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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 신사분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

 

잘 다듬어지지 않은 산길을 달리는 마차 안. 마부의 질문에 고개를 든 남자는 안 그래도 깊게 눌러 쓴 모자를 다시 한번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 모자는 챙이 그리 넓지도 않았음에도, 신기하게도 남자의 얼굴은 코 윗부분이 그림자로 가려져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웃고 있는 건지 무표정인 건지 잘 구별되지 않는 하관의 주인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완곡하게 불편함을 드러냈다.

 

“제 나이는 왜 궁금하실까요?”

“아니, 아무리 여기가 이 근방에선 제일 큰 마을이라고 해도 말이지. 이런 시골에 잘 배운 것 같은 젊은 친구가 온 건 오랜만이거든. 그래서 물었다네. 늙은이의 오지랖일 뿐이니, 대답하기 싫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되네.”

 

‘잘 배운 것 같은 젊은 친구’ 마부가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초면의 손님을 그리 판단한 것은, 남자의 옷차림이나 짐 때문이었다.

지금 이 마차가 향하는 곳은 농업과 축산업이 발달했을 뿐, 도시에 비하면 누릴 게 적은 시골 마을이었는데. 이 손님은 질 좋은 양복을 껴입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짐이 든 가방도 수도에서 유행하는 명품 제품이었으니, 목적지와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 젊은 상류층의 신사가 홀로 시골에 찾아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남자 또한 이 부자연스러움에 의문을 품는 게 당연하다 여긴 건지, 이내 방어적인 태도를 거두고 원하던 답을 알려주었다.

 

“일자리 때문에 오게 된 겁니다. 이틀 뒤부터 국립 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게 되어서요.”

“응? 도서관이라면, 마을 서쪽 언덕 위에 있는 거기 말인가?”

“예. 사서를 구한다고 해서, 좀 멀긴 하지만 지원해서 오게 되었습니다.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했거든요.”

 

그의 말대로, 나라에서 지은 도서관은 갑자기 파산해서 돈을 주지 못하거나 이유 없이 직원을 해고할 일은 없으니 ‘안정적인’ 직장은 맞다. 게다가 그 마을의 도서관은 근처의 마을 사람들까지 다 함께 이용하라고 접근성까지 좋은 곳에 지어두었으니, 이용자가 없다고 폐쇄될 일도 없었지.

마부는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쉽게 긍정하지 못하고 표정을 구길 뿐이었다.

잠시 후. 마을 입구가 보일 즈음이 되자, 마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젊은이, 조심하게. 그 도서관은 급료도 많이 주는데 왜 사서가 안 구해지는지 아는가? 유령이 나와서 그렇다네.”

 

진지한 태도로 입을 여는 마부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허무맹랑해 보이는 내용과 달리 무거운 두려움이 담긴 충고에 고개를 살짝 기울인 손님은 흥미롭다는 듯 웃어 보였다.

 

“유령 말입니까?”

“그래! 몇 년 전부터,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는 여자 유형이 매일 나타난다네! 그래서 기존에 일하던 사서가 도망간 이후, 계속해서 새로운 사서가 왔지만 다들 오래 버티지 못하고 도망쳤지. 덕분에 건물 자체가 그대로 방치되어 버려서, 이젠 마을 사람들도 들리지 않게 되었어.”

 

어딘가 흔히 들어본 괴담 같은 내용이다. 솔직히 신빙성은 없지만, 완전히 무시하기에는 또 거슬리는 점이 있었다.

마부의 말을 곱씹은 손님, 디어 크로울리는 사서 자리를 구했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제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히 이 일자리를 알선해준 이도 ‘이 도서관 사서 자리는 수상할 정도로 사람들이 빨리 그만둔다’라고 했다. 이유는 자신도 모르겠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게 정말로 유령 때문일 수도 있는 거 아니겠나.

혼자서 고개를 몇 번 끄덕인 그는 이내 싱거운 대답을 토해냈다.

 

“그렇군요.”

“그렇군요? 그게 다인가? 아마 자네가 7번째 신입일 거네. 진짜 괜찮겠나?”

“예. 유령이라니, 전 그런 거 안 믿습니다.”

 

자신만만한 태도에선 조금의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대화가 마무리되자, 마침 마차도 목적지 앞에 멈춰 섰다. 마을 입구에 내린 크로울리는 걱정 가득한 마부에게 돈을 두둑하게 주며 인사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살펴 가시지요.”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짓고 있다.

