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떨어진 천사
힐다는 가만히 이리아를 바라봤다. 다른 직원들의 지시로 웃는 얼굴로 ‘네’라고 힘차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긴 했지만 말이다. 이리아가 의류 마케팅 부서에 들어온 지도 벌써 삼 개월이 지났다. 힐다는 어쩐지 이리아가 처음 들어올 때부터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많아졌다.
어느 한때는 신기했다가, 한때는 경악스러웠다가. 또, 어느 한때는 성격 좋고 싹싹하다고 정평이 난 힐다도 가끔 이리아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기도 할 정도로 그녀를 바라보는 게 괴로운 순간도 있었다. 아무리 처음 보는 사이라고는 하지만, 힐다가 생각하는 이리아의 인상이 '회사 안의 사고뭉치'를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에 회사에 새로 들어온 직원인 이리아는 힐다보다 3살이나 많으면서도 경력은 7년 정도나 뒤처져 있었다. 의류 업계에서 응당 있어야 하는 패션 감각도 힐다가 보기엔 썩 좋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힐다는 '이리아가 신은 구두 안에 며칠이나 신은 회색 양말이라도 있으면 어떡하지?'라는 괜한 불안감을 조성할 정도로, 이리아는 자기보다 한 사이즈 더 큰 낡은 회색 정장 한 벌만 입고 한 달 내내 부서 안을 돌아다녔다. 진짜다. 그 정장 한 벌이 종류가 비슷한 게 여러 벌이 있는지 없는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긴 하다. 그래도 힐다는 이리아가 한 달 내내 늘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는 걸 여러 번 목격했다.
원래 대기업은 경력이 부족한 사람은 신입으로도 두지 않는 게 하나의 법칙이다. 힐다의 경우에도 다른 회사에서 경력을 쌓고 나서야,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입사 지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완전히 '신입'인 사람도 이력서를 넣을 수 있냐고 묻는다면 넣을 수야 있었다. 넣어서 재능이 있거나 회사에서 중요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면 들어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에 관한 힐다의 입장은 '경력 없는 신입도 환영합니다'라는 모집 글에 있는 문구는 그저 입에 발린 거짓말이다. 이리아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기엔 커트라인이 너무 높다. 힐다는 이리아를 나름대로 심하게 판단했다고 해서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은 화장실에서 한바탕 이리아의 실수에 관해 수다를 떠는 것 같지만, 힐다는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할 뿐. 어디까지나, 자기 관점에서 판단하는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이리아가 회사 내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할 때마다 속으로 비웃은 건 사실이었다. 힐다는 '웃을 수밖에 없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라고 스스로 변명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동시에, 이리아는 힐다의 지루한 일상에 담긴 하나의 재미라고 하는 게 좋을까. 그녀는 업무는 전혀 도움이 안 되지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르는 깜짝 상자같은 재미는 있었다. 물론, 힐다는 전혀 재미같은 건 딱히 못 느꼈지만. 그래도 한 가지 호감이라고 여길 부분은 있었다. 가끔 힐다를 보고 힐끔거리는 눈이나 힐다가 이리아와 눈이 마주치며 금방 머쓱하게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말이다. 평소에는 '엄청난 사고뭉치'라는 인상을 쉽게 지울 수 없었지만, 이리아의 외모나 느껴지는 분위기만큼은 힐다의 취향이었다. 자신을 몰래 바라보고, 들키면 빠르게 고개를 돌려 민망한 듯이 수줍게 살짝 볼을 붉히는 얼굴이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고 힐다는 그녀에게 따로 궁금한 것도 있었다. 분명 이리아는 어떤 수를 써서 회사에 들어온 거라는, 그런 확신을 뒷받침하는 대답과 회사에 들어오기 위해 사용한 수단 같은 거 말이다. 옷에 하나도 관심 없으면서 왜 이런 곳에 지원했는지까지도. 힐다가 좀 더 이리아와 평범하게 말이 트이고, 사이가 가까워진다면 실컷 물어볼 수 있을 만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힐다가 먼저 이리아한테 다가가는 건 싫었다.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는 거 아니겠어?'
힐다는 이전에도 몇 번 연애를 한 경험이 있으나, 이리아한테는 새로운 기대를 거는 편이었다. 힐다는 예의상의 은은한 웃음으로 이리아를 대하긴 했지만 말이다.
'뭐, 적극적으로 나온다면 안 받아줄 것도 없지. 그 얼굴, 만져서 내 말만 듣고 싶게 만들고 싶기도 하고. 그래도 당신도 뭐 하나 잘난 게 있어서 이곳에 입사한 거잖아?'
