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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숨을 들이켠다. 공포에 짓눌린 눈동자가 어지러이 흔들린다. 맞은편의 사람이 영문을 몰라 혼란스럽게 다그친다.

 

“갑자기 왜 그래!”

“…여기에 있어. 그것이 여기에 있어.”

 

힘겹게 짜낸 말 사이로 색색, 거친 숨이 흐른다. 순간 엄습해오는 한기에 이가 부딪쳐 닥닥 거리는 소리를 낸다. 마찬가지로 차가운 공기를 느낀 상대방도 주변을 둘러보지만, 시커먼 어둠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순간.

 

“와, 호러 무비. 무서운 거 보네요, 화빈.”

 

귀에 닿은 목소리가 느리게 흩어졌다. 뻔한 전개 덕분에 산란하던 정신을 단번에 휘어잡는 등장에 화빈은 퍼뜩 고개를 돌려 상대를 바라봤다. 여유로워 보이는 낯짝을 가진 그는 어느 순간 화빈이 앉아있던 소파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켄지는 TV에서 주인공들이 뭐에 쫓기건 말건 관심도 없는 듯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진짜 목적은 이쪽이라는 티가 났다.

 

“Happy Halloween.”

“놀랐잖아요.”

 

조금은 불퉁한 대꾸에 그가 짧게 웃었다. 대부분의 일에 무던한 화빈이 이런 순간만큼은 조금이나마 당황한다는 걸 알아버린 매켄지는 평범하게 다녀도 되는 순간에도 굳이 그림자를 넘어 이동하고는 했다. 사실, 세상에 그림자에서 나오는 무언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없다. 애초에 그가 어떤 존재인지 알면 도망부터 가는 쪽이 더 많을 것이다. 화빈은 억울한 마음을 뒤로 한 채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악마도 핼러윈을 챙기나 보죠?”

“trick or treat. 사람들 하는 거 재밌어요.”

“난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거 없어요.”

“그럼 장난쳐야겠네.”

 

매켄지가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투로 중얼거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화빈이 미약한 불안을 느끼는 동시에 TV의 전원이 꺼졌다. 툭. 머리 위에서 빛나던 형광등도 꺼져버렸다. 커튼의 원단 틈새로 들어온 희미한 달빛만이 적막한 공간을 밝혔다. 화빈은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식으로 잠자코 눈앞의 악마를 바라봤다. 소리 없이 빙글거리며 화빈을 뜯어보던 매켄지가 속삭였다.

 

“아직도 없어요? favor. 화빈이라면 뭐든 해줄 수 있는데.”

 

작은 목소리여도 쉽게 적막을 가르고 귓가에 파고든다. 그가 악마이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자신이 과민반응을 하는 건지 헷갈렸다. 화빈은 상대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소원을 이뤄준다는 거짓말쟁이 악마를 마주친 건 언제였지. 제법 오래전 일이었기 때문에 기억은 흐릿하지만 결단코 화빈의 의지는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운이 나쁘다는 이유로 악마를 조우해버린 인간에게 흥미를 품은 매켄지는 당신의 소원을 이뤄주겠다며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대가만 준다면 어떤 소원이든 가능하다고. 화빈은 당연히 거절했다. 악마니 천사니 하는 것들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적어도 수상쩍은 자와 뭔지도 모르는 대가를 걸고 거래할 정도로 계산 머리가 없지는 않았으니까.

문제라면 매켄지 쪽에 있었다. 그는 여러 방식으로 화빈을 꼬셔댔다. 행운만이 가득한 삶으로 바꿔주겠다,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 아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다, 강력한 힘을 주겠다 등등. 악마들은 원래 이렇게 한가한지 틈이 날 때마다 화빈을 찾아와 치근덕댔다. 일상처럼 인사했고 인사처럼 유혹했으며 결국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런 식이었다. 다정한 척 속삭이는 목소리는 한없이 은밀했고, 부드러운 척 지어 보이는 웃음은 너무나 은근했다. 악마들은 사실 인간의 마음을 전부 읽고 있는 건 아닐까. 화빈은 괜스레 달아오른 귓가를 매만지며 가까스로 답했다.

 

“안 한다니까요.”

 

화빈의 말을 들은 매켄지가 키득거리며 오케이, 하고 싱겁게 수긍했다. 웃음소리와 함께 꺼졌던 전등과 TV 화면이 말짱히 돌아왔다. 갑자기 사위가 밝아진 탓에 순간적으로 화빈의 눈이 감겼다. 입안에 달콤한 맛이 들어온 것은 직후였다.

 

“갑자기 또 뭐예요?”

“초콜릿. 화빈 먹으라고요.”

 

시야가 차단된 바람에 미약한 저항감이 들었지만, 혀 안에 감도는 단맛에 저절로 침이 나왔다. 어쩔 수 없이 우물거리며 받아넘기는 동안 빛에 적응한 눈이 점차 뜨이고 매켄지의 손에 들린 시판용 판 초콜릿이 화빈의 눈에 들어왔다. 은박 포장지로 감싸인 초콜릿은 한쪽 귀퉁이가 잘려있었다. 저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장난인지 뭔지는 매켄지가 했는데, 왜 내가 초콜릿을 먹어요?”

“화빈, 잇츠 핼러윈. 원래 그런 날이잖아요.”

 

화빈은 열받을 정도로 능청스레 구는 악마의 얼굴을 살피며 심중을 알아내려 했지만, 초콜릿을 베어 물면서 살살 웃어 보이는 얼굴에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입안에 퍼진 단맛이 약간의 쌉싸름함을 남기고 녹아 사라졌다. 화빈은 눈앞의 악마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으나, 자신이 상대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앞의 악마가 무서웠다. 다른 이유도 아니고, 유치찬란한 이딴 마음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화빈은 단맛이 약간 남은 입술을 혀끝으로 핥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요. 핼러윈이죠.”

 

그리고, 악마는 그 모습을 보며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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