건물이 많지 않은 덕에 언덕 위 덩그러니 놓인 도서관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낡은 도서관 앞. 잠깐 멈춰 선 크로울리는 허리를 한 번 편 후 건물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으스스하긴 하군요.’

 

낮에 마을 이장이 최소한의 관리만 한다 했으니 이리 초라하고 오싹한 모양새가 된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허름한 외관과 유령은 상관없는 이야기인 법. 새로 지은 건물에도 나오는 게 유령이니 굳이 겁먹을 이유가 있겠는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그는 그대로 도서관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윽!”

 

그때, 반짝반짝하게 닦은 구두가 계단의 턱에 걸려 벗겨진다.

너무 크지 않게 딱 맞춘 신발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발을 빠져나오다니. 조금 기묘하다. 게다가 발목도 시큰거리는 거 같은 게, 영 불쾌하지 않은가.

 

“이런.”

 

불길한 신호에 어깨를 으쓱인 그는 태연하게 신발을 다시 신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누군가는 이 정도 징조만으로도 도망칠지도 몰랐지만, 그는 그렇게 겁쟁이가 아니었다.

 

 

✻ ✻ ✻

 

 

‘이거야 원, 난장판이 따로 없군.’

 

해가 지고 나서도 한참 도서관 안을 살펴본 크로울리는 텅 빈 복도에서 한숨 쉬었다.

낮 동안 이장이 관리해 준 덕분인지 건물 안은 생각보다 깨끗했다. 먼지 쌓인 곳도 있긴 했어도 거미가 잔뜩 살고 있거나 쥐가 들끓지는 않았고, 가구들도 조금만 손보면 다 쓸 수 있어 보였지. 사서가 지내는 도서관 맨 위층 방도 언제 올지 모르는 귀한 손님을 위해 정리해 놓은 덕분에, 짐만 풀면 당장 머물 수 있는 상태였다.

문제는, ‘도서관’으로서 관리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거랄까.

도서가 종류대로 정리되지 않고 마구잡이로 섞여 있는 건 기본이며, 낡아서 보수하지 않으면 읽을 수도 없는 책도 있나 하면 책벌레의 습격을 받아 명을 달리한 서적도 적지 않다. 게다가 새로운 책이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전반적으로 다양성이 떨어지는 것도 문제였지.

 

“그래도 책들 상태는 나쁘지 않아 다행인가. 지금부터 잘 관리해 준다면, 별문제는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일이 많고 번거롭다 해서 도망칠 생각도 없긴 했지만, 이왕이면 편하게 가고 싶은 게 사람 마음 아니던가. 크로울리는 제 예상보다는 나쁘지 않은 상황에 안도하며 개인실로 향했다.

그때.

 

“꺄아아악!”

 

귀를 찢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건물 내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도무지 환청이라 생각할 수 없는 강렬한 소리에 멈칫한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복도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체 모를 비명은 메아리가 되어 은은하게 울리고 있었다.

 

‘방금 그건, 혹시.’

 

이것이 소문의 유령인가. 헛소문이라 생각했는데, 정말 나타날 줄이야.

이 건물의 유일한 불빛인 손안의 가스등을 고쳐 든 그는 소리의 원인을 찾아 발걸음을 돌렸다.

창고, 고서 보관실, 일반열람실에 휴게실까지.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그가 서류 보관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무언가가 머리 위에서 불쑥 나타났다.

 

“으헉!”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크로울리는 그대로 멈춰 섰다.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불청객은, 잘 익은 포도와 비슷한 색의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름하지만 볼품없지는 않은 드레스. 길게 풀어 헤친 잿빛 섞인 연보라색 머리. 그리고 창백한 피부색까지.

 

“뭡니까, 당신?”

 

눈앞의 여성은 누가 보아도 ‘유령’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였지만, 크로울리의 반응은 침착했다.

그 의연함이 놀라운지 소리 없이 감탄한 여성은 의자에 앉는 듯한 자세로 턱을 괴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데. 너는 뭔데 여기서 어슬렁거리는 거지?”

“제 이름은 디어 크로울리. 이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사서? 네가?”

 

그 말이 믿기지 않는 걸까. 여성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크로울리를 살핀다.

노골적인 불신에 ‘크흠!’하고 헛기침하는 걸로 불편함을 표한 그는 가스등을 들이밀며 다시 추궁했다.

