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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님, 그래서 제 하루 일당은 얼마인가요?

 

 

 

 

 

"전능하신 주신께서는 오로지 하늘에 홀로 존재하시며 간악한 파충류의 탈을 쓴 채 무지몽매한 자들의 귀를 현혹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날 순백의 옥좌에서 일어나 오직 믿는 자들만 구원하실지니, 이 영지의 불쌍하고 우매한 이들은 하루빨리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한 가축의 가죽을 찢고 푸른 피로 흠뻑 젖은 머리를 조아릴지어다. 당신들이 믿는 신은 요망한 술수로 그저 전능하게 꾸밀 줄만 아는……!"

 

신전의 입구가 요란스럽다. 경비병은 신전 입구의 동상 위로 수액을 끼얹는 자들을 막기에 급급하다. 수액으로 끈적해진 동상 위로 낡은 전단이 붙는다. 꼬리인지 목인지, 하여간 뭔가 잘린 도마뱀이다. 소예배실로 안내하는 신관의 얼굴이 붉다. 저들은 옆 제후국의 신도들로, 말로 이주는 달려야 하는 거리에서 왔다고 한다. 본래라면 이 공국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만으로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지만 대공이 제국과의 마찰을 원치 않아 신전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게 한계라고 했다.

 

"죄송합니다, 오실 때마다 매번 앞이 소란스럽지요."

"아뇨, 뭐 …… 근데 파충류는 피가 파란색인가요?"

"네?"

"아닙니다.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이곳에 올 때마다 인간의 신실함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어 좋다고 말하면 실례겠지. 나는 말을 줄이고 신관의 뒤를 바삐 따른다. 먹을 것이라고는 일 년 중 몇 달, 잠시 날이 따스해졌을 때 급하게 재배한 감자와 토마토가 전부고, 혹한이 이어지는 시절에는 그조차 재배할 수 없으나 떠나는 이가 드문 나라. 계절의 구분이 없어 사시사철 굶주린 야생동물이 영지로 내려오는 나라. 머리 위로 거대한 산맥이 있고, 아래로는 제국을 등에 업은 제후국들이 즐비해 영토 확장은 꿈에도 꿀 수 없는 나라. 심심하면 타국의 신도들이 신전의 동상에 오물을 뿌리고, 영지 곳곳에서 국교를 모독하는 나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백 년간 외세의 침략 한번 없이 공국의 위치를 지켜온 나라. 이 모든 수식어가 겨우 전설 하나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나는 믿음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된다. 빅토르 공국의 산맥에는 나라를 수호하는 드래곤이 있다. 한 줄로 요약되는 전설이 수만 명의 목숨을 보호하고 있다. 전설에 얽힌 일화에 따르면 지금의 제국은 수백 년 전 그 드래곤에게 말 그대로 '뜨겁게' 당한 적이 있어, 공국의 합병은 꿈도 꾸지 못한다고 했다.

입구에서 멀어지자 고성을 내지르던 목소리들이 희미해졌다. 제국의 몸집이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대륙의 절반 이상을 먹어 치웠음에도, 게걸스럽게 점령을 이어갔다. 어쩌면 추후에는 이 조그마한 나라가 산맥 하나만을 등에 업고 대륙 전체와 싸울 수도 있는 일이다. 신관님은 가끔 미래가 두렵지 않으세요? 신관은 조용히 웃으며 소예배실의 문을 연다. 좀 전까지는 묻지 않아도 말이 많더니, 정작 궁금한 것은 대꾸하지 않는다.

소예배실이라고 한들 경건한 맛은 없다. 벽에는 교의 상징 하나 걸리지 않았고, 구석에는 명단과 기부금을 모아두는 금고가 있다. 오로지 돈을 위한 공간이라는 본질만 보면 도리어 바깥보다 세속적이다. 본래에는 신전의 중심, 대예배당에서 기부금을 올리고 축성 비스무리한 걸 받았는데 바깥에서 말이 나온 모양이었다. 황금에 집착하는 드래곤의 종교답게 부끄러움 없이 재물을 쌓아둔다고. 아무리 드래곤이 뒷배라고 한들 핍박받는 이들은 몸을 사리게 되는 법인지, 어느 순간부터 기부를 목적으로 방문하면 신전의 가장 끄트머리로 안내를 받았다. 들어오시죠, 소예배실의 안쪽에서 못 보던 신관이 말을 걸었다.

단정하게 다듬은 앞머리 사이로 힐끔힐끔 티아라가 보인다. 월계수 잎을 얽은 것처럼 보이나 가까이서 보면 비늘 모양이다. 검은 머리카락은 빛 받은 자리마다 푸르게 윤이 난다. 신관이 안쪽으로 팔을 뻗자 제의가 펄럭인다. 교의 제의는 검정이었는데, 빅토르를 수호하는 드래곤이 유독 오닉스를 좋아해서 그렇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무튼, 겉으로만 보면 신관이라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늘 계시던 분이 아니네요."

"예, 잠시 출타하셨습니다. 북쪽 동굴에서 곰이 내려왔다는 소식이 있어서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물론, 이 교 전체가 '신'이라는 단어와 맞물리지 않는 부분이 컸다. 물주가 드래곤인 만큼 교의 신관들은 신력 대신 마력을 썼다. 드래곤을 숭배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신관은 드래곤 자체보다는 드래곤의 힘으로 영지를 지킨다는 목적에서 교에 귀의한 것으로 안다. 그렇기에 신전의 신관들은 대부분 영지에 뿌리를 두고 자라난 사람들이라고 했다. 모두 미래 빼고 다 아는 신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사실상 종교라는 탈을 쓴 영지 경비대와 마찬가지다. 종종 견습부터 신전에서 자라온 신관들은 영지의 안전에 대해 집착과도 같은 강박을 보인다며 농을 하기도 했다.

