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과 함께라면 몇 번이고 끝을 반복한들 좋으리라고, 그리 생각하고 마는 날이 있었다.
그러한 종말을 몇 번이고 즐길 수 있으리라고, 그리 믿고야 마는 날이 있었다.
꼭 연인의 품이 간절한 날이었다. 누구보다 절망에 가까운 단테와 그가 휘감은 고상한 종언, 진득한 어둠에 붙들려 가라앉는 감각이 그토록 사무치는 날이었다.
단테, 당신의 너른 품에 파고들면 단단한 팔은 자연스레 허리를 감싸며 맞닿은 체온을 더더욱 강하게 붙들곤 했다. 먼저 안겨올 만치의 각오를 직접 시험해야 마땅하다는 듯 당신이 만족할 때까지 빠져나가지 말라는 의미의 몸짓이었다. 잃을 것 하나 없는 조건에 불만 없이 응하며 엷은 천을 사이에 둔 마냥 좁혀진 거리는 당신의 온몸으로 아로새긴 열애가 그러하듯 자연스레 스며왔다. 그대로 가느다란 숨이 맞닿는 틈을 타 입맞춤을 하거나, 엷은 천마저 걷어내고 체온을 나누는 일 역시 서툴지 않았다. 본능적인 발버둥에 가까웠던 탓이다.
만월은 억누른 본능을 깨운다고 했던가. 본능을 깨우는 것이 만월이라 한다면, 우리는 서로에게서 눈이 시리도록 어스름한 달을 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은은한 달빛은커녕 그와 정반대의 진득한 욕망만이 비친 걸 보면 하늘에 무엇이 솟았는지 따위는 그저 명분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적나라한 본능의 연원을 감은 눈꺼풀 위에 얹어 감추고 그 위에 아른한 달빛을 녹일 따름이었으니까. 누굴 속이기 위함이었을까, 어쩌면 나 자신을 향한 기만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본능을 틔운 기원이란 탈을 쓰고야 만 만월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할 모양새로 조각나 달큰한 편린이 되어 서로의 어깨에 쏟아져 내렸다. 그 잔해를 잔잔히 쓸어 떨구면, 빛을 잃은 바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추락하듯 날카로이 쏟아지는 미약한 바람이 뺨을 스치는 감각. 오싹하리만큼 서늘한, 다만 그럼에도 결국 사랑할 수밖에 없는 향이었다.
꺼진 바닥은 어쩐지 질척한 무언가를 넘치도록 담은 찻잔과 닮았다는 감상을 틔우곤 했다. 당신의 향으로, 당신의 체온으로, 당신의 모든 숨으로 본능의 갈증을 채우고 나면. 낯설도록 폐에 오롯이 들어찬 열망하는 숨에 잠겨 단테, 당신의 숨방울만을 보글거리는 입이 빠끔거렸으니까. 자신의 욕망으로 들이켠 숨이 되려 제 숨통을 열망하다 못해 모든 호흡을 겨눈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이야기가 있을까.
보잘것없는 발버둥이 빚는 진혼곡.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실낱같은 몸부림이 연주하는, 절망에 바치는 희곡. 이를 바칠 대상은 절실히도 어리석은 낙원의 사람들이라고, 아득히 먼 과거로부터 기다려 온 이야기 속에는 자신 역시도 주역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잠긴 몸뚱아리 구석구석에 보이지 않는 실을 매어두었을 게 분명한 당신의 숨으로 그득 찬 폐가 아린 감각과, 그에 응하듯 시큰거리던 눈가의 쓰린 감각은 여전히 선연하다. 익숙지 않은 열기 탓이었다. 끝없는 어둠에 가라앉는 손끝은 시리기만 하고, 디딜 기반을 잃은 다리 역시 불온한 공허감에 옴찔거리는 정도가 다인 몸짓 너머로, 아른하게나마 단테의 흔적이 닿은 자리만이 열꽃을 피우고 그리 붉도록 물든 자욱을 자랑하곤 했다. 서늘한 바람을 들이켜던 폐부에 그만치의 열을 머금었으니 아릿하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버티지 못할 만큼의 고통이냐 묻는다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지만. 자그마한 욱신거림에 바르작대는 손끝을 알아차렸는지 바닥을 기듯 낮은 목소리가 손바닥을 뜨겁게 감싸 쥐었더랬다.
“두려운가?”
“이제 와서?”
“나약한 면이 드러나는 데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니 말이다.”
소리 없는 웃음이 나직하게 따랐던가. 묻는 두려움의 대상이 당신인지, 밑으로 가라앉는 감각인지, 혹은 머리를 어지러이 뒤섞는 열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무엇 하나 겁을 자아내는 건 없었으니 정말이지 의미 없는 질문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혹은 알면서도 부러 확답을 구한 걸지도 몰랐으나,
“당신을 감당하겠다고 했잖아. 내 의지로.”
이 극이 어떤 결말을 맞든 그건 당신이라는 절망을 택한 내가 오롯이 견딜 일이라고. 지독하리만치의 연정만큼이나 멈출 수 없는 소리로 속삭이면, 그리 대답해야 비로소 당신의 것이라 불릴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듯한 눈이 가늘게 접혀왔다.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더욱 깊이 가라앉는 것만 같다는걸, 당신은 알까.
이토록 끝없는 추락을 우리의 낙원으로, 자유를 사랑한 누군가가 그토록 바랐던 끝없는 낙원으로써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표정을 할까. 걸음을 내디딜 필요조차 없는, 가로가 아닌 세로로 늘어뜨려 내려앉는 것밖에 남지 않은 우리의 낙원은 꼭 절망을 닮았노라고. 떠올린 그대로의 말을 건네면 뱀처럼 가느다랗게 치켜뜬 진분홍빛 눈동자는 어떤 형상으로 나를 그려낼까. 어렴풋한 상념과 함께 시선 속에 당신을 담았다.
끝이 비치지 않을 만큼의 검은 음색이 마냥 어스름하지만은 않은 리듬을 짓이겨 게워내던 날의 노래는, 영영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