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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계를 만든 자의 무기였다고 전승된 명검 세르빈과 함께, 신들의 장난으로 소멸할 뻔한 인간계를 구한 영웅 코비.

 

춘풍이 불 듯한 분홍빛 머리결과 번듯하게 생긴 얼굴. 그리고 마법뿐아니라 검술에도 능한 영웅답게 탄탄한 몸. 어느 나라의 영애가 눈독 들이지 않을 수 있을까. 영애들의 구애에 지친 코비를 히바리 공주가 안쓰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강제 정략결혼이라는 오해가 있긴 했지만 집을 나오고 싶다고 친구 앞에서 펑펑 울고 있는 자신에게. 언제든 자신의 집에 있어도 된다며 따라간 친구인 미캉은 마왕이었다. 그렇게 그것이 곱지 않게 와전되어 마왕이 귀엽고 아름다운 공주를 납치한 것으로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당시에 왕가의 의뢰를 받은 용사 코비 역시 납치라고 들었으니까.

 

"용사, 아니 이제 영웅이지...! 어쨌든 그렇게 끙끙 앓지 말고 마왕님에게 가는 거예요!"

"에,에? 고, 공주님. 갑자기 무슨...!"

"마왕님도 분명 코비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라고요. 그렇지 않고서야 마신의 힘을 빌어서까지 코비가 끌려갔던 신들의 세계에 왔던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걸!"

"..."

"만약에 갑자기 마왕님한테 정말 진실한 결혼 상대가 생겼어. 그래도 코비는 그 마음을 꾹 참고 잘 살 수 있는 거예요?"

 

주먹을 꽉 쥐고 고민하던 코비는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히바리 공주를 바라보며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언젠가 미캉 마왕이 줬던 마계로의 귀환석을 쥐어 작게 영창을 하곤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솔직히 말하면 히바리는 자신을 구하러 왔던 용사 코비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강함 뿐만 아니라 여성인 자신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예의 바르고 상냥한 코비의 성품에 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코비의 눈은 언제나 자신의 친구였던 미캉을, 현 마계를 다스리고 있는 마왕을 담고 있는 것을 알고 나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눈치가 좋지 않은 히바리도 알고 있으니 아마 미캉도 알고 있지 않을까.

 

얼마 전 인간계를 구하는 일행 중 가장 약했지만, 창조주의 방계혈통이라는 고귀함으로 구원을 무사히 마무리한 히바리는 영웅 코비나 마왕 미캉 만큼 더 강해지고 싶었다.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꼭 쥐고 자신의 성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언젠가 어깨를 나란히 할 그날을 위해.

 

* * *

 

아름다운 세 개의 달이 맞이하는 마왕 성. 울창한 숲속 고딕풍의 웅장한 검은 성은 미캉의 끝없는 힘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젠 꽤 친숙해진 풍경이지만 지금은 무언가를 결심한 코비가 잔뜩 긴장한 탓인지 성의 지붕이 평소보다 더 뾰족해 보인다.

 

“휴...”

 

코비가 결연한 표정으로 마왕 성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십여 분 동안 계속 직진하니 마왕의 알현실이 보인다. 마왕 성 안 어디에서든 십 분이상 직진하면 마왕의 알현실에 도착할 수 있다. 마왕 성이 익숙한 코비에게는 참으로 쉽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알현실의 문을 살짝 미니 사령관 몽키 D 가프가 마왕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오? 이게 누구신가? 어딘가의 영웅 코비 아닌가~?”

“아, 가프 사령관님...!”

 

아직 코비가 자칭 용사로서 활동하고 있을 때, 가프에게 가르침을 부탁했었다. 비록 가프는 마족이었지만 코비를 자신의 친손자인 루피만큼 아껴주며 그를 훈련을 시켰다. 처음에는 꽤 버거워하던 코비였지만, 엄청난 노력으로 아주 조금 마족인 그와 겨루기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코비에게 있어서 정말 은인 같은 사람이지만 지금 만나는 건 조금 곤란했다.

 

“그...지금은... 마왕님에게 할 말이...”

“엥? 무슨 말?”

 

가프의 물음에 코비는 얼굴을 확 붉혔다. 그 모습을 보고 뭔가 눈치챈 그는 코비에게 다가가 어깨동무를 하고 마왕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만 속삭였다.

 

“ 너 혹시...”

 

평소답지 않게 무언가 눈치챈 가프 사령관은 잠시 한 발짝 물러나 코비와 마왕을 바라 보았다. 분명 가프의 눈에도 마왕은 코비를 꽤 특별히 여기고 있음을 아주 어렴풋이 볼 수 있었다. 원래 얼굴의 표정이 거의 없는 그녀에게서 아주 찰나의 미소를 보았던 것이 확신할 수 있는 증거이기에.