'이 사람도…… 그러려나.'

신관의 낯에서 젊은 티가 났다. 견습 신관들은 티아라를 착용할 수 없었고, 기부금을 관리하는 이곳에 쉬이 들어오지 못하리라. 매끄러운 이마 위로 미스릴 티아라의 은빛이 반짝인다. 기부금 명단에 이름을 써넣고 품에서 수표를 꺼내려던 찰나, 신관의 낯을 오래 보게 된다. 눈가 아래 음영이 질 정도로 속눈썹이 길다. 가느다란 은사를 엮어 조형한 듯한 섬세한 낯에 끝내주게 잘 어울렸다. 반듯한 콧대 위로 굴곡 없이 빛이 떨어진다. 시선은 신관에게 두었으나 몸은 목적대로 움직였는지, 신관은 수표를 받아 들고 부드럽게 웃었다. 얇은 입술이 모양 좋게 휘어졌다. 잘생겼네.

 

"매번 감사합니다."

"아, 예, …… 예?"

"……뭔가 문제라도?"

"매번이라고 하시기에 저희가 얼굴을 본 적이 있나 싶어서요."

 

이런 얼굴을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신관이 낯 위로 웃음을 띄운 채 수표를 금고에 넣었다. 극단 하나를 운영하고 계시죠, 매번 회색 천막에 까만 깃털 장식을 하는 천막을 걸고. 빅토르 공국에 공연을 하러 오실 때마다 신전에 꼭 들러 기부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신전의 신관 중 신도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신관이 예배실 중앙으로 걸었다. 낮은 단상에 선 채 기도할까요, 묻는다.

 

"신실하신 신도님께서는 무엇을 위해 매번 이곳을 찾으시나요?"

"……그저, 사고 없이 공연이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인 거죠! 수백 년간 빅토르의 안전을 지켰다는 말이 있으니!"

 

단상 아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나직한 신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드래곤의 신전이니, 기부하면 금화 한 푼 정도는 더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빌었다는 건 평생 함구해야 할 말이 됐다.

숙였던 고개를 드니 신관이 단상에서 내려왔다. 금고에 짧게 눈길을 주고 바깥으로 팔을 뻗었다. 뒤로 신관이 따라 걷는다. 예배실을 나서기 직전, 입구의 난전이 떠오른다. 도리어 시장 바닥이 더 조용할 판이었다. 아시겠지만 바깥이 소란스러우니 나가실 일 있으면 조심하세요. 신관이 대꾸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이 까마귀처럼 반짝거리는 걸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얼굴에 흠이 나면 드래곤도 슬플 테다. 그럼, 나중에 또. 신관이 문득 입을 열었다.

 

"신도님은 저 사람들이 이해가 가시나요?"

"누구, …… 아, 바깥?"

"예, 존재 여부도 모르는 신보다는 전설이라지만 몇백 년에 한 번씩 얼굴이라도 비추고, 보석 몇 알이라도 던져주는 쪽이 모시고 싶지 않나, 싶어서."

 

예배실의 문을 밀며 애매하게 기울어졌던 몸을 다잡는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힌다. 보석도 던져주는구나. 몇백 년에 한 번이면 …… 사람이 그렇게 살 수가 없는데, 신이나 드래곤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신관의 앞에서 해도 될 말과 해서는 안 될 말을 고른다. 단상에 섰을 때보다 단어가 묘하게 날 것이다. 아직 어리다는 티가 이런 곳에서 나는지, 퍽 친근함이 묻어나는 말투에 웃음이 나려던 걸 참았다.

 

"뭐, 그렇다면 그렇겠죠?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사실 전 이 신전의 드래곤도 신도, 그냥 상징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을 해서. 신실한 사람들이 가끔 신기하긴 합니다."

"상징."

 

……잘못 골랐나? 신관이 되풀이하는 단어가 마음에 걸린다. 그러니까, 상징이라는 게. 급하게 수습을 하려 덧붙인 말이 맥없이 잘린다.

 

"신도님의 연극에는 종종 인간으로 변한 드래곤이 사람 사이에 섞여 지내는 장면이 나오죠. 극단의 대본은 모두 신도님이 직접 쓰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저 상징으로 치부하는 존재를 상황에 섞어 현실감 있게 구현할 수 있는 까닭은 뭔가요?"

"……모두 현실에 기반한 상상이죠. 그, 제가 뒤에 일정이 있어서요. 정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단어와 어투의 차이가 아니다. 꼭 이전과는 다른 사람처럼 조목조목 물어오는 말에 이변을 감지한 몸이 탈출을 요청한다. 신도님의 앞길에 늘 빅토르의 수호자가 함께하시길. 퇴장을 허락하는 신관의 손에 들린 것이 있다. 요철 없이 매끄러운 표면이 한눈에 봐도 값싼 종이는 아니다. 까만 종이 한 장. 반으로 접혀 내용을 알 수 없다. 내미는 방향은 내 쪽이다. 어정쩡하게 갈피를 잡지 못하는 발은 끝내 신관의 방향으로 돌아선다.

 

"……이건?"

