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묵이 채은의 작업실에 놓인 매트리스 위에서 책을 읽던 어느 늦은 밤이었다. 허묵은 책을 읽다 문득 채은의 뒷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며 시야에 담았다. 다소 구부정한 자세로 노트북 화면에 고개를 가까이 댄 모습은 누가 봐도 건강하지 않았다. 허묵은 읽던 책을 덮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의자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채은이 곧 뒤를 돌았다. 앞머리는 헤어롤로 말고 두꺼운 알이 끼워진 원형 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귀여워라. 애써 말을 삼키고 허묵이 그녀의 어깨를 약하게 두어 번 두드렸다.
“채은 씨, 자세가 잘못됐잖아요.”
“어, 교수님?”
“허리는 이렇게 등받이에 대고, 고개는 등과 직선이 되는 게 좋아요.”
허묵은 두 손으로 채은의 자세를 교정해 주며 걱정스러운 한숨을 쉬었다. “바보, 당신은 내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래요?” 그제야 제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채은이 멋쩍은 듯 헤헤, 하고 웃었다. 그 웃음에 허묵은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대답을 무마했다. 이윽고 그녀의 눈을 마주하던 허묵이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댔다. 따스한 온기가 맞닿자 채은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당신, 시력이 많이 떨어진 건 아니죠?”
“그럴 리가요. 대학에 온 후로 시력은 떨어진 적이 없는 걸요!”
“검사는 꾸준히 받았어요?”
“이래 봬도 반년에 한 번씩은 검사받고 있어요.”
그 점은 잘하고 있네요. 칭찬해 줄게요.
허묵은 붉게 달아오른 채은의 볼 위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채은이 이대로 좋지 못한 자세로 작업을 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쨌든 문서 작업이 주된 업무이고, 앞으로도 그렇게 될 테니까. 허묵은 채은의 노트북 옆에 놓인 탁상 달력을 응시하곤 물었다. “마지막 검사는 언제였는데요?” 채은은 고개를 기울이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검사받을 때가 되긴 했네요.” 허묵은 미소 지으며 비어 있는 달력의 주말 칸을 검지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날, 나랑 같이 안경 맞추러 갈까요?”
“좋아요! 안경 맞추고 나서는 같이 데이트해요!”
“바보. 당신과 함께하는 일이라면 뭐가 됐든 데이트예요.”
그렇게 두 사람은 돌아오는 토요일 아침 꽃나무로의 한 안경원으로 향했다. 그곳은 허묵이 잘 알고 있는 안경사가 운영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선 허묵과 채은을 기다렸다는 듯 반갑게 맞이했다. 채은에게는 오른손을 내밀며 허 교수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두 분 모두 새로 맞출 거라고 했죠? 디자인부터 정하시겠어요?”
“…어? 교수님도 새로 맞추시게요?”
“네, 당신과 같이 온 김에 겸사겸사. 저도 마침 새 안경이 필요하기도 했고.”
“그럼 우리 커플 안경 맞춰요! 저, 그런 거 해 보고 싶었어요.”
“좋아요. 당신이 하고 싶은 거라면 뭐든 같이 해요.”
허묵과 채은은 수많은 디자인의 안경테 앞에서 어떤 안경을 고를지 한참을 고민했다. 채은이 쓰고 있는 디자인과 비슷한 원형 모양의 안경도 있었고, 모서리가 약간 뭉툭한 사각형의 안경도 있었다. 재질도 금테부터 은테, 플라스틱까지 다양했다.
채은은 이 안경, 저 안경 써 보며 연신 거울을 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허묵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거나 웃으며 ‘잘 어울려요.’라는 반응을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같이 맞추러 왔다면서?!’ 심통이 난 채은은 제가 쓰고 있던 금테 원형 안경을 벗어 그에게 건넸다. 교수님도 써 봐요! 허묵은 그녀가 건넨 안경을 받아들고 거울 앞에 섰다. “안 어울려도 놀리면 안 돼요.” 장난스러운 말이 뒤따랐다.
“헐.”
“왜요? 이상한가요?”
“아니, 그게… 와… 대박.”
채은은 두 입을 틀어막고 허묵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뇌리엔 그동안 그녀가 연모대의 대학가에서 얼핏 보았던 남학우들이 스쳐 지나갔다. 이렇게나 안경이 잘 어울렸던 남자가 있었던가? 좋아했던 아이돌 이후로는 없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 교수님이 백 배, 아니 천 배는 더 잘생겼다. 두 볼이 화륵 달아올랐다. 이건, 이건 반칙이지! 채은이 못다 한 말들은 입안에서 뱅뱅 맴돌기만 할 뿐이었다.
허묵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저를 바라보며 어버버, 말을 더듬는 채은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채은은 얼굴과 표정에 자신의 기분과 생각이 그대로 드러나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저 얼굴은 필시 사랑에 빠진 얼굴일 것이라고, 허묵은 확신했다. 그 상대가 자신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도 그는 잊지 않았다.
“내가 그렇게 잘 생겼어요? 왜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요?”
“그, 그걸 말이라고…! 엄청 잘생겼어요!”
“그래요? 얼만큼요? 당신 생각을 듣고 싶은데. 들을 수 있을까요?”
정말이지 교수님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채은은 저만치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안경사와 직원들을 힐끗 바라봤다. 이미 그녀의 얼굴은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홍당무가 되어 있었다. 채은은 허묵의 소매를 약하게 끌어당겨 제 쪽으로 가까이 오게 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세상에서 제일, 제일 잘생겼어요.” 만족스러운 대답에 허묵이 그녀의 콧잔등에 짧은 입맞춤을 남겼다.
“고마워요, 홍당무 아가씨. 안경을 쓴 당신도 아주 귀여워요.”
“…얼만큼요?”
“나만 볼 수 있는 곳에서 나만 혼자 보고 싶을 만큼. 아주 사랑스러워요.”
그리고 또다시 볼에 쪽, 하고 가볍게 허묵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채은은 그의 말에 당황한 나머지 저편에서 그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던 안경사를 불러 “이, 이걸로 두 개 할게요!” 하고 소리쳤다.
각자의 몫의 안경을 맞추고 안경원을 나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횡단보도 앞에 섰다. 채은은 고개를 들어 허묵을 바라보았다. 제가 쓰고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안경, 그리고 안경사가 서비스로 준 금속의 안경줄이 햇빛을 받아 그의 얼굴을 더욱 찬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편 채은의 시선을 의식한 허묵은 그녀를 바라보고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채은의 손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그가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그들의 데이트는 지금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