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네임리스 트리퍼 드림입니다. 작품의 주요 스포일러가 마구 튀어나옵니다.
“연등, 영감에게 말 전하고 왔어.”
“수고했다, 흑학.”
드디어 최종장인가. 말하자면 가망 없음, 아니, 엔드게임이라는 거지. 멀찍이서 완성된 신계를 둘러보던 나는 시원하게 기지개를 켜 몸을 풀었다.
제대로 된 보패도 없긴 하지만, 5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열심히 연등류 도술을 익혔으니 두렵진 않다. 슈퍼보패를 가진 선도들이랑은 비교도 안 되겠지만, 적어도 연등도인의 3분의 1 정도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이 싸움의 주인공은 시조들이니 내가 앞에 나설 일도 없을 테고 말이지.
“어이, 너도 출발 준비 해. 연등이 기다린다고.”
“알아. 안다고. 보채기는….”
조금 더 감상에 젖어있고 싶었는데, 이 눈치 없는 사형이 또.
자꾸만 재촉하는 흑학에게 못마땅한 눈빛을 보낸 나는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연등도인 옆으로 슬쩍 다가가 그의 얼굴을 살폈다.
“오랜만에 누님을 보겠네요, 연등도인.”
“그렇겠지. 잘 계시겠지만 걱정이군.”
역시 시스콘. 아니, 지금은 걱정하지 않는 게 이상할까. 용길공주는 강해도 환경에 따라 제약을 많이 받는 몸이니, 여와와의 싸움 중 쓰러지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뭐 나는 이 이후 결말을 대충 알지만…, 쉽게 그걸 말해 줄 수는 없지. 그건 스포일러라고. 스포일러. 그냥 어제 개봉한 영화 스포일러도 아닌, 이 세상의 존속과 관련된 스포일러란 말이야!
내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바뀔 수 있다. 나는 이 역사의 간섭자니까. 어쩌면 여와보다도 더 위험한 존재 아니겠는가. 물론 여와에게도 나의 위험성은 매복지뢰 수준이겠지만. 와, 이렇게 쓰고 보니 나 완전 위험한 놈 같잖아.
“너.”
“네?”
“그동안 고생했다.”
“…저기, 아직 여와도 안 쓰러뜨렸거든요? 벌써 마지막 같이 말하지 마세요!”
“그래도 고생한 건 사실이니까.”
아니 이 사람이 갑자기 왜 이런데. 평소엔 잘했다는 말도 잘 안 해주는 분인데. 이거 완전 사망플래그 같지 않은가. 아, 물론 안 죽는다는 건 알지만! 이미 ‘나’라는 변수가 생긴 지금은 모든 게 불안한데!
“…그 말, 다 끝나고 나서 다시 말해주면 안 될 까요?”
“뭘 그렇게 질색하는지 모르겠군. 우리가 질 것 같나?”
“아니 그건 절대 아닌데요, 제가 겁이 많아서 별별 일에 다 불안해져서.”
“누가 겁이 많다고?”
내 마음을 알 리 없는 흑학은 얄밉게도 나와 연등도인 사이로 머리를 내밀며 말에 끼어들었다. 아아, 저 재앙의 부리! 하지만 500년 쯤 지나면 사람은 해탈하기 마련이죠. 속세에 찌들었다가 트립하여 얼렁뚱땅 도사가 된 저 조차도 어느 정도 득도를 해버렸다 이겁니다. 옛날 같으면 ‘조용히 해! 흑학!’이라 외쳤겠지만, 이젠 아니라 이거야.
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정확하게 흑학의 주둥이를 잡아 그 입을 다물게 한 후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고생은 연등도인이 더 많이 했죠. 신계도 만들어야 하는데, 저도 가르쳐야 했고.”
“고생이라고 할 것까지야.”
“어쨌든, 드디어 이 봉신계획도 끝이 보이네요! 힘내자고요!”
힘차게 외치며 흑학의 주둥이를 놔준 나는 두 손으로 정성스럽게 모자를 고쳐 썼다. ‘푸핫!’ 급히 숨을 몰아쉬며 요란한 소리를 낸 흑학은 나를 매섭게 째려보더니, 내 손길이 닿지 않을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흥, 애초에 넌 모든 결말을 다 알고 있잖아? 긴장할 필요가 있나?”