힐다는 연인이 된 이리아가 얼굴을 붉히며, 자기 뺨을 만지는 손길을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상상을 했다. 한편으로는, 데면데면한 걸 넘어서 사이가 어색한 직원이 자기에 관해 음험한 생각을 가졌다는 걸 눈곱만큼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이리아는 마케팅 부서 사무실 멀리서 힐다의 실루엣을 두고, 부장한테 복사기에서 나온 서류를 내밀었다. 부장은 이리아가 실수로 추가로 복사한 용지들을 보고, 그날따라 유난히 날카롭게 이리아를 쏘아봤다. 추가로 그녀한테 말로 쏘아대는 건 덤이었다.
“이리아 씨, 계속 이런 식이면 곤란합니다.”
“……죄송합니다.”
“됐습니다. 다른 일 하러 가세요.”
“네.”
‘……우와 저런 식으로, 단답형으로 대충 대답하면 나중에 부장님께 엄청나게 혼날 텐데.’
이리아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대답도 성의가 아예 없었다. 이리아 본인은 그래도 노력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보는 사람으로서는 그런 게 없었다. 아예 티가 나지 않았다.
힐다는 놀란 얼굴로 이리아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 이리아가 고개를 돌려 힐다를 바라봤다. 이리아가 고개를 돌려 힐다와 눈이 마주치자, 힐다는 살짝 붉어진 얼굴로 다급히 자기 사무실 책상 근처에 쌓인 자료들을 정리했다. 힐다는 잠시 그러다가, 슬쩍 눈을 돌려 이리아를 쳐다봤다. 이리아는 여전히 힐다를 바라봤다. 마저 자료를 정리하던 힐다의 손이 더디고, 얼굴이 더 빨개졌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리아가 힐다가 있는 곳까지 걸어왔다. 이리아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눈으로 말했다. 마치 삐걱삐걱 자기 몸을 움직이기만 하는 기계 같았다.
"급하시면, 제가 도울게요."
"……괜찮아요. 근데, 요새 업무가 많지 않나요? 사원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분명 힐다 씨였죠? 그러게요."
이리아는 잠시 몇 초 정도 머릿속에 기억한 힐다의 얼굴과 이름을 기억해냈다. 힐다는 이리아의 말에 놀란 얼굴로 말했다.
"설마 직원들을 다 기억하세요?"
"아니요. 힐다 씨는 인상에 남아서 기억했어요."
힐다의 말에 이리아가 웃었다. 건조한 어른 여성이라는 겉 이미지와는 안 어울리게 순수하고 아이 같은 웃음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에 보인 웃는 얼굴이었다. 평소에는 계속 무표정으로 할 일만 한다는 이미지였는데. 힐다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이리아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한참 자신을 보고 웃었던 이리아의 얼굴을 기억 속에 담고 있었다. 다시 무뚝뚝하게 말하는 이리아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힐다는 티 나지 않게 음험한 웃음을 지으며, 속으로 결심했다.
'넌 내 거야.'
두 사람의 출발선은 분명 여기가 시작이었다.
이리아는 천계에서 내려왔다. 천사가 천계에 떨어지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이리아는 단지 인간의 삶을 배우겠다는 주어진 '과제'에 집중해 있었다. 그녀는 과제라는 이름의 쫓겨났다는 다른 말을 인정할 여지도 없어 보였다. 그래도 천계에 있을 때는 상급자의 지위를 가진 이리아는 천사법이 인간이 아닌 너무 천사한테 치중해 있다는 쓴말을 천사장 앞에서 눈치 없는 내뱉는 원인과 동시에 결과로 벌을 받았다. 천계에서 옥좌에 앉은 사람의 말에 직접적으로 반대한 죄였다. 이리아는 인간을 사랑하는 천사이긴 했으나, 눈치가 더럽게 없었다. 다른 천사들도 저 정도로 이리아가 눈치가 없는 줄은 알았는데, 천계를 만든 이의 말에 개기다니, 라는 반응이었다. 한마디로 그 세계의 권한자한테 제대로 원한을 샀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주 큰 잘못을 한 건 아니라, 천사의 능력은 쓸 수 있었다. 천사장은 이런 고지식한 천사한테 벌을 준 건 성격을 고치라는 의미도 있겠지만, 다른 의미도 있었다. 이리아가 가진 인간에 관한 사랑은 환상이라는 걸.
완전히 천계에서 인간으로 남기만을 바랐으면 언제든지 그 능력은 박탈할 수 있었다. 이리아는 분명 아까운 인재였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에 대해서 커다란 착각을 하고 있다. 우선, 인간은 완전하게 선한 존재가 아니다. 이리아가 아마 이 말을 들었다면, ‘네, 그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특유의 딱딱한 말투로 받아칠 게 뻔했다. 이리아는 평소에는 늘 무표정이어도, 어떤 감정인지는 정말 알기 쉬운 타입이었다. 그 점 때문에 상대하기 귀찮지만 나름대로 귀엽다고 인기가 있는 편이었지만. 어쨌든, 자기가 고집하는 건 받아들이지 않는 티가 나는 편이었다.