"오늘 밤에 대예배당에서 고액기부자들을 위한 예식이 있습니다. 본래는 이 영지의 귀족을 대상으로 하는 예식이지만, 신도님께서도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좋겠네요. 안면을 터두면 극의 흥행에도 도움이 되실 겁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바깥으로 말이 돌지 않게 극비리에 진행되는 모임이니 꼭 초대장을 지참해야 한다. 혹여 밤에 경비병이 길을 막는다면 이 초대장을 보여주면 된다. 신관은 마지막까지 초대장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예배실의 문을 연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타국의 신도들이 고성을 질렀다. 초대장을 제대로 훑어볼 수 있던 건 신전과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린 뒤였다. 기름을 먹인 건지 까만 종이가 반질거린다. 보통 이런 건 봉투에 밀랍으로 봉해서 주지 않나. 눈을 뜨자마자 신전으로 걸음했다. 아직 중천인 태양 아래에서 초대장 가장자리의 푸른 빛이 도드라진다. 빅토르에서 파란색은 신의 색이다. 맑은 파랑은 보석을 갈아야만 나온다. 보석을 사랑하는 드래곤이 기꺼이 사랑할 색이라는 이유였다.

'엄청 반짝거리네…….'

종이를 돌릴 때마다 테두리에서 빛이 산란한다. 옆에서 보니 테두리 부분만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와, 이거 설마. 테두리를 만지니 손끝에 까슬한 감각이 돈다. 유난히 색이 맑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틀림없이 상급의 보석을 갈아 만든 장식이다. 귀족용이라 이거지……. 갈린 보석으로 귀금속을 만들어 판다면 한 달 매상은 가뿐히 뛰어넘을 테다. 대예배당에서 열리는 예식이니 못해도 열댓 명은 초대를 받았을 거고, 거기에 쓰인 보석들을 모두 돈으로 바꾼다면…….

 

"……초대는 말로 하고 보석은 나나 주지."

 

쩝. 이유도 없이 아쉬운 마음에 작게 입맛만 다신다. 값어치를 알아서 그런가, 테두리에 꽂힌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다. 손끝에 묻은 가루에도 돈이 따라올까 싶어 검지로 하염없이 테두리를 매만진다. 위에서 아래로, 면적을 따라 길게 훑던 손가락이 순간 뜨끔하게 아팠다. 아씨, 베였나. 떼어낸 손가락은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하다. 가루가 박힌 게 아닌가 싶어 살갗을 밀어 보아도 통증이 없다. ……욕심부려서 벌받았나? 초대장을 매만지던 손가락을 옷 위로 두어 번 문댔다. 이미 갈린 보석은 보석이다. 뭐가 되었든 돈이 들어올 구석이 생긴 건 사실이었다.

 

 

 

 

 

극단의 공연은 열흘 뒤에나 시작이다. 열흘 동안 쉰다는 소리는 아니다. 연극의 흐름을 맞춰보고, 배우들의 의견을 들어 극본을 수정하고, 공연을 도와줄 마법사를 섭외하다 보니 날은 순식간에 저문다. 무엇 하나 쉬운 게 없지만 가장 까다로운 건 마법사다. 표가 모두 팔린다는 가정하에 셈을 해도, 마법사의 급료를 주고 나면 손에 남는 돈이 없었다.

'부르는 게 값이다 이거지.'

공국 소속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마법사는 둘 중 하나다. 제국의 아카데미에 있거나, 전쟁에 차출되거나. 그러니 고작 '연극'에 마력을 보태줄 마법사가 드문 데다가 하루 한 시간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니 공연이 이어지는 동안, 본인의 일은 사실상 손을 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마법이 주는 이점을 포기하자니, 공연의 질을 함께 포기하는 꼴이다. 애꿎은 펜촉을 종이 위로 두드리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 탄식했다. 대단한 마법을 쓰지는 않는다. 강한 빛으로 관객들의 눈을 현혹시키거나, 자그마한 소품을 띄우는 정도인데도 어지간한 군대 수준의 급료를 원했다. 마법을 쓸 줄 알았다면 차라리 내가 갈리고 말았을 텐데…….

 

"사장님, 밤에 어디 간다고 안 했어요?"

 

혀끝이 써지려던 찰나, 상념을 끊고 불쑥 말이 들이닥친다. 창밖이 어두웠다. 펜을 놓고 자리에서 급하게 선다. 기껏 짜둔 예산안이 엉망이 될까, 잉크병을 꽉 잠갔다.

 

"사장님이 아니라 극단주, …… 됐다. 나 잠깐 다녀올 테니까 식당 계속 보고 있어. 후줄그레한데 뭔가 있어 보인다, 마법의 냄새가 난다. 싶으면 떠보는 거 잊지 말고. 닷새 치 급료가 뭔 한 달 밥값이야. 이러다 우리 다 거덜 나."

"그니까 왜 잘 다니던 아카데미 때려치우고 이 고생을,"

"아, 몰라몰라. 나 나간다. 못해도 두 명은 잡아 와!"

"아니, 마법사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도 아니고……! 한 명! 한 명으로!"

"힘내!"

 

겉옷을 챙기고 여관을 나섰다. 섭외 담당이 창문 밖으로 '근데 진짜 어디 가요!?' 외쳤다. 연기는 못하지만 사람 잡는 솜씨는 기깔난다고 자부하여 데리고 왔는데, 잡기는커녕 멀쩡한 섭외도 망치는 재주가 있었다. 잡지는 못해도 사람을 보는 눈이 좋은 건 사실이라 대체할 사람을 찾기 전까지만 같이 일을 하려고 했더니 보낸 세월이 어느새 3년이다. 돈 벌러! 허공에 대충 손을 휘적이며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초대장이 만져졌다.

신전 입구는 아침의 난장판과 다르게 고요하다. 수고하십니다. 경비병의 표정이 지쳐 보인다. 자연스레 지나려던 몸을 두툼한 팔이 막았다.

 

"날이 저문 뒤로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대예배당에 볼일이 있어서요."

"오늘 대예배당에는 행사가 없습니다. 해가 뜬 뒤에 다시 방문해 주십시오."

