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루 아래에서 봄비처럼 쏟아졌던 소담한 비는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성어귀를 퍼붓고 있었다. 비가 내렸다. 귓가 신경을 거슬리고 머리 한쪽을 아프게 두들기는 빗소리였다. 마르셀이 연속된 업무로 잠을 잘 자지 못해 보통의 빗소리가 신경질적으로 들릴지도 몰랐다. 그녀는 유리 창 너머 문밖을 힐끔 보고는 자리에 앉았다. 회의장에 미리 가 있을 생각을 했다. 마르셀은 시계침이 움직이는 소리에 촉각을 기울인 채 팔을 톡톡 두들겼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긴 장대비는 마르셀의 옷깃을 젖게 할 것이 분명하였으나 페이지를 수십번 반복해 넘겨야 적성이 풀리는 그녀는 그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마르셀은 업무를 확인하기 위해 발걸음을 빨리 하여 회의장에 갈 생각을 했다. 쇼파에 걸쳐놓았던 코트를 가볍게 걸친 마르셀에게 귓가에 느지막한 남자의 음성이 들렸다. 마르셀 재상님. 흰 코트에 우아한 조끼를 여민 남자는 입꼬리를 올리고 마르셀에게 말을 기울였다. 비가 그치고 출발하시지요, 옷깃이 젖습니다. 회의시간은 한시간이 족히 남았습니다. 회의장은 아가씨가 알다시피 채 10분이 떨어지지 않는 거리에 있습니다. 서둘러서 옷깃을 공연히 젖게하지 마십시오. 왕가의 윗선은 아가씨가 체통을 지키길 원하시지요.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손매를 모았다 마르셀에게로 시선을 모로 돌렸다. “홍련, 체통이란 단어처럼 제게 안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까요. 저는 화려한 옷을 입고 봉을 들고 성내를 거니는 왕과 우아함과 격식으로 왕내를 빛내는 귀족이 아닙니다. 제가 지킬 것은 통치자의 자격과 바름이며 그것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회의장에 일찍 가있어 살피는 예절일겁니다. ” 홍련은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하고는 눈매를 부드럽게 접었다.
“예, 제가 동행하지요. 재상님. 신하된 바로 예절을 다한다는 재상님의 말을 지나칠 수는 없으니까요.”
홍련은 알 듯 모를 듯 이중 삼중으로 베일에 쌓인 표정을 짓고 곁에 놓인 우산을 두 개 집어들어 마르셀에게 건네었다. 마르셀은 어릴적 엄격한 아버지 아래에서 배운 원칙을 엄수하라는 학자적이고 완고할 수 있는 풍모를 깊이 간직했기에 원칙에 있어서는 져버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정갈히 차곡차곡 삐져나온 곳 없이 쌓인 서류, 예리하게 깎여진 펜날, 정확한 시간을 가리키는 시침과 분침은 그녀의 성정을 어루 짐작하게 했다. 마르셀은 정갈한 글씨로 글씨가 써내려가진 책을 접고 긴 회랑을 걸어 밖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비는 거리낌없이 하늘에서 저를 쏟아내고 있었다. 당을 나와 초목이 화사한 정원을 거쳐 걸어갔다. 돌로 연이어진 길은 폭우를 다 배수하지 못하여 빠져나가지 못한 물은 정원에 꿈뻑거리며 남은 물기를 차올리고 있었다. 지독한 폭우였다. 긴 장화를 신고 나오지 않았다면 다시 돌아가 밑창이 젖어 스펀지같이 된 신발을 갈아신어야 할 날씨였다. 홍련은 마르셀을 뒤따르며 시선을 쫒았다. 긴 코트를 걸치고도 마르셀의 옷이 비에 담뿍 젖어들고 있었다. “마르셀 재상님.”
홍련은 걸음을 멈춰섰다 마르셀에게 다가갔다. 홍련은 저의 백색 코트를 벗고 마르셀에게 옷을 걸쳐주려는 듯 그녀의 어깨에 살폿 힘을 주고 눌렀다. “홍련.” 극구 사양하는 음색이었다. 마르셀이 둘의 좁혀질 수 없는 거리감을 작은 단어로 경계선을 긋고 표현하는 것이 습관이었기에. 홍련은 빙긋이 입꼬리를 끌어다 웃고는 대답했다. “회의에 참석하실 분께서 코트 옷깃이 젖어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물기가 흐르는 것은 아가씨의 청산유수인 말만으로 충분하니까요. 그 물기는 회의를 진행하는데에 쓰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 킴블리는 마르셀의 어깨에 코트를 걸쳐주며 코트 자락을 마르셀을 감싸도록 앞으로 당겼다. 닿는 남자의 손이 따스했고 빗가에 젖은 녹진한 온기가 그의 손매에 부드러히 흐르고 있어 마르셀은 그를 당장 껴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도피처는 없다. 가까이 있으면서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은 우리 사이를 늘상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