이리아는 과제를 수행하면서 많은 인간과 엮일 생각은 아니었다. 너무 깊이 인간의 삶에 관여하면, 그 인간은 다른 이세계의 영향 때문에 불행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건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눈에 보이는 걸 더 대단하다고 여길 게 뻔했다. 이리아는 직장 생활 내에서 그런 ‘꼰대’라고 들을 법한 생각은 아주 다 하고 있었다. 근데, 이리아를 특별히 기억하는 인간이 나타났다.
"이리아 씨, 오늘 점심시간에 같이 카페에 안 갈래요?"
"네."
"그럼, 점심때……."
"힐다 씨, 같이 가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네요. 미안해요."
이리아는 인간의 요청을 거절하거나,
"이리아 씨, 자료 필요하시죠?"
"……."
"이리아 씨?"
"괜찮아요. 힐다 씨. 제가 스스로 찾을게요."
인간이 천사를 도와주려는 걸 거절했다.
‘천사를 도와주려고 하다니, 요즘 세상에 기특한 인간이 다 있군.’
그리고 이리아는 아련한 얼굴로 힐다를 멀리서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모습도 본 힐다의 속은 부글부글 끓었다.
어느 날은 힐다가 늦은 밤까지 혼자서 일하는 이리아를 끝까지 기다려줬다. 그리고 회사 건물 앞에서 대놓고 이리아의 팔짱을 꼈다. 힐다는 회사 내에도 늘 지었던 은은한 웃음을 기본으로 깔고, 가만히 몸이 가까이 붙은 그녀한테 끈적하게 애교 섞인 말투로 말을 걸었다.
"같이 돌아가요? 아니면, 둘이서 회식할까요?"
"……힐다 씨."
"갈 건지, 말 건 지나 정해주세요!"
힐다가 드물게 화난 얼굴을 보일 때 이리아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기어코 공포의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저 먼저 집에 먼저 돌아갈게요."
이리아는 본의 아니게 힐다의 체면을 구겨진 종이처럼 바스락바스락 갉아 먹었다. 힐다의 작은 손이 떨리는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벌벌 떨리는 손은 한동안 진동하다가 서서히 멈췄다.
‘감히 나한테 무안을 줘? 기껏 이때까지 기다려 줬는데.’
“저기……. 힐다 씨?”
그녀는 천사의 능력을 사용해서 힐다의 마음을 읽었다. 원래라면, 이리아는 미안한 마음에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말이라도 꺼냈을 참이다. 하지만 힐다를 데리고 간다면, 분명 이리아에 대해서 캐물을 게 뻔했다.
“…….”
“……어떻게 해도 안 될까요? 이렇게나, ‘길게’ 기다려줬는데.”
힐다는 다시 한번 진짜 마음을 감추고, 이리아한테 매달려 애교를 부려댔다. 이리아는 천천히 한 손을 뻗어서 힐다의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하얀 섬광 같은 게 ‘팟!’하고 터지는 동시에, 쓰러진 힐다를 공주님 안기로 들었다. 이리아는 안타까운 얼굴로 힐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힐다 씨.”
늦은 밤의 거리는 간간이 보이는 자동차 불빛을 제외하면 어두웠다. 다른 존재와 엮이는 인간은 분명 외로워질 거라고 생각했다. 이리아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슬픈 눈으로 고이 잠든 힐다를 내려다봤다.
힐다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제멋대로에 얄미운 사람이라고 얘기할 테고, 어떤 사람은 싹싹하고 그 나이대에 비하면 어른스럽다고 칭찬일색일 터였다. 사람에 따라 마치 천사와 악마를 오가는……. 또한, 그런 평가도 힐다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가끔 자신들의 잣대로 힐다한테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져 싫을 뿐이지. 힐다는 힐다를 싫어하는 사람을 미워하진 않았다. 어차피, 싫어하는 사람이 있어도, 충분히 좋아해 주는 사람은 차고 넘쳤기 때문이었다.
