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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광활하고, 어둡고, 피비린내가 나는 트와일라잇이었다. 그런 전장의 위에 서 있는 남자의 도포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휘날렸다. 신경이 쓰이지도 않는 것인지, 흘러가는 바람의 뜻대로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도포를 걸친 남자는, 한참이나 전장을 관찰하였다. 그러다 문득, 무엇이라도 생각난 듯이 제 손에 걸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 이러다 늦겠군. "

 

철컥, 남자의 위치를 파악한 포탑의 장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강한 바람이 공기를 갈랐다. 펑! 포탑의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었으나, 그 자리에 서 있던 남자는 온 데 간대 없이 먼지만 휘날리고 있었다.

 

조선군 체탐인 소속 하 태의, 그것이 남자의 이름이었다.

 

태의에게는 보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보이고는 했다. 저주받았다면 저주받았다고도, 축복이라면 축복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을 갖추고도 27년을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남자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본인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돈에 목숨을 걸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연인을 지키기 위해, 함께 살아남기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있었다. 짙은 안개가 태의의 볼을 쓸며 흩어져갔다.

 

안대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태의에겐 안대를 벗기라도 한 듯 또렷하기만 했다. 이미 익숙해진 길을 걷고, 또 걸어 분수대에 도착한 태의는 숨을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간은 늦은 게 아니고, 약속 장소도 맞을 텐데. 주위를 둘러보던 태의는, 분수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갈색 머리의 여인을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라, 태의는 걸음을 크게 옮겨 여인의 곁으로 다가갔다.

 

" 윤영, 무엇을 보고 있소? "

" 으앗! ... 테이? 언제 왔어요? "

" 아까 왔소만, 낭자가 꽤나 바쁜 것 같아서 말이지요. "

 

무엇을 보고 있었는지, 마치 장난을 꾸미다 들킨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는 모습 역시도 태의의 눈에는 아주 사랑스러웠다. 무채색의 풍경에 혼자서만 빛나는 사람. 태의가 자신의 연인을 표현하는 것은 그것 하나로 설명이 되었다. 제 말에 웃으며 자신의 품에 안겨오는 이 사랑스러운 사람을, 그것 외에는 어찌 표현해야 좋을까. 태의는 먼저 품에 안겨오는 연인을 내치지 않고, 느리게 연인의 등을 두드렸다. 그리 얼마간 있었을까, 오가는 대화는 늘 같았다. 보지 못하는 동안은 무엇을 했는지, 어디 다치지는 않았는지, 기분은 괜찮은지 같은 그런 간단한 대화들. 그러나 두 연인은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서로의 품에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던 도중, 그랑플람의 전언이 흘러나오기 전까지는.

 

[ 급히 공성으로 출전해야 할 일이 생겼으니 10분 내로, 속히 와주도록! ]

 

대답조차 듣지 않고 일방적으로 끊긴 전언에, 윤영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 하여간, 대답조차 듣지 않고 끊는 건 여전해.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윤영은, 테이를 바라보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10분 안에 와달라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겠죠? "

" 아니요. 가능합니다. "

" 역시 거절해야 ... 응? "

 

그게 무슨, 이후에 윤영은 이후의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태의가 저를 안아 든 탓이었다. 오늘 정말 여러 번 놀라네, 그런 생각을 하며 테이를 끌어안은 윤영은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 어떻게 가려고 그래요? "

" 사람들은 늘, 어둠 속에 있는 길은 찾지 않으려 하지요. 그곳으로 갈 터이니 나를 꽉 잡으시오. "

 

눈을 가린 안대 아래에서, 태의의 푸른 안광이 빛나는 듯했다.

윤영은 저도 모르게, 태의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

 

보인다 하여 모두 믿지 아니하고, 보이지 않는다 하여 모두 외면치 않기에.

 

태의는 늘 어둠 속을 거닐며, 어둠을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역시도, 어둠 속을 달리고 있다 이야기하는게 맞았다. 다만, 지금 평소와 다른 점은 품에 안겨있는 제 연인이 있었다는 것. 태의는 품에 안긴 윤영을 좀 더 제 품으로 끌어안았다. 품 안에 안겨있는 온기 탓인가, 어쩐지 주위로 흩어지는 그림자가 더욱 차가워진 기분이었다.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었다.

 

그림자 속에 있던 시간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보통 사람이 견딜만한 시간은 아니었을터다. 본디 어둠 속에는 보이지 말아야 할 것들이 보이고는 하니까. 태의는 아직 제 품 안에 안긴 윤영의 손이 잘게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스스로가 딛고 있는 땅에 조심스레 윤영을 내려놓은 태의는, 전장 한가운데임에도 한 손으로 윤영을 끌어안고 느리게 다독였다.

 

" 무서웠소? "

" ... 조, 조금이요. "

 

저는 괜찮으니까, 라고 이야기하며 떨어지려는 윤영을, 태의는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제 품 안으로 더욱 파고들 수 있게 힘주어 끌어안기만 했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서로에게만 반응하듯이, 두 사람 사이에서 잔뜩 울렸다.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두 사람은 시간이 다 되었다는 말에 아쉬운 마음으로 떨어졌다. 가볍게 손을 맞잡고, 입을 맞춘 두 연인은 무사히 보자며 사람들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먼지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여 훅, 치고 들어왔다. 그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은 빛이 났다.

 

가리되 가려지지 않는 눈으로 어둠에 숨어 보이지 않는 길을 찾을 것이다.

