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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탁이라는 건 양날의 검과도 같다. 한번 내린 이상 함부로 수정할 수 없지만, 그 파급력과 강력함은 인간이 함부로 거스를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들은 언제나 사제 앞에서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전할 말이 있다면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명확하게 말해야 하며, 단어 선택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쓸데없는 피를 보지 않는다. 잘못된 신탁으로 일이 꼬인다면, 그건 신실한 인간들이 아닌 입조심을 하지 못한 신의 탓이다.

 

……라고, 갓 태어난 신들은 똑같은 교육을 받지.

 

‘참으로 뻔한 이야기를 길게도 설명하는구나.’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애초에 제각각 권능을 가지고 태어나 웬만한 일은 처리할 수 있는 신으로서, 신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꼴 자체가 우스운데. 그 신탁마저도 제대로 되지 않아서 곤란을 겪는 것들이 있다니. 신이 그래도 되는 건가.

그러나 누가 그러던가. 이 세상 최고의 바보는, 남의 어리석은 행동이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리라 생각하는 이라고.

 

‘환장하겠구려.’

 

나는 제단 위에 푸른 비단옷을 입은 채 다소곳하게 앉아있는 여자를 확인하고 이마를 짚었다. 고급 향유로 몸을 닦아 은은한 향기가 풍기는 새 제물은 눈처럼 새한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 외에는 내가 말한 신탁과 맞는 부분이 거의 없었다.

 

‘아니, 불로 온갖 것을 익혀 먹고 무기도 만들어 전쟁할 지능이 있으면 사람 구분도 제대로 해야 하는 게 아닌지? 하여간 인간들이란 어떻게 되어 먹은 건지, 어떻게 한 번에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일이 없는 건가 싶군. 차라리 전에 데려온 그 제물이 더 비슷했어.’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던가? 새하얀 눈 같은 머리카락과 칼날같이 푸른 빛이 도는 회색 눈동자의 소녀를 바치라고. 그런데 이 여자는 눈동자 색이 다르잖아? 그것도 비슷하게 다른 게 아니라, 누가 봐도 착각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르다고!

애초에 같은 회색 눈동자라도 푸른 빛이 아니라 붉은빛이 돈다거나, 분명 푸른빛이 돌긴 하지만 칼날 같은 서늘한 푸른색이 아니라 나뭇잎 같은 푸른색이라거나 하는 식이라면 이렇게 열 받지도 않았을 거다. 내가 비록 인간 친화적이지 않은 신이라고 소문이 쫙 깔렸지만, 사소한 실수나 착각까지 화를 내고 저주를 퍼부을 정도로 광기에 찬 신은 아닌데. 왜 그냥 조용히 내 권능을 지키고 할 일 하면서 살려고 하는 선량한 지하세계 신을 이렇게 미치게 만드냔 말이다.

만약 지금 저 눈동자가 회색 계열이라고 말하는 작자가 있다면, 그건 아마 처음부터 색이름을 잘못 배웠거나 눈이 불편한 녀석이겠지. 대체 누가 이 여자를 제물로 바치자고 한 건지, 나중에 좀 알아봐야겠다.

 

화르륵.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화가 치밀어서 그런 걸까. 머리카락 끝이 붉게 타오르는 게 느껴진다.

아, 진정해야 하는데. 이놈의 머리카락. 아무리 저승 태생의 피할 수 없는 유전이라지만, 감정을 감출 필요가 있을 땐 진정하라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는 이상 감정적으로 굴 수는 없다. 나는 비록 ‘신탁 완벽하게 내리기’는 실패했어도 탈 없이 뒷수습할 정도의 능력은 있지 않나.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보통 제물이라는 건 자발적으로 기쁘게 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러니 어쩌다가 바쳐진 눈앞의 이 꽝 카드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 생각하며.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스렸는데.

 

“저어, 이데아 님.”

 

얇은 직물로 만들어 훤히 비치는 베일을 걷어 올린 ‘꽝 카드’는, 두려움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저는 이제 뭘 하면 될까요?”

 

아. 이런. 아무래도 이번 꽝은, 억울하게 잡혀 와서 바쳐진 게 아닌 모양이다.

저 기대에 찬 눈. 공포가 아닌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 은근슬쩍 몸을 비비 꼬는 꼴을 보라. 분명 앞서 살려 보낸 제물 중 하나가 쓸데없는 소릴 해서, 헛된 기대를 품고 제물이 된 게 분명하다.

 

‘그렇게 된 거였군.’