“어휴. 어떻게 놓아주자마자 다시 잡고 싶게 만드는 거람? 밉상이야, 밉상.”
“하지만 사실이지 않나? 안 그래, 연등?”
흑학의 질문에 연등도인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망토에 달린 후드를 덮어썼다. 하하! 무시당했군, 흑학! 내가 이겼다! 아까 내가 느낀 얄미움을 그대로 상대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혀를 내민 나는 아예 손가락 욕도 해주려고 했지만, 타이밍 좋게 연등도인이 돌아보는 바람에 손을 올릴 틈도 없이 혀를 집어넣어야 했었다.
“솔직히.”
“네?”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긴 했지, 너는 미래를 아니까 모든 것이 가소로워 보이지 않을까 하고 말이야.”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 그렇게 거만해 보였나? 예상 밖의 발언에 내가 얼어버리자, 연등도인은 천천히 앞서나가며 하려던 말을 마저 뱉어내었다.
“너는 출신도 정체도 굉장히 불확실했으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곤륜 전체가 놀아나는 게 아닐지 걱정했다. 달기가 인간들을 골려먹고 주무른 것처럼 말이지.”
“…정말요?”
“하지만 같이 다니다 보니 알겠더군. 넌 그렇게 간사한 인물은 아니라는 걸. 물론 좀 정신없고 가벼운 성격이긴 해도 성격과 인격은 별개니까. 네가 이 세계에서 우리의 미래를 바란다는 걸 알게 된 그때부터, 널 신뢰하기로 마음먹었다.”
“…연등도인….”
‘후우.’ 짧은 한숨을 내뱉은 그는 공중에서 경악중인 흑학에게 먼저 가라는 듯 손짓했다. 뭐라 대꾸할 틈도 없이 날아가는 흑학과 달리 움직이지 않고 계속해서 날 보는 그는 갑자기 애써 덮어썼던 후드를 벗곤, 내 모자를 슬쩍 비껴 올려 눈을 맞춰왔다.
“너는 나를 믿나?”
“…아, 아, 안 믿는데 따라다녔을 리가 있을까요?”
“달리 방법이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
“믿어요. 믿는다고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연등도인만큼 올곧고 청렴한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어쩐지 점점 얼굴이 뜨거워지는 느낌인데. 혹시 지금 나 부끄러워하는 건가.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바다 빛 눈동자는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더없이 강인하고 아름답다. 아아. 방금도 말했지만, 정말로 저 사람만큼 올곧은 이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얼핏 보면 무서울 정도로 딱딱하거나 냉정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연등도인은 정말로 정의롭고 옳은 걸 위해서 힘쓸 줄 아는 사람이다. 비록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른 인물일지라도, 적어도, 내가 간섭한 이 세계에서의 히어로는.
“네가 보여줄 기적을 믿겠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지.”
내 모자를 잡은 손을 놓은 연등도인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아. 기적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걸 당신은 왜 모를까. 내가 곤륜에 와서, 당신을 따라 나서게 된 그 자체가 기적인데.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아, 마지막 싸움의 앞까지 오게 된 자체가 기적인데.
“어이, 안 와?!”
“지금 간다.”
흑학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앞장서는 연등도인을 뒤따라가면서 나는 미소가 번진 얼굴을 마른세수로 씻어냈다. 드디어 태공망 일행과 만나는데, 이런 얼굴로 인사할 수는 없지. 귀 끝까지 차오른 열기가 사라질 때 까지 얼굴을 문지른 나는, 한참 뒤에야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 앞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라도, 내가 아는 미래와 다르더라도 분명 괜찮을 것이다.
나는 이 세계의 인물들을 믿고, 연등도인이 날 믿고 있으니까.
‘그러니, 당신도 나를 믿어줘요. 시조 님. 당신 동료가, 신농이 보낸 사람이 바로 나니까.’
반드시, 이 세계에 자유를.
그들의 이야기의 올바른 완결을 위해. 나는 이곳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