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령이라도 붙어있는 것 같네요.
갈라진 뼛골 속에 불씨라도 쑤셔박은 듯 격통으로 타오르는 어깨와 으스러지듯이 지끈대는 관자놀이의 통증 속에 흐려지는 의식으로, 대릴 딕슨은 스스로가 어리둥절해질 정도로 갑작스럽게 언젠가의 기억을 떠올렸다. 발 아래의 질긴 살갗으로 온 애틀랜타를 기억하고 있던 남자, 사람을 잡아먹는 시체들과 그 속에서 발버둥치다 기어코 자신들이 괴물이 되어버린 이들이 길가의 돌처럼 채이는 세상에서 선량하게 웃는 방법을 잊어버리지 않았던 남자가 살아있던 시절의 일이었다. 그들이 거쳐온 그 모든 험악한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실한 동료가 되어주었던 남자가 살아있었던 그 머나먼 시절 속의 이야기.
그가 속해있고 릭이 이끌었던 생존자 일행의 수가 본격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했던 것은 그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한 이후부터였으므로, 그 순간 함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와 글렌, 두 사람 뿐이었다. 나무 사이를 휩쓰는 바람 소리 때문에 죽은 자들 특유의 걸음 소리가 묻혀 알아차리지 못한 워커 몇을 처리하고 난 후였을 것이다. 혹시라도 뒤따라오는 다른 것들이 있을까 바짝 말라 늘어선 나무들의 사이를 경계하던 대릴은 그 말에 힘이 탁 풀린 얼굴을 한 채 등 뒤의 글렌을 돌아보았다. ‘수호령’? 그 단어를 발음하는 자신의 목소리조차 기묘하게 느껴질 정도로 낯선 단어였다.
“그게 대체 뭔데?”
“음, 수호천사랑 비슷한 거에요. 당신을 위험에서 지켜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나 존재같은 것 말이에요.”
“머리 맡 수호천사 이야기 같은 건 십대 시절에 졸업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세상이 뒤집히기 전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던 옛 이야기들을 떠올린 대릴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어린 아이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비웃는 어른과 같은 그 반응에도 글렌은 어깨만을 한 번 으쓱이고는, 당신이 졸업 못 한 츄파카브라나 생각해봐요, 하고 짧게 받아쳤다. 제가 던진 것을 고스란히 돌려받은 대릴이 짜증스럽게 미간을 구겼다. 그 모습을 못 본 척한 글렌이 그들의 발치에 엎어진 워커를 총구 끝으로 가리켰다. 워커들 중 가장 먼저 나타나 대릴을 덮쳤던 것이었다.
“이 녀석 말이에요. 아까 이유없이 비틀거리면서 당신에게서 떨어졌잖아요.”
“발이라도 걸렸겠지. 죽은 놈이니 발 아래를 신경 쓸 여유도 없었을 거고.”
“그렇다고 하기에는 당신에게 너무 기울어져 있었죠.”
바로 코 앞에서 딱딱 소리를 내며 열리고 닫히던 이빨들과 다 뭉개진 혀뿌리에서부터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던 썩은 피를 떠올린 대릴은 말없이 눈썹을 꿈틀거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꽂힌 화살을 뽑아내느라 발 끝에 떠밀려 바로 누운 채인 워커를 흘끗 바라본 글렌이 침묵하는 그를 향해 어깨를 으쓱했다. 조금 전 머리 끝까지 팽팽하게 당기며 차오르던 긴장감이 모두 녹아내린 목소리가 물었다.
“누가 일부러 이 녀석을 잡아당긴 것 같지 않아요?”
대수롭잖게 발등을 타고 흐르는 그 물음을 들으며 대릴은 한 순간 그의 뺨에 닿는 희미한 온기를 느꼈다. 겨울이 가시지 않은 초봄의 바람 속에서 가늘게 흐르는 훈풍의 기색처럼 아주 연약한 온기였다. 몇 번이고 망설이다 참지 못하고 그의 뺨을 쓰다듬는 손길 같기도 했다. 대릴은 저도 모르게 그 온기를 붙잡으려는 듯 눈을 깜빡였지만, 한 번 눈꺼풀 아래 갇혔던 세상이 다시 드러나는 그 짧은 순간 그것은 환상처럼 녹아 사라져 있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멀거니 선 그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글렌은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을 지키고 싶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말이에요.”
......그 짧은 대화를 불현 듯 떠올리게 된 것은 아마 그가 이번에도 그 순간처럼 살아남았기 때문이리라. 대릴은 턱 끝까지 불쑥불쑥 차오르는 숨을 천천히 뱉으려 애쓰며 그의 발치에 쓰러져있는 몸뚱이를 바라보았다.