 

이제야 왜 이렇게 엉뚱한 제물이 왔는지 이해가 간다. 신의 신부가 되고 싶다고, 막무가내로 제단 위로 오른 거였나. 보아하니 이런 짓을 해도 말릴 사람이 없는 걸 봐선 권세가 어느 정도 있는 집안의 딸인 거 같은데, 그럼 체통을 지킬 줄 알아야지. 인간 중 적당히 좋은 신랑감을 찾으면 될 것을, 나를 속이려 들다니.

……아니다. 어쩌면 인간 중에서도 이런 애욕과 관심에 환장한 것을 받아 줄 이는 없어서 굳이 업화(業火)의 권능을 가진 내게 온 건가? 그렇다면 더 우습군.

당장 한마디만 하면 그대로 품으로 뛰어들 것만 같은 제물의 태세에, 나는 안전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뒤로 조금 물러났다. 내가 비록 불길하다고 여겨지는 신이라도, 방탕한 신은 아니란 말이지. 아무 여자나 덥석 이 품에 안기는 건 싫은 걸 어쩌겠나.

머리끝의 붉은 빛이 거의 사라진 것을 확인한 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꽝 카드’에게 명령했다.

 

“아니. 딱히 아무것도 할 필요는 없다만. 그냥 돌아가면 되는데.”

“예?”

 

내가 이렇게 나올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 건지, 제물은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깜빡인다.

아. 저 눈동자가 아닌데. 내가 찾는 그 애는, 저런 따뜻한 색의 눈동자가 아니다.

의도적이고 명백한 괴리에 다시 머리가 뜨끈해진다. 나는 불타오르면 안 된다는 다짐을 몇 번이고 되뇌며, 최대한 좋은 말로 불경한 것을 달래야 했다.

 

“아니. 애초에 그쪽은 내가 찾는 제물의 조건이랑 안 맞거든? 그러니 그냥 돌아가면 돼. 가만히 있어 봐, 집으로 보내 줄 테니.”

“잠깐만요! 정말 절 돌려보낼 건가요? 기껏 온 제물을요?!”

“그렇다만?”

 

애초에 아무 제물이나 필요했으면 신탁 같은 건 내리지 않았겠지. 인간들은 뭔가 잘못되었다 싶으면 알아서 제물을 바치고, 정 급하면 신관을 통해 ‘뭐든 제물 좀 바치게 해봐’라고 하면 되는데. 굳이 신탁까지 내려 찾는 인물이 있다면 ‘그 외엔 필요 없다’라고 알아들어야지. 뭐가 이렇게 멍청해?

하지만 멍청한 이는 하나만 하지를 않는다고, 고집 센 제물은 내 옷자락을 잡고 늘어졌다.

 

“그러지 말고, 신부로 삼아주세요. 네? 제 어디가 부족해서 그러세요?”

“어디가 부족하냐고?”

 

그거라면 하루, 아니 일주일 내내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설명을 요약하자면 답은 하나뿐.

너는 내가 찾는 소녀가 아니다.

단지 그것뿐이다.

……하지만 굳이 조건이 맞지 않음을 알면서도 제단에 오른 멍청이에겐, 번거롭게도 알기 쉬운 말로 알려줘야겠지. 나는 머리카락이 다시 붉게 타오르는 걸 느끼고, 최대한 이성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조건에도 맞지 않는 제물을, 내가 왜 받아줘야 하는지 모르겠다만……. 너보다 먼저 바쳐진 제물 중에서 조건에 부합하는데도 돌려보내진 것들도 있는데.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건가?”

“그런 조건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저, 좋은 신부가 되어 드릴게요!”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듣는 제물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매달린다.

아마 내 동정심을 자극하려는 모양인데, 어림도 없지. 울면 다 해결되리라 생각하는 건가? 인간들 사이에선 그런 게 먹혔을지 몰라도 신에겐 어림도 없다. 그런 걸로 마음이 약해질 놈은, 적어도 명부의 신 중에선 없다.

 

“정 그렇게 돌아가기 싫으면.”

 

나는 이미 할 만큼 했다고 본다. 그러니, 내게 바쳐진 제물을 어떻게 처리하든 내 마음이겠지.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나는 신탁을 우습게 본 어리석은 인간에게, 그에 걸맞은 최후를 안겨주었다.

 

“명계로 데려가 주지.”

 

제단 뒤쪽 땅을 향해 손짓하자, 땅이 갈라지며 수많은 손이 뻗어져 나온다.