 

극비리에 진행되는 모임이라더니, 경비병의 태도만 보면 꼭 못 올 곳에 온 기분이다. 심신이 너덜거려도 본분은 잊지 않는 태도가 감명 깊다. 품을 뒤적거리니 경비병이 뒷걸음질 친다. 검 손잡이를 쥐기 전에 초대장을 꺼냈다.

 

"여기, 이것 때문에 왔어요."

 

영문 모를 표정이 일품이다. 경비병만 아니었으면 연기하지 않겠냐고 권유했을 텐데. 경비병이 조심스럽게 초대장을 가져간다. 그러고 보니 보석에 홀려 겉면만 살폈지, 정작 내용물은 본 적이 없다. 경비병은 푸른 테두리를 엄지로 쓸더니 초대장을 펼쳤다. 내용을 훑는 것치고는 눈동자에 움직임이 없다. 귀족도 아닌데 뭔 나부랭이냐고 쫓아내면 어쩌지. 걱정이 무색하게 경비병이 길을 텄다. 초대장을 돌려주더니 지친 낯 위로 미미하게 웃었다. 대예배당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입구가 고요하다 싶더니 나 빼고 얼추 인원이 모인 모양이다. 기다린다는 말은 그저 인사치레가 아닌가 싶다. 고생하십쇼. 고개를 까딱이고 신전 안으로 걸었다.

신전의 내부가 과하게 한적했다. 날이 저물었다지만 오가는 신관 하나 마주치지 못했다. 고해실과 소예배실 몇 곳의 불이 켜져 있었으나 별다른 인기척이 없다. 사람이 모여있을 대예배당도 마찬가지였다. 도리어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줄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예식이라는 건 다 개뻥 아니야?'

기다린다더니, 문을 열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람들이 드디어 제물이 왔다며 환호를 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다. 신관이 초대장을 줬다는 이유로 너무 안일하게 행동한 게 아닌가. 그러나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종이 위 썼던 마법사의 급료가 아른거렸다. 표가 다 팔려도 그 모양인데, 혹여나 표가 남기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빚을 져야 했다. 사람보다 더 무서운 건 돈이고, 그보다 무서운 건 돈 받아내는 사람이다. 더 무서운 건 아직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나는 대예배당의 문을 밀었다. 검은 로브의 사람도, 제물이 왔다는 환호성도 들리지 않았다. 단상 위에 초대장을 준 신관이 홀로 서 있었다.

 

"……늦었나요?"

 

신관은 우두커니 선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제의 위로 달빛이 떨어졌다. 검푸른 머리카락의 색도, 잘 다듬어진 유리 공예 같은 얼굴도, 기묘한 분위기며 변덕스러운 어투까지. 어떻게 보면 여지껏 본 어떤 신관보다 이 신전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대꾸 하나 없이 고개만 돌리는 싸가지도 그렇다. 아니지, 이건 내가 늦어서 그럴 수도 있지. 기껏 마음 써서 비싼 초대장도 줬는데, 호의를 발로 걷어차 버린다면 아무리 신관이라도 빈정이 상할 테다. 신관은 창밖에 두던 시선을 돌리고 나서도 입을 열지 않는다. 느린 발걸음으로 대예배당 안쪽으로 들어간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 신관은 그제야 천천히 웃었다.

 

"아뇨, 딱 맞춰 왔네요."

"다행…… 이네요, 그런데 다른 귀족들은. 아, 그런 건가? 여기는 그냥 모이는 장소고 진짜 장소는 신관님이 안내해 주시는?"

"진짜 장소 같은 건 없는데. 여기가 전부예요."

"……그럼 아직 안 모인 건가요?"

 

어째 말투가 드문드문 반토막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을 지적할 타이밍은 아니다. 줄지어 늘어선 의자 사이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건가? 그치만, 기다리고 있다며. 누가. 쟤가?

 

"모일 사람은 다 모인 것 같은데. 나랑, 신도님."

"제가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되어서 그러는데, ……혹시 장난친 거예요?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초대장이, 쓰읍, 뭐 신관 놀이하는 귀족 아드님 정도 되시나? 미안한데 내가 이런 장난에 어울릴 정도로 시간이 많은 사람이 아니거든?"

"내가 신도님한테 이 자리를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해요?"

"고액기부자들을 위한 예식이라며. 영지의 귀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네, 그런데 ……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영지에서 신도님만큼 꾸준히 신실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다 취소했어요. 아니다, 취소가 아니지. 초대장을 건넨 건 신도님 하나였으니 정확히는 그만뒀다는 게 맞겠네요."

 

뒤통수가 쑤신다. 또박또박 늘어놓는 말들 중 이해가 가는 말이 하나도 없다. 들을 만한 건 없고, 볼만한 건 얼굴 하나다. 멋대로 아귀를 끼워 맞춰보아도 내가 놀아났다는 사실밖에 나오지 않는다. 귀족, …… 귀족이겠지? 저 얼굴을 후려갈기면 잡혀가나? 신관은 단상 위를 천천히 오간다. 말을 멈추지 않고, 계속 무어라 주절거리며.

 

"이렇게 신실한 신도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식이 뭘까 생각했어요. 기부금을 돌려주는 건 예의에 어긋날 것 같고, 그렇다니 사소한 건 하고 싶지 않고."