그야 힐다는 사실 이곳에서는 사원이지만, 다른 대기업 회사 회장님의 딸이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힐다가 최고라고 직접 말해줬다. 힐다의 오빠와 아버지는 사랑스러운 동생이자 막내딸인 힐다한테는 유독 약했다. 용돈이라고 윤기가 나는 검은 카드를 덥썩 선물로 주질 않나, 후계자 수업을 받지 않으면 물려줄 게 없다고 말하면서도 백화점 한 채 정도는 받아야 하지 않냐면 오히려 힐다한테 쩔쩔매기도 했다. 힐다가 이 나이쯤 되면, 으레 하던 고집도 관두고 좋은 사람과 만나기도 바라고 있었다. 물론, 집안에서 강요하지도 않았다. 상대적으로 힐다한테 이성적인 어머니마저도 그녀한테는 무른 편이었다. 힐다가 무관심하게 굴어도, 늘 관심을 주는 구혼자는 넘쳐났다. 친구들도 힐다를 건들지 않았다. 오히려 힐다한테 대단하다고 말해주기에 바빴다.
클럽에서 만난 사람은 대부분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재미있게 말하는 남자들이었다. 힐다는 화려한 파티를 좋아했다. 친구들도 하나의 재미였지만, 남자도 여자한테 있어서 하나의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어디까지나, 잠깐 즐겁게 만나다마는 이벤트 말이다. 가끔 각자 집에 돌아가는 일도 있었지만, 대체로 불나방 같은 만남으로 시작되고, 끝이 난다. 부모님께서 정해주신 결혼 상대도 대체로 괜찮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딘가 허무한 기분이 드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아마 힐다는 즐거운 듯이 가벼운 사람과 어울리지는 속은 한없이 무르고 여려서, 만일 본격적으로 만난다면, 둘이서 하하호호는 가능하겠지만, 자신의 전부를 알아주지는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힐다의 ‘전부’라는 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은 힐다가 이리아가 두고 온 서류를 직접 갖다줘야 하는 일이 생겼다. 힐다는 심드렁한 얼굴로 부장이 전달해 준 서류 봉투를 들었다. 이리아가 두 달 정도 더 회사에 근속한 이후 부서 내에서 친하다고 할 만한 사람이 힐다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된 셈이다. 이리아는 힐다하고도 겨우 친분이 트인, 회사 내의 거의 유일한 상대였다. 이리아 쪽에서 묘하게 거리를 둔 지금. 힐다는 이리아는 모르는 분노 스탯을 천천히 '잔뜩' 쌓아놓기도 했다.
회사 안에 있던 누군가는 이메일로 USB 파일을 전송하면 된다고 했지만, 힐다는 굳이 그 제안을 거절하고, 이리아의 집 주소를 ‘굳이’ 알아 방문했다. 그게 체면이 구겨지는 선택이라는 건 힐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낡은 아파트 단지에 엘리베이터로 나선 힐다는 햇빛이 드는 복도에 미세하게 흐르는 연기를 봤다. 아니나 다를까, 이리아가 사는 곳에 다가갈수록 심해지는 고약하고 탁한 냄새에 담배라면 아예 질색하던 힐다는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누구야. 아파트 단지 안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은.’
그때 힐다가 건물 복도에서 거대한 날개를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낯익은 얼굴의 직원은 한 손에는 담배를 들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 이리아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져 바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힐다의 벌어진 입에 허무하게 대답했다. 담배꽁초를 배란다 안에 떨어뜨리면서.
"아."
"이리아 씨……?"
힐다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굳어 있었다. 담배를 피우는 것도, 거대한 날개를 편 사람이 이리아라는 것도 낯설었다. 정말, 모든 게.
이리아의 집에 들어온 힐다가 여전히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리아의 날개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힐다가 보는 원래 이리아의 모습이었다. 평소에도 신 같은 건 전혀 믿지 않는 힐다라고 해도, 두 눈에 보이는 모습은 첫눈에 봐도 이리아와 똑같았다.
“지, 진짜 천사예요?”
힐다가 이런 틈을 타 이리아의 등에 손을 대고 만져볼 때, 이리아는 곤란한 얼굴로 대답 없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힐다는 이리아의 얼굴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몰래 등을 주무르듯이 만졌다. 그리고 대놓고 끌어안았다. 볼이 빨개진 채 힐다가 등에 기대 중얼거렸다.
“신기해…….”
이리아는 다시 기억을 지워야 하겠다고 다짐하면서 힐다가 등에 머무르는 시간을 가만히 기다렸다. 힐다는 아예 이리아에 관해 지레짐작까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절 피하신 건가요?”
“네?”
“그러니까, 날 피한 거구나…….”
“…….”
이미 관계에 정답을 정해 그녀의 등에 얼굴을 파묻어 기대던 힐다는 어느새 이리아와 마주 보며 가만히 안겼다. 부끄러워하는 힐다의 태도에 이리아는 자기 몸을 떨어뜨려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힐다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참아야 해.’
“아무튼, 어…… 와 줘서 고마워요.”
“뭘요.”
“그, 근데, 저한테서 좀 떨어지시는 게 어떨까요?”