나의 부름에 튀어나온 망자들은 업화의 불에 몸이 타오르는 분노를 제삼자에게 쏟아내고 싶은지, 고집을 피우는 제물을 냉큼 낚아채 아래로 끌어내렸다.

 

“꺄악!”

 

명부로 향하는 끝이 없는 끝이 없는 구덩이 아래로. 듣기 싫은 비명이 길게 울려 퍼진다.

하지만 정작 그 불쾌한 외침이 내 머리를 식혀주고 있는 게 우스운 일이지.

원래의 푸른 빛을 되찾은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대충 정리한 나는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제단 위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래, 신탁 같은 거에 의지하려고 한 내가 멍청이지.’

 

그러나 내게도 변명거리는 있다. 마음 같아선 직접 그 아이를 찾아서 온 세계를 돌아다니고 싶지만, 명부에 묶여있는 몸이라 지상에 오래 머물 수 없는데 무슨 수로 그러겠나. 그나마 내 신전에서는 오래 머물 수는 있지만, 그 말은 곧 상대가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만 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쩔 수 없나.”

 

이렇게 된 이상, 조언해 준 쪽에게 따져야지.

이대로는 또 귀찮은 제물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급히 명부로 돌아갔다.

 

 

✻ ✻ ✻

 

 

“이런, 이데아 씨. 오랜만입니다. 그간 잘 지내셨나요?”

“……지금 내 꼴을 보고도 굳이 묻는 건, 비꼬는 겁니까. 아줄 씨?”

“설마요!”

 

나를 반기는 해류의 신은 자신의 애착 인간을 옆구리에 낀 채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저 얄미운 낯짝하고는. 하여간 옛날부터 얄미운 걸로는 수많은 신 중에서 가히 으뜸이다. 분명 과시할 생각으로 저러는 게 아니고, 단순히 팔불출이라 늘 끼고 있고 싶어 저러는 건 잘 알지만……. 몇 년째 사람 찾기를 실패한 내 앞에서까지 저러고 있는 건 역시 열받는단 말이다.

 

“혼자 오신 걸 보니, 신탁을 내린 게 영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군요.”

“아, 그 말대로라오. 분명 최대한 자세히 말해줬는데, 왜 그렇게 못 알아먹는지.”

“글쎄요. 제가 생각하기엔, ‘눈처럼 흰 머리에 칼날같이 푸른 빛이 도는 회색 눈동자의 소녀’는 애매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하? 그럼 뭘 더 얼마나 구체적으로 말해야 하는 건지?”

“제 경우에는 ‘석탄처럼 새까만 땋은 머리에 자수정 색 눈동자,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키가 5척 반 정도의 여성을 데려와라’라고 했습니다.”

 

그 설명을 들은 나는 상대 옆에 붙어있는 여자를 힐끔 보았다가, 그대로 할 말을 잃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의 애착 인간은 아줄의 설명과 딱 맞아떨어졌다.

그래. 저 정도로 설명했다면 신탁을 내리고 나서 한 달 만에 눈여겨 둔 인간을 품에 안은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렇다면 신탁을 내려 보는 게 어떻냐는 조언을 하면서 어떤 식으로 말해야 좋을지도 알려 줬어야지! 이쪽처럼 사제랑 소통할 일도 드문 신은 인간의 인지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단 말이다!

 

“애초에, 소녀라고 말한 게 실수였던 건 아닙니까? 당신이 그 소녀와 만난 건 꽤 오래전이지 않습니까? 인간은 빨리 자랍니다. 어쩌면 소녀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나이를 먹었을 수도 있지요.”

“내가 아무리 망자나 보고 있는 신이라 해도, 인간이 자라는 속도를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소만.”

 

하지만 대답이 무색하게도, 나는 인간이 흔히 말하는 ‘젊다’나 ‘어리다’의 기준을 잘 모르기도 했다. 어차피 명부에선 갓난아이부터 노인까지 다 축 늘어져 생기가 없는데, 연령대를 나누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래도, 아마 내가 찾는 이는 그리 늙지는 않았을 거다. 시간 감각이 망가진 게 아니라면, 그 아이를 본 건 5년에서 6년 전 정도. 그때 아주 작았으니, 지금도 자연사까진 시간이 꽤 남은 목숨일 테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아직 명부에 오지 않은 걸 보면 어딘가에 살아있다는 뜻일 테니, 느긋하게 기다리시지요. 어차피 저희는 죽지도 늙지도 않는데 뭐가 걱정입니까?”