 

“그래서, 방금 비명을 지른 건 그쪽입니까?”

“그렇다면?”

“놀라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이전에 있던 사서들도 쫓아낸 겁니까? 성격이 나쁘군요!”

 

초면에 성격이 어쩌고저쩌고 논하다니. 누가 보아도 신사적이지 못한 행동이지 않나.

여성은 다소 무례한 크로울리의 태도에 눈썹을 까딱이더니 이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날 보고 혼내는 인간은 처음 보네. 대부분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기절하던데.”

“저도 곡소리 대신 비명을 지르는 밴시는 처음 봤습니다.”

 

크로울리의 대꾸에 여성이 입을 닫았다.

시큰둥한 그의 반응과 달리 말에는 무시할 수 없는 굵은 뼈가 들어있다. 여성은 제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겨있다가, 불쑥 얼굴을 가까이하였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척 보면 알죠.”

 

아니, 보통은 보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 오컬트에 조예가 없는 이상 유령과 밴시를 구분할 수 있을 리 없지 않나.

더욱 눈앞의 남자가 흥미로워진 초자연적 존재는 크로울리를 면밀하게 살폈다.

모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눈을 지그시, 마치 날카로운 것으로 후벼 파듯이 뚫어지게 보던 밴시는 ‘아하’하고 짧게 감탄했다.

 

“너, 그냥 인간이 아니구나.”

 

이번에는 제 쪽이 파헤쳐지고 있음에도 크로울리는 여유로울 뿐이었다.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는 그의 주변을 빙빙 도는 밴시는 주변에 감도는 마력을 듬뿍 느꼈다.

지금 이 시대에 마법사는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 남자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는 걸 단번에 알 수 있다. 요즘 마법사들은 제대로 된 주술도 몇 쓰지 못하고 물약이나 팔아 돈을 벌기 마련이었는데, 이 녀석은 제 얼굴을 교묘하게 감추는 마법을 평소에도 아무렇지 않게 쓰고 다니지 않나.

오랜 시간 살아온 밴시지만 이 정도의 마법사는 처음 본다. 여성은 매끈한 크로울리의 피부를 손끝으로 쓸며 장난스레 웃었다.

 

“몇 살이야? 낯짝은 젊어 보이지만 나이가 많지? 어떻게 한 거야? 마법?”

“제가 대답할 의무는 없어 보이는데요. 저는 그저 여기서 조용히 살다 가고 싶으니, 협조 좀 해주시지요.”

“안 돼. 여긴 내 은신처야.”

 

흥미를 느끼는 것과 별개로, 제 공간에 타인이 들어오는 건 싫다는 것인가. 밴시는 단호하게 크로울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조금의 고민도 없이 거절당하자 기가 찬 크로울리는 자세를 삐딱하게 서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이름이 뭡니까.”

“이름?”

“예. 당신처럼 종족 본능을 거스르고 행동하는 것들은 꼭 이름을 지어서 다니더군요.”

 

이것 봐라. 새파랗게 젊은 뜨내기 마법사 따위는 절대 알 수 없는 정보를 알지 않나.

허공을 유영하던 몸을 크로울리 앞에 멈춘 밴시는 스스로 지은 이름을 밝혔다.

 

“이셀라.”

“좋습니다, 이셀라. 당신은 왜 굳이 여기 머무르려고 하는 겁니까?”

“책이 좋아서. 인간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녀석들이 쓴 책은 좋거든.”

 

놀라운 논리다. 마치 농사짓는 건 귀찮고 싫지만, 빵 없이는 못 산다는 인간들 같지 않나.

하긴, 생각해 보면 이 밴시에게 자신들 인간은 풀과 나무, 산짐승들과 특별히 다를 건 없는 존재겠지. 딱히 대단한 인간찬가 정신을 가진 건 아닌 크로울리는 이셀라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도 썩 인간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고, 인류가 자연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마법적 존재가 인간에게 특별히 증오를 품지 않은 게 다행으로 보였으니까.

 

그럼, 이 책을 좋아하는 밴시는 어떻게 달래면 좋을까.

 

상대가 뭘 필요로 여기는지 알게 된 이상 그걸 협상의 카드로 쓰는 게 맞겠지. 가스등이 서너 번 깜빡일 동안 침묵한 채 머리만 굴리던 그는, 이내 괜찮은 설득의 말이 떠오른 건지 다시 말을 이었다.