과거와는 달리 이번에 그를 덮친 상대는 살아있는 인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로 직전까지는 ‘살아있었던’ 인간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밑창이 닳다 못해 부스러지기 시작한 낡은 작업화와 소맷부리의 올이 온통 풀려 너덜너덜해진 상의를 입고 있던 남자는 네간의 아래에서 날뛰다 도망친 끄나풀도, 혼자 일대를 순찰할 때가 있던 대릴에게 가끔씩 발견되었던 떠돌이 생존자들 중 하나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상체만 남겨진 워커를 스피커 삼아 대릴을 끌어들였고,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마주쳐 잠시 멈춰서 있던 대릴의 등 뒤를 덮치고는 그의 한 쪽 어깨를 집요하게 내리찍었다. 그가 총이나 석궁을 들지 못하게 할 요량이었던 듯 싶었다.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영리한 방법을 쓴 남자가 대릴을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그 자신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것은, 그가 ‘누군가에게 밀쳐진 것처럼’ 중심을 잃고 뒤로 나자빠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등 뒤를 짓누르던 무게가 일순 휘청이는 순간 대릴은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아직 공격당하지 않아 무사한 쪽의 손으로 허리춤의 칼을 빼어들었고, 순식간에 다리를 찔려 반응이 늦어진 남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었다.
바닥으로 짓눌리는 순간 불운하게도 낙엽이 얕은 곳에 내동댕이쳐진 머리는 생존을 위한 흥분이 천천히 식어가는 와중에도 시야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해 때때로 흐릿하게 졸아들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거칠하게 돋아올라 옷 아래의 살갗을 찔러대는 나무 껍질과 허리가 꺾인 마른 풀의 감각을 둔하게 느끼며 대릴은 갑작스레 등 뒤의 무게감이 사라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를 향해 온통 기울어져 있어 뒤로 쓰러질 가능성 따위는 없었던 그 때의 워커처럼, 두 무릎을 단단히 땅에 대고 칼을 쥔 남자가 갑자기 뒤로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것도 한참이나 상대를 향해 공격을 쏟아내던 시점이라면 더더욱 그럴 수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남자는, 마치 대릴에게 기회를 주기 위한 것처럼 뒤쪽을 향해 쓰러졌다. 제 몸이 뒤로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인지 어어, 하고 넘어가며 쥐고 있던 칼까지 놓쳐가면서. 아무리 희뿌옇게 흐려지는 머릿속에서도 납득이 가지 않는 상황 위로 글렌과의 대화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그의 곁에 존재하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무언가가 그를 지키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그 때의 대화와,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던 그 희미하고 연약한 온기에 대한 기억이. 그 때의 기억을 곱씹듯 무겁게 무겁게 눈꺼풀을 들썩이던 대릴은 곧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갈무리 하지 못한 고통으로 들썩이는 목소리를 꾹꾹 눌러 내뱉은 혼잣말에는 빠져나가지 못한 숨이 묻어났다.
“...나이가 들어가니 별 생각이 다 튀어나오는군.”
긴장 상황 속에서 자신의 본능적인 움직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 때의 워커도, 방금 전 그를 덮쳤던 남자도 그가 기억에도 없이 반항하는 움직임을 예상하지 못하고 넘어졌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대릴 딕슨은 영적이고 신성한 것들을 믿기에는 너무나 단단히 땅 위에 발을 붙인 인간이었다. 그가 그나마 믿는 것들도 어느 정도의 형체를 갖추고 살아 움직이는 것들에 대해서였으므로, 그를 보호하고자 하는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존재’에 대한 것은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꿈결같은 느낌만을 줄 뿐이었다. 스스로를 비웃듯 비죽 한 쪽 입꼬리를 올린 그는 손을 뒤로 돌려 다행이도 습격자에게 빼앗기지 않은 무전기를 꺼내들었다. 채널을 맞추자 함께 알렉산드리아에서 출발했다가 잠시 갈라져 움직이던 에릭이 의아한 목소리로 대릴? 하고 물었다. 그는 입천장을 툭툭 치받는 숨을 헛기침 몇 번으로 정리하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녀석에게 공격을 당했어. 총은 들고 있지 않았지만, 주변에서 본 적이 있던 놈도 아니던데.”
“습격을 당했다고요? 지금 부상이 심합니까?”