“……그 말, 기만적으로 들리는 건 알고 있소이까?”

“이런,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적어도 웃는 낯짝이라도 감추고 말할 것이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짜증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난 걸까. 아줄의 옆에서 분위기를 망치지 않게 가만히 있던 인간이 슬쩍 몸을 일으켰다.

 

“저, 자리를 비켜드릴까요?”

“아닙니다, 아이렌. 그냥 여기 있으세요.”

“하지만…….”

 

아줄이 괜찮다고 했음여도, 그의 애착 인간은 계속 내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신의 총애를 받는 인간이라고 해도, 다른 신의 눈 밖에 나고 싶진 않은 거겠지. 역시 아줄이 눈여겨본 인간답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여자다. 자신을 가호하는 신만 믿고 설치다가 다른 신에게 천벌 받아 죽는 멍청한 인간이 한가득한 세상인데. 이 얼마나 똑똑한 처세인가.

아. 내가 점찍어 둔 그 아이도 분명 이렇게 현명할 텐데. 지금은 대체 어디에 있는지.

쓸쓸함의 힘은 너무나도 강렬했기에, 내면에서 요동치던 얄미운 감정도 금세 사그라든다.

덕분에 머리의 열이 식은 나는 여자를 향해 손을 저었다.

 

“됐소이다. 졸자는 이만 가 볼 테니, 그냥 앉으시기를.”

 

내 반응이 의외였던 걸까. 아니면 오랜만에 얼굴을 비춰놓고 벌써 가겠다는 게 이상해 보인 걸까. 아줄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어라, 벌써 가십니까?”

“뭐, 더 할 말도 없고. 따질 것도 다 따졌으니. 가서 뒷수습이나 해야지 않겠소이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신탁을 수정할 수는 없어도 다른 신탁으로 수습할 수는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신탁도 어딘가 잘못되어 귀찮아지면 어쩌지. 신탁을 다른 신탁으로 덮어쓰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인데.

두 번째 신탁은 내리지도 않았는데 벌써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진다. 또 어두워지는 내 표정을 본 아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까진 그렇게 추한 짓을 하지도 않으셨잖습니까? 신 중에선 못 볼 꼴 다 보고도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다니는 이들도 있으니, 지금은 그 아이를 찾는 것에만 집중하시지요.”

“……음, 고맙구려.”

 

역시 경험자라 공감이 가서 그런 건가. 모처럼 진심이 담긴 그의 조언에, 나는 그저 감사 인사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좀 얄궂긴 해도, 저 녀석은 꽤 괜찮은 신이란 말이지. 처음엔 명부와 이어진 심해에 거주하는 신이라 만나기 편하다는 이유로 안면을 튼 거였는데. 머리도 잘 돌아가고 정도를 지키는 게 좋단 말이지.

 

“다음에는 꼭 이데아 씨의 소중한 인간도 소개해 주십시오.”

“아아, 꼭 그러지.”

 

만약 그날이 정말 온다면, 저쪽이 과시하던 것의 딱 40배의 강도와 빈도로 자랑해 줄 테다. 어차피 그렇게 해도, 이미 애착 인간이 있는 아줄 씨는 그리 속 쓰려 하지도 않을 거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오긴 할까.

예지의 권능이 없는 나는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 ✻ ✻

 

 

그 아이와 처음 만난 건 몇 년 전, 망자의 날 밤 나를 위해 지어진 신전에서였다.

죽은 이를 기리는 망자의 날. 명부의 신 모두가 공평하게 기려지는 그 기념일에, 생전에 지은 죄를 업화로 불태우는 일을 담당하는 나는 매년 많은 제물과 기도를 받는다.

누군가는 망자가 고통 없이 업화를 견뎌내길 바라고, 누군가는 제 원수가 영원히 명부에서 불타길 바라는. 같은 장소에서 함께 기도 하면서도 각자 다른 것을 바라는 조용한 혼돈의 현장. 나는 사제들이 입는 옷을 입고 내게 기도하러 온 사람들을 구경했다.

‘올해는 작년보다 사람이 많구나.’ ‘아마 올해 기근으로 죽은 이가 많기 때문이겠지.’ ‘풍작의 신의 신전은 살벌한 분위기겠군’ 그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며 인간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묘하게 허무해져, 나는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 어차피 저기 모인 인간들도 다 언젠가는 죽어 명부로 내려올 텐데. 마치 죽음은 자신과는 거리가 먼 사건이라는 듯 남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니.