이리아가 힐다의 기억을 또 다시 지우기 위해 머리 위에 손을 뻗으려고 하자, 힐다는 이리아의 손을 빠르게 낚아챘다.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예상했다는 듯이 말이다. 이리아가 이런 행동을 할 거라는 걸 예상한 것처럼 보였다.
“그거 알아요? 이리아 씨. 저 그때 다 기억나요. 저랑 밤늦게까지 남아있을 때.”
“그건…….”
“쉿.”
이리아가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찰나에 그녀의 입에 손가락이 올라갔다. 여전히 은은하게 웃으며, 힐다가 아까 전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로 전환해 말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이어 나갔다.
“언니가 저한테 수작 부렸던 거.”
“…….”
“저 이래 봬도 귀한 사람이에요? 적어도, 당신 같은 사람이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에요. 이리아 씨가 아무리 천사라고 해도요.”
아무렇지도 않게 험악한 말을 하던 힐다는 두 손가락을 모으면서 수줍은 얼굴로 말했다. 말의 내용은 협박에 가까웠지만.
“언니.”
자연스럽게 ‘언니’라고 이리아를 지칭하는 힐다가 말했다.
“네.”
이리아가 힐다의 부름에 자포자기 식으로 대답하자, 힐다가 이어 말했다. 이전부터 쭉 말하고 싶었다.
"언니, 저랑 사귀지 않을래요?"
이리아는 힐다한테 천사라는 걸 들킨 직후부터 자신과의 싸움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천사로 활동한 지 오백 년, 인간한테 유혹당해서 과제를 잊어버렸다고 하면 천사장을 다시 볼 면목이 없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백 년간의 역사에서 ‘고고한 천사’로 자기 자신을 이미지화해 온 이리아는 힐다의 유혹에 못 이겨서 넘어갔다는 걸 스스로 허락하지 못했다. 사실 대외적인 이미지도 ‘똥고집 천사’에 가까웠지. 절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고결하고, 고상한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리아는 나름대로(?) 인간계에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다른 사람들이나 힐다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 딴에는 자제하려고 애써도 오히려 미궁 속으로 빠지는 일이 많았다. 이리아 사전에는 연애라는 건 해 본 적도 없고, 할 일도 아예 없었던 터라, 다른 천사들이 하하호호거리는 걸 손가락만 빨면서 구경한 게 다였다. 따지고 보면, 사고뭉치에, 고집스럽고, 모태 솔로인 안 좋은 속성만 골라서 들어있는 천사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리아가 처음 하는 연애는 미숙함과 동시에 신기한 감정이 남아 있었다. 순수함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을까. 힐다는 가끔 이리아가 자신을 보고 멍청한 얼굴을 한다는 걸 알까,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저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말이다.
“자, 여기 자료예요. 예전같이 보고서 막 함부로 복사하고 그러면 안 돼요.”
“네…….”
힐다는 이리아를 지나치면서 그녀한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나중에도 잘 부탁해.”
이리아의 붉어진 얼굴을 보고, 힐다는 웃었다. 그녀는 진지한 성격 때문인지 놀리면 반응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힐다는 내심 그때의 일에 관해서 놀라지 않은 티를 냈지만, 새삼 이리아를 보고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어도 정말 인간이 아닌 존재라는 상상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악마나 다른 요괴 같은 존재도 아니고, 천사라니. 직장에서는 사고뭉치에, 기계적인 대답. 게다가, 담배를 뻑뻑 피우지를 않나. 천사답지 않은 면이 한둘이 아녔다. 직장에 다니는 내내 언니라고 몰래 부르기도 하고, 볼이 붉어진 이리아를 보면서 즐거운 맛은 있었다.
이리아는 힐다를 만나면서 점점 강하다고 과대평가했던 자제력까지 완전히 무너져 내려서 힐다가 은근히 자기 팔에 매달려서 ‘하고 싶다’라는 말을 할 때면, 늘 입으로는 반문하면서 얼굴은 물론이고 귀 끝까지 한 번에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자기가 고고한 천사라는 걸 늘 힐다한테 보여주고 싶었으나, 어째선지 그냥 부끄러움이 많은 쑥맥 천사가 되어 힐다가 리드하는 대로 따라갔다. 데이트든 데이트 이후에 있었던 일이든 말이다.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여자한테 ‘아기’라는 애칭을 붙이며 끌어안지를 않나, 늘 힐다가 진지하게 화낼 때마다 자꾸 끌어안아서 진짜 아기 다루듯이 등을 토닥거리기 일쑤였다. 힐다는 그런 그녀의 손을 부숴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진짜로 어리광 부릴 때는 잘 받아줘서 딱히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기 취급은 아무래도 상사인 여자한테 할 짓은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말이다.