 

……귀족이 아니라 대신관 아들쯤 되나? 여지껏 낸 기부금을 몽땅 돌려받는다면 표가 다 팔리지 않아도 입에 풀칠은 할 수 있다. 저 작은 머리통에서 뭘 생각한들, 그보다 좋은 방도는 나오지 않을 테다. 그게 결코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어떻게 납득시켜야 하나, 공연히 아랫입술을 씹어가며 발끝을 본다. 속았다는 분노와 돈이 걸린 초조함에 앞굽이 끊임없이 바닥을 두드렸다. 근데,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게 있더라고요. 신관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아냐, 니가 뭘 하려고 해도 그건 좋은 방법이 아닐 거야. 뭐가 있지, 기부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 돌려받고도 뻔뻔하게 이 영지에 다시 발 들일 수 있는 방법.

단상을 거닐던 걸음을 멈췄는지 신관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정적을 채우는 옷자락 소리. 무언가 찢어지고, 뒤틀리고, 펼쳐지는 소리. 설마 날 가져요, 이딴 구린 건 아니겠지? 엄습하는 위기감에 퍼뜩 고개를 든다. 창밖에서 달빛이 드는 것 치고는 시야가 어둡다. 신관의 낯이 코 앞에 있었다. 정확히는 그보다 위에, 두 쌍의 날개를 펄럭이며 밖에서 밀려드는 달빛을 정확히 가리고 있다.

 

"인간들은 이런 걸 좋아한다던데."

"……."

 

넓게 펼친 날개는 파충류의 그것이었다. 도드라지는 뼈대, 사이사이 팽팽하게 당겨진 가죽과 희미하게 비치는 핏줄. 허공을 가르고 땅의 법칙을 무시하며 하늘로 끝도 없이 치솟아 오를 수 있는 힘. 날개가 움직일 때마다 바깥쪽의 푸른 비늘이 반짝였다. 꼭 초대장의 테두리처럼.

현실감 없는 광경에 잠시 멈췄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등을 돌리고 문으로 뛴다. 뒤에서 청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달음박질치는 몸을 잡기는커녕 도리어 도망가 보라고 놓아주는 모양새다. 육중한 대예배당의 문을 민다. 온몸으로 밀었다가, 손잡이를 쥐고 당기기도 한다.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멀쩡히 보내줄 리가 없지……. 힘 빠진 다리가 고꾸라진다. 가장 먼저 땅에 처박은 무릎이 아렸다. 아까 나, ……싸가지 없었지. 그래, 쟤 보고 싸가지 없다는 생각도 했어. 후려치고 싶단 생각도 했다. 벼락처럼 찾아온 후회의 상흔이 깊다. 어차피 도망칠 수 없다. 괜히 힘을 빼고 싶지 않아 문만 바라보던 몸을 돌렸다. 등을 문에 기대자 멀찍이 떨어진 형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어때요, 상징에 불과하던 게 눈앞에 나타난 기분은?"

"어두워서 잘 모르겠고, 이제 곧 죽으려나 싶긴 합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신관의, …… 아니지. 드래곤의 말은 거리가 무색하게 귀에 꽂힌다. 거세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임에도 그랬다. 드래곤은 더는 날지 않았다. 날개를 접고 두 발을 땅에 디뎠다. 날개를 따라 너풀거렸던 제의가 가라앉았다.

 

"신도님은 죽지 않을 거예요. 죽일 사람이 필요했다면…… 신전 입구에도 많았는데, 굳이?"

"그것 참 위로가 되는 말입니다."

"하하, 위로가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비꼬는 말을 못 알아듣는지, 알고서도 이러는지. 처박았던 무릎만 문지른다. 여기서 죽지 않는다면 내일 아침 푸르딩딩한 멍이 들 테다. 사실 고위기부자니, 예식이니, 전부 거짓말이었어요. 드래곤이 이미 아는 말을 또 한다. 몇 걸음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발끝이 맞닿았다. 친히 몸을 낮추고 시선을 맞춘다. 친절도 하시지.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발끝과 시선 대신, 다른 게 내 목과 맞닿을 것 같아 말을 삼켰다.

 

"해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이건 모르는 말이다. 방금까지 두려움에 굳었던 뇌가 살길이 보이니 움직인다. 현실감 없는 풍경에 압도당해서 그렇지, 따져보면 이 드래곤은 나에게 해가 갈 짓을 하지 않는다. 비록 사람을 꿈에 부풀게 만들었지만, 문도 안 열어주지만, 내일 아침 무릎에 멍이 들게 생겼지만, …… 아닌가? 했나? 어찌 되었든 무식하지 않고 말이 통하는 귀한 파충류다.

 

"제가 뭘 …… 해드리면 되는데요? 근데 여기 신관들 많던데. 아무나 대충 골라잡아서 부탁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신관이 못 할 일을 딱히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은데. 잘못된 선택을 하시는 건 아닐까요?"

"……말이 많네?"

"다물까요?"

 

아뇨, 나쁘지 않아요. 자세한 건 가서 말할까요. 기다란 손가락이 다가온다. 가자는 곳이 저승은 아니겠지. 손가락의 끄트머리가 이마를 쿡 찔렀다. 눈앞이 새까맣게 물든다. 정신을 차리니 시야에 신전은 없었다. 나는 푹신한 융단이 깔린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드래곤은 비싸 보이는 책상에 앉아 있다. 두툼한 종이 뭉치를 손에 든 채다. 정신을 잃었던 게 짧지는 않은지 몸을 세우니 어깨가 아팠다.

 

"일어났네요?"

 

방의 양쪽으로 거대한 책장이 있다. 벽의 한 면을 전부 채우는 크기다. 책이라고 부를 수 없는 낱장부터 머리에 맞는다면 치명상인 양장본까지, 글자가 있는 것이면 모두 모아둔 것 같다. 드래곤의 뒤로는 두꺼운 커튼이 보인다. 아마도 뒤로는 창이 있겠지. 책상 위 양피지와 잉크병, 여러 개의 펜을 꽂아둔 둥그런 통. 규모와 가구의 퀄리티가 달라서 그렇지, 구조는 고향의 방이랑 별반 다를 게 없다.