 

명부에 사는 신은 나 뿐만이 아니다. 나의 아버지는 망자들을 심판하고, 어머니는 심판받은 영혼들을 관리하는 하고 있지. 남동생은 영혼을 명부로 데려오는 일을 담당하고, 나의 사촌들은 죄를 지어 명부에 갇혀있는 것들을 벌주거나 지하에 사는 괴물들을 돌본다.

만약 자신의 미래를 걱정한다면, 업화로 죄와 기억을 불태우는 내가 아니라 다른 신들에게 가야 할 텐데. 저들은 어째서 이미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가. 저들 중 망자가 아닌 자신을 위해, ‘미래의 제가 겪을 고통을 덜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이는 거의 없을 텐데.

 

“저기, 여기서 뭘 하고 계세요?”

 

사제복을 벗은 채 조용한 신전의 뒤뜰에서 얼마나 상념에 잠겨있었던가.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나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가, 자그마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내 키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어린 소녀는 날 알아보지 못한 건지, 회청색 눈동자에는 경외감 대신 호기심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여, 여긴 어떻게?”

“길을 잃었어요.”

“허, 허어.”

 

소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내 신전이 좀 넓고 길도 복잡했으니까. 그렇다 해도, 설마 여기서 인간이랑 마주칠 줄은 몰랐다. 만약 조금만 더 머리가 큰 아이였다면, 신전 여기저기에 있는 조각상이나 내 외모를 설명한 설화를 통해 눈앞에 있는 나의 정체를 눈치챘을 거 아닌가. 푸른색으로 불타는 이 머리카락은 너무나도 눈에 띄어서, 한 번이라도 설명을 듣는다면 못 알아보는 게 힘들 정도였으니까.

 

“당신은 꽃이 없네요?”

 

내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소녀는 제가 들고 있는 꽃다발을 흔들었다. 순백의 백합 세 개를 리본으로 묶어 둔 그 소박한 꽃다발은, 분명 신전 근처에서 파는 행사용 제물이었다. 그래. 망자의 날 밤에 내게 바치는 꽃말이다.

지금 당장 내 손에만 없을 뿐. 네가 들고 있는 꽃도 궁극적으로는 나의 것인데.

그러나 이걸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겠지. 그러면 내가 누군지 밝히는 꼴이 되니까.

결국 나는 대충 상황을 얼버무렸다.

 

“뭐어, 어쩌다 보니.”

“이거, 나눠줄게요.”

“에, 그래도 되는 건가?”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에게 하나 더 사달라고 하면 돼요.”

 

빙긋 웃으며 백합을 떠넘기듯 양보하는 손은 작고 따뜻했다.

아, 인간이란 이렇게 부드럽고 뜨거운 존재인가. 인간과 접촉한 건 처음이었던 나는, 꽃과 구별되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나를 따르는 사제들도 죽음을 두려워해 내 몸에 닿고 싶어 하지 않는데. 순수에서 오는 무지란 얼마나 위험한가. 하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경고하거나 뒤로 물러나긴커녕, 오히려 그 작은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이대로 스쳐 지나가게 두기엔, 너무나도 인상적인 온기였기에.

 

“……예배실로 데려가 줄까?”

 

좀 더 이 아이와 있고 싶다. 하지만, 망자의 날 누군가가 실종된다면 명부의 이미지가 이상해지지 않겠나.

결국 나는 그때 가장 적절한 호의가 무엇인지 떠올리고, 길 잃은 어린 것을 직접 부모의 곁으로 데려다주기로 했다.

 

“네, 감사합니다.”

 

그 인사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뭐, 그렇게 되어서. 나는 다시 사제복을 챙겨입고 소녀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까지 데려다준 후, 사제들에게 부모를 찾아주게 했다. 이후 내 신전에서 사라진 이가 있었다는 소리는 못 들었으니 아마 부모의 품으로 잘 돌아간 것 같지만. 문제는 내가 그 소녀와의 만남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 부드러운 손. 천진난만한 미소. 자연스러운 호의까지.

 

처음에는 그저 인간과 많이 접해보지 못해 인상에 남았던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소녀에 대한 갈망은 명확해져, 나는 결국 그 아이를 내 곁으로 데려와야겠다 확신했다.

문제는, 그 날 이후 소녀는 내 신전에 찾아오지 않았다는 거다.

다음 해 망자의 날은 물론, 아무 행사 없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날에도 소녀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갑자기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내 신전에도 다른 명부 신들의 신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가. 결국 참을 수 없어져 신탁을 내린 건데. 설마 이 방법도 잘 통하지 않을 줄을 내가 알았겠냐 말이다.