 

"마왕 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평소와 달리 결연한 기운을 내뿜는 코비의 모습이 등 뒤로도 선했는지. 미캉은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살랑이는 주황빛 머리카락은 기품이 넘처 흘렀고 속눈썹 아래로 보이는 에메랄드빛 녹안은 코비가 각국에서 받은 금은보화보다도 더 눈부시게 빛났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복식 호흡으로 진정시킨 코비는 우물쭈물거리다 결국 제 마음 속에서 맴돌던 말을 혀끝으로 내보냈다. 매우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미왕 님을...미캉 씨를...정말로 마음 속 깊이 사모하고 있습니다. 마치, 제 영혼의 남은 반을 찾은 듯한 그런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제가...당신의 수명의 반의 반의 반만큼도 스치지 못 할지라도. 저는...."

 

말하다 보니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려 버렸다. 언젠가 미캉이 가장 아끼는 벚꽃 나무를 보며 자신이 그 색과 매우 닮았다고 말했던 그녀의 아련한 모습이 떠올랐다.

 

“비록, 당신의 마음 속에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캉은 코비의 마지막 말을 피하듯 눈을 꼭 감아버렸다. 그리고 옆에 있던 가프 사령관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령관.”

“왜?”

“...요즘 그대의 친손자가 꾸리는 밀짚모자 일당이 마계의 유산을 맘껏 부수고 다닌다지.”

“그게- 철없는 손자 녀석이라서-”

 

가프 사령관 앞에 있는 마왕은 그것에 대해 단 한 번도 말한 적은 없지만, 확실히 루피가 데리고 다니거나 부수고 다니거나 하는 것을은 전부 마계의 국보급 보물이기도 하다. 아직 마신의 보물들을 손대지 않아서 미캉이 가만히 두고 있을 뿐 책임을 묻고자 한다면 언제는 달게 물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저자를 내쫓으면 앞으로 그대의 손자가 부리는 말썽들은 눈감아주지."

"뭐? 그런 거에 왜 날 이용하려고 하는 거냐!“

"...난 적당히라는 걸 모른다."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는, 하지만 그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고 있는 한 마족과 한 인간은 잠시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의 표정을 볼 새도 없이 고개를 돌려 워프 구멍을 만들곤 점차 사라졌다. 그렇게 마왕성 알현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가프와 코비.

 

”음. 있잖냐. 코비.“

”넵..!“

 

코비는 눈물을 손등으로 벅벅 닦으며 군기가 바짝 든 표정을 지었다.

 

”너 굉장한 연상이 취향이냐?“

”그, 그런 건 상관 없습니다..!“

 

부끄러움에 코비는 잠시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이 사랑하게 된 사람이 마왕이고 인간계가 만들어질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살아온 자인 것뿐이었으니까.

 

가프는 머리를 긁적이며 머리를 잠시 굴려본다. 그냥 코비 녀셕이 가지고 있는 귀환석을 뺏어버리고 영원히 추방하면 되는데, 너무 온건한 방법이다.

 

”음...“

 

정말로 고민되는 가프는 팔짱을 끼고 자리에 풀썩 앉아버렸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와 인간이기만 할 뿐 웬만한 마족보다 훨씬 맘에 드는 그런 제자.

하지만 고민은 금방 끝이 나버렸다. 이렇게 고민하는 와중에 도망가면 그만인 것을 정정당당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애제자를 보니 금세 결론이 나버렸다.

 

”녀석, 긴장하긴. 대답은 직접 들어야 하겠지?“

”예?“

”어서 가봐라. 네 말을 들어보니 이미 여러 각오를 한 모양이지?“

 

잠시 어리둥절하던 코비의 얼굴에 벚꽃 같은 화사함이 깃든다. 허리를 90도로 숙여 자신의 스승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 분명 미캉이 있을 곳으로 코비는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곳은 마왕의 정원. 계절을 무시한 채 사계절의 다양한 꽃들이 피어있는 이곳에는 아주 큰 벚꽃 나무가 있다. 인간계의 벚꽃과 비슷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마왕이 애지중지한다는 것. 그리고 평소에는 꽃잎이 순백의 하얀색이었다가 미캉이 다가가면 그녀에게 인사하듯이 점차 분홍색으로 물든다는 것이다.

 

‘미캉 씨. 당신에게 주는 선물입니다. 당신은 제 영혼 색을 좋아하니까. 가장 비슷한 색을 가진 아이로 골라봤어요. 맘에...드나요?’

‘저도 계속 당신 곁에 있고 싶어요. 당신과 같이 있으면 모든 근심걱정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아. 그런데 자꾸 밟혀요. 아직은 약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그들이. 저는 그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이렇게 될 줄 알면서 나를 도와줘서... 아마 난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미캉의 마믐 속에 살고있는 그를 생각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마신이여. 당신은 알고 있겠죠? 환생으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나의 현재에 묶는 방법. 환생을 하면...그의 얼굴을 잊어버릴 내가 두려워 견딜 수가 없어...!’

 

수 천 년은 지났을텐데. 아직도 그때의 기분을 생각하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마왕 님...?“

 

너무나도 감상에 젖어있던 탓일까. 코비가 자신의 정원에 들어온 것을 미캉이 눈치채지 못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눈물을 숨기기 위하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눈에 코비가 비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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