회식 자리에서도 일부러 늘 힐다의 옆자리에 앉는 남자 직원이 있었다. 이리아는 아무래도 말단이다 보니, 자리 선정 권한이 딱히 없었다. 힐다도 공과 사는 구분하는 성격이었다. 직급이 대리인 남자는 이 여자, 저 여자 조금의 여지만 보이면 추근대기로 유명했다. 물론, 소문을 즉각적으로 듣고 피드백을 나누는 타입이 아닌 힐다도 그 남자 직원의 소문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웃어야지. 이리아는 맞은편에서 속이 타고 있었다. 힐다는 무엇보다 이리아의 질투가 재미있었다. 그래서 딱히 말리지 않은 이유도 컸다. 오히려 일부러 더 자극하기도 했다.
“역시 최고네요. 대리님은.”
“하하하핫! 역시 그렇지? 나, 최고지?”
“네, 그런 의미로 건배~. 어때요?”
“나야 힐다와 함께 한다면 뭐든 좋지.”
그 남자는 은근슬쩍 힐다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이리아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리아는 잠시 화장실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힐다가 이리아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어때? 회사 생활은?”
놀리려는 건지, 진심으로 물어보는 건지 이리아의 입장에서는 분간이 가지 않았다. 이리아는 힐다한테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언니는 딱딱하네.”
힐다는 이리아한테 다가가서 바로 입을 맞췄다.
“…….”
“나는 언니가 표정 못 숨기는 거 꽤 마음에 들어.”
“그거 반어법이지?”
“어떻게 알았어? 뭐, 언니는 늘 그런 식이니까.”
힐다는 그 남자한테 하하호호 웃어주던 것과는 반대로 이리아와 있을 때는 살짝 짓궂은 태도로 응수했다. 이리아는 그런 힐다한테 이길 수 없다는 생각만 들 뿐이었다. 사랑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근본적으로 아니긴 하지만 말이다. 힐다는 이리아가 자신한테 손을 뻗으려고 하는 타이밍에 그 손을 잡아 그녀의 몸을 살짝 밀었다.
“농담이야. 언니는 늘 삼천포로 빠진다니까.”
이리아의 아쉬운 얼굴을 보고, 힐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귀엽기는.’
이리아가 처음 시작하는 연애는 뚝딱거렸지만, 내심 다정한 면도 있었다. 그녀는 융통성이라고 해야 할지, 자기 주관이 너무 센 탓에 원하는 걸 알아서 ‘눈치껏’ 해주는 능력은 없긴 했지만, 마음을 연 상대한테는 다정한 성격을 보여줬다. 힐다는 잔뜩 이리아한테 안기며, 그녀한테 의지했다. 가슴 쪽에 얼굴을 이리저리 비비기도 하고, 서로의 집에 있을 땐 무릎에 누워있기도 했다. 어느 날은 이리아가 힐다의 뺨을 부드럽게 만지며 ‘새끼 고양이 같아.’라는 망언을 내뱉기도 했다. 이에 힐다는 눈이 동그래져서 ‘내, 내가 새끼 고양이……?’라고 그녀한테 반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리아는 힐다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한 번은 이리아의 팔불출이 강해져 쉬는 날마다 자기 집에 데려와, 종일 힐다를 뒤에서 끌어안은 적도 있었다. 힐다는 이리아가 자는 숨소리를 낸 뒤에야 잔뜩 빨개진 얼굴로 이리아의 품에 더더욱 깊이 파고들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바보.”
이리아는 힐다와 바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자신의 집에 들이는 일이 더 많았다. 허무해도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좋아했던 힐다는 이리아의 그런 면이 재미없다고 느끼기도 했지만, 오히려 진짜 ‘연인’으로서는 합격점을 주었다. 아무래도 노는 걸 좋아하는 애인은 영 찝찝한 법이었다. 이리아는 노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고, 회사 일에 적응기를 거치면서 바보같이 무식한 노력을 한 덕에(힐다의 표현에 따르면 요령이 하나도 없는) 업무의 상당 부분이 많이 나아지기도 했다. 물론, 힐다가 요령을 가르쳐 준 탓이 컸다. 이리아도 그 부분은 알고 있기에, 힐다의 앞에만 서면 묘하게 보들보들한 분위기가 됐다. 평소엔 고고한 척, 대단한 척하더니, 누구도 따르지 않는 사나운 사냥개가 좋아하는 주인을 만나서 꼬리를 이리저리 휘젓는 느낌이 됐다. 힐다는 그런 부분을 알면 알수록 이리아를 자기만 알게 만들고 싶었다.
