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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짧게 내지르는 기합음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그의 목소리는 낡은 햇볕이 남기고 가는 땅거미처럼 부드러움과 잔잔함이 고여 있었다. 꼭 장르 소설 속에 등장하는 과묵하고 진중한, 하지만 여주인공이 언비를 맞고 있으면 두말없이 입고 있던 코트를 어깨에 걸쳐줄 것만 같은 그런 남주인공의 차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 그의 진중함과 과묵함이 그런 목소리를 더욱 돋보이게 해, 다 구워진 생선을 꼬치에 꿰어 먹으라고 내미는 그 말 한 마디도 귀에 오래도록 고여 한동안 증발할 생각을 하지 않곤 한다. 그저 내가 그를 각별히 여겨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래, 바로 이런 식으로 말이지. 검붉게 흐른 핏자국이 가루처럼 굳은 것을 물로 닦고 반창고를 붙여주다 말고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처가 물에 닿아서 살짝 따끔거릴 법도 한데, 그는 표정을 찡그리지도 않았다. 할렘 가는 깨끗한 물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미리 챙겨온 물이 이제 슬슬 다 떨어져가고 있었다. 내일 쯤 할렘에서 있던 일들을 센트럴파크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아있던 거즈를 반창고에 접합시켜 그에게 붙여주었다. 하지만.

 

 

“뭐가요?”

 

 

그는 말을 고르는 듯 속눈썹을 내리깔았다. 그의 왼팔은 이제 완전히 온기가 빠져나간 소년의 머리카락을 말없이 다독이고 있었다. 할렘에서 죽기 싫어서, 채찍이나 날카로운 것들을 피해 무턱대고 타락한 숲을 앙상한 다리로 달렸을 아이.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는 그릇의 크기나 그로 인한 약탈에 숙명처럼 따른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기에, 아이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살짝 날을 눕힌다는 것쯤은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이상하지. 일시적으로나마 일은 일단락됐는데,”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살짝 멀어진 손이 주먹을 쥐는 것이 보였다. 검은 털가죽이 달린 어깨가 어쩐지 무겁게 보여서 나는 무심결에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도닥거렸다. 한숨 섞인 그의 목소리가 황망하게 나를 올려다본다. 많은 것을 잃어버린 눈. 어쩌면 우리가 앗겼던 것은 소년의 목숨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형편없이 실패한 기분이 드는 거지. 그 말은 사실 살껍질이 너덜너덜해서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마음 같아서는 그런 그의 어깨를 살짝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나는 이것이 좋지 않은 답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자신의 과거를 투영한다는 것은 실패감을 증폭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만드니까. 그리고 누군가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그저 그의 시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할렘의 풍경에서 차디찬 기운이 서린 석벽을 바라보기로 했다. 똑같은 풍경을 바라보았음에도 사람들의 갈림길은 사람들의 수처럼 나뉜다. 하물며 우리가 어떻게 감히 같을 수가 있었을까. 갓난아기일 적부터 최소한의 자주성을 박탈당하고 핍박받는 것을 의무처럼 배운 저 조그마한 아이와, 그런 애를 쓰라린 시선으로 줄곧 응시했던 우리가.

 

 

그렇게 풍경을 반추하고 나서야 희미하게 짚이고 읽히는 것이 있다. 나는 저 아이 또래처럼 몸이 줄어든 당신을 쓰다듬어 주는 것처럼 가만히 쳐다봤다. 얼핏 들으면 맥락이 없는 말들이 사실은 그저 그의 자괴감이라는 너덜거리는 고리 하나에 묶인 것이 안타까웠다. 발버둥 끝에 당도한 아이의 죽음과 무력감은 시체가 썩고 시간이 흐르며 차츰 풍화되어 사라지겠지만 지금 그는 상처투성이였다. 갑자기 할렘 일대를 들쑤신, 조류인지 악마인지 모를 것들은 괴상한 만큼이나 기이한 수법으로 그의 갑주를 깨부수고 생살을 찢어 부상을 입혔다. 그 사실과, 그 기괴한 몬스터들 이상으로 흉측한 것이 그의 정신을 누르고 있는 한 버거운 고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당신이 주저하며 어설프게 누수하는 어리광을 아무도 모르게 받아낸다는 것. 기실 내가 어깨에 두른 것은 실용성일랑 없는 장식용 망토였지만 잠에 든 소년이 추위에 몸을 웅크리지는 않을 테다. 언제든지 다시 깨면 우리와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게끔. 그가 그렇게 믿을 수 있게끔 그의 마음 어딘가에 남았을 상처를 핥으며. 그리고 이 노래가 상처투성이의 그에게도 부디 닿을 수 있도록.

 

 

바람에 실려온 꿈의 조각들 다시 선명해지는

내안에 숨쉬던 너를 기억해

난 기억해 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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