 

“서고를 보니 책 상태가 말이 아니더군요. 관리해 주지 않고 그냥 읽기만 하니 저렇게 된 거겠죠.”

“그래서?”

“이렇게 합시다. 내가 도서관과 책들을 관리해 줄 테니, 당신은 소리 지르지 말고 얌전히 지내십시오. 이대로 방치 해두면 있는 책도 삭아버리고, 새 책을 들여놓지도 못하게 됩니다. 절 여기 두는 게 당신에게도 이득인 일이니, 공존을 선택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건 확실히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이셀라는 그럴듯한 논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대부분의 소장 도서는 다 읽어서 따분한 참이었는데, 크로울리의 말대로라면 기존 책들도 보존하면서 새로운 책으로 제 흥미도 채울 수 있지 않나.

소리를 못 지르는 건 크게 곤란하지 않다. 밴시란 원래라면 누군가의 죽음에 눈물 흘리는 요정이지, 비명을 지르는 유령은 아니니까. 굳이 한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면, 이 수상한 마법사와 계속 같이 지내야 한다는 것뿐일까.

볼수록 비범한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던 이셀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기하네.”

“무엇이 말입니까?”

“굳이 여기 머무르려는 이유가 뭐야? 아무리 봐도 당신 능력 정도라면 왕궁 마법사 같은 것도 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제가 유능하긴 하지만, 능력이 있다고 꼭 한 자리 차치하라는 법은 없지요.”

 

인간들이란 능력이 있다면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능력이 없더라도 인맥이나 음모를 통해 권력을 손에 넣으려고 한다. 뛰어난 이들 중에서도 그저 평온한 삶을 바라는 이가 아예 없는 건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굳이 이런 시골 도서관의 사서로 될 이유는 없을 터. 혼자서 일하느라 힘들고, 주변엔 논밭이나 농장이 다인 이런 곳 외에도, 지내기 좋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호불호와 상관없이 인간을 오랫동안 봐왔기에 그들의 생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던 이셀라는 그게 궁금했다. 이토록 은은하게 오만함을 뿜어내는 유능한 마법사가. 이런 촌구석 도서관까지 온 ‘진짜 이유’ 말이다.

 

“너 무슨 잘못 저질러서 도망 다니고 있어?”

 

그 질문엔 특별히 악의가 없었다. 그저 진짜 이유 중 그럴싸한 가능성 중 하나를 골라 입밖에 내뱉었을 뿐이었지.

그러나 크로울리는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놀라더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빠르게 말하며 이셀라에게 반박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도망이라니?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합니까?!”

“흐음, 정답이구나? 그렇게 당황하는 걸 보니.”

“오해입니다! 제가 왜 도망을 다닙니까?”

 

그것도 얼마든지 추측해 낼 수 있다. 본디 마법사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는 이유로 동족들 사이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 쉽지 않았나. 과거에는 현자로 칭송받는 일이 있었어도 지금은 초자연적 존재와 결탁해 사술(邪術)을 부르는 악당 취급받곤 했으니까, 본디 권력자 곁에서 위세를 떨쳤으나 연줄을 잃고 쫓겨난 건지도 모르지. 아니면 정말 마법으로 큰 사고를 쳐서 모습을 감추기 위해 여기 온 걸지도 모르고, 혹은 동료 마법사들이랑 문제가 생긴 걸 수도 있지 않겠나.

몇 초의 침묵 후. 크로울리는 손사래를 쳤다. 아무래도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며 이유를 추측하는 이셀라의 행동에 나름대로 초조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어쨌든, 함께 지내는 걸로 알고 있겠습니다. 무작정 쫓아내지 않고 함께 지낼 방법을 제시하다니, 고마운 일 아닙니까? 저, 상냥하니까 말이죠!”

 

아, 그래. 드디어 함께 지낼 이유가 생겼다.

저 수상한 마법사가 감추고 싶어 하는 게 무엇인지. 반드시 알아내고 말겠다. 그 김에 새 책도 읽을 수 있다면 제가 손해 볼 게 뭐 있겠나? 소리가 지르고 싶다면 마을 밖 숲에서 질러도 되는 건데.

이미 손익 계산이 끝난 이셀라는 그제야 땅 위에 발을 닿게 섰다. 마치, 인간처럼 말이다.

 

“그래, 크로울리라고 했나? 잘 부탁하지.”

 

그렇게, 소문만 무성하던 도서관의 유령은 수상한 사서의 조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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