그에 반해 이리아는 진짜 상부에서 인간 관찰이 끝났으면 얼른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이것도 그나마 친하고, 성격 좋은 대인배 천사가 굳이 인간 세계로 내려와 이리아한테 통보했다.
‘이봐, 이만 돌아오는 게 어때. 상부에서 전해달라고 해서 왔어.’라는 말로.
그리고 이리아의 일상을 관찰하던 동료 천사는 힐다가 이리아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그녀도 다른 천사가 내려온 시점에서 숨겨도 어차피 소용없다는 생각이 있었다. 이리아는 하급 천사직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과 접촉한 천사에 관해 벌을 내릴 권한은 이리아같이 상급 천사나 천계를 만든 천사장한테 달려 있었다.
이렇든 저렇든 이리아는 힐다의 관계에 대해서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마도 선택권은 없겠지만. 힐다는 이리아의 어두운 낯빛을 살펴보다가, 그녀의 어깨 안쪽에 얼굴을 파고들어 기댔다. 그리고 평소에 밝게 말하는 투가 아닌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언니는 언젠가 날 떠날 거야?”
“……응, 아마도.”
이리아는 빈말이라도 거짓을 말할 수 없었다.
“떠나지 마.”
“…….”
“언니가 떠나는 거 싫어.”
너무나도 약하고, 여린 말이었다. 힐다는 이리아의 무릎에 누워 손을 뻗었다. 그 손은 그녀의 뺨에 닿았다. 힐다가 웃으며 말했다.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웃지 않으면 이 분위기가 심각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리아 쨩.”
‘역시 넌 내 거야.’
힐다는 이리아가 당장 자기 마음에 들든, 실망스럽든 뭐든 보내주기 싫었다. 이리아같이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을 보고 동정이든 관심이든 반응을 끌어내서 계속 붙잡아 두고 싶었다. 이게 힐다가 가진 진심이었다. 이리아는 그런 힐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만히 힐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줄 뿐이었다.
이리아가 힐다의 노력에도 자기 곁에 남겠다고 말하지 않자, 두 번째 작전에 돌입했다. 그건 원래 힐다가 주변에서 떠받들여진 막내 공주님 성격대로 무작정 떼쓰는 거였다. 원래 힐다는 그 정도까지 남들한테 어리광을 부리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리아한테는 유독 심하게 부리는 편이었다. 데이트할 때도 계속 여자끼리 할 수 있는 결혼 얘기를 꺼내거나 다른 남자 직원과 일부러 친한 척을 하며 대화를 나누고는 이리아를 힐끔 바라보거나 그냥 그런 것도 안 통하면 말 그대로 막무가내로 이리아의 품에 파고들면서 ‘가지 마. 가지 마. 이리아 쨩.’이라고 낭랑 28세 직원이 어리광을 부릴 뿐이었다.
천계로 복귀하지 않으면 이리아한테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천벌을 주겠다는 천사장의 말을 동료 천사한테서 듣고 난 뒤에는 이리아는 큰 한숨을 내뱉었다. 달빛이 기운 외로운 밤에 하얀 날개가 이리아가 보던 밤 풍경을 가렸다. 이리아는 힐다가 술에 취해 가지 말라는 말만 연달아 들은 뒤,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에 함께 잠이 들긴 했지만, 금방 다시 일어났다. 1년이다. 1년 사이에 이리아는 힐다가 채근한 탓에 피던 담배도 끊고, 옷장에 옷의 종류가 늘었다. 이리아는 원래 같은 옷을 여러 벌 둬서 돌라입기를 좋아했지만, 계속 그런 습관을 유지하면 바로 즉석에서 헤어지겠다는 힐다의 말을 듣고 억지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리아는 앉은 상태에서 힐다를 가만히 보다가 쓰다듬었다.
“인간 세계는 마음에 들었나 봐? 아니, 모두가 걱정한 만큼은 아닌가.”
“그 정돈 아니야. 인간 세계도 재미있지 않았고.”
“흐음. 레아 님이 널 자꾸 부르는 거 알지?”
동료 천사인 클로드가 짧게 입을 뗐다. 이리아는 그의 말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녀의 손은 힐다를 만지고 있었다. 그는 힐다한테 집중하는 이리아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클로드는 이리아와 단둘이 있을 때는 레아를 ‘그 사람’이라고 멀리 칭할 때도 있었다.
“그 사람의 말로는 자기가 당신한테 잘못했다고는 하는데, 나도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자세한 사정’은 잘 몰라. 오히려 직속 부하이자, 천사 측 사령관인 네 쪽이 더 잘 알지 않을까.”
클로드의 말이라는 건 어쨌든 천사장은 이리아가 다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리아가 가만히 힐다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같이 데려가는 건…….”
“안 돼.”
클로드는 단호하게 입을 뗐다.