 

"여기가 어디예요?"

"작가님 서재."

"……작가님? ……아, 아아. 개인 소유의 극단이 있어요? 이제 알았다. 빅토르에서 영업하지 말라, 그런 거죠? 에이, 쫄았네. 알겠어요, 이번이 마지막. 다음부터 빅토르 공국은 얼씬도 안 하겠습니다. 말로 하면 되는 걸 뭐 이렇게 거창하게,"

"당신 말하는 거예요."

"……아실런지 모르겠는데, 인간은 드래곤처럼 모든 걸 다 알고 고런 능력 같은 거 없거든요? 그래서 논리라는 게 필요해요."

"드래곤도 딱히 모든 걸 알지는 않는데."

"아, 그래요? 책에서 그렇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죠."

"인간은 늘 자기가 아는 게 전부인 줄 알지."

"와, …… 인간 대신 자기로 바꾸면 완전 내 애인이 하던 말인데."

 

드래곤이 그제야 종이 뭉치에 두던 시선을 옮긴다. 그래서 여기가 왜 제 서재인데요? 뇌가 완전히 풀렸다. 책잡히고 싶은 마음은 없어 화제를 돌린다. 긴말을 늘어놓았으나 중요한 건 몇 가지 되지 않았다. 우선, 드래곤의 이름은 청려였다. 누가 지어준 이름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이름의 뜻이야 모르겠지만 어감이 좋았다. 아무튼, 청려의 첫 기억은 빅토르 공국의 산맥. 다른 영지로는 나가본 적도 없고 크게 나가고 싶은 의향도 없어 천 년이 넘게 한 산맥에서 살았다고 했다. 백 년이 조금 넘는 해츨링 시절은 지루했으나 -나는 이 시점부터 시간 단위에 대한 이해를 포기했다- 폴리모프가 가능해진 이후부터는 지루함이 가셨다고 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온갖 인물로 변장하고, 사람들의 정신을 아낌없이 주물러가며 영지에 녹아들어 갔다. 그러나 이 생활도 한계가 있어 이제는 식상하고 재미가 없다. 말의 핵심은 이 영지를 떠나고 싶어진다는 소리였다.

 

"? 떠나세요."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계약…… 같은 거라도 있는 거예요? 청려는 빅토르를 떠나지 못한다, 땅땅. 뭐 이런?"

"이 땅에 그렇게 대단한 마법사가 있었나?"

 

하, 있었으면 돈 주는 게 억울하지나 않지. 고개를 흔드니 말이 이어진다. 빅토르 공국을 수호하는 드래곤이 있다는 전설이 돌기 시작한 건 청려가 공국 국민들의 정신을 주무르며 산 지 얼추 이백 년이 넘었을 시점, 청려의 레어가 발견되면서였다. 당시 제국은 지금과 비슷하게 대륙 통일을 목표로 전진하고 있었고 공국은 척박하기에 공국으로 남아있는 땅에 불과했다. 제국이 무력으로 다가온다면 공국은 병합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완벽한 제압을 위해 제국은 공국의 사방을 포위할 방법을 탐색했고, 레어가 발견된 건 탐색 도중이었다. 도난당한 재물은 청려의 입장에서 푼돈에 가까웠으니 아무래도 좋았으나, 인간이 제 터전을 엉망으로 만든 데에서 자존심에 금이 갔다고 했다. 정신을 차리니 제국의 핵심 도시는 모두 불바다가 되어있었고, 그 뒤로 빅토르는 드래곤을 숭배하게 되었다. 신전과 신관을 용인한 것도 그들이 영지처럼, 자신의 레어도 수호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보니, 전설이 아니라 역사서에 기록되어야 할 이야기였다. 결론적으로 청려는 같은 경험은 필요 없다고 했고, 나는 슬슬 궁금했다. 그래서 난 여기 왜 온 건데.

 

"이야기 잘 들었고요, ……여기서 제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없는데요?"

"난 작가님이 내 다음 인생을 고려해 줬으면 좋겠어요."

"……아하~"

 

대꾸할 말이 없었다. 드래곤이 곱게 살겠단 생각은 안 했지만, 이렇게까지 지독한 쾌락주의자라는 생각도 한 적이 없다. 거절할 이유를 고민하다 우선 말을 돌렸다.

 

"근데 왜 저예요? 딱 맞는 인재는 아닌 것 같은데."

"작가님이 쓴 드래곤은 인간 같았거든요."

"인간 좋아하세요?"

"추잡해서 보는 재미가 있죠."

"다음은 그거죠? 날 왜 인간같이 썼냐, 돌이켜보니 화가 나는군. 이제 죽어라. 하는 거."

"사람 말 잘 안 듣는다는 소리 많이 듣지 않아요?"

"사람 아니잖아요."

"……."

"……계속 말씀하세요."

"……여기 사람들은 듣고 자라온 게 있어서 그런지, 드래곤을 말 그대로의 '신'처럼 취급하죠. 전지전능하고,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고. 긴 생을 영원으로 착각하며 그 영원이 전능함을 가져올 줄 알아요. 그런데 작가님의 드래곤은 그렇지 않죠. 사랑에 울기도 하고, 사기도 당하고, 어수룩함이 도리어 사람보다 더해요. 난 다음 생이 그랬으면 하거든요. 이제껏 살아온 인생과 다른 결의, 내가 상상하지 못한 경험을 하면서 살고 싶어서요. 그래서 작가님이 내 각본을 쓰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칭찬인지 욕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 말이다. 나는 여전히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이유를 떠올리지 못한다. 두어 번 뒷머리를 긁적이고, 서재를 돌아본다. 맘 같아서는 아무 극본이나 던져주고 이대로 살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반대로…… 그럼 빅토르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나 되는 거 아닌가요?"

