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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 씨,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어요?"

"뭔데요?"

"오늘 만날 때 위아래 다 파란색으로 입고 와줄래요? 청난방에 청바지. 나 그거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까지 말하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었으므로, 그리고 무엇보다 윤경이 좋아한다고 했으므로, 무영은 그대로 하였다. 사실 무영은 색상을 불문하고, 난방 셔츠를 이용한 캐주얼한 의상 조합을 자주 입었다. 움직이기 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윤경은 유독 파란 상의와 파란 하의의 조합을 좋아했다.

 

"파란색이 무영 씨하고 잘 어울려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무영 씨가 입으면 더 멋지고요."

"이유가 뭐예요? 내가 잘생겼다, 이런 이유 말고."

"그게 가장 중요한데! 다른 이유…… 글쎄요. 그냥 직감? 바다 같이 깊은 생각과 불꽃 같이 강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라."

"바다는 이해가 되지만 파란색인데 불꽃이라니."

"에너지가 클 수록 불꽃의 색이 푸른색에 가깝대요. 가스레인지 쓸 때 자세히 봐요. 푸른색일 걸요. 그만큼 뜨겁다는 얘기예요."

 

이러한 대화를 나눈 뒤로, 윤경을 만나야 할 일이 생기면 파란 옷을 자주 입었다. 그럼에도 오늘 아침, 윤경은 전화까지 하면서 무영에게 청색 상의와 청색 하의를 입고 오라고 했던 것이다. 부탁의 이유는 윤경을 만나면 알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무영은 청색 난방 셔츠와 청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무영 씨!"

 

약속 장소에 먼저 도착한 윤경이 무영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그 인사에 답하려는 찰나, 무영의 눈에 윤경의 옷차림이 들어왔다.

 

파란 난방 셔츠와 청바지.

윤경은 무영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이러려고 나한테 부탁했어요?"

"서프라이즈! 어때요?"

"하여간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그냥 솔직히 말하면 되는 거 아닙니까. 커플룩 입고 싶다고."

"그래서, 싫어요?"

"아, 아니, 싫다는 건 아니에요. 언제부터 계획한 거예요?"

"며칠 전에 옷을 사러 갔어요. 편하게 입을만한 게 적은 것 같아서.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청색 셔츠가 보이는데 무영 씨가 생각나는 거 있죠. 그래서 한 벌 샀어요. 청바지는 자주 입던 거고. 이왕이면 무영 씨한테 조금 특별하게 보이고 싶어서 머리 좀 썼어요. 무영 씨랑 커플룩 입어보고 싶었는데, 일부러 옷을 사러 가는 게 혹시 부담이 되는 거 아닐까 해서요."

 

조잘조잘 설명하는 윤경을 보며 무영은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윤경은 늘 무영을 우선으로 생각했고, 무영에게 거리낌 없이 자기 마음을 드러냈다. 이런 사람은 무영의 인생에서 윤경 밖에 없었고, 윤경이 처음이었다.

 

"그럼 오늘 사러 가죠. 윤경 씨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걸로. 물론 지금도 좋지만 다른 종류의 커플룩도 하나 구비해두는 것도 괜찮잖아요. 돌려가며 입게."

"그래도 돼요?"

 

무영은 대답 대신 윤경의 손을 잡았고, 윤경은 그 의미를 알았다. 윤경 자신의 손에 전해지는 무영의 온기는 언제나 확신과 편안함을 전해주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두 사람은 앞으로 같이 맞춰 입을 옷을 사러 왔다. 하지만 막상 수많은 옷들을 보다보니 막막해졌다. 도대체 어떤 옷을 사야 하는지가 문제였다. 이들은 사실 새로운 옷을 살 기회가 없었다. 거의 모든 시간을 취재하는 데에 썼으니. 쇼핑도 해본 사람이 더 잘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또한, 이들이 취재하러 가기에 편한 옷을 사야 자주 입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도 만날 입는 거 말고 다른 스타일이면 좋겠는데……"

 

윤경은 옷들을 둘러보며 고민에 빠졌고, 무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아, 저거."

 

작은 탄성이 섞인 목소리를 내뱉은 윤경이 가리킨 건 맨투맨 티셔츠였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요? 실용성 있고. 디자인은……"

 

들뜬 표정으로 이 옷 저 옷 자세히 살펴보는 윤경을, 무영은 계속 바라보았다. 그것만으로도 무영에게는 작은 행복이었다.

 

"모르겠다. 무영 씨가 색 골라볼래요?"

 

난감해하는 윤경이 도움을 요청했다. 무영은 옷들을 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밝은 보라색 맨투맨 티셔츠를 집어 들었다.

 

"이거, 윤경 씨하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정말요? 그런데 무영 씨도 같이 입을 거니까 무영 씨한테도 마음에 들어야죠."

"마음에 들어요. 처음부터 윤경 씨한테 어울리는 걸로 산다고 했잖아요."

 

붉은색과 푸른색이 혼합된 보라색. 예민한 감성과 예리한 이성을 품고 있는 윤경과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무영은 이 색을 골랐으리라. 흔들림 없는 무영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경은 마음을 놓았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게 꽤 많은 것 같아요."

 

옷을 사고 돌아가는 길에 무영이 말을 꺼냈다.

 

"저번 내 생일에 윤경 씨가 만든 십자수 열쇠고리. 그것도 같이 가지고 있고. 오늘 산 이 옷. 그리고 주고 받은 편지들."

"내 목표가 잘 이뤄지는 것 같은데요?"

"목표?"

"나와 관련된 특별한 흔적을 무영 씨한테 많이 만들어주기. 우리가 서로 다치지 않고도."

"'다치지 않고도.'라는 말이 가장 좋네요."

"나는 무영 씨가 더 이상 다치지 않기를 바라요. 그보다는 행복이나 즐거움 같은 감정이 무영 씨에게 일상이 되면 좋겠어요."

 

무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 중 자신의 행복을 가장 많이 원하는 사람은 어쩌면 자신이 아니라 윤경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 내가 바라는 것도 하나 맞혀봐요."

"하나만?"

"일단 지금 내가 말하고 싶은 거 하나만."

"음, 힌트 없어요?"

"사해재단 관련 말고."

"그럼, 나랑 오래 함께 하기?"

"그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무영은 걸음을 멈추고 윤경과 시선을 마주했다.

 

"함께 가진 것도 많고, 내가 있으니까, 윤경 씨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경은 그 말을 듣자 미소를 짓고, 고개를 들어 무영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추었다.

 

"목표 달성. 확인."

 

윤경의 밝은 목소리에 무영도 웃었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은 채 길을 걸어갔다.

두 사람은 당연하게도, 여전히 푸른색 상하의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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