“…….”
“당신의 묘한 어리광을 받아주는 건 나도 그 정도까지야. 어차피, 인간계에 오래 머무르다 보니, 천사의 능력도 많이 약해져 있잖아. 당신의 성격상 그 여자한테 능력을 안 썼을 리는 없고……. 내 말이 맞지?”
“……응.”
이리아가 클로드의 말에 끄덕이자, 잠에 들지 않았던 힐다가 손을 뻗어 이리아의 팔을 잡아 안겼다. 안긴 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진작에 힐다가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리아는 모르고 있었다. 이리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는 몸을 가만히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클로드는 천사와의 교신 능력으로 이리아한테 자신의 속마음으로 전했다.
‘그 여자의 기억은 내가 지울 거야. 정확히 그 여자의 기억은 지워져.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어서 복귀해서 알려야 천계도 험악한 분위기에서 벗어날 거 아니야.’
이리아는 부들부들 떠는 힐다의 얼굴을 잠시 슬픈 눈으로 바라보다가, 힐다를 안은 상태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힐다의 기억은 완전히 지워졌다. 흔적도 없이, 말이다.
몇 년이 지난 뒤, 힐다는 대리로 승진했다. 생일 파티는 저택 밖에 있는 테라스나 따로 별장을 써서 친구들을 초대해 크고 화려하게 진행하기도 했다. 겉으로 힐다는 이게 사는 낙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지만, 전혀 그런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직장에서 승급해도, 새로운 프로젝트의 주인공으로서 이리저리 세미나를 나가도, 마음 한쪽이 어딘가 아린 부분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저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간절히 쫓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단순히 기분 탓이라고 정의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보통 그런 기분이 몇 년에 걸쳐서 드는 기분은 아닐 거라고 힐다는 생각했다. 그녀는 가만히 오빠의 일을 돕는 김에, 백화점 안에 있는 작은 미술관을 둘러보았다. 그 미술 안쪽에는 여신과 함께 그 주변을 둘러싼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뭐야, 오빠도 나름 센스가 늘었네. 예전에는 이해하기 힘든 그림만 걸어놓더니.”
평소 힐다의 오빠는 힐다가 보는 ‘미감’이라는 게 자기 동생보다는 못해서 늘 동생이 좋아하는 걸 알아서 찾아내라고 측근들한테 말해뒀다. 이럴 때를 보면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는 마음은 들었지만, 힐다의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아리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살짝 늦은 시기에 가족한테 선을 보러 다닌다거나, 다른 남자를 만났다. 하지만 어째선지 그 애인들이 자신한테 잘해줄 때마다 눈물이 멈추지 않고 쏟아져 나올 때도 있었다. 정말 슬픈 감정이 힐다를 감싸는 듯이 말이다.
‘누군가가 심장을 잡고’ 있다면, 그 아픔과 비슷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그 슬픔을 놓아버렸지만 말이다.
아무튼, 보통 천사라는 건 힐다 안의 이미지에는 착하고,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이미지였다.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니까, 오히려 순수할 수도 있는 거 아니겠어? 한편으로, 힐다는 이런 생각도 더해서 했다. 어느새 옆에 다른 여자가 그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힐다는 누가 봐도 자기를 봐 달라는 식으로 다가온 여자를 가만히 물끄러미 쳐다봤다. 여자는 힐다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살짝 붉어진 얼굴로 그 그림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천사, 좋아하세요?”
‘뭐야, 여자가 나한테 관심 둬 주는 건 처음인데.’
힐다는 나름대로 질색하는 말을 속으로 했지만, 내심 좋은 기분을 겉으로 감출 수 없었다.
“좋아한다기보다는 흥미가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그쪽의 언니는 어때요?”
벌써부터 이리아한테 호기심 어린 듯한 태도로 응하는 힐다를 보고, 이리아도 마음속부터 뜨겁게 올라오는 감정으로 웃는 얼굴로 표현했다.
아마도, 이렇게 평생 같이 있겠지. 어느 정도 시간이 들어가도.
‘그렇지? 힐다.’
이리아는 정해둔 반려를 보며 누구보다 다정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아마도 이리아는 힐다가 바라지 않더라도 영원을 기대할 게 분명했다. 천사의 삶이란 무한하니까, 언제든 기다려 줄 수 있었다. 분명 힐다의 생각은 이리아한테는 쉽게 읽을 수 없을 테고, 그녀와는 생각도 다르겠지만 말이다. 분명 이리아와는 다를 게 분명하다. 설령, 그 길이 서로 원하지 않은 길이면 어떤가? 두 사람은 앞으로 같이 부딪치고, 같이 의지하면서 그 길을 걸어갈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두 사람’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법이니까. 언젠가는 다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