그는 대답 대신 현재 자신이 위치한 장소를 알려주었다. 죽을 정도는 아니라고 농담을 던지기에는 의식은 여전히 일렁거렸고, 혼자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하기에는 남자에게 떠밀려 쓰러지던 순간 심상찮은 방향으로 꺾였던 발목의 통증과 끝없이 이어지는 어깨의 고통이 순식간에 그의 머리 끝까지 치받아 올랐다. 에릭은 다른 내용으로 떠밀린 대답에서도 무언가를 재빨리 눈치챈 것인지 바로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무전을 끊었다.
별 일이 없는 척 애써 누르고 있던 숨을 길게 뱉은 대릴이 무전기를 쥔 손과 함께 정면을 향하던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겨울을 향하며 마르기 시작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작은 공터는 여전히 고요했고, 그와 시체를 제외하면 오로지 낙엽과 차게 식어가는 바람의 냄새만이 가득한 채였다.
분명 그랬을 텐데.
시선 끝에 낯선 발 끝이 걸렸다. 누군가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땅을 밟고 서 있었다. 바짓단 아래로 드러난 작은 발등은 석고처럼 창백했다. 오래 전 떨어져 진흙과 먼지가 가득 묻은 낙엽 위를 밟고 있는 데도 드러난 살갗이 여전히 희었다. 그러나 그 위를 덮은 청바지의 밑단은 이 세계에서 오래도록 살아남은 이들의 것이 으레 그러하듯 흙먼지가 덕지덕지 들러붙어 누렇게 바래어 있었다. 소매가 긴 것인지 품이 큰 것인지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몸에 맞지 않는 회색 후드 집업의 밑단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이 세계에 잠시 붙잡아 두고 싶거나, 그가 영원히 볼 수 없었을 것을 아주 잠깐 볼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대릴 딕슨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감정에 휩싸여 그 발 끝에 머무르던 눈동자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낯선 이를 보는 순간 당연하게 긴장하던 몸도,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소총이며 석궁의 방아쇠에 걸쳐지던 손 끝도 이상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 눈 앞의 존재가 절대로 그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몸이 알고 있는 것처럼, 정말로 이상하게도.
잎이 벗겨져 가는 나무들의 끝에 긁혀가며 공터로 스며드는 햇살 속에 서 있는 것은 마르고 작은 체구의 여자였다. 그가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여자, 온 삶 속에서 스쳐지나간 적도 없다 이상할 정도로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여자가 그 곳에 있었다. 파도치는 바다에 내던져진 것처럼 울렁거리는 시야 때문인지 그 역시 온전한 형태로 보이지 못하고 구석구석이 희미하게 일렁이거나 부스러기처럼 흩어졌는데, 그 때문인지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단 덜 만들어진 아지랑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여자는 대릴이 잘못 쥔다면 그대로 부러져 나갈 것 같이 얇았다. 한밤 중의 나무 둥치처럼 어두운 색의 머리타래가 여자의 좁고 마른 어깨를 타고 가슴께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허공을 가늘게 그으며 떨어지는 햇살 아래에 선 탓인지 그 끝에서는 옅은 황금빛이 물방울처럼 방울져 떨어졌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여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대릴은 혼란 때문인지 고통 때문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것들로 흔들리는 눈동자를 굴려 여자의 발치를 다시 한 번 흘긋 바라보았다. 창백했던 발등은 그대로 내리꽂힌 햇살을 붙잡지 못하고 맥없이 흘려보냈다. 그 투명한 발 끝에는 어떠한 그림자도 걸려있지 않았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을 보고서야 대릴 딕슨은 눈 앞에 있는 여자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렸다. 죽음과 삶의 경계선에서 늘 대릴 딕슨을 삶으로 밀쳐낸 존재, 느껴지지 않는 손길로 그에게 쏟아지는 죽음과 위험을 걷어내고 들리지 않는 숨으로 그에게 호흡을 불어넣었던 그 어떤 것. 눈 앞의 여자는 바로 그 ‘무언가’였다. 언젠가 글렌이 그에게 말해준, 대릴 딕슨의 ‘수호령’.
여자는 대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로부터 몇 발자국 앞, 손을 뻗어도 닿지 않을 위치에 가만히 서있을 뿐이었다. 대릴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당황한 것처럼 달싹인 작은 몸은 곧 그 역시 대릴을 오래도록 바라보려는 것인지 고요하게 멈추어 섰다. 대릴은 그 기이한 침묵 속에서 이 모든 일들 자체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기적일 뿐,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눈 앞의 여자를 만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토록 일렁이고 희미하고 부스러지는 모습으로도 그의 눈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것을 깨닫자 죽음의 순간을 벗어나며 가라앉았던 흥분이 다시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튀어오르고 애써 억눌렀던 숨이 다급하게 혀 위로 치밀어올랐다. 그는 아직 혀뿌리까지도 넘어오지 못한 말들을 끄집어내려 애쓰며 고통에 시달려 딱딱하게 굳은 상체를 기울였다. 아직 사라지지 마. 가장 먼저 부풀어오르며 잇새를 짓누른 말은 그것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당신은 누구야? 왜 내 곁에 있었지? 지금껏 내가 건너온 몇 번의 경계 속에도 당신이 있었나?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왜 나를 구했어? 어째서 그렇게 나를, 그 모든 순간 속에서, 계속해서 나를......
