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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은 보통의 상식보다 훨씬 빨리 어두워졌다. 다이무스는 날카롭게 솟아오른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를 가늠하며 걸음을 옮겼다. 서늘한 가을의 숲은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에게 냉담한 편이었기에 그의 발 아래에서 부서지는 낙엽의 바스락거림, 풀벌레들의 울음소리, 이따금 다이무스가 수첩을 확인하는 종이의 팔랑거림만 주변을 맴돌았다.

다이무스 홀든은 지역 유지의 딸, 소피아 블랙웰을 찾으러 런던에서부터 온 수사 자문위원이었다. 원래라면 이런 벽지까지 올 만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런던에서 잔뼈가 굵은 수사관 출신의 사이먼 블랙웰은 막내딸을 찾고자 가지고 있는 모든 인연을 동원했고 그중 하나가 브뤼노 올랑의 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영국인도 아니고 정식 수사관도 아니었지만, 다이무스는 수사 자문관으로의 실적이 돋보이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그라도 헬리오스의 2인자의 ‘부탁’을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도착해보니 침울한 분위기가 저택을 감돌았다. 며칠 후 결혼식을 올릴 예정이었던 새신부, 실종자의 언니 테레사 블랙웰은 우울한 표정으로 약혼자 곁에 서 있었고 블랙웰 내외는 초조하게 그를 맞이했다. 다이무스는 짧게 상황에 대해 물어보고 소피아의 방을 포함한 블랙웰 저택 안팎을 살펴보았다. 침대보는 흐트러진 채로 놓여있고, 신발과 겉옷은 없었다. 그 대신 슬리퍼와 잠옷이 방 한구석에 널브러진 상태였다. 따로 몸값을 요구하는 연락도 오지 않았음을 고려하여 다이무스는 소피아가 제 발로 사라졌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만일 그녀가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면, 기차역 주변에서 그녀를 목격한 진술자가 있어야 했지만 그렇게 손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따라서 소피아가 갔을 법한 곳은 저택 근처의 숲뿐이었다.

비록 반쯤은 소피아가 스스로 나갔다고 판단 내렸지만, 다이무스는 불안해하는 가족 앞에서 딸이 ‘외출’했다고 단정 짓는 발언을 할 정도로 무신경한 사내는 아니었다. 그는 예의 바른 이였고, 실제로 소피아의 ‘외출’은 지나치게 오래 걸리고 있었다. 불길한 상상이 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최악의 상황을 바라는 게 아니라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몰랐다. 소피아가 항상 차고 다니는 장신구나 그녀가 입고 나간 겉옷, 하다못해 신발이라도 한 짝 있으면 실마리가 생길 텐데. 그렇게 다이무스 홀든은 숲 속으로 향했다.

그는 수첩 사이에 끼워진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미 외워버렸는데도. 사진 속에 담긴 여인은 연한 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질끈 묶고, 양손으로 치마를 살짝 걷어 올린 채 활짝 웃고 있었다. 몇 달 전, 가족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라고 마리아 블랙웰 부인은 설명을 덧붙였다. 다이무스는 그녀가 웃느라 가늘어진 눈매와 둥근 얼굴을, 역동적으로 팔랑거리는 치맛자락에서 그날 가족들의 추억을 잠시나마 엿본 기분을 느꼈다. 소피아의 사진을 보던 다이무스는 문득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들고 가만히 서서 주변에 집중했다.

어느새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기묘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가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갑자기 몸이 아래로 훅 꺼지는 감각을 느꼈고 그 뒤로는 암전이 그를 뒤덮었다.

 

* * *

 

“이봐요! 저기요…!”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다이무스는 흐릿한 시야 때문에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낙엽이 어느 정도 충격을 흡수해 주었으나 등이 욱신거리고 발목이 시큰거렸다. 발가락 끝까지 감각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골절상은 없고, 몇 군데 타박상만으로 끝난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다이무스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는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정신이 들어요?”

 

그의 수첩 안에 있는 사진과 똑같은 여자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강 묶은 머리카락은 창백한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고 끄트머리가 둥글게 말려 원만한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려갔다. 그리고 그 눈동자. 다이무스는 어둠이 내려앉은 숲만큼이나 짙은 녹색의 눈동자를 보며 사이먼 블랙웰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지러운 시야로도 다이무스는 소피아의 상태를 자세히 살폈다. 어찌 됐든 그는 소피아를 찾으러 왔고, 그녀를 무사히 데리고 나가야 할 책임이 있었으니. 눈에 띄는 상처나 부상은 없는 듯 해보였다. 깔끔한 옷차림을 미루어 보았을 때 피부가 찢어지거나, 다리를 절뚝이거나, 다이무스처럼 구른 거 같지도 않았다. 다만,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은 듯해서 추위로 입술이 새파래진 채 오들오들 떠는 모습이 신경 쓰였다. 겉옷도 잃어버린 모양이었는지, 얇은 옷감이 반투명하게 그녀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었다.

 

“…소피아 블랙웰 양?”

 

눈앞이 핑 도는 감각에 다이무스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웅얼거렸다. 목덜미부터 관자놀이까지, 둔통이 머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뇌진탕인가. 그가 조용히 진단을 내리고 있는 와중에 소피아가 미간을 팍 구기며 반걸음 물러섰다.

 

“뭐야. 제 이름을 어떻게 알죠? 당신, 누구예요? 숲은 일찍 어두워진다는 거 몰라요? 딱 봐도 이 주변 사람이 아닌 거 같은데? 왜 저를 알고 있냐고요!”

“…하나씩, 하나씩 물어보십시오.”

 

다이무스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머리를 문지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는 시선에 경계심이 가득했다. 손바닥만 한 프레임에 갇혀있던 사진 속 인물보다 훨씬 매섭고, 날카롭고, 기운찬 모습이었다.

 

“숲에 들어온 건 당신을 찾기 위해 들어왔습니다. 이름은 다이무스 홀든. 그러는 블랙웰 양은 이 ‘위험한 숲’에 들어오신 연유가 어떻게 됩니까.”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다이무스는 자기도 모르게 혀를 차려다 말았다. 숲에는 산짐승뿐만 아니라, 어둠을 틈타 제 욕망만을 앞세우는 이들도 있었다. 평생을 숲 근처에서 산 소피아가 그것도 모를 거라 여기진 않았지만. 겉옷을 벗어 군데군데 묻은 풀과 낙엽을 털어낸 다이무스가 소피아에게 제 옷을 건네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팔짱을 단단하게 낀 채,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됐어요. 묵비권을 행사할래요. 아무튼, 그쪽도 나가야 한다는 거죠? 안내해 드릴게요. 참나, 나 안 만났으면 그대로 졸도해 버렸을 거면서… 뭐가, ‘찾기 위해’ 왔다는 거야.”

 

자, 가죠! 망설이지 않고 소피아는 앞장서서 걸어 나갔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무성한 나뭇가지 사이로 달이 비쳤고, 서늘한 빛이 소피아의 위로 은하수처럼 쏟아졌다. 어스름한 반짝임 때문인지, 다이무스 본인의 뇌진탕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순간적으로나마 그녀가 반투명하게 보였다.

마치 유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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