 

전투는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조금이라도 더 이득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도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가는 만큼 집중력이 흐트러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몇 명의 사람과 함께 주위를 정리한 태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멀리서부터 몇 번의 폭발음과 함께 섬광이 일었다.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참이었으나, 사실상 태의가 그쪽으로 걸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그곳에 윤영이 있다는 점이 큰 오류였다. 태의는 급하게 발걸음을 옮겨 제 연인을 찾으러 갔다. 먼지 탓에 주위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태의에게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사이로, 태의는 익숙하게 빠져나가 전장으로 향했다. 급한 마음에 도포가 휘날리는 것도 갈무리하지 못한 채로.

 

-

 

" 윽 ... "

 

몸을 덮쳐오는 어지러움에, 윤영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태의와 떨어진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된 판단이었던 모양이었다. 아까 부딪힌 머리가 찢어졌나, 눈가까지 흐르는 붉은 피는 윤영의 시야를 가리기엔 충분했다. 연이은 공격에 확실하게 지쳤다. 공격의 범위도, 가지고 있는 실력도 엇비슷한 능력자끼리의 대치였고, 서로가 이미 잔뜩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앞으로 능력은 딱 한 번만 쓸 수 있을 것이었다.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나, 무너뜨려야만 살 수 있었다. 윤영은 흐린 시야를 들어 적이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유감스럽게도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어디 있는 거지? 눈동자를 휙휙 굴려 먼지가 일어나는 전장을 둘러보았다. 문득, 옆에서부터 무엇인가 윤영을 향해 손을 뻗었다. 늦었다, 그리 생각한 윤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 암영! "

 

단말마와 함께, 그림자를 맞은 능력자가 쓰러져 기절을 하며 싸움이 종료되었다. 긴장이 풀린 윤영이 뒤로 쓰러지기 직전, 달려와 윤영을 품에 안은 태의 덕분에 윤영은 땅에 넘어지지 않았다. 어질어질한 시야 속에서도, 윤영은 저를 안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익숙한 향과, 익숙한 품이 윤영을 안아 들었다. 덕분에, 윤영은 저를 안아 드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 테이. "

" 늦게 와서 미안하오, 낭자. "

" 아냐, 와줘서 고마워요. 신세를 졌어요. "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다친 와중에도 장난스레 웃는 그녀를 바라보는 태의의 눈빛은, 굳이 보이지 않더라도 다들 알 수 있을 정도로 다정했다. 한참이나 윤영을 내려다보던 태의는, 윤영의 이마에 작게 입을 맞췄다.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하오. 나머지는 후에 받지. 제 장난을 사랑스럽게 받아주는 연인에, 윤영은 눈을 휘며 웃어보았다. 그렇게 해요. 그리 이야기하며 연인의 품으로 파고든 윤영은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긴장도 풀리고, 체력적으로 잔뜩 지친 탓이었다. 태의는 품에 안긴 연인을 바라보다 메마른 땅을 걸었다. 저벅, 저벅. 신발에 밟히는 땅의 흔적들은 산산조각이 났다. 우왕좌왕한 사람들 속에서 존재감을 말끔히 지운 태의는 조금 빠르게 걸었다. 품 안에 있는 연인이 다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속이 쓰렸으므로.

 

-

 

" 나 정말 괜찮다니까요? "

" 그 말에만 몇 번을 대답하는지 모르겠는데, 내 알고 있소. "

" 아니, 그러면 나 이제 일어나서 걷게 좀, "

" 아직 걸으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은 못 들으셨나 보오. "

" 그건 아닌데 ... "

 

누가 들으면 두 사람이 싸운다고 오해할 정도의 대화 내용이었으나, 실상은 태의의 품에 안긴 윤영을 그저 달래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의 전투로 걷기가 꽤 힘에 부칠 테니 쉬고 가라는 것을, 태의가 안고 가겠다 이야기해 지금 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아프지도 않던 머리가 어질어질 해지는 기분이었다. 윤영은 다시금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저를 꾹 안고 있는 태의의 손길에 말을 거두었다. 뻔뻔해지기로 결심이라도 한 것인지, 윤영은 태의에게 편안히 기댔다.

 

" 테이. "

" 왜 그러시오? "

" 사랑해요. "

" 저 역시도, 사랑합니다. "

 

두 사람의 입에서부터, 다정한 사랑의 말이 튀어나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 제 연인이라는 것이, 태의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다. 꼬옥, 연인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은 태의는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쭉 이어져 있는 길을 걷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한번 윤영을 내려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다음부턴 따로 떨어지지 마십시오. "

" 그렇게 할게요. "

" 누가 따로 가라고 하면 제 손을, 하다못해 옷자락이라도 잡으시오. "

 

약속해 줄 수 있겠소? 저를 내려다보며 초조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연인의 표정에, 윤영은 결국 웃음을 터뜨려버렸다. 내가 태의 옆 아니면 어디에 있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 이야기 한 윤영은 태의를 끌어안고 달래듯이 토닥였다. 서로가 맞닿은 부분들에 다정한 온기가 채워져 갔다. 한 곳에 멈춰서 여러 번 토닥이고, 입을 맞추고,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주고서야 만족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를 바라보며 예쁘게 미소 지었다. 세상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느껴졌다.

 

문득 고개를 들자, 안개가 가득한 트와일라잇에는 벌써 밤이 내리고 있었다. 조금만 빨리 가겠소. 그리 이야기 한 태의는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조금씩,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 남은 자리엔 달빛이 내렸다.

 

어둠이 짙은 밤에, 남은 건 안개와 아주 약간의 온기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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