그러나 그 중 어떤 질문도 목소리를 얻지 못했다. 그 여자, 세계 위에 얼기설기 기워붙여 짧은 꿈처럼 흩어지는 몸으로 대릴 딕슨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여자가 그를 향해 웃었기 때문이었다.
우는 것처럼 연약하게 누운 가는 눈썹과 그를 향해 부드럽게 휘어진 눈매를 바라보며 대릴은 언뜻 여자가 웃고 있는데도 울음을 터뜨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연약하고 가늘게 떨어진 햇살이 물소리를 내도록 고인 눈동자가 오롯하게 그를 향했다. 여자는 제 갈비뼈 아래에 차곡차곡 채워넣은 사랑이 버거워 견딜 수 없는 사람처럼, 그저 보고있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소중한 것을 눈 앞에 둔 사람처럼 다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 순간이 서로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라는 것을 자신 역시도 알고 있다는 듯이.
상냥하게 접힌 눈꼬리 끝으로 햇빛이 살그머니 고였다. 길고 촘촘하게 자리한 속눈썹의 끝이 눈물 방울을 단 것처럼 반짝였다. 고개를 가만히 기울이면 눈물처럼 흘러 떨어질 것 같은 빛무리를 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바라보던 대릴은 여자의 눈동자 속으로 가득 차오른 빛이 하얗게 파도자욱을 남기며 밀려오는 것을 알아차리고서야 그가 무언가를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단어 하나하나를 반질하게 윤을 내 닦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여자가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속삭였다. 대릴. 제 모든 삶 속에서 반드시 전하고 싶었던 말처럼, 셀 수 없는 사랑을 담아서.
“대릴.”
오로지 그의 이름을.
간신히 숨이 붙은 채 스며드는 데에 급급하던 햇빛이 순간 그의 눈 끝을 아프게 후벼팠다. 대릴은 저도 모르게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가,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 속에서 눈을 떴다. 오로지 죽은 자의 몸뚱이만이 그로부터 멀찍이 쓰러져 있을 뿐, 공터는 잔상조차 남지 않고 고요했다. 지나칠 정도로 여상해 도리어 모든 순간을 의심하게 될 것만 같은 그 고요 속에서 대릴은 긴 잠에서 억지로 깨어난 사람처럼 텅 빈 허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그 곳에는 ‘누군가’ 가 있었다고, 그가 분명히 그 ‘누군가’와 마주했었다고, 누구라 할 것 없이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이 곳, 그의 바로 앞에.
그러나 누군가의 손으로 천천히 닦여나가듯 선명하게 가라앉기 시작한 시야 속으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 몇몇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대릴은 결국 자신이 그 모든 순간을 뒤로 하고 다시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수호령’이 한 번 더 그를 구해주었으므로, 다시는 마주할 수 없더라도 햇빛이 포말처럼 밀려오고 남겨진 빛무리가 황금 자수처럼 남겨진 눈동자를 가진 존재가 여전히 그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점차로 또렷하게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대릴은 조용히 명치께를 문질렀다. 빗장뼈 아래에서부터 무언가가 천천히 차오르는 것 같았다. 햇빛을 닮은 것, 파도를 닮은 것, 누군가의 눈동자와 웃음과 울음이 뒤섞여 부드럽게 무너지는 눈가를 닮은 것. 대릴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이고 싶었지만 사는 동안 그 어떤 순간 속에서도 그럴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떤 것으로 이름을 붙이더라도 부족할 것이라고. 이상할 정도로 욱신거리는 목 안으로 길게 숨을 삼키며 그는 눈을 감았다.
앞으로 그가 온전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그에게는 ‘수호령’ 이라는 것이 붙어있다는 것 뿐일 것이다. 빈 허공 속에 금실로 테를 수놓은 채 나타난 존재가 있었다고. 그를 지킬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고 마른 몸을 하고서 그에게 울 듯이 웃는 얼굴을 지어보이던, 이제 다시는 그와 만날 수 없을......
아마도 어딘가의 언젠가부터 계속해서 대릴 딕슨을 사랑해왔을, 어떤 다정한 눈동자의 수호령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