"나도 그 생각을 안 한 건 아닌데, 사람이라는 게 참 극단적이라. 이 근처 극단들은 영지 사람들의 신앙심을 이용해서 드래곤으로 떼돈을 벌어보려고 하죠. 반대로, 그게 아니라면 드래곤을 괴멸해야 하는 악신 취급하며 다른 집단을 공략해요. 그렇다고 멀리까지 나가서 작가를 구해오기에는 나도 내 본분이 있으니까."

"자기를 보필하는 ……신관이요?"

 

청려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것도 한 5년이면 끝날 거지만. 5년 뒤, 다시 한번 국민들의 정신을 조물락거린다는 소리였다. 이 영지의 사람들이 눈에 띄게 두통을 호소한다거나, 유독 무언가를 잘 잊는다거나 하는 말이 없는 걸 보면 딱히 부작용은 없는 행위인가 보다.

 

"그러니까 작가님에게 주어진 기간은 5년. 그동안 내가 다음 생에 어디에서 무엇으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내가 작가님을 여기로 데려온 이유예요."

 

거절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설명이 끝났다. 명분도, 목적도 들었으니 남은 건 내 대답뿐이다. 여전히 선택지에 승낙은 없다. 드래곤의 입장에서 5년은 찰나라지만, 내 입장에서는 쉽게 놓을 수 없는 시간이다. 5년이면 그동안 쌓아온 극단의 명성이며 인맥 따위가 날아가고도 남을 기간이었다.

 

"근데 저도 제 일이라는 게 있잖아요?"

"왜 극단을 꾸리는데요?"

"당연히 돈이죠."

"5년 뒤, 결과물이 내 마음에 든다면 남부럽지 않을 부자가 되어있을 거예요."

"……마음에 안 들 수도 있잖아요. 전 최선을 다했는데."

"그렇다면 5년의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죠. 이러면 작가님이 손해 보는 건 없지 않나요?"

 

예상은 했지만 이 드래곤 과하게 부자다. 극본을 수정할 때보다 머리가 바삐 돈다. 논리를 운운했던 게 민망하지만, 꺼낼 수 있는 말은 모두 꺼내야 했다.

 

"저도 뭐 오로지 돈만 보고 극단을 꾸린 건 아니거든요? 평균 이상의 미인들이 내 대본을 연기해 주는 게 흔한 경험인 줄 아세요?"

"흐음, 나도 인간의 기준에서 빠지는 얼굴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

"원한다면 작가님의 취향대로 맞춰줄 수 있어요. 신장, 체형, 얼굴의 형태, 머리카락의 색과 길이, 혹은 ……그 이상까지도."

"아니, 그렇지만."

"내 말이 권유처럼 들려요?"

 

주변의 공기가 가라앉는 건 한순간이다. 청려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진다. 세로로 길게 찢어진 동공이 탐색하듯 나를 노려본다. 얇은 입술은 여전히 곡선을 그린 채였는데, 도리어 그 괴리감이 사람을 숨 막히게 한다. 말을 잘 받아주니 착각이라도 했는지, 상대가 언제든 날 죽일 수 있단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싫, 다는 건……. 더듬거리며 다음 말을 찾으려던 찰나, 청려가 작게 한숨 쉬었다.

 

"……라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는데. 작가님은 가진 게 목숨밖에 없어서."

"……제가 가진 게 왜 목숨밖에 없어요? 극단도 내 거고, 극단 천막도 내 거고, 얼마 없지만 은행에,"

"초대장. 만져도 아무렇지 않았죠."

 

엉뚱한 게 화두에 오른다. 맨들거리던 까만 종이와 비싼 테두리. 그 외에 별다른 특징은 없었는데. 이상한 걸 발라뒀나? 뜨끔거렸던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손바닥도, 손등도. 유심히 뜯어보았으나 여전히 내 손이다.

 

"보석이 비싸 보이긴 했죠."

"보석이 아니라 내 비늘이에요."

"와…… 이건 진짜 몰랐다."

"작가님이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정보를 얻어, 첫 접촉자의 마력을 갈취할 수 있는 주문을 걸어뒀어요. 본래라면 조건이고 뭐고 5년 뒤에 마력을 돌려주겠다는 말이 전부였을 거예요."

"아이고, …… 안타깝네요."

 

나는 아카데미 제적생이다. 마법 회로에 대한 이해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고, 교우 관계에도 문제가 없었으며, 날개 달린 것들은 유독 나를 좋아해서 그리폰을 기승수로 들이고 싶다는 꿈도 있었다. 그러나 치명적인 하나의 결점이 있었는데, 나는 마나가 없었다. 아니, 그냥 없다. 과거에도, 현재도, 아마 미래에도 없을 것이다. 마나를 신체에 가둬두고 활용할 수 있는 마나하트의 부재. 입학 당시에는 후천적인 가능성을 믿었으나 차라리 없는 게 나았던 희망이었다. 청려는 먼지조차 나오지 않는 빈 지갑을 턴 셈이다.

 

"그래도 덕분에 다른 제안이 떠올랐으니까."

"아직 남았어요?"

"작가님만 원한다면 마법사의 삶을 누리게 해줄 수 있어요."

 

……돈도, 미인도 귀를 솔깃하게 했으나 이번 제안은 심장이 뛴다. 그러나 청려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여 맞이한 게 지금의 상황이다. 태연함을 가장한다.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린 채 손사래쳤다.