 

‘그래서, 뭐라고 정정하지?’

 

일단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조건에도 맞지 않는데 제물을 자처하는 자가 있다면 영원히 업화 속에서 고통받게 할 거라고 경고해 둬야지. 재촉하는 게 아니니 꼭 조건에 맞는 제물만 바칠 것도 강조하면 좋을까?

아. 안 되는 것만 잔뜩 말하려니 말이 자꾸 길어진다. 아줄처럼 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어도, 나는 그 아이의 외모 외엔 아는 게 없고 그 모습마저도 벌써 몇 년 전 모습이라 지금은 어찌 변했을지 모르는데. 정말 답이 없는 상황이지 않나.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

 

하지만 나도 그렇게 계속 기억날 줄은 몰랐단 말이다. 멍청하게도 말이지.

후우. 답답함에 한숨만 쉬고 있던 나는 사제를 부르려다가, 가까이 다가오는 발소리에 숨소리를 죽였다.

 

‘뭐지?’

 

혹시 내가 온 걸 눈치채고 사제가 마중을 나온 건가.

그리 생각하고 입구 쪽으로 돌아선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저벅. 저벅. 가벼운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이윽고 문 앞에 선 인물을 발견한 나는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

 

나보다 한 뼘 정도 작은 여성은 날 발견하고 멈춰 섰다. 로브 차림에 후드까지 뒤집어쓰고 나타난 방문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더니, 이내 조심스레 얼굴을 드러냈다.

 

“설마.”

 

후드 아래에 감춰져 있던 얼굴은, 분명 추억 속 모습과 똑같았다.

칼날을 떠올리게 하는 회청색 눈동자. 눈처럼 흰 머리카락. 다른 점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성장했다는 것과 머리카락 일부가 회녹색으로 물들어 있는 것뿐.

반가움과 혼란 사이. 나는 어미를 쫓아가는 어린 짐승처럼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대체 어디에 있었던 거지?”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소녀는 멋쩍게 웃으며 손을 뻗었다,

오랜만에 잡아본 손은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죄송해요. 부모님께서, 밖에 못 나가게 하시더라고요.”

 

그 한마디에 나는 대강 상황을 눈치채고 탄식했다.

과연. 집에 돌아간 이후 내 이야기를 한 거군. 어른들은 내가 누구인지 아주 잘 알 테니, 혹시나 딸이 명부로 끌려갈까 봐 아예 가둬서 키운 거야. 그러니 신탁을 퍼트려도 소용이 없었던 것이고. 머리카락도 신탁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물들인 걸지도 모르겠다.

 

‘잠깐,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에 온 거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고개를 들자, 소녀가 답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저를 찾고 계신 거 같아서, 몰래 나왔어요.”

“아…….”

 

다행이다. 본인의 의지로 내 곁으로 와주어서, 굳이 숨겨두고 보호하려는 이들을 떨쳐내고 날 선택해 주어서 너무나 다행이다.

머리가 아찔해질 정도로 기뻐진 나는, 무릎을 굽혀 상대와 눈을 맞추었다. 그 아이는 여전히 내가 두렵지 않은지, 시선이 마주치는데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이름.”

 

이번에는 꼭 물어봐야 한다. 다시는 놓치지 않을 거긴 하지만, 그거랑 상관없이 이름은 알아야 한다.

더는 실수하고 싶지 않은 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필사적으로 진정시켜야 했다.

 

“이름이 뭐지?”

 

만약 나를 거부하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지금 입을 다물면, 손을 빼고 달아나면, 나는 지독한 그리움에 앓아눕겠지만 이 아이를 놓아줄 것이다. 슬퍼하며 내 곁에 머무는 것보다는,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게 되더라도 인간의 삶을 살게 내버려 두고 싶었으니까.

그러나 소녀는 망설이지도 않고 제 이름을 알려주었다.

 

“포플러. 포플러 애틀랜틱이라고 해요.”

 

포플러. 그래, 그런 이름이구나.

그토록 알고 싶었던 이름을 소리 내어서 되뇌자 마음속에서 열기가 피어오른다. 낯선 두근거림을 주체할 수 없어 머리카락까지 붉게 물든 나는, 거창함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고백을 전했다.

 

“나랑 같이 갈래?”

 

포플러의 대답은 간결했다.

하지만, 나는 확실하게 들었다. 그 아이의 마음을. 나를 찾아온 이유를.

 

“물론이죠. 그러려고 온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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