잡을 이유조차 없었다. 정의하지 못하는 관계는 텅 빈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그를 붙잡지 못하는 존재가 된 게 후회스러웠다. 이후로 천봉원수가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건 그의 방에서 나선지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

 

 

"어둡게 있을 필요 없잖아요."

"...그렇죠."

 

 

애초에 잊고 있었다. 밝은 빛이 들어오는 방도 아니고, 서류에 책에 잔뜩 쌓여서 어두운 방을 유하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제 방도 워낙 어두워서요, 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나 이어지는 그의 말에 신경쓰느라 말을 덧붙일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천봉원수가 말하는 이야기들은 마냥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계에서 싸우고 오면 옷조차 제대로 갈아입지 않은 채 하계에서 먹고 즐기던 일을 제게 들려주었고, 천계에 머무는 날이면 하다못해 지금 쓰는 서류가 재미없다거나 천계 사람들은 앞뒤 막힌 성격이라며 대놓고 천계인들을 돌려 까는 이야기였다. 보살님이나 금선님 앞에서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천봉원수는 곧잘 얘기했었다. 그 얘기에 유하는 웃었을 뿐이었다. 제가 그에게 끌리는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그의 태도였으니까. 매번 원정을 나가는 그가 언젠가 죽을 거라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하는 시덥잖은 이야기들을 언제까지고 들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유하는 제 마음을 그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보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의 일상에 한 켠이 되는 일만으로 충분했다. 그라고 저를 밀어내거나 싫어하는 건 아니니까. 이 이상 욕심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천봉원수님, 혹시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편하게 불러도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따지자면 직급도 높은데. 그리고 시간은 널널해요~"

"그런 걸 신경 쓰는 분이 아니면서... 매번 그런 말씀을 하시네요."

"보기와 다르게 겉치장에 신경 쓰는 편이거든요."

 

 

 

그 말이 농담이란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만큼 그하고 지낸 시간이 짧지 않은 탓이었다. 시간이 괜찮다고 하시니 덧붙이자면, 저랑 같이 산책 나가요. 단어 하나하나 조심스러웠다. 혹여 그가 거절할까봐. 또 바쁘게 나가야 할까봐. 저와 달리 바쁘게 다니는 그를 괜히 붙잡는 게 될까봐. 조심스럽게 말하고 나면 그는 일말에 고민없이 웃는 얼굴로 좋아요, 라는 답을 들려주었다. 마치 저하고 나가는 산책이 그에게 일상인 것처럼. 애초에 천봉원수 쪽에서 부탁한 말이었다. 너무 조심스럽게 대할 필요없다고. 보이는 모습에 비해 딱딱한 사람이 아니라는 농담도 덧붙였다. 제 속을 들여다보는 말에 순간 움츠렸으나 저를 배려하는 모습이기도 해 유하는 쉽게 넘어가버렸다. 덕분에 종종 그하고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유하에게 있어 더 이득이었지만. 이제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이에서 당연히 같이 시간을 보내는 사이가 된 일에 더한 행복은 없었다. 그저 지금 같은 시간이 계속 되기를. 그게 유하가 가진 최대의 욕심이었다.

 

 

 

 

*

 

 

 

 

그 생각이 참 짧은 생각이었다는 걸 결국 알고 말았지만. 변화는 제 생각보다 빠르게 이뤄졌다. 오공이란 존재가 천봉원수를 포함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모른다. 오공을 처음 보았을 때, 천계에 없을 법한 존재라고 여기긴 했었다. 오공은 밝았고, 아직 어린아이였다. 쉽게 상상하지 못할 일에 대해 쉽게 말했으니 누구든 그가 가진 의외성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긴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쉽게 하계로 가겠다는 결정을 내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예상했으나 외면하고 있던 건가? 천봉원수도 권렴대장도 천계인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불의에 맞섰고, 나서는 일에 두려움이 없었으며,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아, 그래. 제게 있어서 밝게 빛나는 건 그들이었다. 단순히 천봉원수에게 끌렸던 게 아니라 그들이 너무 밝아서. 그 밝음에 저도 녹아들고 싶어서. 그하고 다니면 저도 밝아질 줄 알고. 착각이고, 오만이었을까. 아니면 멍청한 생각이었을까. 무게감 있는 개구리 재떨이는 제 품 안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곧장 그가 있다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천봉원수의 흔적인지 가는 걸음마다 피웅덩이가 있었고,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신체와 칼이 꽂힌 채 움직이지 않는 시체들이 있었다. 이기적이게도 익숙한 얼굴이 보여도 그들은 그저 배경이었다. 중요한 건 그였다. 죽었다고, 시체로 발견했다고, 소식이 들렸어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도저히 천계와 어울리지 않는 배경 위로 한참 달리면서도.

 

 

 

"그 손 놔요!"

"유하 님, 안됩니다. 그들은 반역자..."

"이미 끝났잖아요! 위탑천도 더 이상 찾지 않을 거라고요!"

 

 

 

병사들 손에 옮겨지는 몸뚱아리를 보면서 유하가 할 수 있는 건 비명 섞인 외침 뿐이었다. 그를 내버려둬요, 차라리 제가 데려갈 수 있게 해주세요. 그 뜻이 전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의 몸이 더 망가지지 않길 바랐다. 그제야 제가 엉엉 소리내며 울고 있었단 사실도 깨달았다. 저를 선택하지 그랬어요. 하계에 어떠한 관심도 두지 말고, 그 관심을 제게 줬으면, 그랬으면... 당신도 죽지 않고, 저 또한 울지 않았을텐데. 그 손으로 제 눈물을 닦아주고, 같이 걷자고 말할 수 있었을텐데.

 

 

아니, 아니다. 그가 어떤 마음을 가졌어도 뒤따라가 붙잡아야 했다. 이리 될 줄 알면서도 겁 먹은 탓에 그가 죽게 내버려둔 거 아닌가. 너무 조심할 필요없다고 했는데, 저는 또 쉽게 닿지 못했어요. 그를 살릴 방도란 제게 없다. 유하는 천봉원수를 힘껏 안았다가 놓았다. 만약 다음이란 게 있다면, 그렇다면, 제가 먼저 다가갈게요. 그때는 겁먹지 않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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