 

"에이, 그거 안 돼요. 제가 별짓 다 해봤는데 사막에 물 붓는 것과 다름없어요. 마나하트가 없는 몸에는 마나가 생성되지도, 고이지도 않는다. 후천적인 형성은 불가능하며 마나의 활용 역시 마찬가지다. 이 소리를 얼마나 들었는데."

"그건 작가님이 여태까지 만나온 모든 이들이 인간이니까. 드래곤하트, 들어본 적 있지 않아요?"

"…… 준다고요?"

"전부는 당연히 무리지만, 일부를 떼어줄 수는 있죠. 내 심장 조직을 살짝 떼어서……."

 

청려의 손가락이 쇄골 위를 찌른다. 순수하게 혈액만을 공급하는 심장이 드래곤의 손가락 아래에서 쿵쿵거린다.

 

"여기, 이 안에 집어넣으면 마나하트 그 이상의 역할도 가능할 거예요. 4서클, 작가님이 활용하기에 따라 5서클까지도 노려볼 수 있고. 만약 내 권유를 받아들인다면 이건 계약 즉시 이행할게요. 나한테는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할게요, 5년. 여기서 청려 씨의 다음 생을 드릴게요."

"……정말?"

 

여태껏 권유해 온 존재의 표정이 아니다. 놀란 것처럼 동그랗게 뜬 눈이 꼭 사람 같아서 우습다. 신기하네. 청려가 중얼거렸다. 이건 다른 드래곤을 만나지 않는 이상, 청려만이 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나는 목 축일 물 한 방울 없이 사막에 던져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 앞에서 누군가 오아시스를 주겠다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정말로. 진짜로요. 한 번으로는 부족하여 몇 번이고 거듭 대답했다. 청려가 처음으로 만족스레 웃었다. 자꾸만 위로 배부른 도마뱀의 모습이 겹쳤다. 본 적도 없는데.

 

"맘에 드네요. 그럼 계약 이전에……."

 

청려가 눈을 아래로 깐다. 여즉 가슴팍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자신의 손가락을 본다. 뭉툭했던 손톱이 차츰 길어졌다. 조금 아플 거예요. 청려의 손톱이 옷감을 파고든다. 정확히는 옷감을 관통한다. 손톱에 살이 뚫리는 고통은 맨정신으로 느낄 게 아니다. 찢긴 살을 타고 흐른 피가 옷을 적신다. 살이 뚫리는 고통, 다음은 누군가 잘 벼른 칼로 혈관을 발라낸다. 잡초가 무성한 풀밭이 된 기분이다. 날짐승이 제 자리를 위해 땅을 고른다. 거슬리는 잡초를 뜯고 짓이긴다. 자리를 만들었다면 이어지는 건 정착이다. 무수한 개미 떼들이 심장에 이를 박는다. 심장 표면에 청려의 조직이 고루 자리를 잡는다. 얇은 점막을 찢었다가, 붙였다가, 결합했다가, 분절했다가,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고통에 숨이 막힌다. 금방이라도 나자빠질 몸을 친절히 지탱하는 건 청려의 남은 손이다. 어차피 쉬지도 못할 숨, 아껴두라는 건지 목덜미를 쥐었다.

 

"심장 조직이라고 한들, 내 본체의 심장인데…… 받는 게 쉬울 거란 생각은 안 했죠?"

 

실핏줄이 터진 건지, 시야가 내내 붉다. 끓는 치즈에 뇌를 빠트린 것 같다. 생각이 순탄하지 않고 자꾸 막힌다. 벌겋게 물든 풍경 속에서 청려가 웃는다. 이제 도망도 못 치겠네. 심장 속에서 도마뱀 한 마리가 기어다닌다. 어쩐지 '나한테는' 어려운 일이 아니라더라……. 정신이 점차 아득해졌다. 미친 파충류…….

 

 

 

 

 

양피지 위로 코피가 후드득 떨어진다. 손등으로 코 밑을 닦아내도 멈추지 않는다. 드래곤만 아니었어도 그 미친 파충류는 사기죄로 잡혀갔을 거다. 코를 비틀어쥐고 피가 멎을 때까지 기다린다. 머리만 똑 잘라 세 바퀴는 돌린 것처럼 어지럽다. 구역질이 울컥 치밀어올라 책상 옆 양동이를 끌어온다. 빠져나가지 못한 게 역류하는지 핏덩이가 툭 튀어나왔다. 계약 이후, 청려가 쓰는 모든 마력은 내게서 빠져나갔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계약 직후였다. 몸 구석구석으로 범람하는 마력을 제어하지 못하면 24시간 내내 술병이 난 것처럼 속이 울렁거린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정신 나간 파충류는 제어를 도와주겠다며 마력을 무자비하게 끌어다 썼고, 책상 옆에 양동이를 놓게 된 건 사흘 후였다.

 

"미친 파충류, 정신 나간 파충류. 5년만 지나 봐라……."

"지나면 어쩌려고요?"

"드래곤 슬레이어가, … … 되어, 주마……?"

"빌빌거릴 줄 알고 걱정되어서 왔더니, 말하는 걸 보면 멀쩡하네요. 앞으로 세 번 더 어지러울 거예요. 이것도 못 견디는 사람이 날 어떻게 잡으려나. 궁금하긴 하네요."

"잠, 아니, 잠깐만요. 파충, 청려님, 드래곤님, 제발……!"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청려가 사라진다. 투명화인지, 텔레포트인지 모르겠지만 위가 뒤집어지는 걸 보니 무언가를 한 건 분명했다. 기어코 사람을 책상 아래에서 기게 만든다. 양동이를 부여잡고 누런 위액만 게워 낸다. 계약 이주일 째, 사람이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가지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톡톡하게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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